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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1871년 ~ 1919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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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1871년 ~ 1919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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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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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1월 15일 -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로자 룩셈부르크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그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부인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독일의 5월은 아름답다. 시인 하이네가 노래하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5월, 모든 초목이 싹틀 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생 시기였다. 진흙 속에 파묻힌 그의 육체가 운하 위로 떠오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6월 13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가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의 같은 장소에 묻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 앞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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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비극의 종말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만하임 가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으로 리프크네히트를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는 차에 실려 가 틸가르텐 호수 근처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로자 룩셈부르크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의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곳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 사회민주당과 코뮤니스트당,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공산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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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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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로자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인용한 문헌>

    1. Takahashi, Shoichi <로자 룩셈부르크>

    2. ICC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팸플릿]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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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칼 코르쉬 「레닌과 코민테른」

칼 코르쉬  레닌과 코민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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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코르쉬 소개

 

칼 코르쉬는 그람시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코뮤니스트당 안에서 코뮤니스트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아니다 다를까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 자리에서 코르쉬를 초좌파(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다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코뮤니스트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코뮤니스트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즉 실제 혁명운동에서 주어 진다예를 들어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 정립되며부르주아 사회 제도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남궁원, “혁명적 코뮌칼 코르쉬”, 코뮤니스트2, 2013)

 

코르쉬와 레닌주의

 

1920년대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는 동안코르쉬에게 소련과 레닌주의는 주요한 논점이 되었다레닌과 소련에 관한 그의 입장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이라는 복합체의 양가성을 반영하기에 크게 모순적이다개략적으로 코르쉬의 입장은 세 단계로 분류될 수 있는데첫 번째는 레닌주의와 소련에 전심전력하여 집착하는 것으로 두드러지는 열광적인 레닌주의의 시기이다이 입장은 나중에 자신이 편집자로 있는 코뮤니스트 저널인 인터내셔널에 발표한, 1924년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코르쉬가 한 연설인 레닌과 코민테른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코르쉬는 진정한 혁명정치를 위한 토대로서 레닌주의를 전적으로 옹호하고 레닌주의가 일련의 모든 정치적이론적 과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따라서 레닌의 유산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속하여 보존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것과현재 상황에 레닌의 정신을 그것의 이론과 실천 속에서 역사적 현실로서 한층 발전시키는 것은 코민테른 전체의 의무였다.

 

코르쉬는 자신의 이론적이데올로기적 기능 속에서 죽은 레닌을 살아있는 레닌주의자들의 크고 강력한 집합체로써” 대체하는 임무를 제안했다레닌주의를 전유하고 발전시키는 이 기획은 세계역사상 이러한 형태로 당 앞에 제기된 적이 결코 없는 아주 거대한 임무로 서술된다코르쉬의 레닌주의에 대한 온갖 집착의 지표로서레닌주의를 소련 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론으로 역사화시키려고 한 독일코뮤니스트당 이론가인 탈하이머와반면에 레닌주의와 소련의 모델이 세계혁명운동에 대한 일반적 타당성을 담지한다고 본 코르쉬의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르쉬는 치고 올라오는 코뮤니스트적 수정주의의 쇄도에 맞서 방어벽을 요청하면서 결론짓고레닌주의에 대한 총체적 헌신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방법이론전략으로서 옹호한다코르쉬의 철저한 레닌주의의 배경은작센과 튀링엔의 노동자 정부에 대한 폭력 탄압과 뒤이은 코뮤니스트당 불법화 이후 1923년 독일 연합전선의 붕괴였다코르쉬에게 이 경험은 무너져가는 독일 운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더 성공적인 레닌주의 혁명 이론과 전략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의미했다이러한 계획으로새로운 역사적 사건들이 정직하고 헌신적인 혁명가 코르쉬가 자신의 레닌주의를 근본적으로 묻도록 강제하여 결국 레닌주의와 결별하기 전까지코르쉬는 이후 몇 년 동안 헌신적인 레닌주의자가 되었다.

