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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8/09/23

[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3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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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자)

     

    판네쿡과 호르터가 발전시킨 전략적 목표는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에만 한정된 것 아니었다. 1920년 봄, 급속히 강화되던 레닌주의적 코뮤니즘에 대한 좌익공산주의의 강력한 도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상했다. 좌익공산주의는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장 위협적인 도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좌익공산주의가) 응집된 구성체는 아니었으며, 단지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당/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해체된 후, 좌익공산주의의 국제 센터는 비엔나 코민테른 사무국과 그 기관지 「Kommunismus」로 이동한다. 편집인이 루카치였던 「Kommunismus」는 좌익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주된 포럼 역할을 한다. 루카치도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이론가로서, 판네쿡의 영향을 받았다. 좌익공산주의의 다른 주요 센터는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는데,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주도하는 반-의회주의 코뮤니스트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한다. 보르디가의 반 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좌익공산주의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한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했고, 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한다. 좌익공산주의의 또 다른 이론적 센터는 영국에서 나타났는데, 실비아 팽크허스크(Sylvia Pankhust)의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Socialist Workers' Federation)과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 전함( Workers' Dreadnought)이었다. 좌익공산주의 경향은 또한 의회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뮤니스트 당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관료적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창립은 좌익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간의 대립 단계를 가져온다.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존중해 창립 후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고.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한다. 이후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Wolffheim, Laufenberg, Rühle의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공산당(KPD)과의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2차대회에 참가할 것)을 담은 공개서한을 전한다. 대표단은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륄레(Otto Rühle)의 2차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륄레는 레닌, 코민테른 타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인 7월 18일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라는 극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그렇게 2차 대회에 불참했지만, 대회에서는 주요 이슈로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는데,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해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대회 마지막은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권주의파를 대표하여 보르디가 동지가 작성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 의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정치적 대의제도의 형태이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비판한 결과는, 국가 대의기구 선거에서 모든 사회계급의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부기관이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위원회가 되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역사적인 투쟁 기관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조직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코뮤니스트는 노동자계급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무장투쟁만이 노동자계급을 그 목표에 데려다 줄 것이다. 코뮤니즘(공산주의) 경제 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은 민주주의 기구들을 폭력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 즉 노동자평의회로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착취 계급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대의기구를 가진 정부 체제를 세운다. 의회제도의 폐지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과제가 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 사회 형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소유보다도, 관료적 국가기구보다도 앞서 타도되어야 한다.

    (중략)

     

    5.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이 아직 까마득히 멀어서, 혁명을 직접 준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아직 계급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 시기에, 선거와 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선전과 선동, 비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 혁명이 이제 막 시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들이 아직 형성 단계에 있는 대의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승리에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사태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6. 세계혁명의 종결과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조직에 끼친 결과,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실현한 러시아 혁명과 사민주의 배신자들에 반대하여 건설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시작한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는 코뮤니스트의 혁명적 대의를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전의 선명성을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최종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선거를 보이콧하도록 선전할 필요성이 있다.

    (중략)

     

    10. 다수결에 의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정한 당들에게 선거 캠페인에 계속 참여하게 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인자들을 걸러내는데 필요한 과정을 가로 막는다. 그들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11. 의회와 기타 민주주의 기관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실제 성격은 반대당들이 비판으로부터 의회주의 원리에 반대하는 선전으로, 의회주의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선거과정의 공식 절차를 따르기를 거부할 경우 발언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 제도의 기본 원리라는 공통의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 그 규칙의 미묘함을 이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의회제도 내부의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과 똑같이 점점 더 투표수와 의석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느냐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당들이 의회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보르디가의 테제 낭독>>,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 8차 전체회의 (1920년 8월2일)

     

     

    코민테른과의 단절과 혁명운동의 퇴조

     

    코민테른과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판네쿡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의미와 관련된 근본적인 쟁점에 관심을 둔다. 1920년에서 1921년 초까지 판네쿡과 호르터는 레닌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조심스럽게 피했고, 러시아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사회를 낳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유지했지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내에서는 륄레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번째 공개적 비판을 가한다. 러시아에서 1920년 6월 돌아오면서 그는 러시아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며, 반-혁명적 당 독재가 권력을 쥐었다고 비판한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 사이에 러시아와 서유럽 상황은 급변하는데, 1920년 러시아는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구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는 여러 국가와 무역, 외교적인 유대를 마련했고,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 같은 변화된 관점은 신경제정책으로 알려진 경제정책으로 표현된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 재평가 작업에 착수한다. 판네쿡의 분석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는 생각, 그리고 러시아는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크론슈타트 반란처럼)한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으므로,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판단하여 서구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비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축출된 이후 더 많이 표명된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는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혁명적 파고의 퇴조는 판네쿡에게 깊고 슬픈 환멸을 경험케 하였고, 정치적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변화된 내용은 없었지만, 정치적 행동은 대개 개인적 만남에 한정된다. 정치적 혼란도 큰 이유였지만, 그가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천문학에 전업 경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 선전을 이유로 신분이 위태로워진 그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수학, 천문학 강사로 선임된다. 이후 20년간 그 연구원에서 그는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쌓는다. 혁명 운동의 의미에서 판네쿡의 적극적인 정치경력은 1921년 비-레닌주의 혁명적 좌파의 퇴조와 함께 종료된다. 이후 어떠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1921-27년간은 예외적인 휴지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적 이론가로서의 자기 소명을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중단 없는 저작활동을 한다. 좌익공산주의의 선구에서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로서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평의회공산주의는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경향으로 갑작스럽게 대두된 것이 아니었으며, 장기간의 지적 탐구로부터 천천히 발전한 것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이론적 기초들은 아래 몇 가지 문제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발전시켰던 사상체계와 직접 맞닿아 있다. 하지만, 초기의 평의회공산주의가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될 수 있었던 측면은 국제코뮤니스트운동과의 동일시 거부, 당이라는 조직 거부, 사회주의적 변형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을 발전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고, 이후 평의회주의1)라는 극단적 오류를 낳기도 한다. “비록 소규모였고 또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길 어떠한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분석은 훗날 ‘소비에트 레닌주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데올로기적 도전”(McLellan, 1979)으로 평가받게 된다.

    <주>

    1)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이형로 (코뮤니스트 4호, 2014)

     

     

     

    독일혁명 연표

     

    1905년 러시아혁명 발생 소비에트 출현.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작성

    1907년 레닌 [12년] 논문집 발표,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비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 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찜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등)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혁명 발생, 대대적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말 독일공산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총선에서 독일 사민당 집권

    1919년 1월 독일공산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독일사민당 진압 (로자 룩셈부르크 암살)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 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공산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 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

    1920년~1923년 독일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창립(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 창립, (공장조직의 연대) 오토 륄레 주도.

    1920년 6월 레닌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무질서] 팸플릿 작성 -> 이 팸플릿을 계기로 코민테른 전 세계 지부 볼셰비키화.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공 산당 (VKAPD) *독일사민당내 당내 분파가 독립사민당임 ; 1917년 로자 룩셈부르크 주도 독일사민당 좌파 + 카우츠키가 주도한 독일사민당 중앙파

    1922년 카우츠키 독일 사민당 복당 ->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림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유명무실화 됨

    1927년 호르터 사망

    1929년 세계대공황

    1933년 나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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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노동자평의회

     

    1920년 이후 판네쿡은 천문학의 연구에 집중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에 이론적인 깊이와 이해를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판네쿡의 생각은 ‘노동자평의회’, ‘철학자로서의 레닌’ 그리고 출간되지 않은 ‘자유로의 노동자의 길’ 3권의 저서에서 발전된다.

