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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임성용

 

 

 지난 4월 17일, 낮 열두 시 무렵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뒤편에 있는 추모비 앞에 3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봄바람이 좀 세차게 불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 붉은 담벼락이 높다랗게 둘러싼 언덕 아래에는 ‘조선의 혼그릇’이라고 이름 붙인 주발 형태의 철재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혼그릇을 이룬 쇳조각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은 항일독립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6·10만세 항쟁의 주역 권오설의 이름도 있었다. 그 추모비를 정면에 두고 한 장의 현수막이 걸렸다.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라고 적힌 것이었다. 현수막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에 담긴 얼굴 하나가 점차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수인복과 수형번호, 그리고 權五卨이라는 흰색 성명을 앞가슴에 달고 있는 강고한 인상의 사내였다. 수형자의 모습으로 찍은 당시의 나이는 스물아홉, 그는 다름 아닌 조선의 젊은 볼셰비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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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볼셰비키 혁명가, 권오설

 

  6·10투쟁 지도특별위원장 권오설은 1928년 2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기 전까지 일경은 예심 기간이라는 것을 두어 2년 동안이나 그를 심문했다. 결국, 혹독한 폭행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서대문형무소 병감에서 숨졌다. 1930년 4월 17일이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보통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대한독립만세’를 떠올린다. 아니면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권오설 역시도 독립운동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권오설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뛰어넘는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였다. 그가 책임지고 투쟁을 주도한 6·10만세 항쟁의 혁명적 성격을 살펴보면 그것은 확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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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민이여 귀를 기울여라- 들려오지 않은가 노동자 농민을 전위로 한 인민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우렁찬 발소리- 이 강산을 진동시킨 「조선 독립 만세」의 고함- 이날이 바로 지난 21년 전 일제와 가장 용감히 싸운 조선공산당의 영도 아래 노동자 농민을 전위대로 한 학생 소시민 지식층 등 모든 조선 인민이 독사 같은 일제의 눈초리와 총칼 밑에서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 독립 만세」 「토지를 농민에게」 「애국자 혁명가를 석방하라」하고 과감히 궐기한 조선해방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제21주년 6·10만세 운동 기념일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노동자가 일어섰다. 농민도 궐기하고 학생도 소시민도 지식층도 일본의 주구 이외의 조선 인민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이 날. 전 인민의 무자비한 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만세 소리의 폭풍은 전선 방방곡곡을 휩쓸었다.’    - 《독립신보》 「민족의 자랑 6·10만세 기념일-조선공산당 영도 아래- 이조 최후 왕·국장일에 반제항쟁」이라는 제목의 기사

 

 위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오설이 특별위원장을 맡았던 6·10만세 항쟁은 1919년에 전개되었던 3·1만세 운동과는 다르다. 6·10운동은 그 규모가 3·1운동보다는 작았지만, 조선공산당 중앙기구 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비서인 박민영, 조선공산당 조직원이며 공청 선전부원인 이지탁,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였던 권오설 등이 주도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고 나서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6·10만세 항쟁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특히 권오설이 핵심을 맡은 사업이었다. 1926년 5월 3일, 고려공산청년회 간부 회의에서 6·10투쟁 총책임자로 권오설을 선임했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고려공산청년회, 조선노동총동맹을 주축으로 해서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권오설은 6월 7일, 사전에 투쟁계획이 발각되어 서대문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앙고보 학생이었던 이현상(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권오상, 이선호가 다시 선전문을 만들어 예정대로 6·10투쟁을 진행했다.

따라서 일부의 관점에서는 3·1운동보다 6·10투쟁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종교, 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좌우는 물론 조선의 모든 혁명 대중을 하나로 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3·1운동 때, 조선 민족 대표라는 33인들의 얼빠진 행적과는 달리 6·10투쟁은 조선공산당이라고 하는 ‘전위당’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하여 인민대중들의 민족해방 의지를 끌어모으는 데 집중했다. 즉 6·10투쟁에는 ‘당’이 있고, 강철 같은 당에 목숨을 맡긴 ‘당원 동지들’이 있었다. 3·1운동 앞에 이름을 내세운 종교 지도자들,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인텔리들, 민족주의자들은 6·10투쟁이 일어나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천도교 신파에서 함께 참여한 것뿐이었다.

3·1운동 때의 ‘독립선언문’과 6·10투쟁 때의 ‘격고문’은 뚜렷이 다르다. 6·10투쟁의 격고문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싸움에서 처음으로 맑스-레닌주의 운동의 혁명적 방법론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같은 투쟁 슬로건은 조선 혁명의 전환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혁명 정신은 조선공산당이 와해한 1928년 이후에도 경성 트로이카, 경성 콤그룹으로 끊임없는 재건작업을 시도했다. 격고문을 보자.

