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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분파-당 문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분파-당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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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소개할 문서는 1971년 처음 작성되었고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전통에 대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의 내부 토론에 사용될 목적으로 수기로 작성된 형태로 1981년 번역되었다그리고 최근 온라인 저널 비타협(https://intransigence.org/2018/11/02/fraction-and-party/)에 출간되었으나여기서는 서문을 대폭 추가하여 소개한다.

 

원문은 국제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PCInt)이 소집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국제대회 시기에 작성되었다이 글은 저널 빌랑(Bilan)을 중심으로 한 국제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가 이탈리아좌파의 최고 표현(highest expression)이라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주장에 대한 부분적인 응답이었다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망명한 동지들로 이뤄진 분파(Fraction)는 전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일부(이러한 사실은 오직 보르디가주의에 감화된 다양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당들만이 거부한다)이긴 하지만최고의 표현은 아니다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탈리아에 돌아가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에 가입하였으나 그때까지도 많은 문제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한때는 프롤레타리아 조직이었던 소련의 코뮤니스트당(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CPSU)이 반()혁명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그 상황을 이해하고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CPSU는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에 맞서는 국가자본주의 괴물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점점 더 제국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으나분파는 많은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보기를 들어 그들은 소련의 계급 본질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이 문제는 오직 국제코뮤니스트당을 세운 동지들만이 분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소개할 문서는 빌랑(Bilan)의 대차대조표(bilan)에 관한 것이 아니다이 문서의 목적은 훨씬 정확하다해외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경험을 특정한 역사적 국면의 맥락그러니까 좌파의 많은 투사들이 외국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이탈리아 파시즘의 맥락에서 설명한다분파(Frazione)라는 단어는 1928년 사용되었고이는 과거 사회주의당이 나뉘기 전코뮤니스트들이 그 안에서 분파를 형성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과거 “1921년의 당과의 정치적 연속성과 통합을 가리키는 의도였다좌파의 투사들은 (전체 명칭으로 표현하자면인터내셔널 지부인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 Section of the Third International)을 건설했고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여전히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의 정치적이고 조직적인 연속성을 주장했다그러므로 이것이 그들 스스로를 국제주의자 분파라고 부르는 이유이다그들은 코민테른과 그람시(Gramsci)와 톨리야티(Togliatti) 아래의 이탈리아 당이 반()혁명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것도 알았지만완전히 반()혁명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들은 중도파로 불렸고그들의 이름이 이야기해 주듯이분파의 주요한 노력은 혁명적 정치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시도들을 가로막도록 이용되었다.

 

1935소련의 타락이 명백해지면서 코민테른과 그 모든 당들은 결국 그들을 계급의 적들의 손에 넘겨버렸고분파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했다계급에게 의미 없어진 당의 분파로 더 이상 남아있을 수도 없었지만어떤 지점에서 새로운 당을 출범해야 하는지도 결정하지 못했다특히베르세시(Vercesi)는 대중정당이 다시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래의 글이 보여주듯이분파의 많은 구성원들이 그렇게 주장했다그러므로 분파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마비되었고결국 해산되었다전후 잠재적 혁명 계급투쟁을 부활시킨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1943년이 되어서야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 국제코뮤니스트당의 탄생하면서 당의 문제가 분석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문서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분파의 경험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오늘날 분파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의 분파?”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과거의 당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과거의 전투에서는 다루었었고그들의 시기의 문제들을 둘러싼 사항들은 결정되었다오늘날 우리는 똑같은 입장에 있지 않다프롤레타리아의 과거 경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지만그것은 미래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다맑스가 브뤼메르 18에서 지적했듯이심지어는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너무 과거에 기대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오랜-과거의 정치적인 경험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혁명적 위기의 시대전례 없는 것을 일으키려 한 우리들이 등장한 시점에유서 깊은 위장과 빌려온 언어로 새로운 역사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우리는 안절부절못하고 과거의 정신그들의 이름그들의 전장에서의 함성그들의 복장을 소환했다.

 

오늘날 우리는 오래전에 죽어버린 당의 분파가 아니라미래 당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소그룹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다.

 

이것은 베르세시(이탈리아 좌파의 해외 주대변인)가 노동계급이 움직일 때까지 당 건설은 기다려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던소위 역사적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실이다그러나 역사적 과정이란 아이디어는 특히 마크 치릭(Marc Chirik, 미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설립자)과 같은 이들에 의해 선전되었다그의 관점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관점 에서는 역사적 과정이 반혁명으로 향하고 있는 오늘날 계급 정치를 만들려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하게 되어있다베르세시와 같이그 주장은 계급 역학의 실제 균형은 계급 정당의 건설에서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다치릭은 역사적 과정이 전쟁과 반혁명으로 향하고 있으며따라서 분파의 나머지 대부분과 다르게 국제코뮤니스트당에의 합류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그것은 보르디가가 국제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1943년 창설설립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몇 년 후, 1948-52년 취했던 초기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국제코뮤니스트당은 각지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동요의 신호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에서 대중파업의 물결이 있었던 시기1차 세계대전 말과 같이 전후 혁명 물결의 전조처럼 보이는 시기에 설립되었다그러나 1948년 즈음에는 자본주의가 그 폭풍을 잠재운 것이 명백해졌다보르디가는 이제 당을 건설할 시점이 아니라고 주장했고심지어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이 처음부터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시기는 이탈리아에서만 4천 명이 넘는 구성원이 있었을 때였다!