    판네쿡의 『노동자 평의회』는 현재에도 노동자 자기해방 사상의 고전으로 남아, 수많은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읽고 있으며, 현실 운동의 무기로 등장하고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낡은 표지를 벗고 다시 노동자들의 품에서 해방 사상으로 살아날 때, 노동자혁명의 불길은 다시 계급의 가장 아래로부터 타오를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사상체계

     

    판네쿡은 사회주의 이행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로서 평의회 조직의 사상을 명백하게 하려고 했고, 평의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높은 단계에 있지만, 이전 조직을 단순하게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조직을 규정하던 근본적인 원칙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 위에 군림하는 권력인 전문적인 지도체제를 제거함으로써 지도자와 추종 간의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평의회에서는 지도력의 모든 기능이 사라지고 대중 모두가 적극적으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권력은 언제나 노동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가 혁명조직에 의해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독단적으로 생성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조직은 단지 평의회의 사상과 필수성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평의회는 단지 노동자 계급이 공세를 취하는 혁명적 시기에만 적합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혁명을 완수할 능력이 없는 경우, 평의회는 유용한 사회적 기능을 더는 할 수 없으며, 곧바로 프롤레타리아 전쟁의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평의회가 단지 노동계급의 실천적 투쟁에서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생성될 수 있으며, 와일드캣 파업(비공인 파업)과 공장점거와 같은 활동에 태생적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를 노동자 평의회로 변형시키는 주요 요인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하는 파업위원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파업위원회들은 평의회 조직의 기본적인 두 요소, 즉 직접 민주주의와 계급 공동체를 구체화시켰다고 보았다. 일단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가 국가적이고 전체 계급 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것들은 즉각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갈등으로 전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보다 높은 수준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판네쿡은 노동자 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이때이며, 자본주의 국가가 붕괴할 때까지는 혁명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했다.

     

    판네쿡은 부분적으로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점거 전술이 전통적인 노동조합에 대항하는 불복종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그는, 선진 자본주의의 노동조합들은, 그들이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정체성의 흔적들을 잃어버렸고 또한 자본주의의 통합적인 메커니즘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조를 독점적 자본이 독점자본의 조건을 전체 노동계급에 부과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자본 합리성 원칙에 대한 노동조합의 헌신 때문에, 노동조합이 결코 ‘노동자들의 통제'라는 주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통제’는 노동조합 권력의 원천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조합들은 지도자들에 의한 지배 원칙을 기초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충실한 재생산이고 어떤 혁명에서도 부르주아지의 굳건한 동맹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판네쿡의 생각에 노동자 운동의 부활은 이 옛날의 조직(노조)에 대항한 대중적 반역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판네쿡의 혁명적 변혁 모델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두 가지의 목적, 즉 투쟁의 직접적인 기구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특정 국면에서 혁명의 물질적, 정신적 기초이며, 새로운 사회의 하부구조와 조직적 채비를 구성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2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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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2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 : 유럽 코뮤니스트의 형성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은 판네쿡이 그의 생애 과거 20년을 헌신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다른 대부분의 혁명적 좌파와 같이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판네쿡은 혁명과정의 뉴스를 따라 추적하고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그 의미를 분석했다. 차르가 무너지고 며칠 후 판네쿡은 2월 혁명이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위대한 민중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의 주요관심은 초기 시기에도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계, 즉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년 이전에 판네쿡과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실현하는 기구형식을 모호하고 일반화된 용어로 설명했었다. 트로츠키도 1905년 혁명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토론했지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판네쿡은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라고 보았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기간 판네쿡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전적인 연대를 표시했다. 미래 혁명의 경로에 대한 예후에서 판네쿡은 종전의 태도를 뒤집고 러시아가 “유사-맑스주의 교조주의의 형태로 사회주의를 위하여 무르익지 않았다.”라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난했다. 룩셈부르크 같은 볼셰비즘에 대해 다른 비판자와 달리,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실제적 견해에 동조했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확신은 그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을 수행함에 비타협적 헌신을 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힘은 조직 구조에 있지 않고, 공격적 전투력과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굶주림에 대한 자발적 항의를 강력한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린 그들의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성숙은 투쟁과 권력을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숙에 결정된다는 것을 볼셰비키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았다. 판네쿡에게 볼셰비키의 투쟁은 유럽 전역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판네쿡의 관심은 세계혁명이라는 더 넓은 과정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 재조직화의 모델을 나타내는 것에 주로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기에도 판네쿡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구에서 투쟁하는 조건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짜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다면,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혁명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성격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민주의로부터 정신적으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투쟁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1917년은 전쟁의 피로가 최고조에 오르자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격정의 해였다. 민중적 불만이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고조된 독일만큼 위기에 처한 나라는 없었다. 브레멘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발발이 혁명적 좌파의 상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혁명이 나자, 브레멘 경찰은 보고서에서 ‘행동파 혁명 좌파 소집단은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과 잠재적 혁명의 위험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혁명 영향의 가장 최초 직접적인 표현은 1917년 3월 31일 나타났는데, 수천 명의 브레멘 부두 조선 노동자가 러시아 혁명과의 연대와 전쟁 지속에 항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고 시 중앙으로 행진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1917년 봄 동안 미래에 채택할 조직형식에 관한 브레멘 좌파들 내부의 토론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독일사회민주당(SPD)으로부터 좌파의 축출은 이 문제를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판네쿡의 관점에서 브레멘 좌파의 당과 노조 조직의 옛 형식은 새롭고 직접적인 계급 도구가 기대되는 혁명적 투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그린 새로운 조직 형식의 모델은 미국의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2)에 대부분 영감을 얻었다. 새로운 조직 구조에 대한 브레멘 좌파의 추구는 1917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 파업과 일치했고 더욱 강화되었다. 파업은 생활조건의 악화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혁명적 기질은 여러 곳에서 보이게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파업을 조정하기 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됐는데 이는 독일에서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였다. 파업투쟁은 주로 현장 활동가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점차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참여로 나아갔다. 노조 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개별공장과 산업 지역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의 조정 망을 형성하여 옛 노조 지도부를 대체하였다. 옛날 지도자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에서 현장대표를 선출했다. 이러한 위원회로부터 그다음 해 독일 전역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평의회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1917년 8월 26일 13명의 대표가 비밀리에 베를린에 모여 독일국제사회주의자(ISD)의 창립대회를 한다. 여기서 ‘국제’라는 말은 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발전할 제3 인터내셔널’과 현존하는 찜머발트 좌파의 회원임을 밝히는 의미였다. 내부구조로 보면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단일조직’이며 자발적인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혁명 투쟁에 대한 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믿음은 두 번째 자발적 파업이 1918년 1월에 일어나자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9월 초와 10월 초의 주요 패배를 뒤이은 군사 상황의 악화는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국가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1918년 11월 4일 키일(Kiel)에서의 해군반란으로 시작되었고 독일 전역으로 눈사태처럼 번져 나갔다. 이 사건의 초기 과정은 판네쿡과 독일 좌파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혁명의 형식은 거의 그들의 예측과 같았다. 주로 자발적 성격을 띤 대중행동과 대중파업이었고, 기구 형식도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였다. 11월 초 며칠 동안 1만 개 넘는 평의회가 모든 작업장과 부대에서 선출되었고 권력은 잠정적으로 그들 손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평의회(소비에트)가 조직 형식으로 평의회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난 2년 동안 독일 노동자의 경험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었다. 평의회와 정부에서 주요세력이 된 독일사회민주당의 역할 때문에, 옛 국가의 몰락과 노동자평의회 체제의 발전 모두 러시아보다 독일에서는 덜 급진적 과정이었다.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 자체에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지만, 당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과 공장 전투파 사이의 통제를 통하여,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주도권을 장악할 위치에 있었다. 혁명 초기 동안 전략적 입장을 요약하는 두 가지 주요 표어를 채택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가 그것이다. 이 주제는 판네쿡에 의한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독일 혁명의 직접적 참여자는 아니지만, 판네쿡은 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전략적 관점을 정교하게 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판네쿡의 평가는 11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 권력의 옛 기구가 그대로 온존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목적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적 행동계획의 추적을 시도하면서 판네쿡은 전쟁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진정한 형식을 건설하는 첫 번째 단계로 전쟁 전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와 완전한 단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독일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에 더욱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의 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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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혁명은 점차 두 적대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 상반되는 표어, 즉 의회냐 평의회 체계인가라는 상징 표현의 이러한 갈등은 독일 혁명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에 기반을 둔 투쟁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 주도의 임시정부는 옛 정권의 기구와 동맹을 맺고 평의회 권력을 침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으며 혁명을 좌파에게 몰아가길 바랐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러한 세력의 연합은 노동조합주의를 정당화하고 평의회를 격하시키는 노조와 사용자 사이의 Stinnes-Legien 협약으로 제도화되었다.

