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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10월 혁명 100주년에 즈음하여 : 1917년의 명백한 유산

  • 10월 혁명 100주년에 즈음하여 : 1917년의 명백한 유산

     

     1917 10월혁명.jpg

     러시아 혁명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해는 1917년이다. 하지만, 이 혁명을 최초의 제국주의 간 세계대전(1914-18)을 끝낸 1917년부터 1921년(중국에서는 1927년까지 계속)까지의 노동자계급 투쟁이라는 세계적 고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고조는 독일 혁명(1918-21), 이탈리아 북부의 공장 점거(1919-20), 1919년 영국의 전국적 파업 물결, 헝가리 혁명(1919), 그리고 1919-20년 프랑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스페인, 미국(1919)에서의 중요 파업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은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1908-14년 영국, 아일랜드와·스코틀랜드의 생디칼리스트 파업 물결, 1914년 이탈리아의 “붉은 주간,” 그리고 어떤 이론가의 산물도 아닌 투쟁 속 노동 계급의 실천을 통해 발견한 노동자평의회와 무엇보다 소비에트를 역사적 의제 위에 올린 1905-07년의 러시아 혁명과 연관된 세계대전 이전의 정치적 동요를 지속시하고 증폭시켰다.

     

    영국의 조지 6세(George VI)와 같은 가망 없는 목격자가 말하듯이, “전쟁에 감사를 드립니다! 전쟁이 우리를 혁명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급증했던 투쟁들뿐이다. 자주 잊고 있지만, 1905-14년의 시기는 동시대인들에게는 이란(1906), 멕시코(1910-20), 중국(1911)의 혁명, 인도(1909)의 봉기를 포함해 혁명이 증가하는 시대로 나타났다.

     

    반-식민지와 식민지 세계에서의 이러한 투쟁은 1925-27년에 절정에 이르는 중국에서의 오랜 정치적 동요 기간, 1918년 일본의 쌀 폭동, 1922년에 일어난 (다소 문제가 있는) 남아프리카의 총파업1), 1922년 브라질 좌파 장교들의 쿠데타, 1925년까지 터키의 투쟁 물결2), 북부 이란의 질란 소비에트,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좌익 성향의 친-소련 쿠데타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나는 이들 반란과 혁명에서 현재까지 최고의 유산은 헤르만 호르터, 안톤 판네쿡, 아마데오 보르디가와 같은 인물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독일-네덜란드 변형(變形)과 이탈리아 변형 두 가지를 지닌 이른바 좌파 코뮤니스트들이라고 본다. 두 변형이 공통으로 주장한 것은 러시아에서 “이중 혁명”을 이뤄낸 노동자-농민 연맹과는 달리 서구의 노동계급은 홀로 서 있었고 이미 토지를 가진 농민층과 동맹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아스니코프 주변의 ‘노동자 집단’과 같이 서구의 흐름에 동조한 러시아인도 있었다.

     

    (실제로 훌륭한 전략가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조직 이론 및 실천 때문에 반혁명을 촉발시킨, 레닌과 트로츠키의 모호한 역할을 조금이라도 깊게 평가하는 것은 이 짧은 글의 길이를 두 배로 늘이는 일이라서 유감스럽지만 생략한다.)

     

    좌파 코뮤니스트 조류는 1921년의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분쇄를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상징이 된 세계 혁명 물결의 퇴조 속에서 러시아 중심의 제3 인터내셔널 헤게모니와 그것이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수십 년의 스탈린주의적 반-혁명에 의해 묻혀버렸다. 부차적으로, 1917년에 노동 계급이 인구의 10% 이하이던 나라가 주 무대가 되었다.

     

    이 흐름에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

     

    룩셈부르크는 사회 민주주의와 완전히 단절하는 1918년 이후의 명확한 관점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일찍(1919년 1월) 살해당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대대적 파업에 대한 그녀의 저술들, 민족주의에 대한 그녀의 거부, 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그녀의 두 저술은 오늘날도 그것들을 썼던 때만큼 의미가 크다. 세계대전 동안 감옥에서 보낸 그녀의 편지에 담긴 놀라운 인류애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볼셰비키 혁명이 첫날부터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말하는 (또는 보기를 들어 오토 륄레 같은) 좌파 코뮤니스트들에게는 동의하지 않는다. (편집자 주 -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는 흐름은 “평의회주의 경향”으로 좌익공산주의에서 출발했지만 극단적인 오류에 빠진 정치사상이며, 현재 코뮤니스트 좌파 흐름은 러시아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1920년대 초에 이러한 성격 규정이 발전했고, 러시아의 내전(1919-21) 기간에 서구의 좌파 코뮤니스트들은 러시아 백군들에게 무기와 탄약을 운반하는 기차들을 폭파했다. 소비에트의 짧았던 권력과는 별도로 1917년은 러시아 농민 코뮌의 광대한 확장을 나타냈는데, 농민 코뮌은 1930년 스탈린의 “집단화” 실시 이전까지는 러시아 영토의 98%를 통제했다.3)