 

역사적 과정의 옹호자들에게 반혁명은 끝나지 않았고따라서 당의 문제는 그 시점에서 제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냉전이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마크 치릭 뿐만이 아니었지만그는 그 결과가 핵 재앙이 될 수 있고한국 전쟁 발발 당시 베네주엘라를 위해 유럽을 포기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3차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1952년 보르디가주의자들과 결별한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은 숫자가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내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끈질긴 싸움을 계속했다그들에게 역사적 과정이란 혁명적 조직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책무를 포기하는 변명에 불과한 지적 개념에 불과했다.

 

마크 치릭과 그 동료들은 당의 문제는 객관적인 조건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 1930년대의 분파와 동일한 방법을 공유했다이는 분파 내의 기다립시다”라는 경향과 역사적 과정에 대한 옹호자들의 입장을 보여준다여기서 오류는 당이 오직 대중 정당이 될 즉각적인 가능성이 있을 때만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본질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그리고 코민테른의개념에 대한 동의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태어난 개념도 아니다.

 

러시아 노동계급 가운데 작은 소수(8000)였음에도 불구하고, 1912년 멘셰비키로부터 분리한 후 볼셰비키는 이미 존재했었고그리고 1917년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조직된 세력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계급으로부터 승인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려졌다이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조직으로서 뚜렷하게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중도주의 USPD(독일 독립사회민주당내부의 분파로서 집어 삼켜졌던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과 명백하게 대비된다. 1918년 11프롤레타리아 저항이 발발한 이후에야 그들은 실질적으로 코뮤니스트당 건설을 고려했고곧 기회주의에 굴복하여 혁명적 정책과 보수적 정책 사이에서 찢어졌다.

 

아래의 글이 언급하듯이정당은 하룻밤 만에 건설될 수 없다이론적 작업뿐만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강령)와 작동 방식 – 구성원들이 모두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당은 방정식의 주체적인 부분이고자유의 도구이며그것은 혁명 발발 이전 투쟁의 과정에서 벼려질 것이었다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이 언급했듯이노동계급은 즉각적인 희망과 조건이 어떻든 당을 영구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으며분파는 역사적인 배신이 불러온 심각한 혼란의 시기독특한 역사적 막간극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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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활성화된 경기가 끝나가는 첫 번째 신호가 명백해지자 1960년대 후반마크 치릭은역사적 과정이 이제 역전되어 유럽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작업하고 있었다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경제적 위기의 재래는 자본가들이 노동의 조건과 임금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노동자들은 저항했으나 이는 대게 노동조합이 통제하고 있는 기업별 투쟁에 기반하고 있었다국제적으로는 이러한 틀을 넘어서고자 하는 가시적인 시도들이 있었으나 예외적이었다그러나 마크 치릭에 있어서는 반혁명이 끝났고이제 새로운 혁명적 조직(기존의 것은 경화되었으니”)을 건설할 때라고 주장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과거 평의회주의 그룹들 몇몇은 (그들 중 다수는 근래에 건설되었는데) 1975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 합류했고그것이 혁명가들의 재편성의 축이라고 주장했다이제 반혁명은 끝났으며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노동계급은 이미 혁명적이며, “역사적 과정이 이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향하고 있으니 탈신비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노동조합이 이제 노동계급에 반대하고 있다고 노동자들이 듣기만 한다면그들의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혁명으로 향한 길이 열릴 것이었다놀라울 것도 없이 역사적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0년대와 같이, 1970년대는 계급투쟁이 부활하는 시기였는데그것이 노동계급 안의 폭넓은 대중 가운데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되지는 않았다투쟁의 새로운 물결은 반혁명의 끝을 나타내는 신호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앞으로 25년 동안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방향을 잃은 자들이라고 비난받을 것이었다. “역사적 과정의 확실성으로 무장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들이 남은 코뮤니스트들이 다시 모여야 하는 재편성의 축이라 확신했다.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점증하는 계급 적대에 따라 진실의 시대를 선언했다이것은 위기가 가져온 구조조정이 중국과 같은 저임금 경제로 생산이 옮겨감에 따라(그 당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인정하지 않았지만과거의 산업 중심지 자본의 대손상각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었다노동자들은 수세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자본가들이 이미 고정 자본을 없앨 준비가 된 상황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은 결코 편한 입장인 것은 아니었다사기 저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계급은 후퇴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역사적 과정이 심화된 계급 대결로 향하고 있다는 사상의 지지자들은 이를 보지 않았고그들이 이론을 재평가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소련과 그 블록이 붕괴한 이후가 되어서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과정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없었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는 노동계급도 자본가도 서로의 안건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1979년 이후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구조조정이 전체 공동체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그들의 대차대조표 계산 속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포스트모던 대열에 합류하여 혼돈과 해체” 등 그들 자신만의 개념에 도달한다자본주의는 이제 해체(은유로서, “쇠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이제는 진짜진짜 쇠퇴를 의미한다)되고 있는 것이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게 혼돈과 해체는 역사적 과정이 혁명으로 향하고 있다는 그들의 관점이 무너지는 것을 가려주는 미봉책 이론이었다우리는 자본주의의 하락의 점증하는 신호가 있다는 것은 거부하지 않지만이것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무시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인들(그들에게 자본주의의 위기란 영속적인 것이다때문이다또한 자본주의 위기는 사라진 적도 없고자본주의가 연장되면 될수록 강화된다.

