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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복간호]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김수행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맑스주의자이었던 그는 강단의 학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가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연구자와 활동가가 한데 어우러져 노동자 관점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연구소"를 만들자는 취지와 만나 지금의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천』지는 “맑스주의 이론 진영의 동향을 점검하고 좌파 저널에 실린 해외논문과 세계사회주의 정치운동 진영의 주요 기관지 등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한국 맑스주의 이론진영에 튼튼한 밑바탕을 제공”하기 위해 발간했습니다.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실천』지를 복간하는 시점에서 김수행 선생의 ‘특별한 실천’이 새겨져 있는 사회실천연구소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왜 다시금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토론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이자 영원한 동지인 오세철 선생과 함께 그분을 다시 만나러 갑니다.

     

    다시 김수행 선생을 만나다

     

    Q : 올해가 68혁명(또는 68투쟁) 50주년입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오세철 선생에게 68년 반란의 물결은 실제 현실에서 존재했는지요? 존재했다면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A : 1968년은 미완의 4.19혁명, 5.16쿠테타 이후 유신으로 가는 길목이었어요. 당시 베트남 전쟁, 유럽의 68운동, 남미의 민족해방운동의 간접적인 영향은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럽과 같은 반(反)관료주의 등의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1965년 한일회담 반대 같은 민족주의 경향,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투쟁, 월남(베트남)파병 반대 등에 간접적 영향이 있었죠.

     

    Q : 세계적으로는 68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내적으로는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군사정권까지 격동의 20~40대를 보내셨는데, 당시의 (급진적, 실천적)지식인과 지금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A : (1963~1983) 이 시기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기였어요. 그 중 1979년 말에서 1980년 봄까지 짧은 민주화 기간을 빼고, 이 시기의 지식인 운동은 군부독재 반대(타도) 투쟁에 집중하면서 민주투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지식인 운동이 부르주아 세력에 흡수되어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비판적지지 역할을 하고 있고, 일부는 사회주의, 코뮤니스트 운동으로 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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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4. 19혁명 49주년 - 교수․연구인 시국선언 (2009년 4월)

     

    Q : 같은 시대를 보낸 김수행 선생과 오세철 선생 두 분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처음 만나셨습니다. 코뮤니즘이라는 목표에서 같은 곳을 향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셨는데 어떤 계기로 사회실천연구소까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까?

     

    A : 2004년 명예퇴직 후 실천 운동에 전념했어요. 맑스주의 연구자들과 『사회이론연구소 : 빛나는 전망』을 만들었고, 혁명적사회주의 운동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정치연합』을 만들었고, 『맑스주의 대학원』을 설립하여 젊은 맑스주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을 양성하자는 운동도 시작했죠. 그동안 한국에서 맑스주의는 분과학문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에 갇혀있었고, 역사학을 포함한 보다 넓은 지평과 만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맑스주의 종합연구소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과학과 역사학(최규진), 그리고 인문학이 결합한 연구소, 연구자(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의 김수행)와 실천가(사회주의자로서의 오세철)가 결합한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오세철, 김수행, 최규진이 깊은 토론을 거쳐 『사회실천연구소』의 설립을 결정합니다. 김수행에게는 최규진과 내가 사회실천연구소에 함께 할 것을 제안했는데, 에피소드로 사당역에서의 대취사건이 있었고 김수행의 제자들은 반대했지만 함께 하게 되었죠.

     

    “ 더 중요한 것은 2006년 11월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제안이 있기 전, 종합 사회주의연구소를 향한 주제를 놓고 김수행과 나 그리고 최규진이 나눈 토론이었다. 나와 최규진은 연구소 설립문제를 여러 해 고민해 온 사이인데, 사회과학대학원 설립과 맞물려서 김수행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의 전제였다. 김수행은 흔쾌히 동의했고, 그 날 우리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수행은 나처럼 자주 많은 양의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애주가이고 술맛나는 자리에서는 대주가가 된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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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013년 여름 김수행 교수 자택에서의 사회실천연구소 수련회가 끝난 후

     

    Q : 사회실천연구소를 만들 때, 그리고 연구소 주요 성원들이 참여한 사회주의노동자연합과 국가보압법 탄압사건이 있었을 때, 김수행 선생의 도움(역할)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A : 책에 쓴 내용대로입니다.