     

    대체로 이들 이름과 흐름 대부분은 현재로서는 호박 속 화석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오늘날을 위한 지침으로써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좌파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좌파(“보르디가주의자들”)의 통합 가능성을 가리킨다. (나는 두 흐름이 서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는 보르디가주의 경향과 데이먼이 창설한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 경향이 있으며, 후자는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좌파의 영향을 받은 조직(CWO) 등과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을 만들어 함께 활동 중이다.) 이러한 요소에는 개별 작업장에 나타난 노동 분할(그람시의 자랑거리인 공장 평의회에 대한 보르디가의 비판)을 극복해내는 실업자와 은퇴한 프롤레타리아의 지역 조직인 소비에트, 소비에트의 부속물인 노동자평의회, 러시아의 1917년을 규정하는 “이중 혁명” 이론, 그리고 모든 “범계급” 동맹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에 대한 강조 등이 포함될 것이다.

     

    나는 또한 소련(그리고 오늘날 중국과 베트남까지 이르는 이후의 파생 현상들)을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본 보르디가의 성격규정도 지지한다.

     

    이런 관점은 “노동자 국가”라는 트로츠키주의적 개념도 거부하면서, 독단적이며 내가 보기 에 손쉬운 “국가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피하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늘날 수습할 수 있는 정통적 연속성에서 단절되지 않은 실마리는 없으며 단지 지침일 뿐이다. 새로운 국제적 통합은 진행 중인 작업이며, 이것이 하나의 기여다.

     

    1917년의 격동 이후 100년

     

    2017년, 트럼프, 푸틴, 시진핑, 두테르테, 모디, 에르도간, 아사드와 네타냐휴의 세계에서 다음세대 세계 노동계급의 고조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극히 “비-동시대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심스러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천 건의 파업을 포함해 매년 더 많은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중국(2016년에 150,000건)을 선두로, 지난 10년간 3~4 차례의 총파업을 벌인 베트남4),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섬유 및 의류 수출 부문에서 수많은 파업과 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방글라데시, 그리고 마루티 스즈키에서와 같은 파업을 겪는 인도5)가 있는 아시아만 보면 된다.

     

    과제는 1848년 이후의 모든 혁명적 상황에서 임금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새로운 투쟁 형식을 찾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 “불변적 요소”를 규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자본의 축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한다면, 세계의 임금노동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어두운 이면”인 집단적 실천 주체이며, 이들은 노동계급을 상대로 계속 시도되는 “우버화(Ueberization)”로 귀결되는 1970년대 이후의 파편화 전략에 의해 더욱 전도되어 소외된 형태로 되어 있다. 이윤, 금융, 부동산(지대)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는 인간 노동의 결과물들이 거꾸로 걷는 것처럼 보이고, 여기서는 파열이 일어나는 예외적 국면에서만 자신들의 일상적 행위로 그런 소외된 형태를 떠받치는 사람들의 “대자적 계급”이 마법 신발(7리그 신발)을 싣고 똑바로 서서 현실을 활보할 수 있다. 코뮌을 촉발시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905-07년 러시아 및 폴란드에서의 분출로 이어진 1904-05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 영국의 봉쇄에 맞서 확실한 죽음을 맞느니 차라리 폭동을 일으킨 키엘의 독일 수병들은 체제의 논리에 의해 한계로 내몰리다가 그것을 뒤집은 프롤레타리아의 과거 사례들이다.

     

    오늘날 두 제국주의 세력 간 세계대전 차원의 전쟁은 말할 수 없는 재앙일 것이며,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질문에 아마도 분명히 후자에 찬성하여 대답할 것이다. 오늘날, 그리고 오랜 시간 야만인들이 승리해왔다. 미국의 슬픈 예만 들자면, 우리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나라”가 근무 중 사망에서 늘 “선진 자본주의” 세계를 이끄는 것을 보고 있다. 최고경영자와 노동자의 소득 비율은 1970년대의 40 대 1에서 오늘날은 200 또는 300대 1로 증가했고, GDP에서 노동자의 몫은 1945년 이래 최저다. 현재의 거대한 허리케인 하비와 어마는 “기후 현상들”의 급증이 기후 변화의 증거가 필요하다면 추가적 증거임을 강조해주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코뮤니즘(공산주의)을 무엇보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적 운동”(『코뮤니스트 선언』)으로 보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계속되는 위에서 언급한 파업 물결들 이외에도 2001년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piqueteros) 운동과 이후 2014년 마이클 브라운의 총격 살해로 매일 거리로 나온 미주리주 퍼거슨 시의 흑인 청년들, 현재 진행 중인 마크롱의 최우선 의제가 된 국가에 의한 노동법 개악에 맞선 프랑스 노동자와 청년의 저항, 이집트의 말할라 섬유공장에서 이어지는 전투적 노동 투쟁과 2017년 3월의 빵 폭동, 그리스에서 유럽연합에 의한 긴축에 대항해 일어난 수년의 파업과 폭동,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광산노동자 파업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2017년 초 멕시코에서 휘발유 가격이 또다시 오른 데 반대해 일어난 폭력적인 전국적 저항, 2017년 3월 공장 경비를 공격한 베트남 노동자들도 언급할 수 있다.6) 이것들은 “오래된 두더지”가 죽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몇몇 예일 뿐이다.

