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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 비판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 비판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

 

 

 

 

 

이행기 강령과 제4인터내셔널

 

 

 순수한 정치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사회주의가 될 수 있는 노동자 국가로 파악하는 트로츠키 개념은 그가 단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 만 아니라,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1938년, 그의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인 「자본주의 죽음의 고뇌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좀 더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이행기 강령」 (Transtional Programme)에서 명확해진다. 우리는 이 강령을 다루면서 방법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도이처(Deutscher)의 피상적인 이해를 기초로 트로츠키가 레닌의 정치적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닌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역사적 상황과 자본주의를, 그가 문제제기하지 않았던 범주에서 분석하려 했다. 새로운 사례들이 그의 분석과 모순되자, 그는 맑스주의적 원칙을 토대로 철저히 재분석하고 그에 따라 범주를 수정하는 대신, 그것들을 왜곡하여 이미 내린 결론에 맞춰버렸다.  우린 이미 러시아 경제에 관한 그의 분석에서 이러한 방법을 보았다. 그가 처음에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쥐고 있으므로 노동자 국가라고 논쟁하다가, 이 주장이 유지하기에 너무 당혹스런 것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에 대한 경제적 주장을 뒤섞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차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제국주의가 동유럽 국가들을 그 지배 아래에 두었을 때,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의 열등한 후계자들 (파블로 Michel Pablo, 만델 Ernest Mandel, 그란트 Ted Grant, 캐넌 James Cannon)은 그들의 교사의 가장 훌륭한 전통에 따라, 이들 국가들은 마찬가지로 노동자 국가가 틀림없다고 결정했다. 비록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으며, 그 체제가 순수한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동적 자본주의 원형의 관료주의도 진보적이며 노동자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러시아가 노동자 국가라는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맑스주의와 진실은 끊임없이 희화화되고 왜곡되었다. 영구혁명, 즉 후진국 노동자와 농민은 부르주아지가 힘이 없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국민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주장 역시 영구위기 이론과 마찬가지로 방어되었다. 이 이론들은 트로츠키의 분석적 틀의 대들보를 형성했으며, 매우 유용하게 여겨졌다. 이 이론들을 자기모순에 의해 붕괴되도록 두는 대신, 트로츠키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영역을 포기하는 희생을 무릅쓰고, 방법론적으로 이 이론을 버팀목으로 버텼다.

 

 대신 트로츠키가 우리에게 준 것은 손쉬운 슬로건, 즉 근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회관계와 새로운 시기의 정치적 의무를 파악하는 그의 무능력을 감추는 데 실패한 슬로건이 된 영구위기와 영구혁명에 대한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행기 강령에 있었던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는 이미 완수되었다는 정확한 인식은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 강령으로 퇴보하게 만든 그 전망에 대한 경제적 무지와 정치적 즉시성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다. 이 무지의 가장 눈에 띄는 예는 경제적 영역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인류의 생산력이 정체되었으므로 자본주의는 혁명에 무르익었다고 한다. (이행기 강령 11쪽, WRP 팸플릿) 이것은 1930년대에는 옳았을 수도 있었으나 오늘날 단순한 통계치 하나로 진실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쓴 서구 자본주의 전체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GNP가 몇 배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 실증적 증거는 그 진술의 유효성을 무효화하기에도 충분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실제 자본의 운동을 이해하는 그의 방법상의 실패이다. 자본주의는 맑스가 많은 경우에 썼듯이, 생산도구의 지속적 혁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 선언)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쇠퇴시기도 그 근본요소를 바꾸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축적 사이클은 상업적 위기로 잠시 정기적으로 멈칫거렸을 뿐 끝나지도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의 다른 점은 이런 위기들의 부르주아 해결방식이 단순한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하게 하는 몇몇 파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흥은 오직 세계적 토대 위의 자본의 대량 파괴를 거쳐서 오는 제국주의 전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사이클은 지금 시대에 호경기-불경기-전쟁-재건-호경기로 계속되는 하나의 순환이 되었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현재 시스템의 쇠퇴를 설명하는 것이 생산력의 정체가 아니라 생산은 증가하지만 남반구의 영속적 기아, 결핍, 전 지구적 주기적 전쟁의 대가로 인류의 이해에는 어떤 의미로도 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산력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기 전에, 생산관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속박과 그들의 가치법칙은 분쇄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본질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은 사실 사회주의 투쟁의 토대로서  「이행기 강령」을 완전히 파기시켰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를 임노동의 잉여가치 추출을 통해서만 오직 존재할 수 있는 가치법칙에 기초한 체제로서가 아니라 죽음의 고뇌속의 시스템으로 간단히 정의함으로써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은 자본주의 순환의 단 한 가지 측면(불황기)의 즉각적 틀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1938년 자본주의가 죽음의 고뇌에 빠져있다고 판단하면서, 트로츠키는 이를 파괴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실패를 설명해야 했으며, 이 실패를 극복할 처방을 내놓아야 했다. 바로 여기서 트로츠키가 사회민주주의로 돌아선 것이다.