     

    “김수행은 경상도 사나이라 말수가 적지만 한마디 하면 그 뜻이 확실하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을 결성하고 사무실을 얻어야하는데 목돈이 없었다.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사무실 보증금에 돈을 보탠 적이 있는데, 그 일부를 차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김수행을 만났다. 얼마를 빼 갈테니 그 부분을 메꿔달라고 했다. “그래 알았어”라고 한마디 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Q : 김수행 선생과 함께했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10여 년 연구소 활동을 돌아보면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무엇이었고,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김수행 선생께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하셨을까요?

     

    A : 긍정적인 것은 5~6년간의『실천』지 발간입니다. 맑스주의 관련 주요 글을 망라한 의미 있는 실험이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연구소 안에 활동가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실천」의 빈곤이었죠.

     

    김수행이 답했다면, 긍정적인 것은 연구자들의 단합과 헌신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사회과학대학원』의 실험에 역부족이었다는 것 아닐까요. 『자본론』수강생이 70%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사회과학과 문학이었으니까...

     

    Q : 오세철 선생께서는 친구이자 동료이자 동지인 김수행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수행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 일상에서 사람과 운동을 대하는 모습은 어떠셨습니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소개해 주세요.

     

    A : 하나는 사노련 재판 때의 모습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걸린 「사노련」재판 때에도 변호인 측 증인으로 참석해 판사와 검사에게 호통치며 일갈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법원 앞에서 열리는 기자회견과 집회에 꼭 참석하여 힘차게 발언하는 김수행의 실천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그는 서슴지 않고 “나 같은 사람도 잡아가야지” 한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두 번째는 사회실천연구소에서의 모습입니다. 연구소의 『자본론』 강의 후 자주 가는 ‘을지로 골뱅이’에서 있었던 뒤풀이 에피소드인데요. 강의에 참석한 수강자들과 남궁원, 김수행, 나 이렇게 뒤풀이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김수행은 나에게 처음으로 “나 공산주의자야” 라고 고백했어요. 그러니까 2014년경, 당시 72세의 김수행이 맑스주의자, 공산주의자(코뮤니스트)로 커밍아웃 한 것이죠.

     

     

    다시 김수행 선생을 부르다

     

    Q : 올해는 맑스 탄생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상(코뮤니즘)을 지향하고 현실에서 투쟁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로서 평생의 과제이자 삶의 동인(動因)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추구하고 실천하던 맑스주의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느 점에서 다른가요?

     

    A : 맑스주의자로서의 사상이론(특히, 『자본』과 관련하여)의 기본은 둘이 같습니다.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맑스의 삶, 즉 그와 연관된 세계 코뮤니스트운동,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공언하기 전에 실천적으로는 사민주의좌파로서의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 상황에 방점을 둔 것은 사실입니다.

     

    Q : 김수행 선생의 친한 벗이자 동지였던 선생께서는 그분이 쓰신 책과 논문을 대부분 보셨을 텐데, 지금 우리가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십시오.

     

    A :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 신정완 편, 2007년, 서울대 출판부.입니다. 이 책은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으로 김수행과 제자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제1부 사회주의 이론」에서 제1장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김수행이 집필했고, 나머지 장과 2~4부는 제자들이 썼어요. 「제2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 「제3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 「제4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초석들」

    이 책을 보면 당시의 김수행과 그 제자들이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 상과 그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Q : 김수행 선생이 못다 이루고 간 맑스주의 연구와 실천의 과제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 김수행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와 나는 공동으로 새로운 사회의 강령을 포함한 구체적 방법론을 대담형식의 연재물로 『실천』지에 싣기로 했으나 미완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코뮤니스트의 공동의 과제로 남아있고 이를 위한 공동의 연구와 그 실현을 위한 혁명적 투쟁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진정한 코뮤니스트들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Q :  첨부한 글은 사회실천연구소의 성원이었던 남궁원 동지가 김수행 선생을 인터뷰한 글입니다. 인터뷰 내용 중 김수행 선생이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라는 책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답변이 있습니다.

