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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3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자유로운 영혼
  2. 2010/07/01
    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
    자유로운 영혼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이형로

 

 

 

<노동계급의 자립화에 대하여>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노동자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거나 독자적인 혁명의 수행이 어려웠던 시기 다른 계급과의 연대나 협조가 필요했을 때 적절한 용어였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생산과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들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 자기조직화로 표현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 는 맑스의 테제는  현실운동에서 미래의 혁명을 위해 무시되거나,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이상적인 문구가 아니다.  현실운동에서부터  노동자계급은 자립성을 획득하려는 노력들을 해야만 계급의식이 고양되고 계급투쟁이 전면화되었을 때, 반혁명적 괴저와  대리주의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흔들림없이 자기권력창출과 자기해방으로  나아갈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자립적인 계급의 조직을 스스로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자평의회이다.  이러한 노동자평의회의 생성과 권력창출, 자기해방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와 지도력 획득의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은 사회 내부의 모든 다른 계급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혁명 활동을 위해 하나의 불가분한 전제조건을 나타내는데, 노동자계급만이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계급의 정치조직인 혁명당과 강령으로 표현된다. 인민전선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회주의 제도에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들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서 의회가 이용될 수 있었다. 선거 시기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계급의 정강을 위한 선전 및 선동가능성으로서 활용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참여에 대한 전술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참여, 그것과 관련된 각종의 선거 연합들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정강들, 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자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부르주아선거에 대한 개입전술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에 부응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낡은전술이 되어버렸다.
 


<선거연합에 대하여>

선거 시기 정당들의 연합이란, 자본가 지배계급이 강력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 연합하는 것일 뿐, 그것의 결과가 승리이던 패배이던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단 선거가 끝나면 누가 이기든 바로 그들을 위해 투표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향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는 체제내로의 포섭을 통해, 다른 한편에서는 부르주아 법, 제도의 정교화를 통해 부르주아에 적대해 자립하려 하는 세력에 대해 공격을 가해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 북미의 좌파 당(사민주의, 공산당, 사회당을 포함한 세력들)의 역사에서도, 10여년의 짧은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가 투표를 하거나 누군가를 지지하라고 투표를 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참여의 한계를 제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민주적으로 선출’ 한다는 것은, 선출된 그들끼리 권력투쟁을 하던 일부가 특정계급을 대표하던 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폐지하려는 세력이 스스로의 물리력을 갖춘 상태에서 선출되지 않는 한, 결국에는 지배계급이 원하는 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에 복종해야 한다.’ 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거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선(집권) 가능성'인데, 이 당선가능성은 선거에 돌입하면서 정강이던, 정책이던, 계급이던, 그 무엇이던 모든것을 삼키어버린다.  더욱이 당선가능성에서 가장 불리한 노동자계급의 후보(정당)는 그들의 당선을 위해 자신의 고유임무인 계급투쟁을 멈추고 선거에 몰입해야 한다.  당선가능성 마저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속에서만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회주의자들과  그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는(사실은 이용당하면서) 급진주의자들은 선거시기에도 선거가 끝난후에도  노동자계급의 자립화가 아닌 또다른 당선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온갖 전술과 환상들을 생산해낸다. 그래서 그들의 비대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선거와 당선가능성을 위한 정책, 조직라인은 보강되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부르주아와의 계급전쟁에 대한 개입전술은 상대적으로 허약하고 반계급적이기까지하다. 여전히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은 혁명과 권력의 주체가 아닌 계몽과 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부르주아지와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다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투표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이고 삶에 절실한 투표인, 노동자계급의 파업을 위한 투표나 투쟁을 위한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에 대해서는 온갖 법 제도의 세부조항과 규칙들을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해 인정하지 않거나, 철저히 무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지배계급이 반세기 동안 반공이데올로기를 세뇌시켜 왔다면, 80년대 이후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대중의 뇌리에 각인 시킨 것은 선거=민주=합법 대 파업=폭력=불법이었음을 상기해보자.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우리가 그들의 민주주의 규칙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합법성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이다.


<계급투표란>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노동자후보나 정당을 지지하여 투표함에 넣는 행위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현장과 투쟁의 공간에서 행해지는 정치의식의 표현과 저항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회주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주장하는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과 투표함에 동원되어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투표함을 거부하고, 투쟁현장과 계급연대의 공간에 정치발언대를 만들어 투쟁을 결의하고 , 광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총회를 열어  계급적 연대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자본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노동자계급에게 위기를 전가하여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과 생존권 위기에 몰려있는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조직 확장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전 계급적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자립적인 총회 조직들과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창출되며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조직들을 통해 가능하다.