     

    공격적 혁명에 대한 헌신과 함께 독일국제사회주의자(ISD)는 그 이름을 독일국제코뮤니스트(IKD)로 바꿨다. 그리고 독일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할 수 있는 일간지 코뮤니스트(Der Kommunist)를 창간했다. 혁명의 혼란스러운 처음 몇 주간 독일국제코뮤니스트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단결 부족은 좌파를 무겁게 짓눌렀고 혁명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특히 좌파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통을 겪었다. 사건의 속도가 순간순간 달라지고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2월 16일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좌파를 통일시키는 의식적 단계로 간주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안을 발간했다. 이 시기 동안 칼 라덱은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중재하는 시도를 하기 위해 볼셰비키의 파견자로 모스크바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공식적 통합과정은 새로운 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여는 12월 24일 독일국제코뮤니스트의 전국대회에 스파르타쿠스그룹이 개입하는 제안이었다. 통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스파르타쿠스 그룹이 독일독립사회민주당으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천명하는 12월 29일에 제거되었다.

     

    공식적으로 독일공산당(KPD)의 창립대회는 12월 3일부터 1919년 1월 1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당시의 토론은 독일 코뮤니스트의 두 흐름 사이의 전망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주요 분화 지점은 새로운 조직의 성격이었다. 스파르타쿠스 그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요구하지만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새로운 당이 모든 공산주의 지향 집단의 느슨한 연맹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재천명했다. 판네쿡의 관점에 따라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 조직의 진정한 바탕은 ‘내부 목적 통일과 결합한 개별집단의 외적 독립’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정신적 통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지방조직은 당과 노조 기능을 결합한 “단일조직”이라고 요구했다.

     

    독일공산당 힘의 첫 번째 검증은 창설된 지 며칠 만에 왔다. 프러시아 정부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스파르타쿠스 그룹에 동정적인 Emil Eichorn의 직위해제를 시도한 1919년 1월 4일 발생한 스파르타쿠스 봉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독일독립사회민주당은 1월 5일 대중시위를 조직했는데 예기치 않게 70만 명이 참여했고 일련의 건물점거가 이어졌다. 독일공산당은 미성숙한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대규모 동원과 전투적 분위기에 지배당해 권력투쟁을 조정하는 혁명위원회 조직을 도왔다. 거리 투쟁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소수만이 전투에 참여했고 일주일 시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봉기는 분쇄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잔인하게 살해된 1월 15일에 있었다.

     

    브레멘에서는 평의회공화국이 3주간 권력을 장악하는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베를린 사건이 2차 혁명의 시작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비극적 오해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장악 배후에는 평의회와 공공모임에서 평의회 권력의 형식을 선언할 필요에 대하여 수 주간의 토론이 있었다.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행동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노조사무실 점거로 나아간, 단일 조직에 의한 노조 대체를 요구하는 독일공산당이 조직한 시위였다. 이러한 행동은 브레멘 사회주의공화국을 극적으로 선포한 시청 앞에서 무장시위로 확대되었다. 평의회공화국의 존재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처음 3주간은 좌파의 힘을 보여주는 시위와 사회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지만, 지역 조건은 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취하게 했고 새로운 정부 구조는 대체로 문서상의 체제에 불과했다.

     

    1월 25일 독일사회민주당의 내무장관인 노스케(Noske)는 중앙정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브레멘 봉기를 무력으로 분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그는 자유군단(Freikorps) 연대에 브레멘으로 행진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도시 탈환의 전투는 2월 3일 시작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마지막 타격은 좌파의 주요 거점인 Weser 부두가 2월 5일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유혈의 패배 이후 평의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독일사회민주당 지배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패배와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독일공산당과 브레멘 노동계급은 4월 2주간의 총파업을 포함한 저항을 1919년 동안 계속했다.

     

    독일 좌파의 명백한 패배는 제2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판네쿡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했다. 1919년 1월 2일 비극적 사건을 놓고 판네쿡은 좌파의 패배가 혁명투쟁의 전 시기에서 ‘조그만 사건’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판네쿡이 결단코 반대했던 1월 공격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11월 혁명으로 형성된 권력 지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이 새로운 권력지위의 정복으로 나가거나 11월 정복한 지위의 체면 상실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독일 부르주아지가 상당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힘의 전면적 검증을 하는 데는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노동계급 준비의 실재 상태였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투쟁할 준비와 기꺼움이 있지만, 위로부터의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옛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악의 걸림돌이 된 전쟁 전 그들의 교리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판네쿡이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왜 노동자가 옛 교리와 조직에 집착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그들을 실천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였다.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완전히 절연하고 노동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판네쿡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 가을 동안 혁명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내부 당을 지배했다. 이 토론을 통하여 옛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이 “단일조직”과 평의회체제를 선전하는데 헌신하는 분권화된 협의체가 되어야 함을 더 확인하게 된다.

     

    코민테른과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

     

     1919년 3월 코민테른 창설에 따라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브레멘 좌파는 코민테른의 가장 열성적 옹호자들이었는데,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 승리로 코민테른은 러시아의 주도 아래 결성된다. 새로운 세계혁명운동의 성격에 대한 판네쿡과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네덜란드와 브레멘 좌파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코민테른 초기 러시아와 서유럽간의 소통을 위해 베를린에 서유럽 서기국(Secretariat)을, 암스테르담에 서유럽 사무국(Bureau)에 두도록 결정한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은 회의를 암스테르담에서 조직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면서 1920년 1월 활동 시작한다. 회의는 많은 사람에 코민테른 대회와 동급으로도 비추어진다. 1920년 2월 개최된 회의는 사무국 활동의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사실상 최초로 서유럽 인터내셔널로 복무하고자 했다. 회의에서는 네덜란드 대표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최소한 12개국에서 참가하여 코민테른 창설 시보다 더 많은 대표가 참여한다. 회의는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고, 경찰에 일찍 해산되었지만, 그런데도 서유럽 공산주의 개념의 특수성을 최초로 확정했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은 의회주의, 노조주의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조직화 원칙으로 노동자 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그것은 판네쿡이 초안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였으며, 공개적으로 코민테른 정책에 도전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판네쿡은 이때 즉각적으로 사무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등장했고, 노조운동에 대한 테제에서도 같은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회주의, 노조운동에 대한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반감, 그리고 (코민테른에 소속된) 각 당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코민테른 지도력과 네덜란드 좌파 간 전망에서의 주된 차이를 보여주었다. 볼셰비키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심각한 차이점은 찜머발트 운동 시기까지 올라가지만, 양 당파의 차이는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무마됐다.

     

    네덜란드에서는 처음에 볼셰비키, 코민테른 모두 의회주의 전술을 거부한다고 보고 그것을 당연시했다. 특히 그것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코민테른 초기 문건 등 몇몇 저작에 기인했다. 하지만 볼셰비키 이론과 실천은, 혁명가들이 대중을 각성시키기 위해, 부르주아 정당을 공격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를 허물기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 기간 강조해 왔다. 의회주의 전술에 대한 판네쿡의 반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초로서의 평의회 체계에 대한 그의 지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판네쿡은 의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외관만 띨 뿐, 자본가 헤게모니의 주요 수단의 하나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와는 달리 노동자 평의회는 통합적인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 체계에 전체 노동계급을 통일시킬 것이며, 혁명전략, 사회주의적 사회 재조직화의 근본문제는 더는 전통적인 ‘지도력 정치’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공격적인 전투성, 독립적 전망은 자체 하위 사무국으로 전미 임시 사무국을 조직화하려고 했을 때,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자신을 코민테른의 도구가 아니라 미래 유럽 혁명을 위한 주 혁명 센터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국의 독립적인 혁명적 전망은 많은 부분 서유럽에 특수한 공산주의 개념화의 반영이었지만, 또한 그것은 암스테르담과 모스코바 간의 소통 부재에 의해 생긴 것이기도 했다. 사무국-모스크바 간에는 얼마간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없다가 소통수단을 갖추게 된 시점에 사무국의 정책과 활동이 모스크바에 알려지게 되었고, 코민테른 지도부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곤혹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분열점은 사무국이 새롭게 형성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이며, 코민테른 지도부의 반응은 신속했고 단호했다. 4월 30일 모스크바 방송은 사무국을 폐쇄하고 그 기능을 베를린 서기국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한다. 그 결정은 협의나 호소의 기회 없이 내려진 것이었다. 이 조치로 서구 코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코뮤니스트 센터를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잃게 된다.