     

    “내가 (소련을)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리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대해 말합니다.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김수행 선생의 답변에 동의하시는지요? 선생의 맑스주의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 주제가 발전적이고 심화된 토론으로 이어지도록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지요?

     

    A :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1) 상품, 화폐, 임노동, (시장)의 소멸을 말한 것, 계획경제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 이라고 한 견해에 동의합니다. 2) 그러나 계급과 국가의 소멸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부분적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3) 새로운 생산자의 연합을 국가로 등치시킨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개념과 혼동한 것 같습니다.

     

    <보충>『한겨레신문』에 베네수엘라 차베스주의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나와 김수행의 차이 : 물론 이는 전태일연구소와 사이버노동대학과의 관계이기도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민주의에 대한 태도와 비슷하게)

     

    Q : 김수행 선생은 평소에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거침없이 호소하셨습니다. 지금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작년의 촛불 투쟁과 지금의 미투 운동에도 함께 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두 분이 무엇을 함께 하셨을까요?

     

    A : 그가 살아있었다면, 촛불투쟁에 분명히 함께 하고 토론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이야기 했을 겁니다.

    미투 운동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세대를 넘어선 코뮤니스트운동으로서의 의미를 논의하고, 우리세대의 가부장적, 남성우월적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진지하게 터놓고 토론했을 겁니다.

     

    2018년 5월

    오세철 사회실천연구소 회원 인터뷰

    이형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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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위한,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해!

     

     

    김수행 선생은 한국 맑스주의 1세대를 대표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맑스주의 운동과 이론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한 문제가 있다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선생의 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 인터뷰 내내 느낀 답은, 선생의 ‘맑스 원칙’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굳건한 이론적 원칙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현학적인, 문헌학적 경향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몸에 밴 탓이리라.

    선생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는 분명 독재 정권의 암흑시대였다. 선생의 지속된 맑스주의 ‘이론 연구 투쟁’은, 한국 사회 『자본론』 완역으로 빛났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공산주의 유령은, 그래서, 이렇게 성큼 한국에 다가올 수 있었다.

     

    Q : 2008년 자본주의 공황 이후 유럽에서도 『코뮤니스트 선언』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맑스주의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까?

     

    A : 내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간 게 1961년이야. 경제학이 너무 재미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방법이 없느냐 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일본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1학년 때, 책 읽기 위해서 일본 말을 서너 달 배웠어. 그때 상과대학에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책이 많이 남아있어서 일본 책으로 이론에서, 경제사에서, 경제사상사에서, 맑스와 맑스의 위치를 공부했지.

     

    독학으로 맑스주의 입문

     

    Q : 선배들 권유가 아니라, 선생님은 독학하셨네요.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하고 남산에서 고초도 당하셨죠?

     

    A : 우리 때는 권유 그런 거 없었어. 독학을 했지.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논문으로 [금융자본에 관한 일 연구]를 썼는데, 힐퍼딩과 독점자본, 금융자본, 산업자본, 은행자본이 어떤 식으로 융합되느냐 하는 공부를 했지. 주로 일본 책 읽으면서,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경제학과 조교가 됐어. 신영복 선생님과 만나는 것은, 상과대 경제학과에 동아리가 있었는데, 경우(經友)회가 있었지. 내가 들어갔는데, 6기더라고, 신 선생은 2년 선배니까 4기지. 1년에 선후배 관계로 한 두 번씩 보는데, 신 선생하고 통일혁명당 사건에 걸린 것은, 내가 종암동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가까운데 신 선생이 살았어. 그때 신 선생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고 있었어, 내가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하도 힘들어서, 재밌는 책이 없느냐고 했더니, 신 선생이 갖고 온 책이 레닌이 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꽃 파는 처녀』로 기억해, 근데 보니까 한글로 돼 있더라고.

     

    Q : 선생님 그러면, 북한판본이네요.