     

    우리는 그래서 1917-21년의 분출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바라볼 때, 먼 과거에 일어난 한 역사적 파열을 행복한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투쟁들,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며, 자신이 그 해답임을 아는” 다가오는 계급의 반란을 통합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주>

     

    1) 남아프리카의 파업 노동자들은 “백인의 남아프리카를 위해 세계의 노동자는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2)http://breaktheirhaughtypower.org/socialism-in-one-country-before-stalin-and-theorigins -of-reactionary-anti-imperialism-the-case-of-turkey-1917-1925/에서 이 시기를 다룬 나의 글을 볼 수 있다. 로렌 골드너

     

    3)http://breaktheirhaughtypower.org/the-agrarian-question-in-the-russian-revolution-from- materialcommunity-to-productivism-and-back/에 실린 나의 글 참조

     

    4) insurgentnotes.com에 있는 Art Mean의 새 글을 볼 것.

     

    5) Insurgent Notes no. 15, insurgentnotes.com에 있는 [인도의 코뮤니스트 집단] 카무니스트 크란티(Kamunist Kranti)의 글 참조.

     

    6) 이들 사례와 다른 사례들에 대해 블로그 “Nous sommes les oiseaux de la tempete qui s’annoncent”에 감사드린다. https://mail.google.com/mail/u/0/#inbox/15e65efbe9e4d76f.

     

    2017년 9월

    로렌 골드너

     

     

    <출처>

     

    http://breaktheirhaughtypower.org/on-the-extreme-margins-of-the-centennial-of-the-october-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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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년, 87년 노동자대투쟁 30년, 승리와 실패의 유산 모두를 기억하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하자!!!

  • 러시아혁명 100년

    87년 노동자대투쟁 30년

    승리와 실패의 유산 모두를 기억하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하자!!!

     

    문재인 정부와 노조하기 좋은 나라

     

     작년 10월 29일 첫 집회를 시작으로 거대하게 타오른 촛불 투쟁은 연인원 1,700만 명이라는 기록과 ‘계급투쟁’ 없는 대중행동의 한계를 남기며 박근혜 탄핵과 함께 막을 내렸다. 촛불 투쟁이 사상 초유의 규모로 분출한 계기는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면서이지만, 근본에는 자본주의 위기가 있다. 1,000만 비정규직,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급증하는 실업, 몰락하는 자영업, 생존권 위기에 몰린 빈민과 노인, 철저한 계급사회임을 증명하는 구조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이렇게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가 촛불 투쟁의 배경이었다.

     

     촛불 투쟁에서 노동자의 요구는 현재 위기와 고통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문제로 나아가지 못했다. 노조 할 권리,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최소한의 기본권 요구에 머물렀던 주류 노동자 운동은 대선을 지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까지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현안과 쟁점을 계급투쟁으로 다시 한 번 모아내기 위한 근본적인 반성과 쇄신보다는 ‘정권교체-적폐청산’ 환상에 기대어 ‘노조하기 좋은 나라’라는 ‘국가적’ 캠페인에 나선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시작부터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시킨 치명적 위기를 떠안고 출발했다. 그가 어떠한 개혁 정책을 펼치더라도 그 해결책을 이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찾아야 하기에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세계 자본주의 위기와 국내 정치경제 위기를 동시에 떠안은 문재인 정권은 동아시아 지역 제국주의 대립 격화와 북핵-전쟁위기까지 가중되는 상황에서 계급적인 ‘저항’에 부딪히기 전에 노동계급 일부를 ‘포섭’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래서 자신의 정치 기반이자 정권교체 주역이었던 촛불 민심을 끌어안는다는 명분으로 노동자 운동 내부를 포섭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교훈은 어떠한 정권에서라도 ‘사회적 타협(합의주의)’의 결과는 투쟁을 교란하고 결국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절차일 뿐이라는 걸 증명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30일 기업과 노동계 등 경제 주체들을 향해 '사회적 대화'에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양극화가 심화하고 내수가 위축돼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기업들이 먼저 피해를 보게 되고, 기업이 어려워지거나 해외로 나가면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된다.’며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짐을 나누고, 격차를 줄여가는 노력을 할 때 국가 경제가 더 발전하고,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또한 정부에서도 전체 노동자의 90%에 달하는 비조직 노동자들을 어떻게 사회적 대화에 참여시킬 것인지 그 방안을 강구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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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촛불 투쟁에서 조직노동자는 박근혜 정권의 공범인 자본가계급에 맞선 전면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촛불이 100배로 커지는 동안 자신의 동료인 ‘투쟁사업장 동료를 위한 연대 투쟁’에도 적극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촛불 투쟁 이후 금속노조와 전교조 등 일부 정규직 노조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과 조직을 가로막는 일까지 발생했다. 정권이 바뀌자 민주노총 내 노사협조주의-조합주의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정규직을 위한 일자리 기금을 내겠다고 선언했고, 민주노총은 일자리위원회에 참가했고, 노동운동 내·외부 명망가와 상층 관료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들처럼 노동자 대표(?)로서 적당히 정부를 비판하면서 노동자 투쟁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그 영향 아래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아진다면 정부로서는 큰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투쟁 회피 세력과 제대로 된 투쟁 없이는 원칙적인 투쟁, 계급적인 요구는 내부 협조자와 조직질서에 의해 차단당할 것이다. 결국 ‘노조하기 좋은 나라’란 이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조합이 공식적인 정부 파트너(정부에 포섭, 통합되어) 역할을 하며 ‘노동자를 통제하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유산