 

레닌 및 소련과 관계맺는 코르쉬의 두 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소련과다음에는 레닌주의 자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발전과 관련된다이 전환의 배경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이 코르쉬를 제명하고 그가 좌익반대파의 선봉으로 이동한 것이다코르쉬는 혁명적 레닌주의 이론과 소련 및 독일코뮤니스트당 내 스탈린주의자들의 점증하는 반혁명적 실천 사이의 모순을 주목했다코르쉬가 표명하는 스탈린주의와 소련 비판의 입장은 코르쉬가 믿기에 순수히 레닌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던 소련과 독일 운동 내 좌익반대파 세력들과의 자기 동일시였다(당시 코르쉬에게 레닌주의적임과 혁명적임은 동의어였다). 그는 레닌주의의 퇴보와 반혁명적 퇴행으로 이어지는 스탈린과 그 동맹자들 속에 구현된 기회주의개량주의 세력들의 승리를 우려했다이 입장은 소련에서의 10년의 계급투쟁이라는 소론에서 명백히 나타난다코르쉬는 양자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라는 교의에 이론적 정식화의 근거를 두는, “러시아 국가의 필요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 사이에 발전하는 모순을 보았다이것은 세계혁명운동이 소련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것과그리하여 자율적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를 의미했다(우리가 상기할 것은처음에 코르쉬는 소련의 이해관계와 세계혁명운동 사이에 어떤 모순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익반대파 세력의 패배와 함께레닌주의는 더 이상 혁명적 실재가 아니라 소련코민테른독일코뮤니스트당의 반혁명적 정책을 정당화에 쓰이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따라서 이제 코르쉬는 레닌 자체를 비판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은좌익반대파 시기의 초기에도 코르쉬가스탈린주의를 레닌주의의 퇴보라고 비판한여전히 신실하게 믿는 레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좌익반대파의 분열 및 패배와 함께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혁명적 레닌주의 세력도 더 이상 없었고그리하여 레닌주의와의 날카로운 결별의 필요만이 남았다.

 

다음 글은 코르쉬가 열광적인 레닌주의자였던 시기, 1924년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코르쉬가 한 연설문이다.

 

<편집자 주>

레닌과 코민테른인터내셔널, 1924.6.2. 이 선집에 로이 제임슨이 Lenin and the Comintern으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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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코민테른

 

 

5차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세계대회 의제의 첫 번째 항목은 레닌과 코민테른레닌주의의 기본 원칙들과 선전이라고 되어 있다이것은 단지 레닌주의 정신에 대한 대회의 헌신만을그리고 진정한 레닌주의 정신 속에서 그들 앞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참가자들의 널리 인지될 수 있는 의지의 선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이것은중유럽과 서유럽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난해 투쟁의 초점에 관여하고 이후 의제에 등장하는 특수한 문제들이의제의 두 번째 항목을 차지하는 경제적 상황의 분석 이전에 처음부터 주의되어야 한다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명백하게도 중유럽서유럽 및 아메리카의 코뮤니스트들의 모든 임무들 가운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현 발전시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레닌이 우리에게 배정한 임무즉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계층의 다수파를 획득하는 것이다더욱이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는 오직 레닌주의 정신 속에서만 진실로 해결될 수 있다다시 말해레닌이 급진주의에 관한 고전적 저술(좌익공산주의유아적 무질서)의 말미에 아주 인상적인 방식으로 러시아 볼셰비키의 역사와 유럽 당의 경험에서 그 유래를 찾았던정확히 “[몇 가지]결론의 정신 속에서다이른바 공동전선 전술이 있은 지 4년 후그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레닌이 4년 전에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1924년 오늘날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현대 코뮤니스트의 주요 임무, “대중을 현실의 결정적인마지막으로 위대한 혁명투쟁으로 이끌아직 완전히 혁명적이지 않은 척도와 방법의 구체적인 계획을 발견하고깨닫고실현하는 것이다그러나 레닌주의자들의 이 주요한 실천적 임무의 해결은 의제에 관한 모든 일련의 항목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특히 단독적인 하나의 항목이 아니며이러한 의미에서만 그 해결은 레닌주의의 기초와 선전을 말하는 이 첫 번째 항목과 더불어 다른 모든 임무에 이바지하는 것이다그 해결은 다음과 같이 귀착된다오늘날 코민테른 전체는코민테른의 위대한 창설자이자 지도자인 V. I. 레닌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자신이 레닌의 유산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속하여 보존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것과현재 상황에 레닌의 정신을 그것의 이론과 실천 속에서 역사적 현실 즉 레닌주의로서 한층 발전시키는 것을 기꺼이 할 수 있음을이제 처음으로 보여줄 수 있고 또 보여주어야 한다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코민테른은 그의 이론적이데올로기적 기능 속에서 죽은 레닌을 살아있는 레닌주의자들의 크고 강력한 집합체로써 대체해야만 한다.