     

    A : 맞아, 북한에서 나온 책이야. 그때는 그런 책이 남한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 그걸 보고서, 어, “이거 어디서 난 거에요” 물었지. 그랬더니 신 선생이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 읽고 나서 돌려줬지. 근데 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는데, 신문에 신 선생이 잡혀가고 청맥회가 거론됐지. 나는 68년 한여름에 잡혀 들어갔지. 상과대 경우회 사람들이 잡혀가고, 나한테도 올 것 같더라고. 부산에 도망가 있었는데, 내가 조교라서 학교에 전화했더니, 학교 선생님들이 “정보부 사람들이 교무실에 매일 와서 앉아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학교에 갔지, 바로 잡아가더라고. 근데 사건이 종결될 때가 된 거야. 나 같은 사람은 크게 가치가 없는 거야. 신 선생하고 걸린 게 별로 없어서,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조사받으면서, 신 선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그랬지. 그러다가 많이 맞았어. 정보부에서 사건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신 선생이 진술한 내용을 내게 던져주더라고. 근데 보니까, 책 빌린 내용밖에 없잖아. 그 사람들이 “이걸 읽어보고 인정해” 그러잖아, 그래서 인정했지. 그 당시 내가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부 수사관들이 조교하고 조교수를 구분을 못 해서 신 선생이 나한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야. 나갈 때쯤 되니까, 정보부 수사관이 “당신은 기소 유예될 것 같다”라고 귀띔을 해주더라고. 기소유예 받은 거지. 그러고 나서 학교 조교 사표를 냈고, 은행에 들어가서 영국에 갔지. 런던대학교 버크벡(Birkbeck) 대학인데, 거기에 영국 좌파들이 다 와 있었다고. 내 지도교수는 로렌스 해리스(Laurence Harris)라는 사람이고, 심사위원은 벤 파인(Ben Fine)이었어.

     

    “구소련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Q : 자연스럽게 대안 사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말하려면, 1917년 러시아 혁명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최근에 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6장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결국 소련 사회가 레닌의 정치혁명 시기나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에도 결국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시나요?

     

    Q : 그래요. 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자체도 소련 경제를 어떻게 개발할 거냐 하는 문제에 집중된 것 같아. 혁명과정에서 적군이 백군을 진압한 뒤 ‘신경제정책’을 실시하거나 ‘국가자본주의’를 이야기하거나 농업 집단화나 중화학 공업화의 추진 등에서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노동자의 해방’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되요. 내가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런데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문제라는 것이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무계획성이다, 계획적으로 운영하면, 자본주의적 공황도 없고 낭비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개념이 빠지는 거야. 국유화의 의미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소유를 이전하는 것이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표지인데, 소련에서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해서 군수산업 등 각종 산업을 건설하는 이런 식으로 갔다고.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이 인간의 탈을 쓴 게 자본가라고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국가, 당과 정부의 관료나 노멘클라투라가 자본가계급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Q : 선생님, 소련의 국영기업과 달리 예를 들면 콜호스, 소프호스는 소련의 집단 농장으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협동조합 형식에 의해서 농민이 집단 경영을 하고, 각자의 노동에 따라 수익을 분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콜호스, 소프호스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라고 볼 수 있나요?

     

    A : 집단농장도 모두 정부가 통제했어요, 자발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지. 생산량 할당하고 임금도 위에서 다결정하고.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그런데 소련에서처럼 정부나 당의 관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계획을 세우면 노동자들이 일할 맛이 나겠어.

    소련 사회가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넘어갈 때, 레닌이 그러잖아, 경제를 움직여야 하는데, 머리가 빨갛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잘 모르는 사람이 공장 운영을 어떻게 해? 네프 도입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야.