 

자본주의는 수십 년이 넘도록 위기를 관리하려 하거나 또는 이윤율을 높이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1971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남아있는 한 요소는 자본의 과잉 축적이다과잉축적이란 생산 주기의 새로운 부활이 자본의 평가절하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의미한다오늘날에는 만연한 전쟁의 대량 파괴 또는 여러 차례의 전쟁만이 이를 달성할 수 있다이 사실은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가졌던 우리의 관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전쟁이냐 혁명이냐는 이 체제의 점증하는 대립의 유일한 해결책이다상황이 아직 급박하지 않고 코뮤니스트좌파의 경험에 근거하여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작업을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춤추는 자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우리는 본다.

 

여기에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도 포함될 수도 있다우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한 이유는 그들의 최근 답변이 너무 혼란스러워 그들의 현재 입장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4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일종의 내부 위기를 경험하였으나결국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들의 동조자들에게서도 명확해진 적이 없다그 대신 그들은 2016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40이란 제목으로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56권에 실린 대차대조표를 생산했다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과거 입장의 몇 가지를 비판한다우리는 일부만을 여기 요약할 수 있다아래는 그들의 언어로 표현된 것 중 일부이다

 

계급 사이의 세력 균형 분석프롤레타리아가 지속적으로 공격적으로 되어가는 경향

. “대 재앙적” 비전

경제적 위기와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이 필연적으로기계적인 방식으로 투쟁의 물결을 촉발시킬 것이라는, 1970-90년대에 동일한 인물이 발전시킨 동일한 모델 환상을 보유하는 경향.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수년 동안 오류를 저지른 유일한 조직은 아니지만(일반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이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이러한 오류들은 역사적 과정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의 결과이다이러한 재검토는 환영받을 일이지만(그들의 문제에 대한 실제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호의 분파로서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역할에 대한 보고서라는 이름의 글이 인용된 글 다음에 이어졌다이것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포럼에서 몇몇 논쟁을 불러일으킨 매우 혼란스러운 글이다. 2017년 발간된 세계 혁명(World Revolution)」 376호에서 한 동조자링크(Link)는 그 글에 대해 질문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이제 분파로서의 역할을 채택한 것으로 보이지만나는 그 이유와 가능한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이 역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이러한 변화의 정치적인 정당화는 어떻게 될까요다시 말해 이 결론에 이르는 현재 상황에 대한 분석이 무엇일까요?

 

나는 이전이 포럼에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재편성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했고 어떤 비판이나 반대도 없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단순히 그 방향을 설명하거나 명확히 하길 피해왔습니다이 새로운 분파로서의 역할이란 것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 대답으로 오직 더욱 큰 혼란만 가져왔으며역사에 대해 조금 다른 말로 서술했을 뿐링크(Link)가 제기한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직접적인 대답은 없다그들은 이제 스스로를 분파라고(그렇다면 무엇의 분파?) 여기는 것일까그들의 활동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링크(Link)가 왜 그들이 자신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느냐고 질문할 때그들은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나머지에 대한 비판으로 돌린다.

 

좌익공산주의 진영의 보편적인 낮은 사기는 40년 동안 자기-비판이 없었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대답이 없는 배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그토록 오랫동안 방향을 잃고” 헤매었지만여전히 선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명백한 현재의 사기 저하를 남들에게 투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자신의 활동을 정의하기 위한 역사적 과정이란 변하지 않는 비전은 갖고 있지 않다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내재적 위기이지만 그 최종 결과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그것은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사회의 혁명적 재편성이거나 대립하는 계급들 모두의 파괴라고 공표한 것또는 이후에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과 여전히 동일한 것이다.

 

혁명가들은 예언가의 수정 구슬 따위는 갖고 있지 않으며헤겔주의 목적론적 역사와는 다르게 언제나 하나 이상의 가능성을 제공한다최근우리는 계급으로서 계급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으나 앞으로 계속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투기 거품의 폭발은 과거에는 자본주의가 호황이라는 거짓된 이념을 유지시켜 주었지만그 이후 세상은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코뮤니스트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비웃음당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자본에 대해 질문하는 새로운 대중운동이 비록 계급의 기반이 없기 때문에(Indignados - 2011-2014년 스페인 시위 -에서 노란 조끼 운동까지스스로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더라도체제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으며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조차도 알아차렸듯이, 1970년대 초 이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젊은 세대의 혁명가들이 코뮤니스트좌파로 모여들고 있다이 모든 것이 우리가 혁명적인 국제주의 진영을 확대하는데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고동시에 우리가 언제나 해 왔던 것을 하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을 직면하게 하고 있다.