     

    레닌 대 판네쿡-호르터

     

     레닌의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는 코민테른에 배척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서구에서 레닌(주의)의 성격과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판네쿡과 사람들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은 세계혁명, 비타협적 계급투쟁, 전투적 반-의회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의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반대를 예견했다 할지라도) 좌익공산주의가 세계혁명의 옹호자인 레닌과 확고한 제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계속 확신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 전술에 영향을 미치려는 희망으로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이라는 제목을 단 문건을 작성했고, 그것은 즉각 좌익공산주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판네쿡은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 맞는 혁명개념을 마련하기 위해 광범위한 이론, 경제, 사회, 역사적인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판네쿡은 혁명적 실천의 동유럽적 형태와 서유럽적 형태를 구분했다. 서유럽에서는 오랜 부르주아 문명화가 대중들의 사고와 감성에 철저히 침투했는데, 독일 혁명에서 그것은 특히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판네쿡은 서유럽에서 주된 전술적 문제는 혁명적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미성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공리처럼 여겼다. 그는 서유럽의 낮은 수준의 노동계급 의식, 늦은 혁명적 발전에 따라 2가지 갈등하는 전술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에 대한 강조는 그가 사회민주주의의 대중정당, 러시아 볼셰비즘의 엘리트주의적 전위 양자를 모두 거부하게 한다. 판네쿡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 간의 차이는 깊고 실질적인 이데올로기적 분기를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러시아 혁명이 갖는 세계-변형의 중요성을 믿었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대중의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발화시켰고, 그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유럽 혁명과 서구 자본에 대한 아시아의 대규모 반란을 가져오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같은 평가는 러시아 혁명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덜 강조하면서 민족해방운동으로서 그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판네쿡이 이 같은 주장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레닌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준비하면서 좌익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자신의 전략적 분석을 발전시킨다. 즉,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이것은 레닌 저작 중 아마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묘사되듯, 즉각 코뮤니스트 전략, 전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레닌은 서유럽에서 늦은 혁명 진척에 따라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을 향한 단축 시기가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장기적 싸움이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코뮤니스트는 가장 반동적 제도라 할지라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들어가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와 의회 속으로’는 좌익공산주의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한 레닌의 처방이었다.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지도자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레닌은 대중 조직에 침투하는 예외적인 수단들을 요구한다.

    레닌은 논쟁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 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하고, 특히 절대적 집중화와 강력한 규율이 부르주아를 이길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레닌은 신랄한 언어를 동원,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의 전술적 책략의 부재를 비난하는데, 특히 판네쿡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견실한, 그리고 특별히 우둔한” 것으로 지적한다. 레닌은 당 조직화의 전위모델을 좌파가 부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이해 앞에 프롤레타리아를 완전히 무장 해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독일 입장은 불법이 불필요했던 국가에서 태어난 불행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말한 뒤, 그들은 ‘대중들의 정당이 아닌 동아리, 즉, 지식인주의의 가장 나쁜 측면을 닮은 지식인, 소수 노동자의 그룹’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으로 결론짓는다.

     

    이에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에 실은 짧은 후기를 통해 레닌의 주장과 비난에 대응한다. 그는 레닌 정식은 독창성,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것이 레닌이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과제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또 다른 주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레닌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전통적인 의회주의, 노조운동 전술에 대한 레닌의 방어는 민족국가로서 러시아의 역할, 그리고 제3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사명감 사이의 모순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그 모순을 분석하면서 경제 재개발에 대한 러시아의 절박했던 필요성을 지적한다. 판네쿡은 러시아의 정치적 요구가 서유럽에서 코뮤니스트 전술을 결정하는 데 핵심 요소로 되고, 코민테른은 서유럽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러시아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러시아가 잠재적으로 혁명에 대한 반동적 방해물이 되고, 반혁명의 승리를 가져올 힘들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한다. 판네쿡은 이처럼 러시아 혁명의 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첫 번째 코뮤니스트 이론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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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호르터, 1864~1927>

     

    레닌에 답변하는 주된 과업은 호르터에게 남겨진다. (그의 글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호르터는 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중 레닌과 가장 긴밀한 관계라서 논쟁에 끼어들 것 같지 않았던 인물이다. (호르터는 「국가와 혁명」 등 레닌 저작을 번역, 자신의 저작 「세계혁명」을 레닌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호르터도 서유럽, 동유럽 코뮤니스트의 차이점을 축으로 주장을 전개한다. (“당신의 전술은 러시아에서 뛰어난 것이었고,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서유럽에는 무엇을 입증했는가?”) 그는 두 지역의 농업 부분의 차별성을 추적했는데, 동유럽 농민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반면, 서유럽 농민은 노동자를 계급의 적으로 인식하는 개별화된 소부르주아 기업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노동자들은 참호에 둘러싸인 부르주아에 홀로 맞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했다. 호르터는 서유럽 전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을 특징했던 같은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격하게 주장한다.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하여, 호르터는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자 전술을 거듭 주장한다. 호르터의 분석은 판네쿡과 유사하지만, 다른 몇 가지 점도 존재하는데, 판네쿡은 서유럽 혁명의 늦은 진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 때문이라고 보았고, 호르터는 프롤레타이아의 주요 걸림돌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리적 힘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호르터는 (레닌, 코민테른 주장과는 다른 것이지만) 확고한 맑스주의 원칙, 당의 중앙집중화, “철의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로 이어짐>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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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1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판네쿡과 네덜란드 사회주의 운동

     

     

     판네쿡(Pannekoek, Antonie - 독일식 표현으로는 Anton)은 1873년 1월 2일 네덜란드의 가난한 농업지역인 바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요한스 판네쿡과 빌헬미아 도로시아 바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골에서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당시의 다른 맑스주의 지식인처럼 중하층 계급에서 상층지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힘든 노동과 독학을 통해 농사꾼에서 작은 주물공장의 경영인이 되었고, 자유사상가이자 자유당의 지지자였으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네덜란드 중간계급의 젊은이처럼 판네쿡도 특별히 반항적인 본성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의 청년기는 깊이 기억할만한 중요한 투쟁도 없었다.

     

     판네쿡이 정치의식 성숙에는 그가 자란 네덜란드라는 배경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은 독립적이고, 대중에 기반을 두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중요한 노동계급 운동이 상대적으로 없었던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상황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문화를 형성한 것은 네덜란드 자체의 경제적인 구조였는데, 노동집약적인 농업이 경제적인 주요한 영역으로 남아있었고, 서유럽 나머지 국가보다 산업화가 상대적으로 느렸다. 이러한 구조적인 특성으로 네덜란드 노동계급은 수동적이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산업화가 다가오고 있던 시기에, 경제적 법적 시스템의 낙후성은 광범위한 빈곤 계급을 형성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빈곤에 대하여 수동적인 온정주의의 수혜자가 되어가면서 네덜란드 노동계급은 그들의 비참함에 대해 산업자본주의 등장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였고, 혁명적 저항을 고무시킬지도 모르는 물질적 환경에 대해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판네쿡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1902년에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3년에 음악가이며, 문학교사였던 요한나 나사수 누데바이어와 결혼했다. 1906년까지 그는 라이덴(Leiden) 천문대에 근무했고 그 이후에는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강의했다. 당시 그의 유일한 정치활동은 자유당과 학생토론그룹의 대표 활동이었다. 그는 학교 선생으로부터 좌파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대부분 자신의 지적인 모험과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적 확신에 도달한다. 맑스주의와의 첫 번째 만남은 1899년에 자유당 지역 클럽에서였는데, 에드워드 벨라미의 ‘평등’이라는 책을 접하고 그의 사상에 전반적인 전환을 맞는다. 1899년 그는 사회주의적 고전들을 소화해 내는데, 이론적 능력이 뛰어나 맑스주의 경제학 연구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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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수 누데바이어와 판네쿡, 1905년>

    그는 지적인 경로로 사회주의에 다가섰지만, 이론적 활동에만 자신을 국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1899년부터 1906년 독일로 오기까지 라이덴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몰입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사회민주주의의 일상생활에 개입하고 있는 다른 노동계급 전투파와 다르지 않았다. 천문학에 전념했지만,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당(SDAP)의 모든 활동에 참여했고 작은 라이덴 지부의 움직이는 힘이었다. 1900년 2월, 라이덴 사회민주노동당(SDAP)은 그가 의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지역 노동계급을 정치, 경제, 사회적 세력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을 확대했다. 판네쿡의 강의는 지역 노동계급의 문화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당의 노력중의 하나였다. 그는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지역문화센터와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지역 노동계급을 급진하는 데는 실패했다.