 

 ‘......현재 세계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계급 대 자본가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계급에 대한 무산자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 1926년 6월 10일, 격고문 중에서

 

 그럼 이와 같은 민족해방-계급해방 정신을 바탕으로 6·10투쟁을 계획하고 준비한 권오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권오설은 경북 안동의 잔반가에서 태어났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한 형편에도 가숙인 남명학교에 들어가 동화학교에 편입, 졸업한다. 대구고등보통에 입학했으나 민족사상을 부추기다 퇴학당한다. 2년 뒤,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그만둔다.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고용원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광주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체포된다. 그는 배후조종혐의로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0년부터 고향에서 ‘안동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학습강습회’ ‘풍산소작인조합’ 등의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설립하고 농민,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는 불과 일이 년 만에 사회주의단체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한다.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화요회)’에 가입했다. 화요회는 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4년 4월, 260여 개의 가입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 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된 그는 대동인쇄 동맹파업, 양말직공파업, 고무직공파업, 양화직공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 조직 준비위원을 한 그는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아울러 그는 조공의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에 조선노동총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조직부 책임자를 맡았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1차 검거(신의주 사건)로 책임 비서 박헌영이 붙잡히자 김찬, 조봉암 등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게 된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가 되었다. 즉 2차 조선공산당의 강력한 실력자가 권오설이었다. 그가 벌인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6·10투쟁 이었다. 그는 만세시위에 나설 학생들을 규합하고 상해에 있던 김단야, 조봉암 등과 연락해서 격문전단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는 한편 국내에서 투쟁 슬로건이 담긴 격문을 십만 장이 넘게 인쇄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 날인 국장일에 맞춰 전민족적인 규모의 거사를 실행하려던 그는, 거사 사흘 전에 인쇄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도중, 그는 일경을 고소하면서까지 고문에 맞서 대항하였으나 끝내 옥사하였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1925년 창건 이후, 그해 11월 ‘신의주사건’ 1926년 6·10투쟁, 그리고 1928년 당 책임비서 차금봉이 피검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만에 열린 추도의 기념식

 

 

 권오설을 비롯한 조공 핵심 인물들의 망명과 검거, 구속, 옥사로 조공은 치명적인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재건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그대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31년 2월, ‘ML파’ 사회주의자그룹은 상해에서 기관지 『계급투쟁(階級鬪爭)』을 발행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화요파’ 출신인 김단야, 권오직 등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단야 등은 1931년 3월, 박헌영과 『콤뮤니스트』 창간호를 발간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시도하였다.

1933년 8월, 서울에서는 이재유를 중심으로 경성 트로이카그룹이 결성되었다. 1934년 11월 경성재건그룹, 193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경성준비그룹 등을 거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1939년 4월, 이관술과 김삼룡이 경성 콤그룹 지도부를 다시 구성했다. 특히 1930년대 들어와서는 혁명적 노동조합,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검거자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당 재건 방침에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전국적 조직건설을 통해 당을 재건하려는 목적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운동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의 결렬과 조선정판사사건,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의 테러, 미소 간의 정세 변화에 따라 통합적 지도력 강화를 위해 남조선로동당으로 해소되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삼두마차를 필두로 하는 경성 트로이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소에서 병사했고,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죽었고, 남로당 책임자였던 김삼룡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주하와 함께 총살당했다.

2018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을 진행한 주최자가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로 되어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는 단체가 아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가열 차게 했던 경성 트로이카 혁명가들의 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몇몇 사람들의 모임이다. 마침 조선공산당 창립일과 권오설 사망일이 4월 17일로 같은 날짜였다. 그리하여 권오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었던,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들이 옥살이했던, 바로 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다 의미 있는 행사를 추도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권오설 동무가 옥사한 지 88년 만에야 역사와 죽음의 현장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었다. 그 이면에는 사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기도 했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는 시민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가의 시설물이므로 조선공산당 기념식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라는 현수막을 만들어갔지만, 그것을 공공연하게 내걸지도 못했다. 권오설의 삶과 죽음이 조선공산당 투사들의 삶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정신이었기에 그 모든 동무를 위해서 한 송이 하얀 국화꽃을 바치고 인터내셔널가를 제창하는 것으로 위로 삼았다. 차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하고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여 조선공산당 창립 100주년 기념을 앞두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성원 넘치는 행사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 만세!’ 추도식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나의 가슴 속엔 이 한 마디의 외침을 품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의 동지들이 분명한 결의와 각오로, 공부와 실천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선배 동지들의 뜻을 이어가자고 한 사회실천연구소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를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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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좌익공산주의자 오세철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굉장히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권오설 선생 시대에, 1910년 20년대 초기부터 조선 공산주의운동 역사를 제대로 실천하신 동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경성 콤그룹 구성원들이 있지만, 우리가 공부하고 이해하기로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 특별히 맑스주의 원칙과 사상을 끝까지 올바르게 붙들고 실천한 사람들이 경성 콤그룹 포함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 그룹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공부했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를 포함한, 또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젊은 동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무얼 붙들어야 하는가? 세계사적으로 붙들기도 하지만 조선의 공산주의 역사에서 누굴 붙들어야 하느냐? 어떻게 운동을 붙들어야 하느냐? 이런 고민을 하거든요. 공부하면서 그래도 그 시대에, 그 운동을 앞장서서 하셨고 또 실천하셨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던 동지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 여기에 처음 나온 이유입니다. 역사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추도사가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어떤 생각으로 나왔냐 하면, 앞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이, 또는 앞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겠다는 젊은 동지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결의와 각오를 우리 권 선배님에게 전달하는 의미로 나왔어요. 추도사 아닙니다.