 

미래 당 건설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물론 계급투쟁 그 자체이다그러나 당 건설은 또한 진정으로 오늘날 계급투쟁에서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달려있다혁명적 소수를 역사라는 수동적인 범주에 가두는 것은 능동적인 두 기둥 사이의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을 닫는 일이다그것은 역사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것이고인간 존재가 역사를 만든다는 진실을 잃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그것은 수동적인 관찰로 후퇴한다는 것이다동시에 자본주의 위기가 개선되기보다 더욱 심화되는 것처럼 보일 때자본주의가 자신만의 해결책” 준비를 개발하고 있을 때지구의 생태적 오염이 일상적인 자본주의의 위협으로 우리 존재에 대한 위협을 보여줄 때그리고 많은 젊은 세대들이 해답을 갈구할 때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 기다려 봐라라는 것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12-22/the-fraction-party-question-in-the-italian-left

 

번역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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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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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사회민주주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민족(조국)의 수호"를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부터 이탈했다. 사회민주주의는 1918년과 1923년 사이에 혁명적인 노동자 봉기를 분쇄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코뮤니스트를 살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계급투쟁의 시기에는 ‘노동자당’을 표방하면서 자본주의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계급평화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에게 의회주의, 선거주의 환상을 확산시킨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으로 현실에서는 개량이 없는 개량주의의 옹호자로 행동한다.

 

 이러한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한 ‘코뮤니스트’ 정당들은 코민테른의 타락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국제주의를 포기함으로써 다시 자본주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코뮤니스트 정당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수용은 부르주아의 재무장화에 참여, 인민전선에 참여, 그리고 전후 국가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자본의 진정한 협력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자’ 또는 ‘코뮤니스트’를 자임하며,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수많은 그룹과 조직이 있다. 그들의 오류는 대부분 앞서 말한 ‘사회민주주의’를 재창조하려 하거나 ‘스탈린주의’를 부활시키려는 희극적인 시도라서 더욱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맑스주의’의 아름으로 계급운동 전반에 끼진 악영향과 혼란은 운동의 퇴보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를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동일시하면서 해괴한 강령까지 만들어 내걸고 있는데, 이것은 혁명적 맑스주의와 무관하다. 그리고 이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미 맹렬히 비난했던 반동적인 입장일 뿐이다.

 

“근대 국가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기구이다; 그것은 자본가, 모든 자본가의 이상적인 공동 기구이다. 그것이 생산력을 장악할수록, 자본가의 진정한 공동 기구가 될수록, 점점 더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들은 임노동자, 프롤레타리아로 남게 된다. 자본주의 관계는 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극단으로 더욱 밀어붙인다.”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국가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사회적 변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정치·경제적 권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착취체제를 ‘진보적’이거나, ‘반자본주의적’이거나, 심지어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규정하는 '가짜 사회주의 세력'과 진정한 우리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노동자계급을 지속해서 공격하고 혁명적 코뮤니스트를 살해한 스탈린주의야말로 진정한 반코뮤니즘(반공주의)이다. 또한 마오주의자와 게바라주의자들도 스탈린주의자들과 같은 이데올로기(인민전선, 단계론, 국가 미화, 민족주의 등)를 방어하기에 반()코뮤니즘 경향에 속한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사회를 코뮤니즘으로 바꾸는 혁명은 경제의 '자주 관리'나 '국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즉 임노동, 상품생산, 국가의 의식적인 폐지가 필수적이다. 이는 코뮤니스트 혁명이 인간 필요의 충분한 만족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계 공동체 건설의 과정임을 의미한다. 이와 무관한 일국사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모든 형태는 반코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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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이나 중국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는 세력과 더불어 이른바 ‘입당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 또한 스탈린주의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협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부정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이른바 ‘민족자결권’ 문제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여러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충돌 (스페인 내전, 아비시니아, 중일전쟁)을 지지했고 결정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조국의 방어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성과 교정 없이 국제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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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다양한 스탈린주의, 정통 트로츠키주의 자임세력, 그리고 마오주의 경향은 서로 대립하면서 일치하지 않는 정치세력이지만, 우리는 이들 모두를 자본주의의 좌파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강령, 전술 또는 운동 개념은 수없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타락시키고 붕괴시켜왔다. 여전히 ‘좌파통합’ 또는 ‘좌파 공동전선’을 내세우며 반성과 교정 없이 낡은 것들을 지속시키려는 시도는 그들의 전통이자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세력에 맞선 오늘날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오직 국경과 지역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 계급투쟁과 세계혁명을 향한 전망을 함께 세우고 국제적 코뮤니스트 강령에 따라 단결하고 투쟁하는 세력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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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침머발트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 좌파의 투쟁

침머발트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좌파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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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사건

 

100년 전인 1919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러시아 밖의 여러 나라에서 40개가 넘는 정치단체 소속 52명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였다. 5일 동안의 대회는 코민테른(Comintern)으로 약칭되고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이라고도 알려진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총회가 되었다그 사건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발전에 핵심점이 되었다.

 

총회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을 한 역사적 순간에 열렸다레닌은 총회 이후 3월 말에 녹음한 축음기 음성을 통해 혁명적 낙관주의로 제3인터내셔널의 전망을 밝혔다.