     

     네덜란드의 사회주의 운동은 낭만주의에서 맑스주의로 발전하는데, 1880년대에 ‘타흐티허르(tachtigers)’ 그룹에서 시작된다. ‘타흐티허르’는 초기 낭만주의, 개인주의에 기초해서 네덜란드 사회를 비판했지만, 1890년 이후 문학동아리에서 맑스주의 운동의 출현 기반을 닦는다. 1889년 맑시즘과 문학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고 논쟁은 사회주의, 개인주의의 장점에 대한 논쟁으로 변형되어 ‘타흐티허르’는 2개의 적대적 진영(개인주의·신비주의 대 맑스주의)으로 양분된다. 1890년대 초 젊은 맑스주의자 가운데 탁월한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와 롤랜드 홀스트(Henriette Roland Holst)가 등장한다. 호르터는 네덜란드 맑스주의의 발전에서 판네쿡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명은 서로 친밀한 보완관계를 형성한다. 홀스트도 호르터와 지적 친분이 있어 사회주의자가 되는데, 1897년 호르터와 홀스트가 먼저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판네쿡도 1899년 가입한다. 이들은 모두 당 이론지 ‘신시대(De Nieuwe Tijd. : 네덜란드판 신시대)’ 참가하여 활동한다. 초기 신시대 그룹은 독일 맑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고, 특히 카우츠키 저작에 의존했다. 그러나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 독자적인 전망을 갖게 되는데, 판네쿡은 철학과 과학을 맡았다. 신시대는 곧 독일 카우츠키의 신시대(Die neue zeit)와 경쟁할 정도로 발전했고, 그 영향도 네덜란드 이외 지역으로 확장된다.

     

     1908년 네덜란드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중파업이 일어난다. 1903년 이전의 사회민주노동당 내 분파투쟁은 특정한 정책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었으나 1903년 대중파업 물결에 따라 혁명전략에 대한 논쟁으로 진입한다. 이는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가 정치적 사고를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며, 이때부터 판네쿡은 좌파 저항의 주 대변인이 된다. 이때 당내 분파투쟁의 전선은 당의 성격, 지도력, 전략, 혁명적 원칙에의 헌신 등으로 명확해진다. 1903년 대중파업의 실패 직후 그는 패배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이 작동한 증거였다고 확신한다. 판네쿡은 맑스주의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문제는 특히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이념투쟁의 중요성에 있다고 느꼈다. 그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을 위한 이론적 작업과 교육을 전담하기 위해 독일로 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가 독일에 들어간 데에는 카우츠키와의 교류와 정치적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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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판네쿡 1908년>

     

    독일에서의 활동과 좌익반대파

     

     독일에 오래 머무는 동안(1906∼14년) 판네쿡은 ‘좌익반대파’의 이론가로서 빛나는 역할을 계속했고, 이 그룹의 경험은 판네쿡 사상의 본질적인 준거점이 된다. 그는 독일에 있는 동안에도 네덜란드 좌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전파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함에 따라 1907년 10월 19일 트리뷴지(Tribune)를 창간한다. 1909년 2월 21일 드벤터(Deventer) 당 대회 일주일 후, 트리뷴지의 지지자 200명은 암스테르담에 모여 만장일치로 새로운 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한다. 1909년 2월 21일 창당대회를 연 것은 맑스가 사망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고,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하여 혁명적 맑스주의 활동가 당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네덜란드 좌파가 서유럽의 다른 사회주의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계기이다.

     

     1910년까지 판네쿡의 정치적 입장은 카우츠키, 베벨, 플레하노프 같은 사상가들이 정의한 제2 인터네셔널의 맑스주의와 비교적 일치했다. 하지만, 1903, 1905, 1908년의 역사적 사건들과 국제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적 분화과정에 관한 지적 탐구와 이론적 성찰은 1910년 이후 그를 새로운 혁명 전술의 틀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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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카우츠키 포함), 1907년>

     

    1910~1914년은 판네쿡에게 독일 사회민주주의 밑바닥에서 강력한 실천 활동을 한 특별한 시기이다. 즉, 1903년 이래 그의 사상에서 성숙해 왔던 새로운 통찰력을 확신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판네쿡은 당의 지도부나 관료에 한정되어 만났기에 점점 운동의 적극적 삶으로부터 고립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일 사민주의의 지도력이 당의 핵심적인 부분과 완전히 동떨어진 ‘그들 자신의 이해 집단’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10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판네쿡은 이 논쟁의 주요 논객으로 참여했다. 카우츠키는 의회 전술로의 회귀를 방어했는데, 대중의 분노는 대중파업 같은 ‘극단적 경로’로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대신 ‘지구전 전략’을 주창했다. 그는 당의 진정한 과업은 2년 남은 의회선거에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 선거에서의 승리는 최종적인 ‘전복의 전략’의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승리를 위해 당은 미숙한 대중파업의 모든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조직을 활용하는‘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요청으로 1910년 4월, 논쟁에 참여하면서 판네쿡은 그녀의 입장을 방어하는 일련의 글을 썼다. 그는 운동이 직면한 현실 쟁점은 대중투쟁의 의지와 그 의지에 대한 지도부의 무능력 사이의 모순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카우츠키의  ‘지구전 전략’에 반대하는 판네쿡은 대중운동의 강화를 통한 자본가 국가의 기초를 궁극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공격적 전략의 필요성을 재강조했다.

     

     1910년 대중파업 논쟁이 마무리되면서 사회민주당(SPD)은 세 가지 경향으로 분화된다. 수정주의, 수정주의로 움직이는 이른바 맑스주의 중앙파, 그리고 판네쿡, 로자 룩셈부르크로 대표되는 새로운 ‘혁명 좌파’가 그것이다. 그 이전에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사이 분화가 추상적 이론문제에 국한되었다면, 새로운 분화는 혁명 전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1910년 10월 대중행동에 대한 연설을 위해 슈투트가르트에 갔을 때 판네쿡의 새로운 주장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국가권력의 소유를 위한 자본가 계급과의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국가권력 그 자체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신시대에 실린 연재 글 ‘대중에 의한 행동’에서 급진 좌파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격을 시작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판네쿡이 쓴 글 ‘대중행동과 혁명’으로 둘 사이의 논쟁은 1912년 7월 다시 시작됐다. 판네쿡은 의회 활동을 넘어서는 대중행동은 거리의 군중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사실 그것은 ‘조직화한 노동자에 의한 구체적 개입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했다. 대중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솟아나는 힘의 지표이며 제국주의로 알려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전략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공격적 성격이 전제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자본주의의 권력 도구에 대한 직접적 공격으로만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레닌이「국가와 혁명」의 주요부분에 판네쿡과 카우츠키의 논쟁을 언급하면서 그를 고무시켰다. 레닌은 <카우츠키와 판네쿡의 논쟁> 끝부분에 "우리는 기회주의자들과 단호히 결별할 것이며, 모든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 관계의 변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해,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파괴를 위해, 코뮨형의 민주공화제나 노동자병사대의원 소비에트 공화제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투쟁해나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의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와의 결별은 1910년 봄 독일사회민주당 지방 학교에서의 조직과 교육을 위해 브레멘으로 옮기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베를린 시절과 대조적으로 판네쿡은 당에 삶을 몰입했다. 브레멘 사회민주주의 조직 내에서의 4년은 그의 사상을 갈고 닦는데 풍부한 기초를 제공했으며, 그의 경력에서 가장 성과를 남긴 시기였다. 브레멘 좌파가 ‘사회민주당 극좌파의 가장 훌륭하게 닻을 내린 집단’으로 떠오른 것은 판네쿡의 조직적, 이념적 작업의 결과였다. 1910년 봄 대중동원과 그들이 독일사회민주주의에서 불러일으킨 논쟁은 판네쿡의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이후 판네쿡은 이전의 저술에서 묵시적이었던 기본개념에 대해 명확한 형식을 부여했다. 대중의 창조적 혁명 에너지에 대한 믿음은 1910년 이후 그의 전략적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의회에서 의회 밖 행동으로 투쟁 영역을 옮긴 판네쿡은 ‘대중행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모호한 표현을 전면적 표어와 통합된 혁명 전략으로 전환했다. 대중행동을 ‘대표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조직화한 노동계급의 의회 밖 정치행위’로 정의하면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투쟁 형식을 하나의 전술이나 일련의 전술로 보기보다는 계급, 권력 도구 그리고 정치 행동 사이의 새로운 상호작용에 기초 한 혁명 활동을 향한 총체적 지향성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요소들의 통일은 결정적인 권력투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축적된 반란의 욕구, 권력 의지, 그리고 경제적 불만을 가진 대중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개념의 주요가정은 ‘대중행동’으로 부르는 전투적 행위 복합체는 유럽자본주의 내의 새로운 발전의 산물이자 증상이라는 것이다. 판네쿡에 있어서 대중행동은 제국주의라는 지배계급 공격에 대응하는 유일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방어적이며, 그것이 직접적 혁명투쟁의 기제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힘과 자신감의 표시하는 점에서 공세적이다. 생활수준의 저하,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 그리고 국가 내에서의 권력투쟁에 위협받는 노동계급은 의회투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중간 매개체의 개입 없는 직접 경로로 자신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찜머발트 좌파에서의 레닌과 판네쿡