     

     올해는 ‘거제에서 구로까지 족쇄 깨고 외쳤던’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노동자 투쟁이었다. 70여 일 동안 3500여 건의 쟁의가 발생했고, 122만 명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지난 촛불 투쟁과 비교해도 계급적으로 훨씬 ‘각성’되는 투쟁이었고, 준법-평화시위가 아니라 점거 파업, 거리 투쟁 등 선 투쟁-후 협상, 비공인-탈법 투쟁이 주요 투쟁 방식이었다. 물론 단위사업장 요구를 넘어 전 계급적 요구의 투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투쟁 속에서 얻어낸 노동자 민주주의를 계급적으로 확산하지 못하고 ‘(민주)노동조합’ 형식에 갇힌 한계도 있었다. 문제는 지금 노조운동도 여전히 87년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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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노동 운동 역사의 필연이었다. 이미 1970년에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있었고, 70, 80년대 치열하고 헌신적인 노동 운동의 밑거름이 87년을 가능케 했다. 지금의 암울한 노동 운동 현실 또한 역사의 필연으로 볼 수 있다. 87년과 다른 점은 30년 전에는 상승하는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필연이었고, 지금은 ‘퇴보하는 운동의 결과’라는 반대의 내용이다. 87년 이후 급격히 성장한 대공장 정규직 중심 민주노조운동은 퇴보의 길을 걷다가 근본 쇄신에 실패하고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위기로 인한 불안정노동의 구조적인 증대와 1998년 이후 노동자운동 패배의 연속은, 노동자 조직화의 기나긴 정체현상과 계급운동의 자신감 결여를 초래했다. 이제 과거 민주노조 운동의 뼈저린 ‘각성과 영광’을 되살리는 건 고사하고, 87년 역사적 대투쟁의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더욱이 운동을 파탄으로 이끈 세력과 전면전을 이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투쟁’은 내부의 조합주의-관료주의에 막혀 있고, 소수 의식 있는 노동자(계급운동가)의 헌신적 투쟁도 여전히 ‘노조운동’ 안에 갇혀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자 반드시 기억하고 극복해야 할 민주노조 운동의 유산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그리고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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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또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자 세계혁명의 미래’를 꿈꾸게 했던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7년~1920년은 전 세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가 일어나는 시기였고, 1917년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의 첫 단추였다. 하지만 그것은 독일 등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좌절된다. 1차 대전 패배와 내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러시아는 결국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의 후진적이고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 자본주의적 이행 형식을 들여온다. 이러한 상황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5개년 계획 도입과 농업 집산화로 소련이 사회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지만, 노동자 권력이 아닌 당 독재의 강화를 가져왔다. 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결정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되었다.