 

"오늘날 자본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대의에 충실한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코뮤니스트'라고 부릅니다. ... 곧 우리는 전 세계에서 코뮤니즘의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세계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기초를 보게 될 것입니다." (3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레닌, <FTCI, p.316>), *FTCI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 1차 총회 회의록과 문서: 1919년 3(Anchor Foundation, 1987)

 

이어 4월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세계사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인류는 자본주의 또는 임금 노예라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 제도를 폐기할 것입니다노예 제도에서 스스로 해방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로 나아갈 것입니다." (인터내셔널과 역사의 장소레닌, <같은책 p.33>

 

이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대한 자신감과 세계혁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하지만 전체 자본가계급과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이었다특히 1차 세계대전 말 혁명적 물결은 그들에게 공포와 악몽이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참호에서의 반란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자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그리고 독일 노동자 봉기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이에른(Bayerische Räterepublik)과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 대중의 파업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벌써 100년 전의 일이지만코민테른 창설은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그리고 북아메리카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 물결에서 정점이었다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에는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부의 커다란 분열과 전환점이 있었다바로 세계대전 시기 제국주의 전쟁을 대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와 그에 따른 결과이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맑스주의의 전망을 확인했고프롤레타리아운동 내부에서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당시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전 맑스의 저술까지 환기시키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러시아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시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결국 그들은 그렇게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신병모집과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맑스와 엥겔스로부터 시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처음으로 적대적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충실성이 위선적인 선언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으로 입증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제국주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인 것도전쟁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제2인터내셔널 내부의 좌파 흐름이었다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같은 흐름이었다.

 

 

2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좌파

 

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초에 발생한 자본주의 시기 변화를 먼저 인식할 수 있었다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 시기가 시작되었다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전투로 이끈 것은 제인터내셔널의 좌파였다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1905년 러시아의 대대적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 전쟁을 대대적파업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켰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좌파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인터내셔널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 위협에 맞서는 이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뮨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자본가의 이익왕조의 경쟁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같은 글)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2인터내셔널의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회민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 때문에 균열이 시작되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광풍에 휩쓸려 깨어져 부끄럽게 수명을 다했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과 결의문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회민주당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2인터내셔널의 몰락레닌)

 

이러한 폭풍 속에서 소수만이 우뚝 섰다특히 이탈리아세르비아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이 그랬다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다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The Tribune) 그룹'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고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심대한 패배였다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는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그것은 당연히 재건해야 했다.

 

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인터내셔널 만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레닌, 191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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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머발트 좌파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레닌의 투쟁

 

1915년 9월 5일에서 8일까지 중립국 스위스 침머발트에서 40여 명의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모인 국제대회가 열렸다침머발트에서 대립하던 정치노선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문제는 이후 몇 년간 유럽 전역에 반향을 일으켰다그리고 여전히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

 

2인터내셔널의 주요 정당이 각자의 조국에 대한 호전적인 제국주의 전쟁 목표를 지지하는 데 동참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이 사상누각처럼 붕괴된 것은 그로부터 1년 이상이 흐른 뒤였다전쟁 전에 대다수가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세계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주의의 객관적 조건이 현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인식했다노동자에게 조국은 없고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이끌 맑스의 원칙을 확고히 지지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전쟁 직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관해 글을 썼던 트로츠키로부터 판네쿡롤랜드 홀스트호르터의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은 제국주의세계대전사회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 전쟁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태어날 용광로라고 강조했다보르차르트의 리히트스트랄렌(Borchardt’s Lichtstrahlen) 그룹으로부터 분리한 독일 좌파요한 니프(Johan Knief) 주변의 브레멘 좌파와 폴 프롤리히(Paul Frolich)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당(또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요기세스(Jogisches)의 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프롤레타리아는 정부압제자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면서 혁명적 패배주의를 기초로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조직하려 했다.

 

이 흐름 중 일부는 사회민주당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확인할 새로운 인터내셔널 설립의 시급성에 대해 다른 사회주의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보기를 들어 헤르만 호르터는 중요한 2년간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다른 이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전쟁 이후 – 또는 오히려 노동자계급 투쟁이 끝난 후에 건설될 것으로 예상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 설립을 원하는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발언할 권리에 도전할 뿐 아니라 국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통일될 수 있는지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심지어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제국주의)전쟁과의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평화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뜻인지아니면 레닌이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전쟁의 끔찍한 희생에 맞서 싸우는데 있어 먼저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부를 전복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사회주의 혁명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그는 파리 코뮨과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세계대전 자체가 혁명적인 상황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주장했다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해서 사회주의를 위한 세계적인 투쟁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계속해서 사회주의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 프롤레타리아트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해야 한다. ... " (Golos 37/38, 1914년 10)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은 유일하게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슬로건이다코뮨의 경험으로 알 수 있고 바젤 결의안(1912)에 의해서 윤곽을 드러냈고고도로 발달된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나온다내전으로의 전환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일단 전쟁이 현실화되고 나면 그 방향으로 체계적이고끈기 있고단호하게 준비해나갈 것이다.

 

이 길만이 프롤레타리아가 배외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그리고 곧 어떤 형태로든진정한 자유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 배외주의와 애국심에 맞서 단결한 노동자의 국제적인 우애여 영원하라!

 

기회주의로부터 벗어난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전쟁과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1914년 10월 작성, 1914년 11월 출판)

 

스위스 망명 중에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여러 투쟁을 했다무엇보다 먼저 해외 망명 중인 볼셰비키 중 일부는 (한때 러시아 맑스주의의 주류로 여겨졌던 플레하노프가 지지하는 입장프랑스군에 자원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915년 초 해외 사회민주노동당(RSDLP) 그룹 베른 회의에서 프랑스 볼셰비키 그룹은 평화를 위한 투쟁에 찬성하여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한 그의 요구를 반대했다.