     

     1914년 8월 이후 판네쿡의 정치활동은 국제사회주의운동 내의 좌파의 재조직화의 폭넓은 과정과 직접 연결되었다. 이러한 재조직화의 과정은 레닌과 볼셰비키로부터 주로 자극을 받았고 ‘찜머발트 운동’으로 알려진 조직적 기반을 갖게 된다. 좌파 재조직화에 대한 레닌의 첫 번째 시도는 1914년 9월 27일 스위스 루가노에서 열린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회주의자 회의였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 간의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간의 내전으로 돌리자는 9월 5일 테제를 제출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영향을 미친 최초의 중요한 회의는 1915년 3월 26~28에 베른에서 열린 ‘전쟁반대 사회주의 여성대회’였고 2주일 후 사회주의 청년 대회가 뒤따랐다. 이 두 대회에서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촉매로써 전쟁을 이용하자는 혁명가의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종식하자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이었다.

     

     1915년 9월 5-8일에 스위스 찜머발트에서 열린 국제회의는 다수파와 소수파 사회주의자로 분리되었고, 반전 소수파 내에서도 독특한 좌파조류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레닌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직접 혁명투쟁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결성을 주장했다. 레닌의 안건이 3분의 1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지만, 이것은 좌파에 의한 작은 승리로 간주하였다. 이를 계기로 향후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베른에 <국제 사회주의자 위원회>를 설립했는데, 레닌은 이를 새로운 인터내셔널 사무국으로 보았다. 1915년 봄, 이 사무국은 라덱의 주도 아래 좌파의 국제 출판물을 내는 일을 하는데 판네쿡은 카우츠키의 「새시대」에 대항하는 이론지로서의 출판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닌과 협의한 후 라덱은 독일어판을 네덜란드에서 출간하자고 판네쿡과 홀스트에게 10월에 제안했고 두 사람을 공동 편집인으로 추천했다. 최초 편집위원은 라덱, 판네쿡, 홀스트, 레닌, 트로츠키, 메링, 보카르트, 그림, 제트킨, 프라니아이였다. 레닌에게 판네쿡의 도움은 매우 중요했다. 판네쿡과 라덱이 생각하기에 그 출판물의 주요 초점은 전쟁으로부터 파생되는 전략ㆍ전술 문제, 제2 인터내셔널 몰락의 원인, 제국주의의 본질이었다.

     

     새로운 출판물을 편집하는데 판네쿡이 기꺼이 나선 것은 그 스스로 혁명적 재조직화의 개념을 펼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찜머발트 좌파모임에서 레닌과 밀접하게 동맹을 맺었지만, 그의 전략적 분석은 몇 가지 주요 지점에서 레닌과 달랐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그는 기존하는 사회주의운동의 분열과 전통적 전술보다는 정치의식과 대중행동에 근거한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적인 관심사라고 명확히 했다. 사회주의 좌파의 재조직화는 모든 국가의 지배계급에 대한 끊임없는 반대에 기초한 ‘행동의 국제주의’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국제운동의 시도는 ‘지도자의 인터내셔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1920년 레닌과의 논쟁의 핵심이 된다.

     

     국제이론지는 1916년 1월 「Vorbote」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판네쿡은 출간의 주요 목표를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사회민주주의의 전면적 분리의 전제로서 ‘낡은 수정주의와 급진사회주의의 부적절성에 대한 냉혹한 분석’이 우선 포함돼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판네쿡의 서문이 나가자 레닌은 판네쿡이 이론지의 성격을 바꾸고 찜머발트 좌파 대표의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난하고 「Vorbote」지가 판네쿡과 홀스트의 개인적 기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는 레닌과 라덱 사이의 더 깊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당면한 쟁점은 레닌이 수용하고 라덱이 거부한 민족자결권이었다. 레닌은 판네쿡과 라덱이 카우츠키에 대한 투쟁의 접근방식이 부정확하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비판은 트로츠키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러시아와 네덜란드의 극단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또한 노동자를 조직하고 좌파의 폭넓은 운동을 세우기 위하여 출판물을 이용하는 것은 ‘순수한 레닌주의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트로츠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찜머발트 선언을 썼지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를 요구하는 레닌의 국제주의자 입장을 지지하는 좌파에 함께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Vorbote」는 2호로 종간되었다. 하지만 「Vorbote」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찜머발트 좌파는 깨질 수 없는 계기를 마련했다. 1916년 4월 스위스 키엔탈에서 두 번째 회의가 열렸고 좌파가 무정형의 경향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찜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들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 인터내셔널과 찜머발트의 좌파와 제3 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찜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찜머발트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찜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찜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찜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찜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2부로 이어짐>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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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남궁 원

     

     <편집자 주> 이 글은 독일혁명(1918-1923) 100주년 맞아 교훈을 얻고자 남궁원 동지가 [코뮤니스트 창간호]에 발표한 글을 보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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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식 - 세계혁명 분기점, 독일 혁명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혁명으로 발전하느냐는 서유럽, 특히 독일 혁명(1918-1923)에 달려있었다. 특히 레닌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수행하면서,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를 돕지 않는다면, 러시아의‘일국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 패배 이후 스탈린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은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밀어붙였다.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레닌과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심각한 대립을 빚고 있었다. 레닌은 1920년 코뮤니스트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소집에 맞춰,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 팸플릿을 작성하면서 독일 급진 좌파를 비판한 바 있다. 이 문건은 레닌이 각국의 노동운동 및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좌익 편향을 비판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레닌이 지칭한 좌익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일 공산당 내의 급진좌파였기 때문이다. 레닌이 볼 때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리더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레닌의 이 문건은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한 것이며, 즉각적으로 전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략, 전술의 방침이 되었다.

     

    이에 독일 급진 좌파를 대표하는 안톤 판네쿡과 헤르만 호르터는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하면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하고, 노조와 의회 활동’을 권고하는 레닌에 강력히 반대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한다. 이들은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 전술을 거듭 주장한다. 또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한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차르의 후진 러시아와 선진 서유럽 상황에서 혁명의 전략과 전술이 과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또한,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좌익공산주의 정치조직 흐름인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 Bund),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대립은 무엇이었고,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어떠한 혁명관과 조직관을 갖고 활동했는가? 독일 혁명 과정에서 코민테른 지도부와 코뮤니스트좌파 사이의 논쟁은 무엇이었나? 이 글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흐름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로자 룩셈부르크, 헤르만 호르터, 안톤 판네쿡, 오토 룰레, 칼 코르쉬, 폴 매틱 등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의 자세한 이론적 쟁점은 생략한다.