진정한 계급투표란 노동계급을 대리하는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그 책임을 유지할 계급의 투사를 뽑고, 투쟁을 결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투표함에 갇힌 대리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정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선거의 공간에서 항상 분리되고 분열되었던 노동자계급이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장이어야 하고, 그 공간은 부르주아지의 투표소가 아니라,  집합적이고 공개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이 압도적으로 표출되는 곳이어야 한다.


<기권주의를 넘어 적극적인 보이콧과 광장점거 전술로>

따라서 노동계급의 자립화를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진보대연합도, 노동계급의 정치를 선거와 정강내용으로 제한시키는 대리주의 적 비판적 지지노선도 노동자계급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기세가 약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혁명적 원칙은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 전망이며, 이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일어서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선거기간 선거운동과 선거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지역의 투쟁사업장과 투쟁의 현장에 가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준비하는 계급연대를 조직하고 직접행동하자. 고립되거나 앞선 투쟁,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거나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노동자 투쟁에 형식적 연대가 아닌 자기자신의 투쟁으로 계급적으로 연대하자. 선거기간과 무관하게 노동자계급이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계급적 연대의 표시로 투쟁에 함께하고 거리를 광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총회를 열어 자본과 권력을 규탄하고 항거하는 직접정치행위를 하는 것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로 가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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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

 

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


<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계급적 관점에 대하여>

                                                                                                                                                                                                                          by lee





1. '평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은 '평화'를 단순한 ‘전쟁반대’나 ‘긴장완화 요구’가 아니라 전쟁의 본질인  '노동계급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자본주의적 전쟁반대', '전쟁의 원인인 모든 제국주의 반대', '자본주의 타도를 통한 노동계급의 항구적 평화쟁취'로 연결 시켜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가 전쟁을 잉태한 체제이고, 경쟁과 경쟁의 극단적 표현인 전쟁 없이는 유지 불가능한 것이 현재 인류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알려 내는 것, 즉 전쟁의 계급적 본질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한반도에서 '분단 상황·긴장상황'을 이용한 자본가계급의 노동계급에 대한 모든 억압과 위협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의 기본임무이다. 하지만 , 자본주의적 분단해소(통일)와 남북 지배권력 간의 협조(협정)를 노동계급의 평화체제인 양, 민족(자주)적 권력을 세우는 것이 제국주의 반대 투쟁인 양 호도하는 관점은 계급 협조적 민족주의적 관점의 전형이다.



남북한 권력과 제국주의 체제


2. 남한 정권이 노골적인 친 제국주의적, 친 자본가적, 친 냉전(적에 대한 규정이 분명한)적 부르주아 정권이라면, 북한은 노동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체제일 뿐이라는 사실과, 이들은 공통적으로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군사적 긴장을 이용해 자국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야만과 파시즘적으로 통치하며 미국이건 중국이건 그들을 비호하는(자본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제국주의 세력과 노골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천안함 사태와 북 핵 위기 문제를 야기 시킨 장본인이며, 좀 더 호전적이지 않은 좋은 정부-민족(자주)적 정부가 들어선다고 이 체제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오바마가 여전히 아프간 전쟁을 확대시키고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통해 자본의 이해(군수산업 자본과 중국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견제)를 대변해주듯이, 자본주의하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거나 평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 각각의 자본을 대변해주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자본주의 일반의 법칙들이 자본의 치명적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자본과 권력을 지배하는 핵심자본들이 국가를 앞세워 전쟁을 전면전이나 국제전쟁으로 확대시켜 위기를 일시적으로 비껴가거나 자본과 시장의 재편을 통해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 와서는 전쟁의 성격도 자본주의 위기를 지연시키거나 완화하는 역할에서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즉,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2차 대전 이전 제국주의 국가가 세계의 어느 부분(비자본주의/반자본주의 영역)에서 자본주의를 정착(확장)시키는 역할을 했을 때 자본주의는 풍부해졌고 넓어졌다. 이때의 군사력은 어느 경우 세계자본주의에 있어서 생산력 발전의 요소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경쟁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전쟁은 전리품의 재분배를 가져올 뿐, 새로운 정복은 불가능해졌다. 그 시기부터 한 자본주의 강대국은 다른 국가를 희생시킴으로써만 군사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세계 자본에게 전쟁은 내부적 분열과 재난 낭비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이와 같은 군사지출을 통한 출구는 각 나라 경제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 군사지출은 자본에게 그리고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 엄청난 낭비다. 지난 몇 십년간 미국은 평균적으로 매년 잉여의 1/3을 군수품으로 전환시켰다. 이 지출이 생산적 상품에 사용되었다면 미국 경제성장은 33% 가속되었을 것이다.