     

     1919년은 세계적으로 혁명 물결의 정점이었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후 코민테른) 창립총회의 입장은 당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사회-애국주의 반역자와의 단호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요구되는 대중행동 방법,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등 강령적 명확성은 거대한 혁명 물결을 반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낡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내부 혁명적 좌파(이후 코뮤니스트 좌파로 자리매김했다.)의 투쟁과 공헌으로 준비된 결과였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원칙은 혁명물결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으로 변질된다. 이 과정에서 소속 당에 러시아 국가 방어를 요구했고,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코민테른은 결국 코뮤니스트 좌파, 혁명운동 세력을 배제하고, 국제주의를 포기한다. 타락해가는 코민테른에 맞서 코뮤니스트 좌파들은 투쟁했으나 분리해 나왔고, 독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등장과 함께 반혁명의 시기가 열린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무게에 눌려 결국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한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 승리와 실패의 유산 모두를 기억하고자 한다.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첫째, 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오래 생존할 수 없으며,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한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였을 때, 모든 정치, 경제 정책은 반드시 혁명을 전 세계로 확산하는 데 복무해야만 한다. 둘째, 사회주의는 명령경제가 아니며, 생산수단이 사회화되고 국가 권력이 노동계급 지배 아래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반(半)국가-국가소멸로 향하는 노동자평의회의 국제 권력이어야 한다. 셋째, 러시아 혁명에서 국가기구는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고, 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앞으로 혁명에서도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으며,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코뮤니즘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 코뮤니스트 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당의 역할은 필수이지만, 당이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의 집단적 권력을 당이 가질 수 없다.

     

     세계적인 혁명 물결이 패배한 후, 이른바 사회주의, 코뮤니즘(공산주의), 그리고 맑스주의라는 용어만큼 더 왜곡되고 남용된 사례는 없다. 과거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 그리고 현재 중국, 쿠바, 북한과 같은 나라가 사회주의, 코뮤니즘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역사상 가장 큰 ‘거짓말’이다. 거짓의 핵심은 스탈린주의 국가가 ‘10월 혁명의 연속선’ 위에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체제가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되어 거짓이 진실인 듯 오랫동안 유지된다. 또한, 스탈린주의 정권이 아무리 타락하고 변질되었더라도 그것이 노동자 국가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도 거짓을 응원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실제로 자본주의였지만, 왜곡된 형태의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다른 사회를 대표하는 거로 보였다. 스탈린주의 정권을 특징짓는 비참함, 결핍, 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경쟁, 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걸로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련과 동유럽 정권이 몰락했을 때 그 정권의 실패가 맑스주의 또는 코뮤니즘의 실패였다는 ‘거짓말’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코뮤니즘에 대한 오해와 반감(증오)은 더욱 커졌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거짓 선전은 노동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식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도 노동계급의 투쟁은 완전히 멈추지 않았으며, 2006년 이후 투쟁은 되살아나 세계로 넓혀져 갔으며 2009년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선 세계 노동계급 투쟁은 5년, 9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1년 대중투쟁의 부활로 잠시 희망이 보였으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민주주의 환상) 공세와 스탈린주의(민족주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다. 극단적 테러리즘과 포퓰리즘은 대중의식을 더욱 황폐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68혁명에서와 같은 성장하는 계급과 새로운 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 몰락을 거듭한 정규직 대공장 노조운동과 진보정당(민족주의, 사민주의) 운동을 거부하는 노동자의 전반적인 불신 현상 속에서 새로운 세대와 주체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새로운 운동에 대한 요구, 그리고 기성 운동에서 소외된 비정규노동자, 실업자, 빈민, 장애인, 소수자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 출현의 기반이지만, 낡은 형식과 무너진 계급의식에 막혀 분출하지 못하고 있다. 2017년 노조하기 좋은 나라 캠페인은 투쟁을 통해 스스로 ‘투쟁할 권리’를 찾고 계급적 단결을 통해 ‘노동해방’을 (추상적으로나마) 지향했던 87년 노동자 대투쟁 정신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민주노조 운동 실패의 산물이다.

     

    승리와 실패의 유산 모두를 기억하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하자!!!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계급투쟁과 혁명운동의 미래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지금의 극심한 침체는 낡은 운동의 몰락과정에서 겪어야 할 필연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실패의 유산을 반복하지 말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낡은 운동인 ‘사회-애국주의 반역자와의 단호한 단절’로부터 시작했듯이, 낡은 운동과 지금 당장 단절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무너진 운동의 복원은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제는 ‘거짓’ 사회주의 운동의 재구성과 낡은 조합주의 운동의 쇄신이 아니라 그것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주체는 소수라도 현실에서 원칙을 지키며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의식적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 이에 우리는 낡은 운동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하고 계급 안에 튼튼히 뿌리내리는’ 장기적인 운동에 나설 것이다. 그 첫 걸음은 노동자 투쟁을 교란하고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모든 형태의 조합주의와 의회주의, 그리고 계급투쟁을 막다른 골목에 밀어 넣고 코뮤니즘을 왜곡하는 이른바 진보 좌파 정치, 스탈린주의(민족주의) 세력과 철저히 단절하는 일이다.