 

인터내셔널 전선에서 임무는 본질적으로 같았다전쟁 기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맞서는 것(특히 인터내셔널은 평화 시기에 무기지만전쟁 후에는 예전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카우츠키의 말), 사회 평화를 파괴하고 노동자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할 세력을 결집하는 것즉 그는 노동자가 기존의 정부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을 기초 노선으로 새로운 국제행동의 기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5년이 되자 전쟁의 피로감이 가중되고 있다는 징후가 입증되었다독일에서는 계엄령을 무시하면서 생활비에 대한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4월부터 러시아의 파업은 증가했고 더 정치적으로 되었다. 7월에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는 전쟁 산업 위원회의 보이콧을 주도했는데이 위원회는 노동자들을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정부가 설립했다.

 

심지어 구 인터내셔널의 수명이 다한 국제 사회주의 서기국도 '평화회의를 승인하는 쪽으로 끌려들어 갔다. 1월에 중립국의 사회민주당원들은 코펜하겐에서 만나 교전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행동을 호소했다. 2월에 영국 독립노동당(ILP)은 키어하디(Keir Hardie)가 주재한 연합국의 '사회주의자대회를 개최하여 볼셰비키인 리트비노프(Litvinov)의 국제주의 선언 낭독을 막았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전쟁이 자본주의 사회제국주의와 식민지 경쟁이 만들어 낸 대립의 결과물로서 모든 나라의 공동 책임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승리한다면 자유국가 독립그리고 조약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고 명시했다.

 

연합국의 노동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인민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맞서 방어전을 벌이고 있으며이것을 정복 전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결의안은 특히 벨기에의 복원폴란드의 자치나 독립그리고 민족자결을 바탕으로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에서 발칸에 이르는 유럽의 모든 국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4월에는 동맹국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민주당원 모임과 비슷한 만남을 비엔나에서 가졌고전쟁 후 관계를 주로 다루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회 민주당이 전쟁에서그들 나라'의 역할에 관계없이 노동자 단체의 반전 회의를 제안하자국제사회주의서기국(ISB)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그들은 어쨌든 밀고 나가기로 하고 계급투쟁의 기본을 고수하며 동시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평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단체의 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조직적인 의미에서 침머발트는 썩은 제2인터내셔널의 임무를 벗어났다하지만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훼손할 의도는 없었다지노비에프가 다가오는 대회의 목적에 대해 명확한 혁명노선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구 인터내셔널과의 분명한 단절을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그럼에도 레닌은 혁명가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여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세력을 통합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인식했다대회에 이르기까지 몇 달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쟁에 관한 공동 성명서에 포함시켜야할 핵심 주제에 대한 좌파 사이의 집중적인 서신 교환과 토론이 있었다라덱과 레닌둘 다 결의안 초안을 작성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좌파 사회주의자의 참여를 조직했다네덜란드의 트리뷴 주변의 맑스주의 그룹이 연락을 취해왔다.

볼셰비키는 대표들에게 배포하기 위한 독일어 팸플릿을 발행했다 ... 팸플릿에는 레닌과 지노비에프의 사회주의와 전쟁뿐만 아니라 중앙위원회와 베른대회 결의안 등이 들어있었다또한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많은 좌파 동맹국들과 이견을 갖고 있던 민족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의 1913년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레닌의 투쟁, John Riddell, Monad Press)

 

이 마지막 주제(민족 문제)는 제3인터내셔널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던 논쟁거리였다그러나 침머발트 대회를 앞두고 레닌은 다수에 양보해야 했다좌파가 제시할 성명서의 문구를 둘러싼 사전회의 토론에서 8명의 대표단 중 대다수는 레닌보다는 라덱의 초안을 선호했다최종본은 피억압억압 민족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이 정도는 혁명적 패배주의의 무늬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다수에게 걸림돌이 아니었다좌파의 결의안은 거부되었다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침머발트 선언은 주로 트로츠키가 초안을 작성한 타협의 결과였다그럼에도 좌파는 문제시되는 조항을 추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명했다. 1915년 9레닌은 침머발트를 '첫 번째 단계'라고 묘사했다.

 

모든 모순과 소심함에 대해 ... 그것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기회주의에 맞선 진정한 투쟁.” (레닌 저작집제 21)

 

두 번째 침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진전은 대부분의 국제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독립적인 좌파를 조직했다는 것이다침머발트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레닌지노비에프와 라덱으로 구성된 침버발트 좌파 서기국을 설립했다. 1916년 전쟁으로 인한 위기와 레닌이 예측한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첨예화되었다사회민주당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침머발트 다수와 좌파 사이의 큰 차이는 균열이 되었다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레닌은 침머발트의 늪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로만 구성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을 즉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그들의 다수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좌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은 '코뮤니스트'당 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1919년은 전후 혁명 물결의 최고정점이었고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 총회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진보된 입장을 표현했다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완전한 단절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의해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이러한 강령적 명확성은 혁명물결의 거대한 기세를 반영했지만그것은 낡은 제2인터내셔널 정당 내부 좌파혁명가들의 정치적 이론적 노력과 투쟁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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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며

 