     

     

    평의회를 둘러싼 논쟁과 분화: 독일코뮤니스트당 창당

     

     당시 독일의 주요 정치세력은 사민당과 독립사민당, 스파르타쿠스단, 브레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의 연립정부 구성이란 안정 속에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국민의회 소집을 뜻한다. 여기서 레테(평의회)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혁명 발발 직후 카우츠키가 이끄는 독립사민당 지도부는 레테(평의회)체제냐 국민의회체제냐 사이에서, ‘국민의회와 레테체제’ 입장을 취한다. 국민의회 소집은 곧 부르주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1918년 12월에 열린 노동자병사 레테(평의회) 전국총회는 국민의회 결정을 내린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 내에서 패배하고 당을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데에 한계를 느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을 탈퇴한다. 현장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평의회 활동을 전개한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그룹은 급진좌파의 통합을 요구받고 있었다. IKD그룹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적 노조그룹과 통합 대신에 IKD그룹과 함께 1918년 12월30일 독일코뮤니스트당을 창당한다.

     

    독일코뮤니스트의 강령은 노동계급의 규칙을 확립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밟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일련의 실천적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첫째, 경찰과 군 간부의 무장해제,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모든 무기와 화약의 접수, 노동자 군대의 창설.

    둘째, 군대 통솔구조의 해소, 군사평의회의 일반화.

    셋째, 혁명 법정의 창설.

    넷째, 전국의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에 의해 선출된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 중앙의 회 설립, 모든 옛 시의회 및 국회의 해산.

    다섯째, 6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

    여섯째, 모든 인민의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의 몰수.

    일곱째, 토지, 은행, 광산, 그리고 주요 산업 및 상점 기업의 몰수.

    여덟째, 공장과 기타 작업장의 관리를 과업으로 하는 기업평의회 건설이다.

     

    그러나 독일코뮤니스트당은 창당 직후 내부논쟁에 휩싸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이 국민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말로만 투쟁하는 것은 아니라, 국민의회에 들어가 부르주아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에 대해 급진좌파 대표로 나온 오토룰레(Otto Rühle)는 국민의회 연단 대신에 거리연단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혁명세력은 14일 이내에 곧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낙관적인 혁명 전략을 피력했다. 국민의회를 둘러싼 당 대회의 격렬한 논란 끝에 62:23으로 선거불참이 결정됐다. 이 결정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판단 차이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의회선거 참여를 주장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한계가 나타난 것이다. 창당대회 당 조직 문제는 중앙집권적 방식이 아니라 연방제적 원칙을 결정했다.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은 베를린 1월 봉기, 루르 광산지역, 중부지역 노동자총파업과 사회화운동 등 혁명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를 감행하다 정부군에 의해 무력진압 되었다. 독일 노동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당원은 20만 명이나 되었다. 1920년 초 우익의 카프반란이 시도되었을 때, 코뮤니스트좌파 활동가는 루르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사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월 봉기 기간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되고,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조직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당내 급진좌파를 겨냥한 내부투쟁에 돌입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은 2차 전당대회에 ‘코뮤니즘의 근본원칙과 전술에 관한 기본원칙’을 채택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당을 혁명투쟁의 지도자로 규정하고, 당의 볼셰비키적 중앙집권적 조직형태를 결정한다. 이른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화’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활동방침을 지지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과 노동조합은 의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틀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적합한 노동운동의 조직형태로 자리매김 된다.

     

     

     

    코민테른 지도부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대립 :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판네쿡뿐만 아니라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의 좌파들은 대부분 열렬한 레닌주의자였고,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원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볼셰비키의 강점을 조직구조에서 보지 않고 공격적 전투성과 맑스주의 원칙의 확고한 헌신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15년 찜머발트 좌파에서 드러난 레닌과 판네쿡의 차이는 한 마디로 국제주의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코민테른이 결성되고 서유럽의 공격적 맑스주의자들은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만든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브레멘(독일) 좌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열광적 주창자였지만,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승리로 인해 코민테른은 러시아 주도하에 결성되었다고 보았다.

     

    1920년 2월 3-6일 암스테르담 국제대회에서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서유럽 인터내셔널로서의 역할로 규정하고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으로서 노동자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코민테른 지도부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전망 차이의 첫 번째 표시였다. 암스테르담 서기국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을 채택했고, 1920년 4월 30일 모스크바 지도부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폐쇄하고 베를린 서기에게 할당했다고 방송했다.

     

    1919년 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독일코뮤니스트당으로부터 축출된, 판네쿡, 호르터, 오토 룰레 등 독일‘코뮤니스트좌파는 (투쟁 정신과 영향력에서 자신들의 ‘관료적’ 경쟁자를 순식간에 넘어선) 새로운 당,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당시 당원은 4만 명이었다.

     

    KAPD 강령을 검토하면 맑스주의의 명료성을 볼 수 있다.

    첫째,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면서, 강령은 세계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환경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혁명과의 연대와 세계적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셋째,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반대는 도덕주의와 형식에의 집착이 아니라 의회와 노조가 계급의식에 봉사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넷째, 공장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주창은 소수의 혁명가가 꿈꾸는 가공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계급 운동의 구체적 조직적 표현이다.

    다섯째, 반(反)당의 입장과 달리, 코뮤니스트 투쟁의 핵으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여섯째,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주의 개념을 방어하고 있다.

     

    1920년 4월 KAPD의 창립은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 단계를 가져왔다. KAPD는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이유에 대해 존중했으며, 창립 후 KAPD는 야펠(Appel)이 이끄는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다.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 나왔다.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KAPD 구성원에게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건넨다. (울프하임, 라우펜베르그, 오토 룰레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KAPD가 2차 대회에 참가할 것). 야펠 대표단이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룰레의 2차 KAPD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오토룰레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 7월 18일 극적인 성명발표를 한다. KAPD는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

     

    KAPD가 2차 대회에 불참하였지만, 대회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 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2차 대회 직후 KAPD내에는 제3 인터내셔널과의 장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오토 룰레가 취했던 소수 입장은 코민테른과의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오토 룰레는 2차 대회에서 돌연한 이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받았다. KAPD 다수의 감정은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던 호르터가 대변했다. 호르터는 코민테른 전략의 오류에 대해 레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KAPD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부와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호르터를 만났지만, 그의 설득, 충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보다 직선적으로,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한 호르터의 방어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다. 이 같은 대화의 결과는, KAPD를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협의적인 지위를 갖는 “동조자 당”으로 KAPD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같은 조정이 많은 단서조항을 가지고 있었지만, KAPD는 제3 인터내셔널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KAPD는 1921년 5월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기 위한 과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것은 야펠(Appel), 슈바브(Schwab), 몌이에르(Meyer)로 구성된 또 다른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다가오는 3차 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단 가운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 국가의 좌파경향의 대표단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KAPD는 대회에서 응집된 반대파 분파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 집행부는 KAPD에 KPD와 통합, 아니면 제명이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KAPD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9월 공식적으로 코민테른에서 방출된다.

    호르터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과 함께 본격적인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전개한다. 호르터는 당의 주요 목표는“평의회 사고”를 선전하고, 평의회가 나타나면 당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르터가 러시아와 서유럽의 정치 경제적 차이를 강조한다면, 판네쿡은 러시아와 달리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사고에 미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영향이 크다고 판단한다. 반면 레닌이 쓴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무질서 (좌익소아병은 잘못된 번역)>에서는 이 부분(러시아와 유럽 차이에 대한 좌익공산주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보편성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 3월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을 좌익공산주의의 교과서로 제출했다. 판네쿡은 여기서“의회의 활동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으로 분할되고, 진정한 국제주의적 개입이 불가능해지며 국제자본에 대항하는 대중 행동에 있어서 민족분할로 나아간다.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조합은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와 같이 동일한 발전 경향을 갖는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그들 속에는 관료 계급이 생기고, 그 관료주의는 자금, 언론, 경영 등 모든 조직의 자원을 통제한다. 혁명당의 기능은 앞장서서 명확한 이해를 선전하고 대중이 올바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계획, 슬로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네쿡은 또한 서유럽의 전술선택이 생디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차별화했다. 즉 생디칼리즘의 목적은 조합관료주의와 옛날 국가기구의 급진 부분에 기반을 둔 정부를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국가를 존속시키게 하며, 자본주의 지배의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구별 못 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레닌의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라는 전술의 방어는 국민국가로서의 소련의 역할과 코민테른의 역사적 사명 사이의 모순에 있다고 보고 결국 소련이 서유럽정치에 개입하는 도구로 코민테른을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이념적 몰입, 공장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통제를 생산력 증진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도구로만 협소하게 이해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을 국가 행정기구에 통합시킴으로써 혁명 후 혁명 사회의 기초기관으로 자리 잡아야 할 노동자통제는 당과 국가에 의해 억압되어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는 대량생산체제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집착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로 파악했다.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처럼)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21년 7월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판네쿡은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유럽 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유럽과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적대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KAPD가 축출된 이후 보다 많이 나타났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버려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한편, 러시아를 방문한 오토 룰레는 소련 사회가“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소련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이후 “노동자평의회 외에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기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평의회주의자로 흘렀다.