     

    “코뮤니스트로서 우리의 임무는 노동자 대중 사이 일상적인 투쟁의 슬로건을 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일상적인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으며, 그것으로는 절대 자본주의의 몰락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지적해야 합니다. 코뮤니스트들은 이러한 일상적 투쟁에 참여하고 투쟁의 선두에서 전진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지들! 우리는 일상적인 전투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투에서 대중의 선두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중에게 코뮤니즘의 길과 위대한 목표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3차 대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마이어-베르크만 연설 중에서)

     

     현재 자본주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 운동은 노동조합 수준에 갇혀서는 안 되며, 정치적으로도 운동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 코뮤니스트 혁명의 목표를 분명히 밝히는 운동이어야 한다. 이 과정은 어려운 계급투쟁 속에서 주체가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는 과정이기 때문에, 단기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매우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노조운동을 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나아가자. 계급분열과 국가주의를 넘어 국제주의를 사수하자. 아래로부터의 대중행동, 계급투쟁이 있는 모든 곳에서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의 목표를 분명히 밝히자. 코뮤니스트 강령,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혁명적 실천에 기반을 둔 혁명조직(당)을 건설하자. 이것이 ‘코뮤니스트 노동자운동’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30주년, 민주노조운동을 넘어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으로!

    러시아혁명 100주년, 계급분열과 국가주의를 넘어 국제주의 사수!

                        자본주의를 넘어 세계혁명과 코뮤니즘으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억하고 패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

                        그리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하자!

     

     

    2017년 1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러시아혁명 100년 성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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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선언 (2)

  • 10월을 방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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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혁명을 모욕하는데 중요한 요인은 10월 봉기가 곧 스탈린주의 정권의 전조가 된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착수한, 배고픈 볼셰비키 당 권력에 의한 쿠데타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의 해석도 1917년 2월, 자발적인 대중 파업에 참여하고 ‘민주적’ 평의회(소비에트)를 만들었던 노동자들에 대한 큰 공감과 이해를 보여줄 수 있다. 이 운동은 차르 독재 정권을 쫓아냈고,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와 같은 저명한 자유주의 역사가의 관점에서도 이 운동은 진실로 민주주의적 의회 국가의 등장을 위한 토대를 준비할 수 있었고, 곧 수십 년간의 고통과 공포에서 러시아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볼셰비키가 찬란한 희망을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교의로 파괴했으며, 선동적인 슬로건으로 대중을 속였다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실제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때에는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계층의 완전한 정치적 각성이 있었다. 그 과정은 존 리드가 쓴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이 시기의 러시아 사람들은 글을 배우려 했다. 그들은 세상을 더 알기 위해 정치, 경제,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러시아를 뒤덮은 것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혁명과 함께 폭발했기 때문이다. 첫 6개월 동안 스몰니 회관 한 곳에서만 몇 톤, 몇 차분, 몇 열차분의 문서들을 전국으로 배포했다. 물을 빨아들이는 뜨거운 모래처럼, 러시아는 지칠 줄 모르고 읽을거리를 빨아들였다.… 온갖 연설들도 쏟아졌다. 칼라일이 말한 ‘프랑스에서 한 연설의 홍수’도 당시 러시아에 비하면 냇물에 불과했다. 수많은 강연, 논쟁, 연설 들이 극장, 원형 광장, 학교, 술집, 소비에트 집회장, 조합본부, 병영, 전방의 참호, 마을의 광장, 공장의 모임에서 진행됐다. 특히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4만 명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사회민주당, 사회혁명당, 아나키스트들과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주장을 경청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모든 길모퉁이는 몇 달 동안 공적 발언을 위한 연단으로 사용됐다. 또 기차와 전동차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즉석 논쟁을 벌였다.… (모든) 회의에서 발언 시간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책갈피, 서찬석 옮김(p.29-31중 발췌))

     

    이것이 계급투쟁의 정치화가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긴급한 경제적 필요에 쫓겨 어떻게 사회가 전체적으로 관리될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전문가와 직업 정치인들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통치하도록 ‘권력을 넘겨주는’ 의회 체계라는 거짓 민주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연합, 토론, 그리고 자기-조직화라는 프롤레타리아 방식을 통해서이다. 여기서는 작업장, 지역, 군대, 마을 회의의 전반적 네트워크가 구성되고 이러한 회의에서 위임받고 재소환할 수 있는 대표자들이 더 중심에 있는 평의회, 소비에트로 보내진다. 1917년에는 그러한 네트워크가 러시아 전역에서 분출했으며, 한 해, 아니 그보다 짧은 시간에 전 세계에서 비슷한 조직들이 이에 고무되어 형성되었다. 성숙의 심도 있는 과정이 발생한 것도 이러한 회의와 평의회였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많은 이들을 포함하여) 구체제의 당과 이데올로기에 따르는 사람들과 혁명을 그 논리적 결론 – 부르주아정당들이 지배하는 의회에 권력을 넘길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가 정치적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본질에서 불안정한 ‘이중 권력’ 상황을 해소하는 것까지 인정하는 이들 사이에 대립이 발생한 곳도 이곳이었다. 노동계급과 농민들에게 끔찍한 고난을 안겨준 전쟁을 무엇보다 우선 끝낼 필요가 있다는 볼셰비키의 슬로건은 부르주아 정치인과 정당이 ‘국가 방어’ 정책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그만둘 수 없을 것을 점점 더 많은 다수가 의식하고 있음에 부합한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 분파들은 부르주아지의 노골적인 독재를 선호했는데, 이것이 소비에트의 억압을 의미할지라도 그러했다. ‘민주주의자들’의 공모와 1917년 8월의 코르닐로프(Kornilov)의 반란 시도, 그리고 연이어 발생한 임시 정부의 ‘질서 회복’ 시도는 많은 사람의 유일한 선택은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알게 했다.