 

레닌과 코민테른을 5차 세계대회의 의제로 설정하면서집행위원회는 이 위대한 임무(세계 역사상 이러한 형태로 당 앞에 제기된 적이 결코 없는 아주 거대한 임무)의 이행을 위하여레닌의 자연적인 주요 상속자인 러시아 볼셰비키당뿐만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코뮤니스트당의 다른 모든 지부들즉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도 이론적실천적으로 함께 노력해야 한다또한 대회 자체는 이 길을 따라 첫 번째 중대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대회의 임무는 확실하고 완전하며 상세하게, “레닌주의의 선전”(의제에서 유일하게 불확정적으로 지시된)의 슬로건을 코민테른 전체에 타당한 방식으로 정식화하는 것일 터이다또한 그들의 상황과 발전 상태에 따라 인터내셔널의 각 지부에 특히 중요한 개별 임무들을 지적하는 것과이 모든 임무들의 해결을 실행해야 할 더 큰 지도 원칙들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5차 세계대회의 의제에서 첫 번째 항목의 중요성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 “레닌주의의 선전을 구성하는 다방면의 부분적 임무에 대한 더 자세한 규정과 함께대회는 오직 (우리가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기술적 측면에 따라서 레닌주의의 물음에 관한 입장을 가질 것이다명백하게도그 물음의 이 기술적 측면 또한 너무나도 큰 중요성을 지닌다. “레닌주의의 선전은 위대한 코뮤니스트의 혁명의 조직이라는 총체적 임무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그리고 물론 이 선전의 임무를 정확히 이행하는 것은아직 국가권력을 획득한 적이 없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부들(따라서 이미 합법화된 모든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부들이지만아마도 처음에는 불법적 조건 하에 있었을 지부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소련에서보다 훨씬 더 곤란한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그러한 나라에서대체로 그 임무의 이행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최고기관인 세계대회를 통해서 더 정확한 설명과 규정을 요구하는전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들(각 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정확히 일치하는)을 띠어야만 할 것이다그러나 다소 기술적인 이 물음들은 결코 문제의 핵심을 포함하지 않는다.

 

실제로 볼셰비키 이론의 방법 그 자체는 레닌과 코민테른레닌주의의 기초와 선전이라는 문제를 포함시킴으로써 그 의제에 관하여 제기된다. “레닌주의의 기본원칙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모든 지부에서 이러한 원칙에 근거한 레닌주의적 선전 체계의 발전을 해명함으로써볼셰비즘의 이론가인 레닌이 맑스의 혁명적 방법을 복원하고 그것을 이른바 통일된 제인터내셔널 맑스주의자들의 곡해와 혼란에 맞서 대립시킨 그 형식에서 맑스의 혁명적 방법을 공통된 토대로 삼아 코민테른 전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견고한 통일체로 용해되어야 한다우리의 혁명적 볼셰비키 이론의 방법만이 아니라의제의 세 번째 항목인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프로그램도 레닌주의의 문제에서 토론에 부쳐진다.

 

 

5차 세계대회가 극도로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어려운 임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그것은 레닌주의의 방법론적 기초를 예리하고 정확하게 정식화하여 이 기초 위에 방법적이고 체계적인 레닌주의 선전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내에서 이데올로기적 통합과정은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들과 집단들이 그 본질적 특징이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의 이론적 방법에 헌신하게끔 하는가?