 

 

 

 

이행기 강령과 당

 

자본주의 내부의 역동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이행기 강령」은 프롤레타리아적 조직문제에 순수하게 주의주의적 해결책만 내놓는다. 정확히  「이행기 강령」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적 선결조건은, 자본주의 하에서 성취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이미 보편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1938년 이것은 여전히 진실이었으나 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멍에를 지고 자본주의에 종속되었나? 트로츠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정치적 상황 전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리더쉽의 역사적 위기에 의해 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 지도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이지만, 트로츠키는 이런 의미가 아니었다. 지난 4반세기 동안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조직이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원을 받아 왔음을 보아왔다.  먼저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은 그들의 대중조직(노동조합)과 함께 그들의 정부의 도움을 받아 출범했고, 모든 각각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이 정당들은 그들이 대량학살을 지원하거나, 독일에서처럼 계급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대량학살을 조직했을 때, 노동자들의 대의로부터 스스로 분리했다.

 1914년 제국주의 질서의 가장 확실한 적은 레닌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이론적으로 무장된 볼셰비키 당이었고, 이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했을 때, 이것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였다. 그러나 이전에 설명했듯이 쇠퇴의 과정은 시작되었고, 그 과정은 사회민주주의의 갑작스런 배신보다도 더 음흉한 과정이었다. 1922년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통일전선론 채택은 이 쇠퇴의 중요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1926년까지의 반대파의 축출, 1927년 중국에의 재앙스런   정책들도 이와 같았다. 1938년까지 트로츠키조차도 부르주아지 편에 선 코민테른의 변질이 일어났음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트로츠키의 보증으로 남아있는 그 별난 논리의 꼬임으로 인해, 그는 제2, 제3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보수적 관료주의적 기관으로 보았다.

 다른 말로, 대량 학살과 배신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들은 지도력이 바뀔 수만 있었더라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35년 그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해 통일전선과 사회민주주의로의 개입에 대한 지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정통 트로츠키주의는 혁명적 조직의 물리적 패배와 함께 일어난 이데올로기적 패배를 아직도 인식하지 못한다. 오늘날 이 사회민주주의적 실체들(사회주의당, 노동자당, 그리고 그들의 노동조합)은 비록 가끔 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수백만의 지원으로 선거에 이겨도, 사실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계급 체제의 일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노동자 투쟁을 선거라는 안전지대로, 혹은 한 산업이나 공장의 고립된 경제투쟁으로 돌림으로써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약점에 대한 트로츠키 분석의 극단적으로 간단한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의 위기가 그들이 그들 계급의 독립과 혁명적 열망을 지켜줄만한 정당의 부재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해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제4인터내셔널은 그 구성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영역에서 지나치게 작동하여, 스스로 그 창설에서부터 계급정당이 되기에는 부족하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진정한 구성에 장애물이 되었다. 필요한 것은 구 사회주의 정당과 공산주의 정당의 사회적 보존에 반대하는 가차 없는 투쟁이었다.

 오늘날 트로츠키주의는 여전히 이 노동조합과 정당에 의한 배신만을 이야기하며, 그러므로 그들이 노동자 계급 내에서 할 진정한 역할을 드러내지 못한다.