이제 군사적 자극제가 자본주의의 영원한 확장을 결코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비생산적 유형에 그렇게 거대한 부분을 바치는 것일까? 그것은 군수산업의 발전이 제국주의간 적대의 격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쟁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전적으로 분열된 그리고 모든 경쟁자들이 나누어 갖기에는 너무 작은 조각들로 이뤄진 세계에서 각국의 군사적 힘은 그 나라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국주의간 적대의 첨예한 표출이 상시적으로 분출되는 곳이 바로 한반도 주변이며, 남북의 군사력은 각자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도구이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불해야할 대가인 것이다. 비생산적 영역인 군사력은 결국엔 자본에게 짐이 되고 낭비일 뿐이지만, 제국주의 간 적대체제, 세계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상품을 수출하고 이윤을 추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의 자본가들은 군사비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한(물론 노동계급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을 기꺼이 감내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의 지배계급 또한  미·일을 겨냥한 군사적 방어선을 사수하고 미국에 대한 적대의 표출을 대리하면서 중국·러시아에 도움을 받으며 내부적으로는 자국의 인민들을 초과 착취하고 군사화로 동원하며 생존을 연장해가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낭비들의 악순환은 지배 권력과 자본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정권의 변화- 특정 자본분파의 이해관계 -에 따라 ‘전쟁 없는 긴장상태’, ‘평화 없는 경제교류’를 오가며 두 착취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의 남북 지배 권력 간의 평화협정이라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 강제하는 군사적 영역을 침해할 수 없고 극도로 제한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 뿐이고, 언제든지 제국주의 세력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는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과 단절하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착취와 이윤추구의 자본주의 경쟁관계 ,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절시켜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천안함 사태의 진실과 자본의 이해관계


3.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두고 의혹이 큰 만큼 공방도 치열하고, 국제적인 진실게임의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게 천안함 사태의 진실은 없다. 천안함 사태 때문에 계급투쟁이 유보되었거나 영향을 받을 거라는 사고도 글로벌화 된 자본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분석하지 못한 과도한 표현이고, 더욱이 곧 전쟁이라도 일어날듯이 무조건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장하는 과대망상가들 이야말로 노동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반공세대-정신적 피해자들일 뿐이다.


천안함 사태를 북의 소행으로 발표하던 날, 자본은 전쟁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수조원이 증발된 주식시장과 환율폭등을 대비했고, 해외의 자본시장과 상품시장에 전쟁위기가 없을 것임을 설득했다. 또한 천안함 사태의 장기화가 상품수출과 이윤추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본들은 적당한 선에서의 정리를 원하고 있고, 자본의 또 다른 축에서는 천안함을 접고 경제위기를 피해나가는 일에 강력하게 북, 중을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세력들이 자본분파들 간의 투쟁에서 승리할 때 평화협정, 자유 왕래 등은 기본카드일 뿐이다. 그들이 이윤추구의 근거지를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전쟁을 '위기상황 - 위기의식 조장' 이상의 실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현재의 평화와 냉전이 공존하는 상황이며, 더욱 완전한 평화 속에서 북을 이윤추구의 장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평화체제의 완성이다. 따라서 천안함 사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 있는 지배계급 일부의 권한은 제한되어 있으며, 자본의 일부분파가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국내외 핵심자본과 국내자본 전체의 이익을 일방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 체제로서의 한국자본주의이며 현재적 자본의 구성인 것이다.


그래서 전쟁위기와 더불어 사회주의자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측면은, 평화체제 유지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자본의 분파들이 북을 자본주의 체제에 온전히 편입시켜, 민족적·경제적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북의 노동계급을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착취와 잉여가치의 실현을 위한 시장 확대로 이용하고, 그것의 한축으로 한국노동계급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고용과 임금의 상대적 안정을 일부에게 보장해주는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면, 자본이 주도하는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남북의 노동계급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노동계급이 주도해야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또한 그런 측면에서 소위 '자본의 위기전가' 내용이 '부문적'이거나 '일국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전투적이고 잘 조직된 계급일부(부문, 국가)의 계급투쟁의 지엽적인 성과물들이 자본이 착취해간 것들을 다시 되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취약한 부분의 초과착취-희생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면 자본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것이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투쟁도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투쟁으로 진전시킬 전망을 갖지 못하는 한, 전 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무차별 공격과 발 빠른 행보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며, 자본은 본연의 임무인 이윤추구를 위해 노동계급을 분할 통치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리직과 생산직, 대기업 노동과 중소영세 노동, 선진국 노동과 후진국 노동으로 분리시키고 한쪽을 희생시키면서 혁명적 분출을 막기 위한 온갖 방책과 환상들을 생산해 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본의 덫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빼내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분할과 분열을 고착화시키는 노동조합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도 반드시 버려야한다.