침머발트 좌파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을 향한 발걸음이었다는 점이다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의 의의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침머발트 좌파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가기까지 너무 늦었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이 결정적 요인이었다이러한 사태 때문에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고 퇴행을 거듭하던 끝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혁명가들에게 침머발트의 진정한 의의는 무엇인가그것은 여전히 국제 노동자계급에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같은 국제혁명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19년과 비교하면 현재의 노동자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심각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자본주의의 참상에 맞선 투쟁은 산발적이고 고립되어 있다계급 역관계의 커다란 불균형 상태는 100년 전보다 오히려 더욱 계급투쟁에서 정치적조직적 역할을 할 혁명당을 필요로 한다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본가계급뿐 아니라 (2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한때 노동자계급의 조직이었던 노동자/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에 스며들기 때문이다이들은 시시때때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항시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는데 실질적 도움을 주고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이들이 전취해간 계급의 혁명 의식을 되찾고다가올 자본가계급과의 전면전을 위해서는 명확한 강령과 국제주의적 행동일치 능력을 가진 국제혁명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계급투쟁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자혁명적 소수인 코뮤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쇠퇴와 제국제주의 전쟁그로 인한 자본주의 참상과 노동자계급의 현실 앞에서 수동적 관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레닌은 계급 전쟁에서 휴전은 없다고 했다.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는 슬로건은 오늘날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한 혁명가들에게 모든 상황에서 과거의 공식을 단순히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다하지만일상에서조차 노동자계급에게 국가 방위나 전쟁 준비에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코뮤니스트의 기본 원칙이다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조국이 없고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계급 전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의 국제주의자 코뮤니스트들은 100년 전 침머발트 좌파가 했던 것처럼 미래의 국제혁명당 건설을 위해 인내심을 갖고 혁명세력을 재편성해야 한다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국제주의 원칙을 사수하며 전쟁을 내전(계급전쟁)으로 전환하는 공동행동과 국제적 연대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당이 아니지만당을 위해 존재한다우리와 같은 원칙을 가진 동지들은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을 위해코뮤니스트당-국제혁명당 건설을 위해 함께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우리는 침머발트 좌파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총회의 정신을 계승한다.

 

미래의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해 투쟁하자!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을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2019년 5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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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스탈린주의 비판 – 코뮤니즘 원칙을 세우며

스탈린주의 비판 – 코뮤니즘 원칙을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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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 등장 배경

 

1915년 침머발트 대회에서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평화주의에 맞서 레닌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이며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이러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국제 부르주아에게 제국주의 대학살에 마침표를 찍게 했다레닌의 슬로건(전쟁을 내전으로)은 현실이 되었다이처럼 프롤레타리아는 침머발트 좌파의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그들의 원칙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이 글은 전쟁과 온갖 억압에도 코뮤니즘 원칙을 지키고 건설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 100주년을 맞이하여 코뮤니즘 원칙에서 이탈하고 코뮤니즘 참칭으로 인한 스탈린주의 폐해의 심각성을 다루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혁명적 법과 제도적 조처를 한다하지만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사회주의로의 혁명은 퇴행하게 된다. 1918년 봄 테일러주의의 재도입과 1인 경영 강제그리고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려는 임시조치들즉 정치반대 세력 분쇄차르 관료의 재고용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인센티브 부과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실질적 권력을 깨뜨리고 노동자정부와 노동자 사이 틈새를 벌려놓았다이 과정은 3년간의 내전 동안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죽음으로 더욱 굳어졌다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판단 속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당이 노동자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일국사회주의

 

1924년은 일국사회주의 교의가 태어난 해이다스탈린은 그 교의의 레닌주의 기원을 끊임없이 강조했다세계혁명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레닌의 가정에서 시작한 스탈린에게혁명적 봉기의 조류가 일시적으로 빠져나갔고 혁명을 성공시킨 유일한 국가인 소련은그 자체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보루였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공격에서 보호되어야만 했다이러한 환경에서 코민테른과 각국 코뮤니스트당(공산당)의 주된 과업은 혁명적 봉기를 조급하게 추진하는 게 아니라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다이것은 코민테른과 각국 코뮤니스트당의 혁명적 사명이 소비에트 국가와 이익에 종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1)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이것은 사회주의가 승리한 세계혁명의 열매임을 주장한 1917년의 볼셰비즘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결국 일국사회주의는 세계적 규모에서만 사회주의가 건설 가능하다는사회주의의 고립된 섬은 불가능하다는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이념을 포기함을 의미했다.

부르주아 정치인과 국가에 일국 사회주의’ 정책은 스탈린이 더는 세계 혁명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실제로 1941년 스탈린주의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일시적 협정에 따라 위대한 애국 전쟁의 깃발을 들었으며 그 끝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지구를 분할해 차지하는 데 참여하였다.