     

    오토 룰레는 당과 독일노동자총연합의 단일조직을 주장하면서 독일노동자총연합-단일조직 (AAUD-E)를 창설한다. 오토 륄레는 일반노조로 재조직된 혁명적인 공장조직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며, 혁명적 평의회와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를 주장1)하였다.

    1920년 이후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이후 마침내 볼셰비키와 관계를 끊었다. 유럽 내에서, 1923년 이후 계급 갈등의 상대적 안정화는 코뮤니스트좌파 경향 추종자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고립되면서, 남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천천히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립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 역할 테제 (축약)

     

    KAPD(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당 역할 테제는 1921년 7월에 작성됐으며, KAPD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안에서도 토론되었다.

     

    1.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지구적 부(富)처분을 노동 대중의 손에 넣게 하는 것이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따라서 독립된 착취, 지배계급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정치 권력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사회 경제의 자유로움을 포함하며, 또한 세계적 수준에서 제기하는 과제다.

     

    2.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종식하고, 이 생산을 인수해서 노동계급의 수중에 넣고, (부르주아) 정치 제도들을 분쇄하고, 계급 분할을 모두 없애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개별적 순간들을 정확히 예견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적 과정에서 정치 폭력의 역할이 취하는 행동은 여전히 어떤 순간에서는 결정적이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동시에 정치 경제적 과정이다. 정치 경제적 과정도 아닌 것은 일국적 수준에서 풀 수도 있으나, 세계 코뮨 건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파괴할 때까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한 지역은, 가능한 반(反)혁명의 정치 폭력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여전히 정치폭력을 필요로 한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한 부분을 위해서 정치 폭력의 필요성을 만드는 이러한 근거들은, 혁명의 내부 발달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이유가 있다. 정치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확실히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경제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앞서 언급한 결정적 순간이 없고, 프롤레타리아트 일부분이 경제 방향을 떠맡고, 이윤 동기를 없애고, 필요의 경제로 대체하는 오랜 작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데, 이 기간에 부르주아지는 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을 방어할 목적으로 권력을 다시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발전된 민주적 이데올로기 국가들은 - 다시 말해, 발전된 산업 국가들- 민주적 슬로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잘못 이끌기 위한 방안을 찾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강력하고 확고한 정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본질적인데, 이 기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5. 혁명의 정치적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 권력을 유지할 필요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6. 정치적 노동자 평의회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행정부의 모든 형태를 수용하는 역사적 결정이다. 항상 노동자 평의회는 계급투쟁의 개별적 요소를 통과하면서 완벽한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7. 가장 의식적이고 준비된 프롤레타리아 투사로 함께 분류되는 역사적으로 확고한 조직 형태는 당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코뮤니즘이기 때문에, 이 당은 자신의 강령과 이데올로기로서만 코뮤니스트 당이 가능하다. 코뮤니스트 당은 강령적 기초를 철저하게 해결해야 하며, 통일된 의지로서, 전체적으로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혁명의 머리와 무기가 되어야 한다.

     

    8. 코뮤니스트 당의 주요 과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혼란과 변동 사이에서, 코뮤니스트 당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 모든 상황들에서 대중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권력 장악 이전 정치투쟁의 모든 이슈들에서, 개량과 혁명 사이에 차이들을 명확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적 개량주의 - 어떤 가면을 쓰고 선택하든지 - 는 오늘날 혁명에 큰 장애물이며, 지배계급의 마지막 희망이다.

     

    9. 따라서 코뮤니스트 당은 자신의 강령에서, 언론에서, 전술과 활동에서, 동일한 결정으로 개량주의와 기회주의 모든 현상에 가차 없이 반대해야 한다.

     

    10. 전체뿐만 아니라 개별적 순간에서도 혁명은 변증법적 과정이다. 혁명 과정에서 대중들은 불가피하게 동요를 겪는다. 가장 의식 있는 요소들로 구성된 조직인 코뮤니스트 당은 이러한 동요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슬로건을 명확하고 원칙적인 본질을 통해서, 말과 행동의 통일, 투쟁의 책임자라는 위치에서, 예측의 올바름을 통해서, 코뮤니스트 당은 프롤레타리아가 각각의 동요를 빠르고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의 전체 활동을 통해서, 심지어 대중의 반대하는 순간적인 비용을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발달시켜야 한다. 혁명적 투쟁 과정에서, 오직 이러한 의지를 가진 당이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광범위한 사람들의 혁명적 교육을 달성할 수 있다.

     

    11. 코뮤니스트 당은 대중과 접촉을 잃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칠 줄 모르는 선전의 명백한 의무는 제쳐놓더라도, 경제적 필요로 야기되는 노동자 운동의 개입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당이라는 이름하에 개량주의적 요구가 떠오르는 기회주의 정신을 강화해서는 안 된다.

     

    15. 혁명의 정치 승리 이후 당의 역할은 국제 상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발달에 의존한다.

     1923.JPG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강령2) (*공장조직과 정치조직 부분)

     

    공장조직은 KAPD와 긴밀히 결합하여 그 임무를 수행한다.

     

    정치조직은 당 강령의 기초위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와 함께할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과 당의 관계는 공장조직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 조직 내에서 KAPD의 일은 투쟁의 기치를 밀고 나갈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혁명 간부는 당의 움직이는 무기가 된다. 나아가 당은 항상 더욱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게 하고 밑으로부터의 독재에 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임무의 둘레가 더 커지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원이 요구된다. 달성해야 하는 것은 승리(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장악)가 계급독재로 끝나고 소수의 당 지도자나 정파의 독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장조직은 이의 보증자이다.

     

    ·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 권력 장악의 단계는 자본주의 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가장 견결한 억압을 요구한다. 그것은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총체를 행사하는 평의회조직을 만듦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공장조직은 공장을 통해 수행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소가 된다. 이는 더 나아가 평의회 경제체제의 기초단위로 변혁되는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은 코뮤니스트 공동체(Gemeinwesen) 건설의 경제적 조건이다. 코뮤니스트 공동체조직의 정치형식은 평의회 체제이다. 공장조직이 개입함으로써 정치 권력은 평의회 지도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 이처럼 KAPD는 최대 혁명 강령의 실천을 위해 투쟁하고 다음에 포함된 구체적 요구를 위해 투쟁한다.

     

    정리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KAPD가 평의회를 선전하는 것은 내용 없고 선동적인 미사여구였다. 왜냐하면 KAPD는 당이었으며, 당은 관료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의 구호인 “ 정치적 노동자평의회를 선출하라!”는 구호 역시 선동적인 속임수이다.

    이 구호의 이면에는 난파한 당에서 사라지는 관료의 권력을 허구적인 평의회의 구명보트라는 안전지대로 옮겨, 관료제의 축복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한 시도 외에는 다른 것이 숨어 있지 않다.

    평의회는 공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당의 성격을 완전히 극복한 그리고 당에 대한 종속을 벗어던지고, 가능한 평의회 체제를 만들어나가면서 구체화하는 조직에 의해서만 준비될 수 있다.

    오늘 날에 이러한 조직은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공장조직, 노동자 총연맹이 그것이다. <평 의 회 - 오토룰레> 중에서

    2) 1920년 5월에 채택한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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