 

이 점에서 그 임무의 급진적인 해결에 거의 여지를 주지 않는 막대한 곤란들이 발생한다한편으로우리는 아직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지부들 특히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유일하게 타당한 맑스 이론의 방법인 레닌주의에 대한 단일한 헌신을 전혀 말할 수 없다다른 한편으로하나의 방법인 레닌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현재 본질적인 특징들 속에 서로에게서부터 출발하는 몇 가지 시각들이 존재한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조직에 속하고 자신의 실천적 정치학 속에서 레닌에 따라” 행동할 각오가 된 수많은 지도적인 다른 맑스 이론가들은 과학적 맑스주의가 복원된 ” 방법인 레닌의 방법의 원리를 이론에서 거부한다그들은 레닌주의적 방법을 현시기(국제적 범위와 유럽 및 아메리카의 국가적 범위에서 아직 정치적 권력의 장악 시기로 대표되지 않는 시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의 실천적정치적 목적을 충족하는 하나의 방향설정 방법으로서 인정하지만가장 구체적이고 진정한 유물변증법의 방법으로서즉 혁명적 맑스주의가 복원된 방법으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그들에게 타당한 방법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창설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방법이거나그게 아니라면 룩셈부르크주의적 방법뿐만 아니라 레닌주의적 방법도 편향적이라고 선언하고 오직 과학적 성숙 시기의 칼 맑스가 적용한 방법만을 진정한 맑스의 방법으로 인정하기를 원한다이 짧은 소론에서 레닌주의적 방법(하나의 방법으로서혹은 과학적 맑스주의의 ” 방법으로서)에 대한 이 무조건적 적대자들과의 제대로 된 논쟁을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이 과제는 가능한 한 큰 규모의 코뮤니스트 이론계의 집단작업으로 이 저널의 다음 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현재로서는 볼셰비키의 정치적 실천과 (레닌에 의하여혁명적 맑스 이론이 복원된 형태가 불가분하게 응집된 통일체를 정립한다는 관측에 만족하자그런데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코뮤니스트당의 역할에 관하여어떻게 이 통일체를 제2차 세계대회의 결의에 관한 코뮤니스트적 입장인 실천적 정치가로서그러면서도 동시에 유물변증법의 룩셈부르크에 특유한 형태로 경제발전과 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 간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과학적 맑스주의자로서 간주하게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우리에게는 레닌이 복원하여” 한 발 더 나아간인간의 감각 활동과 실천 자체를 그것의 객관화된 현실 속에서 이해하는맑스의 완전한 유물론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만 당 역할의 볼셰비키판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다른 한편으로실천적 측면에서 레닌주의적 변증법만큼 거의 유물론적이지는 않은 룩셈부르크주의적 변증법의 입장에서 보면당 역할의 레닌주의적 설명에는 언제나 주관주의의 고통스러운 잔재가 있다그러나 어쨌든룩셈부르크주의적 맑스주의자와 레닌주의적 맑스주의자가(여기에는 세 번째로 룩셈부르크의 더 나아간 발전도순수하고 완전한 맑스주의로서 맑스 방법의 레닌주의적 복원도 인정하지 않는 맑스주의자들이 추가되어야 한다5차 세계대회에서 공동으로 동의할 수 있는 레닌주의의 기본원칙에 관한 해결과, “레닌주의적 선전의 체계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전체의 동일한 이 이론가들에게 압도적 동의를 얻은 코뮤니스트적 프로그램이 불만족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존속할 것이라는 점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맑스 이론의 룩셈부르크주의적 방법과 레닌주의적 방법 간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레닌주의의 기본원칙과 선전의 결정에 불가결한 전제들로 구성된다.

 