 

스탈린주의의 코뮤니즘 참칭으로 인한 문제점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하여 국제 부르주아지는 혁명이 모든 것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러시아혁명은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로 끝났으며 뿐만 아니라 대중 테러재판 쇼역사 위조다른 의견 억압거대한 군사적 병기창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지만품위 있는 소비자 상품을 제공할 역량이 없었던 경제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그리고 1981년 폴란드에서처럼 프롤레타리아 반란을 분쇄하는 탱크를 사용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설립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혁명으로 등장한 국가 내부에서 반혁명이 성장했고거의 국가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 된 볼셰비키 당이 관계되어 있어서 스탈린주의 정권은 10월 혁명의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이러한 거짓된 동일시는 러시아 외부의 스탈린주의 정당들에 급진적이라는 광택을 내게 해 주었다또한 자본주의와 각각 자신의 국가와 민족적 이해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붉은 10월로 포장할 수 있었다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붙들고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여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또는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라고 여기는 비극적이고 재앙적인 결과로 돌아왔다혁명의 진정한 패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의 승리는 내부에서부터 10월의 연장선이라는 거짓 탈을 뒤집어쓴 채 일어났고전 세계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파괴적인 혼란을 낳았다이것이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과 같다는 거대한 거짓말의 객관적인 밑바탕이었다그렇기에 서방 지배계급의 주요 파벌들에게 스탈린주의 정권은 코뮤니즘과 같다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말을 공표할 자격을 줄 수 있었다이러한 경향들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과정을 깨닫는 데 필요한 국제적 역사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심각한 방해물이었다.  

 

서구의 많은 이에게는 스탈린주의 정권을 특징짓는 비참함결핍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더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자본주의 경쟁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동유럽 정권이 80년대 말 몰락했을 때맑스주의 그리고 코뮤니즘 실패의 최종적 증거라는 거짓말이 전 세계로 증폭되었고지금까지도 국제 부르주아지는 스탈린주의를 코뮤니스트로 묘사하는 것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이러한 선전은 노동자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으며노동자계급은 1980년대에 이미 더 높은좀 더 통일된 수준으로의 즉각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전망역사적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기 어려움을 깨달았다현재 사회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널리 알려진 편견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지배계급이 체제의 착취를 당하는 계급의 의식에 맞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이다전제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그들의 중심 테마는 민주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리고 지배계급이 열심히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화의 근거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 국가 대 코뮤니즘 사회

 

스탈린주의는 맑스와 엥겔스 시절부터 노동자 운동 속에서 방어해 왔던 코뮤니즘과 비교했을 때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코뮤니즘이란 인간 소외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물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적대 세력이 되는 어떠한 사회적 질서도 극복하는 것을 의미했다정치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국가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왜냐하면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의 명확한 표현이며광범위한 대중이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정치적 기관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은 개인사회무엇보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지배의 전형이었다경제적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인류가 비인간적인 경제적 법칙과 이윤과 시장의 냉혹한 요구에 더는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이것은 코뮤니즘에서는 돈시장또는 임노동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생산성 전쟁이 전체 경제 체제를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국가 권력은 임금노동자 계급에서 추출한 잉여가치 위에 세워져 있었다자본은 본질에서 사회적 관계이지 단순히 법적 소유의 형태가 아니다임금노동자들에게는 노동력이 사적 기업가에게 팔리든 국가 관료에게 팔리든 차이가 없다자본주의 착취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그리고 코뮤니즘이 인류를 여러 민족으로 분리를 끝내고국경 철폐를 의미하는 한 스탈린주의 정권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광신적 조달자이며그들의 국경의 방어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세계라는 투기장에서 그들의 민족적제국주의적 이해를 추구한다.

 

스탈린주의 교훈

 

소련의 경험은 첫째일국사회주의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 직면하여 오래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프롤레타리아가 한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였을 때그 모든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반드시 혁명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긴박한 필요에 종속되어야만 한다한 국가 또는 지역에 제한되면 혁명은 불가피하게 외부의 공격이나 내부의 타락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국가의 이름으로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소련에서의 국가는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일국 사회주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주의 이론 및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노동자 국가에 대한 환상은 이러한 은폐에 모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둘째명령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며사적 소유 철폐와 국가 소유로의 전환만이 아니라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국가 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지배 아래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 체제이어야 한다셋째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국가기구가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며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의 관계 문제의 복잡성과 난해성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가들은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으며이것을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넷째어떠한 노동자혁명도사회주의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북한 같은 착취체제는 부르주아 체제와 똑같이 노동자혁명에 의해 타도해야 할 체제일 뿐이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코뮤니스트 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당의 역할은 필수적이다하지만 당이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권력을 당이 가질 수 없다따라서 코뮤니즘 사회 건설은 혁명의 시작과 함께 사회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계급이 집단적으로 행사하는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노동자평의회가 모든 정치와 경제와 산업을 장악하고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에 걸쳐 모든 권력을 행사해야한다코뮤니즘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사적소유의 철폐를 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이며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노동자평의회의 전 사회적 권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자신의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이행기 국가에 대한 독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4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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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에서 1923년 10월이 대실패로 끝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당내 투쟁이 강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안정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코민테른을 위기로 빠뜨렸다이러한 상황에서 코민테른의 볼세비키화가 진행된다볼세비키화란소비에트 러시아가 코민테른과 그 회원국 코뮤니스트당을 지배하려는 경향이며특수하게는 ECCI(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에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대표의 손아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코민테른과 외국 코뮤니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요새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이에 따라 점점 소비에트 국가 이익은 코민테른의 기본 사명인 세계혁명보다 우선하였다유럽 혁명운동의 패배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의 과정은 코민테른을 구성하는 당에게 소비에트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과하고동시에 그 당들이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하면서 코민테른에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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