 국제 공산주의 좌파(이탈리아 좌파)가 그 당시 문제제기 했을 때, 제4인터내셔널은 1920년대 혁명적 파고의 패배에 따른 정치적 해명이라는 필수적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이라고 주장 할 수 없었다. 트로츠키가 조심스럽게 피했던 그런 명확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정당의 부활과 역사적 교훈을 고려한 공산주의 강령의 재구성에 필수적인 단계였다. 독립적 계급운동이 없어서 1938년에는 계급정당이 없을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는 여전히 그들 조직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을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트로츠키는 오직 제4인터내셔널의 선언만이 그 단순한 의지의 노력에 의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의지의 부족은 아니다. 당의 중앙집권주의자로서, 지도자로서, 행동하는 계급의 안내자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제4인터내셔널의 설립은 혁명과 반혁명의 경험에 대한 신중한 검토를 수행했던 트로츠키의 추종자들 없이 이루어졌다.

 

 정당이란 무에서, 시간과 공간의 고려 없이 스스로 창조할 수 없다. 계급정당의 부재는 비록 독일에서 1918-1919년에 있었던 것처럼, 혁명적 리더쉽의 위기가 역사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이 역전되는 객관적 요소였을 지라도, 단순히 그 리더쉽 위기의 결과는 아니다. 트로츠키의 정당에 대한 개념에 따르면, 정당은 계급투쟁의 필수적 부분이 되는 대신, 그 성원들의 결정에 의해 인류의 역사적 반란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하는 구원자(deus ex machina)의 관념적 형태를 가정한다. 이것은 강령의 이행 요구들을 분석할 때 훨씬 뚜렷해진다.

 

 

 

이행기 강령 요구

 

 「고타강령비판」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본을 파괴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행기 강령」, 「자본주의 죽음의 고뇌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 권력 쟁취를 위한 준비로서 이행의 요구를 둘러싼 대중의 동원」 은 제목이 이야기 해 주듯, 맑스의 이행 개념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트로츠키에게는, 30년대에 아무런 혁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죽음의 고뇌 속에 있었고, 때문에 이미 이행의 시기는 도래했다는 것이 명백했다. 맑스에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나서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871년 파리꼬뮨의 교훈이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근본적 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개념과 관계없이 움직였다. 사실 트로츠키는 최소의 요구를 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주의로 되돌아갔고, 이는 그런 최소의 요구조차 부패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믿었다는 단순한 차이밖에 없었다.

 

현재 시대는 혁명정당이 일상적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혁명의 실질적 과업과 분리될 수 없이 수행되도록 되었기 때문에 구분된다.

 요약하면,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은 이제,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최대강령이 되었다. 자본가 계급의 혁명적 타파 없이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차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C.Slaughter, 이행기 강령의 WRP 편집판의 서문」

 

 이 명백한 난센스는 「이행기 강령」 의 요구를 가장 피상적으로 관찰만 해도 없어진다.

  트로츠키가 우리에게 준 것은 프롤레타리트에 의한 권력 쟁취에 선행하는 은행의 국유화, 산업의 노동자 통제, 공공근로, 임금의 물가연동제와 같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개혁할 거대한 계획이다. 명확히, 그런 발본적 요구들은 트로츠키의 동시대 인물인 케인즈에 의해 자본주의를 구원할 명백한 계획으로써 이미 주창되었고, 사실 모든 수단들은 자본주의 질서의 보존을 위해 부르주아 국가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동유럽에서 은행의 국유화,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통제, 이 둘은 근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스칼라 모바일(scala mobile)같은 임금의 물가연동제 공공노동 등은 실제로는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떠받치기 위한 단계이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국가 역할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것은  「이행기 강령」 이 가진 당연한 결과였다. 국가를 자본가 집합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은, 트로츠키는 여전히 국유화를 사회화와 동일시 여기며, 사회주의의 주 과업을 임노동의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파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행기 강령」은 1890년의 에르푸르트 강령보다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최대의 혁명적 부분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겨우 한 번 언급되었으며, 그것도 우연히 그러했고,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이것이 바로 다음의 「이행기 강령」의 목적에 대한 언급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 강령과 대중의 현재 요구 사이의 가교를 찾기 위하여 일상적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 있는 그들을 돕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현재의 요구란 잠재적으로 혁명적이라고 이미 지적했다. 부족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 강령에 따라 대중과 함께 투쟁할 당뿐이었다. 트로츠키의 끝없는 실패는 이 강령을 현시대 자본주의에 맞춰 정교화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요구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이것들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진행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행기 강령」의 요구와 같이, 그 요구들은 쉽사리 자본주의에 의해 복구된다. 1848년 혁명 이후,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공식화된 각 요구들은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운동의 초기에는, 노동자들은 어떤 직접적 공산주의적 수단들을 제안할 수 없다. 그러나 ... 만약 소부르주아지가 철도와 공장을 매점매석할 것을 계획한다면, 노동자들은 반드시 그것들이 국가에 의해 무상으로 몰수되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만약 요구가 비례세를 제안하면, 그들은 누진세를 요구해야 한다. ...  그 비율은 매우 가팔아서, 결과적으로 자본은 곧 박살날 ... 만약 민주주의자들이 국가부채의 조정을 요구한다면, 노동자들은 그 지불거부를 요구해야할 것이다. (공산주의자 연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연설)