     

    사실 10월 봉기는 이 모든 정치 과정의 정점이었다.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권력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는 요구 증가는 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와 다른 혁명적 그룹의 영향력 향상과 일치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기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의 진정한 발전을 반영하기도 했다. 봉기가, 특히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봉기가 최소한의 폭력을 사용한, 계획되고 조정된 행동이라는 사실, 그리고 봉기가 대부분 잘 조직된 노동자와 선원 분대가 수행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봉기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 군사 혁명 위원회 – 의 전반적인 지휘 아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러시아소비에트 의회가 스스로 이 땅에서 최고의 권력을 차지했다는 선언을 재빠르게 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봉기가 하나의 쿠데타가 아니라 반대로, 맑스가 “봉기는 예술이다.”라고 표현한 것의 실천적인 진실을 러시아 노동 계급이 학습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데모, 거리 투쟁, 바리케이드 – 봉기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혁명은 이미 해결한 문제를 풀 필요가 없었다. 통치 기구의 장악은 상대적으로 작은 무장대의 도움으로 단일한 중앙의 지도를 받은 계획에 따라 완수될 수 있었다. 10월 거리의 고요함, 군중과 전투의 부재는 영향력 없는 소수의 음모,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볼셰비키의 모험이라는 소문에 대한 핑계거리를 적들에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볼셰비키는 ‘음모’의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을 향한 투쟁을 억제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그들이 작은 소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뒤, 노동자들의 거리와 병영에는 잘 통합되고, 조직되었으며, 훈련된 압도적인 다수가 있었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러시아 부르주아지 정부 전복에서 노동 계급은 다소 약하고, 분리되어 있으나, 경험이 부족한 자본가 계급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훨씬 더 엄청난 적이라는 것을 재빨리 보여주었다. 앞으로 혁명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노동 계급은 더욱더 정교하며, 고도로 조직된 국가와 이데올로기적 기관을 보유한 지배계급과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일이었다. 그런데도 10월 봉기는 이날까지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 성취한 가장 높은 지점 – 대규모로도 잘 조직할 수 있고, 그 목표를 자각하며, 사회적 삶의 고삐를 쥘 수 있다는 그러한 능력의 표현이다. 이것은 맑스가 “전(前) 역사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한, 인류가 무의식적이고 사회적 힘의 영향 아래 있는 조건에서, 처음으로 인류가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만들 수 있게 될 조건이 될 것이라는 기대이다.

     