룩셈부르크주의자와 레닌주의자 사이의 갈등과 상관없이오늘날 이론적 방법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 문제에 관한 일반적 동의는 부재하거나더 강하게 말하면 오늘날 이 동의는 이전보다 훨씬 덜 존재한다그리고 맑스주의 코뮤니스트당의 방법론적 의식이 당의 실천 외부에혹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그 상부에 있지 않고오히려 이 혁명적 실천 자체의 중요한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에격렬한 위기의 결과로서 볼셰비키 실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쓰라린 분파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버렸을 때레닌주의의 이론적 방법 문제도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야만 한 것도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다시금 레닌주의적 변증법의 방법의 결정에 있어 현재 착수된 시도(다양한 측면에서 착수된속에서오늘날 실제로도 코민테른 내부의 전술 및 다른 실천적정치적 문제에 관한 투쟁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모든 분파들을 발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새로운 코뮤니스트 저널 노동자문헌(Arbeiterliteratur)의 1/2권에 나온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부 문제들에 대한 레닌의 유물변증법 적용에 관하여라는 탈하이머 동지의 소론은 이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탈하이머 동지는 레닌이 맑스와 동일한 대담성과 통찰 및 엄밀성과 더불어 적용한자신에 의하면 동일한 유물변증법의 맑스주의적 방법일 뿐인 레닌주의적 방법을 해명하고자 한다그는 세 가지 구체적인 물음들즉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농업 문제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전쟁 문제의 전개를 통해 이것을 할 것이다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에 관한 절은 레닌이 국가의 소비에트적 형태를 노동계급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로서가 아니라오히려 국가의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일탈하는 이 유형의 변종형태의 가능성이 포함되는 국가의 유형으로서만 특징지었다는 언급으로 맺는다농업 문제에 관한 절은 레닌이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적용을 부여했다. (탈하이머의 묘사에 따르면이 적용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혁명 문제의 핵심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력의 이전을 수호하고자이전 볼셰비키적 농업 프로그램의 경직된 모든 요구들을 기각하도록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생활의 과정 속에서 실례(example)의 힘의 결과 즉 실천적 고려의 결과로서, “저절로” 될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도록 용인했다는 사실에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절에서 탈하이머 동지는 레닌이 민족 문제를 취급한 것을 구체적 변증법적 분석의 진정한 모델로서 특징짓는다레닌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애국주의의 허위를 비판적으로 무효화시켰고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전쟁 중인 유럽에서일지라도 특정한 조건하에서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민족주의 전쟁으로의 전화는 확실히 개연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았음” 또한 강조하였다.

 

우리는 탈하이머 동지가 이 중요하고 어려운 세 문제들에 대한 레닌의 해결책을 평가할 때의 흠모로부터 한 치라도 뒤로 물러서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즉 레닌이 탈하이머 동지가 묘사한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맑스주의 유물론적 방법 적용의 그토록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실례들을 어느 정도로 부여했는가라는 이 문제를 아주 신중하게 제기해야 한다예컨대농업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적 접근에서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사용은 무엇에 있는가주지하다시피 칼 맑스는그들이 스스로 즉시 그들에게 고유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혁명적 활동의 내용과 소재(material)를 발견하는 데까지즉 적을 때려눕히고전쟁 요구에 의해 주어진 수단을 장악하고그들만의 행위 결과를 진척시키는 데까지 상승하게 되자마자 혁명적 계급의 역량을 인정하였다그들은 자신에게 고유한 임무의 상위에 있는 이론적 작업에 착수하지 않는다.”(프랑스에서의 내전디츠 판, 31러시아 혁명의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은 투쟁의 한복판에서, “그 자체로부터” 생활 속에 그리고 이 생활의 일부인 혁명적 계급투쟁 속에 보급되는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서내재적무의식적그리고 자연적인 변증법에 의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레닌은 변증법적 방법을 여기에정확하게는 그가 (맑스와 말하기 위해) “이론 작업의 착수를 거부하는” 데에 적용하는가레닌은 그것에 의하여 각별히 교훈적이고 각별히 엄밀한” 형식으로 변증법을 적용하는가?

 

오히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그와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역사적 과정의 견지에 따라 온전히 파악되어야 하는 고도로 발전한 유물변증법이그 물질적 생활 현실의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이 확실히 변증법적으로 진행하지만 그 진행 과정의 특정 지점에서 변증법론자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그 한계에 다다르는 상태에 정확히 도달하였다는 것이다그것은 이 한계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기 위한 맑스주의 방법의 엄밀한 이론의 요구조건에 속한다하지만 이 속에서 맑스와 레닌의 유물변증법의 현실적 핵심을 정확히 알고자 할 때 그것은 이미 과도하다마찬가지로또 다른 방식으로탈하이머 동지가 레닌의 맑스주의적 방법 적용의 두 다른 선택된 실례를 분명히 진정한 유물론에 속하지만 결코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속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한다하더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장 내적인 본질즉 일반적으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유물론의 주요 특징과 핵심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또한 그가 세 가지 실례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한 맑스 레닌주의적 방법의 본질 왜곡 외에도탈하이머 동지는 더 나아가 그의 소론의 서문 및 산발적인 언급에서 똑같이 왜곡된이 방법의 본질에 관한 일반 이론을 추가한다그는 맑스뿐만 아니라 레닌의 유물변증법적 사유의 결과들이그 사유가 유래하고 그 사유에 대해 결정되는 순간적인 경험영역의 범위를 넘어설 때전혀결코어떤 형태로도 일반적으로 타당할 수 없다는 캐리커처[풍자적 모방속에서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라는 맑스의 기본 원칙을 과장한다마치 맑스(예컨대미하일로프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와 레닌(예컨대, “어떤 형식으로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중요성을 언급할 수 있는가?”라는 부제의 급진주의에 대한 소개