 

그래서 짧게 이야기할게요. 최근에, 작년이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었고, 올해가 맑스 탄생 200주년입니다. 내년이 코민테른 100주년이에요. 3년이 연속으로 이어져서, 이것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서, 제가 3년 동안 행사를 하는 게 아니고 공부를 좀 합시다! 그랬어요. 동지들한테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그래서 작년엔 러시아혁명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하고, 러시아혁명이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건 혁명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지만 왜 변질되고 퇴화했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한마디로 하면 그거는 그 원칙과 사상을 져버린, 우리가 보니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특별히 총칭으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서 역사를 망쳤다고 생각해요. 제가 공부하기로는...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로 안 봅니다. 우리는 백 개의 공산주의가 있고 백 개의 맑스주의가 있는데, 그러면 진짜가 뭐냐? 그것을 찾는 운동! 저는 그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 특별히 권오설 선배 동지가 했던 그런 운동과 세력은 거기에(공산주의) 가장 가까웠다고 저는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뭘 해야 하는가? 그것을 세계운동 속에서 찾아야 하고, 우리 운동도 있었지만 이제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계속 토론을 하면서 그것을 찾자, 제발 스탈린주의 좀 버리자, 운동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게 우리가 작년에 공부했던 것이거든요. 올해 이제 맑스에요. 올해가 맑스 2백 주년인데, 맑스를 다시 찾아야 하는데, 다시 찾는 게 아니고 먼저 돌아가서 찾자. 다 떠났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시 제대로 된 사상으로 돌아가서, 그럼 지금 맑스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느냐, 아 그걸 계속 공부하자. 금년은 그 공부를 합시다. 맑스 2백 주년 맞아서 그 공부하고, 2년 공부한 다음에 내년 아니에요? 그럼 코민테른 백 주년이에요. 그런(공부) 다음 당이고 뭐고 전략은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내가 그랬어요. 아까 무슨 당 이야기도 하셨지만, 우리가 그런 당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공부 좀 하시고 그 토대 위에서 전략도 이야기합시다. 그때 뭐 세계 혁명당을 이야기하든지 그렇게 합시다. 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부하고 있어요.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고딩이 됐거든요. 고등학생... 무슨 말씀인지 모르죠? 제가 열여섯 살이 됐다는 겁니다. 60을 버리고 한 바퀴 돌았으니까, 이제 열여섯 살이 됐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래서 공부 좀 합시다, 제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이제 공부하는 것을 보여드릴게요. 공부만 하지 않고 한 다음 실천을 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면서...

오늘 추모제를 보면서, 각 공산주의자의 추모사업회가 따로 있어요. 제가 알기로 이일재 선생도 계시고 이수갑 선생도 있고 남궁원 동지도 있고, 아! 개인으로 제발 그러지 맙시다. 이제 개인추모사업회는 자기들끼리 하더라도 좀 다르게 합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코뮤니스트정신계승회의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실천하는 모임을 하자고, 모시는 것만 하지 마시고. 그래서 전 여기 오면서 나중에 점심 드시면서도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운동을 그렇게 하자는 거죠. 추모하실 분들은 또 이렇게 하시고 실천으로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을 제대로 하는 그런 모범을 좀 보입시다. 또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을 이 결의로, 헌사로 권선생님에게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

 

 

 

*웬 뜬금없는 조선공산당 추모식이고 기념식인가 하고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시 한편으로 답을 대신한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옆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형수의 가족들이 사형장 밖에서 목 놓아 울며 그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전에 사형장을 지키고 섰던 미루나무는 언젠가 비바람에 쓰러져 없어졌고, 지금은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서 있다고 한다.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푸르게 자라듯, 코뮤니즘 혁명을 향한 진군의 역사는 또다시 되살아올 것이리라 믿는다. 모든 사라진 것들은 돌아온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pdf

 

 

미루나무

 

임성용

 

미루나무는

비바람에 쓰러진 게 아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사무친 것이 있다

 

어떤 통곡이 있다

어떤 기억이 있다

달그림자 드리워진 올가미가 있다

 

울며 울며 땅을 치더라는

울지도 못하고 하늘을 보더라는

목 놓아 부여잡던 손톱자국이 있다

 

검은 구멍 속으로

깊숙이 햇볕이 든다

시구통으로 질질 끌려나오는 사람이 있다

미루나무 혼자서 붉은 담벼락 언덕을 본다

 

피맺힌 것이 있다

잊혀진 것이 있다

무덤의 유골로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사라진 뼈에 사무친 것이 있다

 

외로운 목숨이 질 때

미루나무가 쓰러질 때

인간의 땅에 태어나 푸르른 미루나무가 있다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마지막 숨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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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기사 (1927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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