 

 이 변증법적 개념은, 변질되고 있던 코민테른, 특히 3차 대회의 해묵은 창고에서 트로츠키가 집어낸 사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코민테른에서는 대중들이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의식적으로 대표하여 투쟁하지 않을 때, 투쟁의 단계를 구성하는 정밀한 요구들이 있다고 언급되었다. (Frank, 앞의 책 61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단지 노동자 대표라고 불리는 이들의 의회 투쟁을 단순히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시위로 도와줘야한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생각 없는 대중으로 밖에 보지 않는 카우츠키의 특징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투쟁은, 그 단결을 이뤄내는 요구뿐만 아니라 투쟁의 진정한 목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요구를 정의함으로써, 그 속에서 함께 있음으로서 그 투쟁을 더 큰 단결로 이끌고 그럼으로써 더 큰 목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혁명가들의 상이한 요구를 만든다. 이것은 「이행기 강령」 이 회피해오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작점이 역시 마지막 점인 대중의식의 즉각적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그러므로 그가 제2,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의 약점을 극복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약점은 대중과 함께 싸웠던 그들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부르주아 국가 전복의 필수성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가진 리더쉽을 제공하지 못한 무능력에 있었다. 이러한 약점을 비판하는 대신, 트로츠키는 이를 미덕으로 삼았다. 프롤레타리아 패배 시기의 대중의 획득은 그의 주의주의의 중심이었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모든 (실패한)전략은 통일전선에서 최소강령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프로그램은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는 트로츠키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그는 그의 프랑스 지지자들에게 SFIO(제2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섹션)에 가입하여 “그들의 요새에 가서 개량주의에 도전하라” 그리고 “대중에게 혁명적 프로그램을 전하라”고 말했다. 그는 코민테른의 1935년 인민전선 정책의 채택을 비판하는 위치에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민주주의 편에 옮아가는 것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은 지속적이지 않았다. 특정한 반혁명 논리 -코민테른의 정책(프랑스, 영국, 제국주의와 동맹하여 중유럽의 파시스트 정책에 저항한) - 가 있는 동안, 트로츠키의 사회민주주의로의 입당주의는 전혀 의미가 닿지 않았는데, 특히 그가 예견했듯이 혁명이 코앞에 다가왔다면, 더욱 그러했다.

 

 우리는 선언한다. 코민테른의 처방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노동계급정당의 비혁명적 정책을 인정하더라도 상황은 혁명적인 것만큼 혁명적이다. 이 상황을 극도의 성숙한 혁명으로 몰고 가기 위해, 즉각적이고 정력적이며 쉴 새 없는 대중의 동원이 있어야 하며, 이는 권력 쟁취의 슬로건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혁명 이전 상황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유일한 방법이다.

 

 1920년대의 노동자 계급의 패배를 깨닫지 않았기에 1938년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가 수행한 제국주의 전쟁에 무방비로 있었다. 그러므로  「이행기 강령」이 레닌의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혁명이론인 혁명적 패배주의의 핵심지점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 함께 끝났어야 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가 2차 제국주의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와 서구 제국주의 양 편에 모두 가담하도록 했다.