에서)이 그들의 유물변증법 연구의 결과들을 그러한 일반적 중요성을 지닌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아주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이미 알려진 현재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도달하려는 것만을 부여하는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가치는 무엇인가혹은 더 나아가탈하이머가 표현하는 것처럼한편으로 이론적 반성(!), 즉 특수한 시대의 분석이자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시대일 때와 마찬가지로”,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위한 지침들일 뿐인역사적 결과들만이 초래되는가?

 

사실 탈하이머 동지가 만들고 맑스 레닌주의 유물변증법으로부터 변형된이 새로운 방법은 유물변증법과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다맑스와 레닌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순수한 경험과 실천의 역사과학의 방법으로서 아주 물질적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노력에서탈하이머 동지는 이미 유물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버렸고완전히 비변증법적인 역사주의실증주의실용주의를 달성했다앞에서 지적한 것처럼로자 룩셈부르크가인간 실천에 관한 그녀의 견해에서 온전히 유물론적으로 되지 못하여이 점에서 헤겔 변증법론자로 남게 된 반면에이에 반해 탈하이머 동지는 헤겔 변증법의 잔재와 함께 동시에 맑스주의 과학의 방법론의 모든 변증법적인 것을 축출해버렸다탈하이머의 입장에 따르면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역사적 과정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행동으로서 구체적으로 함축하는맑스의 유물변증법적 방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고립된 역사적 사실성의 순전히 수동적이데올로기적인 반영으로 변형된다.

 

실제로 이러한 맑스 레닌주의적 변증법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곡해는 맑스엥겔스레닌 및 다른 이들이 얻은 모든 성과를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그리고 맑스 레닌주의적 연구 방법의 성과를 평가절하하는 이러한 경향이 어디서 유래하고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아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탈하이머가 수백 번 반복한 예로 들자면소련 국가는 가능한 종과 변종이 있는 단지 하나의 유형으로서 레닌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오직 이러한 성과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고자 할 때만맑스 레닌주의적 방법론의 성과들을 이토록 평가절하할 수 있다소비에트 국가를 가능한 형태들의 다수성이 있는단지 하나의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유형으로 보는 견해는 레닌주의의 이론가들이 평의회 독재의 엄격한” 형태(레닌에 따르면한층 더 발전할 수 있지만그렇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 사회주의적 형태의 ” 시초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고예컨대 작센 노동자정부처럼이 유형의 다양하고 가능한 변종” 및 퇴화에 이르도록 만든다또한 다른 모든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이론의 성과도 마찬가지다그 성과들이 모두 특유한 역사적 전제에 구속되고단지 특수한 시간과 장소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순수한 역사의 산물이라면새로운 관계 하에서새로운 경험과 변화된 정치적 요구에 반해서이전의 맑스주의의 성과이 타당성을 상실할 것이고그 성과이제 이 새로운 상태가 유물변증법의 레닌주의적” 적용을 위하여 그 속에 반영된”, 새로운 지식과 지침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거나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맑스와 레닌의 혁명적 변증법적 유물론을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으므로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은(역으로도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으므로 더 이상 변증법적이 않은), 순수하게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과학과 실천으로 변형시키면서탈하이머 동지는 실제로 경향 상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 대신에 기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방법을 매력적인 레닌주의의 외피 아래 둔다.

 

 