     

    Q :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난 1980~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소련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스탈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해야 된다고 봅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이나,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론, 정치적으로는 진영테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 비판을 하려면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과거 소련 사회 경험에서 본 것처럼, 국유화가 문제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 일부 운동진영에서도 국유화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A :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다가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부르든, 공산주의 사회로 부르든)로 간다는 거야, 이거는 엥겔스 도식이야. 새로운 사회가 계획경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노동자가 어디에 있어? 없지. 엥겔스 도식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계획경제의 실현을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제시했어. 진영테제는 이론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야.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나 강제수용소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얘기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야. 옛날 소련경제를 전형으로 하는 중앙지령형 통제경제에서는 국가가 세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가 동원한 노동하는 개인들은, 사실상 국가에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 노예에 지나지 않아.

    맑스가 생각한 노동자 해방, 해방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협동하는 그런 개념이 없어진 거야. 평의회나 이런 게 없어진 거야. 이런 게 문제점이라고 생각해. 혁명적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공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이 공장을 접수하여 임금노동제도를 폐기하고 자본가계급을 ‘노동하는 개인들’로 전환시켜서 계급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결국, 해방된 노동자가 주체가 돼야 하고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 잔재를 부수어야 하는데, 새로운 계급인 당이나 정부의 관료가 하니까 안 돼. 정부 관료가 “금년 목표는 이거야” 노동자들한테 “따라와” 이렇게 하니까 말로만 계획경제야. 지금 새롭게 나오는 소련 문서를 보면, 국영기업들이 이윤율을 올릴수록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인센티브(incentive),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고. 전체적인 계획경제도 안되고, 거짓말 보고만 되는 거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와 무엇이 달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이런 특수한 소련 자본주의를 시장에 다 맡겨 경쟁적 자본주의로 전환시켜야 비리가 없는 능률적 사회가 된다는 거야. 지배계급인 당과 정부의 관료가 국유재산을 모두 헐값으로 사들여 경쟁적 자본주의의 자본가계급으로 둔갑했는데, 소련의 역사 80여 년이 이런 식으로 쭉 연결된 거야.

     

    Q : 선생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중국, 북한도 자본주의로 볼 수 있겠네요.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자본가계급에게 있기 때문에 국가 주도가 잘 안 돼. 박정희체제를 국가 주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벌한테 모든 걸 맡긴 거야. 새로 탄생한 국영기업이 별로 없잖아? 정부가 재벌한테 금융혜택, 세제혜택 줬지. 외국 차관의 도입에 정부가 지급 보증을 했지. 재벌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것을 박정희가 총칼로 보호한 거야.

    흔히들 박정희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을 제압했다고 보면서 ‘국가주도’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킬 뿐이야. 독재적 정치권력은 권력 유지에 돈이 필요해서 증권파동을 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에, 재벌에 크게 의존했고, 미국 정부가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지침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독재 권력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 따라서 ‘국가 주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는 낡은 사회를 타파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혁명적 전환기’일 뿐이야. 실제로 해방된 노동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하여 공장을 접수하면서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야 한다고.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상품 화폐 자본을 없애야 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Q :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이행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이행기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행기 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행기 강령에 시장도 사라지고 화폐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일반 노동자들이 볼 때 쉽게 다가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좌파들, 트로츠키 이행기 강령보다도 더 센 이행기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 :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자본론』에서 상품부터 시작하잖아.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상품교환이 이루어지고, 상품교환에서 화폐가 생기며, 화폐를 가지고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잖아. 상품, 화폐, 자본은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돼 있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서는 노동하는 개인들이 모든 노동조건들에 대해 공동으로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혁명적 이행기에 생산수단이든 소비수단이든 사회적 생산물을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처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없애야 해. 이래야만 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거나, 가치에 따라 교환되거나 하는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와 시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이행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모든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 이행기의 초기에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니까 화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공장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로, 전국평의회로 가면서) 노동자들의 연합이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계획적으로 이용하여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생산한 것을 각 가정에 ‘택배’로 배달하면 될 것이므로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릴 필요도 없고, 노동자들이 화폐를 갖고 물건을 살 필요도 없어. 화폐가 계속 사용된다면, 화폐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물가를 폭등시켜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쿠바혁명에서도 체 게바라가 몇 번에 걸쳐 화폐개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붉은글씨』 창간호 중에서

     

    2012년 11월

    김수행 교수 인터뷰

    남궁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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