 

 

 

제2차 제국주의 전쟁

 

 「이행기 강령」은 분명히 다음 시기에 혁명정당은 주로 전쟁 문제에 대한 정책의 성공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31쪽)

 

 그것은 심지어 공산주의 원칙의 기본인 제국주의 전쟁에서 주요한 적은 그 자신의 국가에 있다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트로츠키는 곧 소련의 본질 분석 실패와 구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정책에 대한 재검토의 실패가 그로 하여금 공산주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했음을 밝힌다.  「이행기 강령」의 같은 페이지에서, 그는 제국주의가 아닌 다른 억압받는 나라뿐만 아니라 소련이건 다른 노동자 정부이건 간에 그들을 지원하고 방어하는 똑같은 의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의 소련의 생산관계 분석 실패는 러시아가 제국주의 동맹의 네트워크에 참가하는 것에 직면하여 그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독일에 맞서 영국,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기려 했던 스탈린의 정책이 있었던 1930년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 스페인과 중국에서의 이 정책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 1939년 폴란드를 공격하기 위해 히틀러와 맺은 스탈린 조약에도 불구하고 : 필란드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 트로츠키는 그가 죽는 날까지 러시아가 자본주의도 제국주의도 아니라는 허구에 집착했다. 사실, 1939년에 쓰인 그의 글,   「소련과 전쟁」에서 트로츠키는 모스크바의 정치 전체를 반동적 성격으로 비판했지만, 노동자 국가가 보나파르트주의 엘리트에 의해 강탈당했다는 사소한 논쟁을 제외하고는, 왜 소련이 반동적 정책을 취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같은 글에서 트로츠키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는 반대로 소련에서의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스탈린을 탈스탈린 화시켰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소비에트 관료주의의 문제제기가 우리에게 있어서 소련의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문제에 종속되며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문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제임스 (CLR James), 버냄 (Burnham), 샤흐트만 (Schachtman) 등 러시아의 본질에 대한 다른 분석을 했던 이들과 제4 인터내셔널을 분열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논쟁에서의 트로츠키의 글은 「맑스주의 방어」라는 제목으로 잘 수집되어 출간되었다. 부적절한 제목이었음에도 그의 글은 지금 그를 패배하게 한 일관성의 위기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의 그의 논쟁, 즉 만약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맑스주의는 반박될 것이며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논쟁은 그가 1939년 쓴   「소련과 사회주의」에서 이미 썼던 것의 좀 더 확고한 변형에 불과하다.

 

 모든 가능성과 반대로 만일, 10월 혁명 (소련을 의미함 -편집자)이 지금 전쟁의 과정에서, 혹은 그 직후의 과정에서 어떤 선진국에서 지속하는데 실패한다면, 그리고 만약,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전선으로 되돌려 보내진다면, 우리는 의심 없이 현재 시대와 그 추동력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교정해야 하는 문제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의 방어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범주에 기초하지 않은 분석의 논리다.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는 그 약점을 1938년에 맑스주의가 아닌 관념론에 무게를 둔 의지의 노력으로 극복하려 했다. 이것은 트로츠키의 오류의 끝이 아니었다.

 「맑스주의 방어」에서 그는 소련의 방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늪의 방어를 요구하며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길을 따라 훨씬 더 나아갔다. 이것은 소련, 영국, 미국 사이에서 편의에 따라 결성된 제국주의 동맹을 야기한 1941년 히틀러의 러시아 공격전이었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러시아 분석으로 분열되었다면,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 또한 독일과, 제국주의 동맹에 대한 방어문제로 분열되었다!  <민족 혁명 운동의 혁명 프랑스>가 억압 없이 히틀러와의 협력을 요구하는 동안, 베리떼(Verite)의 제4인터내셔널 위원회는 몇 세대의 프랑스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축적한 부의 보호를 요구했다. (1940년 9월)

 

 트로츠키주의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개관은 이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 이 시기의 원칙적이지 못한, 많은 분열의 첫 번째 문제는, 여기서 보았듯이, 현재 시대와 추동력의 개념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실패에 대한 비판은, 공산주의 강령과 국제 공산주의당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파괴할 만큼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어디서든 우리의 시각을 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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