우리가 이처럼 상세한 설명으로써 레닌주의적 방법에 관한 탈하이머의 견해를 다룬 것은단지 탈하이머 동지가 제5차 대회의 프로그램의 문제에 관한 두 번째 연설자로서 지명되어서그로 인해 대회에서 그가 방법론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 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주목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그보다 중요하게, “레닌주의의 기본원칙을 결정하려는 시도특히 제5차 세계대회에서 레닌주의적 방법의 본질의 고정하려는 시도가 단지 현재의 거대한 난관에만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이를 넘어서 어떤 위험에도 구속된다는 것을자세하고 명확하게 전형적인 실례로써 제시하는 것이 긴요하다이 위험은 그것이 정확히 외관상 순수하게 이 이론적인 영역에서 여전히 전혀 인정되지 않고관찰되지 않는 한에서그리고 분파들의 실천적 투쟁으로부터 아주 거리가 먼 한에서는 오히려 더 큰 것이다최근 존경 받는 레닌주의의 혁명적 깃발 아래 다양한 수정주의적개량주의적기회주의적청산주의적 금제품을 혁명적 코뮤니스트의 이론과 실천에 밀수해 들어오려는 시도들이 있다가장 내적인 토대에서 탈하이머가 지금 정식화한 레닌주의적 방법의 이론은 단지 그릇된 정치적 실천의 그릇된 이론을 의미할 뿐이다기회주의와 개량주의의 공동전선 전술이 라이프치히 당대회 이후 독일에서 적용된선동과 대중동원의 혁명적 방법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탈하이머와 그의 가까운 동지들의 레닌주의적” 방법도 혁명적 레닌주의의 순수한 방법과즉 레닌이 복원하고 완성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방법과 관계가 있다이 입장의 근본을 해명하는 데서5차 세계대회는 코뮤니스트 정치의 다른 모든 즉각 실천적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레닌주의의 기본원칙 문제와 프로그램의 문제에서 치고 올라오는 코뮤니스트적 수정주의의 쇄도에 맞서 특별한 방어벽을 세워야 할 것이다이 부정적 기능의 이행에 의하여이 대회는 그 본질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행동의 이론적 의식에 다름 아닌레닌이 복원한 혁명적 맑스주의 과학의 완성된 방법의 위협적인 붕괴를 강력하게 저지할 수 있다코민테른 발전의 현국면에 있어서방법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을 긍정적[실정적]으로 고정하는 것은코뮤니스트 정치의 전시기에 타당한최종적인(궁극적인코뮤니스트 프로그램의 고정하는 것만큼이나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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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소개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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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는 계급 사회와 사유 재산 폐지라는 장기 목표를 가진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재편성 활동입니다다시 말해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젊은 세대의 생애에 코뮤니스트 사회를 이루기를 우리는 원합니다현시대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말이 들어맞았고 절박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당면한 목표는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맑스주의 입장을 가진 조직의 감소로 코뮤니스트 운동을 단념한 동지들을 재편성하는 것입니다이미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가진 동지들을 재편성하는 것뿐만 아니라새롭게 또는 맑스주의를 잘못 이해한 코뮤니스트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또한 맑스주의 교육을 위해 접근 가능한 온라인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조직에 참여하려면아래의 정치 입장을 읽고우리와 연락할 것을 제안합니다우리의 입장과 조직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우리는 기꺼이 답할 것입니다.

 

 

정치 입장

 

 

1. 우리는 코뮤니스트로서 코뮤니즘이 인류 생존을 위해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본다.

 

2. 자본은 자본가계급과 임금노동 프롤레타리아트 사이 역사적 사회적 관계다우리는 자본을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산물이라고 규탄한다따라서 정부의 외형적인 형태와 관계없이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3.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는 국제적 혁명을 코뮤니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이것은 자본과 계급 자체를 파괴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4.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당이거나 그것의 유일한 중핵이라고 믿지 않지만계급의 중추적 역할을 할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당 설립을 지지한다다시 말해 우리는 당이 아니라 당을 위해 존재한다.

 

5.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조국이 없는 이주민의 계급이라고 이해한다현재 자본주의 쇠퇴시대에 우리는 민족-국가가 어떠한 유용한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모든 민족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기조직화와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달려 있다.

 

6. 우리는 모든 실제로 존재(자임)하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한다우리는 그들의 활동과 정당(국제기구를 포함)을 부르주아 계급의 도구로 본다.

 

7. 우리는 모든 계급주의 이론을 낮은 계급의식 표현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이해관계와 계급 단결에 어긋나는 것으로 본다이러한 반응은 자본주의 사회의 골칫거리인 사회적 적대 앞에 서면 이해할 수 있다우리는 계급 사회에서 비롯된 모든 형태의 억압을 폐지할 것이다.