 

‘평화’와 노동자국제주의


4.노동계급은 천안함을 누가 가라앉혔는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남북의 통일이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될 건지, 아무런 계급적 이해관계가 없다. 그런 의제들은 자본가 분파들의 이해관계일 뿐이다.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란 오직 군사적 긴장상황을 이용한 부르주아계급의 온갖 명분의 공격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방어하는 것과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모든 전쟁과 전쟁책동에 조건 없이 반대하고 대항하는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평화'그룹들과 시민단체들, 민족주의-사민주의자들, 좌파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전쟁(책동)중지·평화협정 체결'을 향한 다양한 연합들이 말하는 ‘평화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 평화주의자들은 유엔에 그리고 국제 법에, 부르주아 권력 간의 협정에 호소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그 법의 장벽들을 파괴할 때에만 확장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간, 북중 간 제국주의적 군사동맹과 연관된 모든 조약(협정)을 파기하고 실질적 연결 관계를 끊는 것이 남북 평화협정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면, 자본의 서커스 판에 메뉴로 올려 진 천안함 사태에 부화뇌동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야만적인 상태로 몰리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정신적 피로를 가중시키지 말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진실이 가려질 거라는 유아적 상상도 이제 그만하자. 진실은 훗날의 혁명만이 밝혀줄 것이며,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진실을 접근해야 한다.


혁명을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패배의 누적과 보이지 않는 전망으로 극도의 정신적 피로에 쌓여 계급의식이 하강되어가는 노동계급에게 혁명적 분출구를 제시하거나 함께 뚫고 나가자고 앞선 결의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북조선에 있는 노동계급도 중국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미국에 있는 영어 잘하는 workers도 모두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전쟁을 막는 일도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도 궁극적으로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야만 실질적으로 자본가를 타격하고 노동계급을 방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망과 흐름들만이 노동자국제주의와 세계혁명의 기본임을 노동자계급 스스로 인식하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인 것이다.

 

 

결론


5.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은, 오직 방어 할 어떤 국가적인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은 운동에 의해서만 -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운동에 의해서만 - 저지될 수 있다.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간의 어떠한 연대도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들의 기만적 연대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어내려는 시도들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첫걸음이다.


평화주의자들 말하는 '전쟁반대 - 이명박 반대'는 '양심'과 '이성'에 호소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계급들의 연합을 주장하고 결코 민족적 이해관계를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부르주아의 군사적 연합에 필수불가결한 부수물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의 의미에 관한 진정한 계급의식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방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반도 안에서의 '평화'와 관련된 계급투쟁이 나가야할 길은 '계급평화-계급연합-체제간의 평화'가 아닌 남북한 부르주아 지배 권력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한 계급적 연대와 국제적인 투쟁을 통해 전쟁을 실질적으로 억제해내는 투쟁이어야 한다.


끝으로 천안함 사태를 굳이 정세의 중심에 두고 사고하거나 그것과 관련된 현실투쟁에 개입하고자 한다면, 시민단체 혹은 민족주의세력과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 좌파 내 평화주의세력들 수준에서 주장하는 비 계급적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적/노동자 국제주의적 전망을 제시해야 하겠다.


-자본가권력과 제국주의세력이 주도하는 그 어떠한 조사내용도 남북을 포함한 세계의 노동계급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그 어떠한 사후조치나 제재조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천안함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차원의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조사단에 의해 정보가 철저히 공개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절차에 따라 규명되어야 할 것


-과학적 혹은 객관적 물증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주요원인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을 근거로 한 제재조치가 해당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피해를 주거나 고통을 전가하는 것에 사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영향을 주는 그 어떠한 제재조치(경제봉쇄, 군사적 제재 등)도 조건 없이 반대한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방적 희생만을 초래하는 어떠한 명분의 전쟁과 전쟁위협, 전쟁책동도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노동계급을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연대투쟁으로 방어해낼 것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서는 전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전쟁을 잉태한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지시킬 것


-이모든 요구사항을 알려내고 관철시키기 위한 남북 노동자계급과 세계노동자계급의 연대와 투쟁을 호소하고 조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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