 

8. 우리는 노동조합이 프롤레타리아트 저항을 억제하고우리가 정복하거나 혁명적인 기구로 전환시킬 수 없는 자본주의 국가 기관이라고 이해한다우리는 개별적인 평조합원 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그러나 계급투쟁이 격화되면 노동조합은 반혁명 세력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우리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직접 혁명 기관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9. 인간의 필요와 풍요가 이윤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을 보고 싶다면인간은 자본의 존재에서 벗어나야 한다개인의 발전과 인류의 성공을 촉진시키기 위해 현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Internationalist Communists Oce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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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칼 리프크네히트 기억하기

칼 리프크네히트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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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는 위대한 이론가가 아니었다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그의 이름과 영원히 연결될만한 주장 글이나 정치 경제에 관한 주요 논문을 그는 쓰지 않았다.(심지어 노동가치설에 대해 의심하기까지 했다.)(1) 그는 능숙한 정치가도 아니었다전쟁 전에는 맑스의 동료이자 독일사회민주당(SPD) 공동창립자의 아들로 유명했는데(2) 전쟁 후 그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매우 꺼렸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원칙적인 사람이었다유명한 자유주의 역사학자 세바스찬 하프너(Sebastian Haffner)는 그를 "독일이 배출한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3) 그는 자신이 어느 날 갑작스러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그중 일부는 다음의 단편에서 읽을 수 있다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4월에 루카우(Luckau) 감옥에서 이 글을 썼다때로는 장황하고 급하게 쓰기도 했지만내부와 외부 변증법주제와 대상의식과 조건 같은 중요한 주제를 다뤘다따라서 그것은 오늘날에도 관련이 있다.

 

리프크네히트가 여기서 확인하기를 바라는 것은 트로츠키가 몇 년 후 "적절한 순간"으로특히 실패한 독일 혁명과 관련하여, 1917년 10월의 교훈을 되새기며 이론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4)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ács)는 이 문제를 아우겐블릭(Augenblick : 순간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했다계급의식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객관적인 사건 과정에 주관적으로 개입하여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순간 또는 눈 깜박할 사이로 표현했다종종 이것은 조건의 "성숙"으로 논의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거의 엉망진창으로 죽었다.”고 폴 매틱은 나중에 회상했다.(5) 사실그들의 마지막 글에는 이미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불길한 예감이 감돌고 있었다오늘날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살해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이 살해당한 혁명가들이 남긴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Walt Auerbach

 

칼 리프크네히트의 사회주의 외교 정책」 읽기  ▶  코뮤니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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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22년 사후에 출판된 그의 맑스의 비판의 주요 특징(Grundzüge einer Marxkritik)을 참조 바란다.

 

 

(2)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와 룩셈부르크는 때때로 리프크네히트가 당에서 "태어났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1914년 8월 이전에 그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청소년 부문을 보강하기 위해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전쟁 채권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한 그의 결정은 그를 반대파의 유일한 주창자로 만들었고결국 1915년에 재판을 받고 1918년 11월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3) 세바스찬 하프너(Sebastian Haffner), 독일 혁명의 실패, 1918-1919게오르그 랍(Georg Rapp) 번역. (The Library Press. New York, NY: 1973). 140

 

(4) 어쨌든이것은 보르디가가 가장 좋아하는 트로츠키 팸플릿이었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을 제외하고) “적절한 순간을 잃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반란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분명히 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최대 변화가 일어났을 때이다우리는 물론 의식 영역에서의 힘의 관계즉 정치적 상부 구조의 영역에서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으며혁명적인 시대 전체에 걸쳐 다소 변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 할 수 있는 경제 토대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하나와 같은 경제 토대에서사회의 계급 분열과 함께힘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분위기에 따라 변하는데그들의 환상이 깨지고 정치적 경험이 커지는 정도국가 권력에서 중간 계급과 집단의 신뢰가 깨지는 정도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자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정도에 따라 변화한다혁명 기간 이러한 모든 과정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모든 전술상의 기술은 이것으로 이루어진다. : 여러 사정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레온 트로츠키10월의 교훈나오미 알렌(Naomi Allen) 번역좌익반대파의 도전, 1923-1925. (Pathfinder Press, New York, NY : 1975). 232

 

(5) 폴 매틱(Paul Mattick). -볼셰비키 코뮤니즘. (Merlin Press. Monmouth: 1978). 95

 

<출처비타협(INTRANSIGENCE)」 4

https://intransigence.org/2019/03/26/remembering-karl-liebkne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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