    계급 정당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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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기 직전, 레닌은 소비에트 내에서의 (심지어 당내에서의) 동요에 대해 점차 초조해졌고, 이제는 주요한 소비에트에서 유의미한 다수를 점하고 있는 볼셰비키 당의 이름으로 봉기를 수행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볼셰비키 당내 논쟁에서 제기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봉기는 명백히 소비에트를 책임지고 있는 기관, 이른바 노동 계급 전체 조직의 작업으로 비춰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정치권력의 장악이 당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었다. 우리는 다시 이 지점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2월에서 10월 사이, 폭풍처럼 성장한 계급의식이 진정으로 증명한 것은, 코뮤니스트당의 단호한 개입과 정치적인 리더십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계급의식은 절대 동질적일 수 없다. 보다 전투적이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대해 저항적인, 계급의 역사적 투쟁과 그 교훈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전체로서의 계급의 당장 의식 수준이 어떠하든, 계급에서 가장 선명한 인자들을 견고한 강령으로 다시 모이게 하는 것은 코뮤니스트 조직 고유의 과업이다. 이것은 코뮤니스트 조직이 오류가 없는 진실을 담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코뮤니스트 강령은 역사의 진정한 교훈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하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경험과 토론으로 계속 풍부해진다. 바로 러시아 혁명 시기, 선진 노동자들이 벌써 당의 왼쪽에 있었다고 레닌 자신이 기록했을 때처럼, 당이 계급의식의 새로운 전진에 뒤처질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배 계급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저항하는 싸움이 계급 전체 내부에서 발생하듯이, 코뮤니스트 조직 내부에 발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실제로 코뮤니스트 조직이 계급의식을 정교히 하는 필수적인 실험실의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순간이 2월 혁명의 여파에 잠겨있던 볼셰비키 당내에서도 있었다. 차르가 퇴위하고 뒤따랐던 민주주의의 행복감에 휩쓸려 가버린 러시아 내의 ‘옛 볼셰비키’의 다수는 임시정부와 참전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하는, 노골적인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는데, 이제는 러시아 편에서는 방어적이고, 더 이상 제국주의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볼셰비키는 전쟁에 대해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단호한 반대를 외쳐옴으로써 전체 국제주의 사회주의 운동의 전위가 될 수 있었는데, 위와 같은 입장은 이러한 볼셰비키의 지난 3년에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활력은 비록 위협받았을지라도 완전히 소진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닌은 4월에 러시아에 돌아와, 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분들의 급진화에 기대어, 부르주아 임시 정부에 대한 어떤 지원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어떤 참여도 거부하는 ‘4월 테제’를 공표함으로써 당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었고,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혁명 과정에서 필연적인 다음 단계, 세계 제국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세계 혁명의 신호탄이 될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전을 준비하라고 호소했다. 레닌은 모험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참을성 있는 설명과 명확화를 위한 정치적인 전투를 통해, 이러한 입장을 위한 논쟁이 당내에 있어야 하고, 당이 소비에트 그리고 전체 계급 내에서 논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우리가 소수인 한, 우리는 계속 비판하고 오류를 폭로하는 동시에, 전체 국가 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이전할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럼으로써 민중이 그들의 경험을 통해 실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4번째 테제)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러시아의 위기가 무르익고 노동자 농민 대중이 임시 정부의 거짓된 약속이 환상임을 깨우쳐 감에 따라, (이제 레닌의 입장으로 태도를 바꾼) 볼셰비키 당은 계급의식을 단호하게 가속할 수 있었다. 당의 인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수의 노동자와 선원들이 부르주아의 도발에 빠져, 러시아의 계급 다수가 준비 되지 못한 시기에 권력 쟁취를 밀어붙임으로써 위기에 처했던 7월에 특히 유의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일은 가장 선진화된 노동자들의 대량학살로 완전히 사기가 꺾이는 사건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이 사건 후 2년이 채 지나기 전에 있었던, 이와 같은 함정을 베를린 노동자들과 스파르타쿠스는 피하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구석에 숨지 않고 노동자들의 시위에 동참하면서 왜 지금 시기가 권력을 쟁취하기에 무르익지 않았는지 설명했는데, 이 입장은 이 당시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건들의 즉각적인 여파로, 당은 독일 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지속적인 중상모략에 시달렸고, 정부의 직접적인 억압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당은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그리고 나라 전역의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계급을 뒤로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호한 행동을 지지하며 나설 필요가 있을 때, ‘바로 10월 봉기’를 위한 기반을 다지는 작업으로 이 일시적인 실패로부터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많은 노동자가 애국심이라는 열병에 빠져있던 전쟁 동안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논리적인 분석을 방어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는 이러한 역량은, 볼셰비키가 그들 자신만을 위한 권력을 획득하는 것 밖에 신경 쓰지 않는 마키아벨리적 음모론자 일당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만연한 비방이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혁명의 변질과 볼셰비키 당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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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패배의 전야, 처음에는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지지했던 혁명적 정치 세력 중 몇몇은 독일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주의 아나키스트들의 일부로, 이른 시기에 혁명 변질의 신호를 보았는데, 10월 혁명이 권력에 굶주린 볼셰비키의 쿠데타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믿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잘해봐야 ‘부르주아 혁명가들’이며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의견이 그들 구성원 속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혁명가들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때 직면한 진짜 문제 –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와 그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압력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변질될 수 있고, 심지어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를 제거해버렸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스파르타쿠스 로자 룩셈부르크가 아직 감옥에 있었던 1918년 작성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팸플릿이라고 본다. 그녀는 거기서 지배 계급의 피에 굶주린 선전에 반대하는 볼셰비키와 완전한 연대를 표현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 기회주의자들이 1914년 전쟁에 찬성하고, 이제는 모든 힘을 다해 혁명에 반대하는 등 배신행위를 함으로써 몹시 실추되었던 국제 사회주의의 명예를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단호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배 계급이 이미 이해하고 있듯이, 볼셰비키주의가 세계 혁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미래가 볼셰비키주의에 있다고 썼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라고 해서 볼셰비키가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녀가 발견한 그들의 정책들 중 매우 심각한 오류들– 소비에트와 다른 기관 내부의 정치 조직과 자유로운 토론을 축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경향, 반혁명 음모에 직면하여 ‘적색 테러’에 의존하는 모습, 이전 러시아 제국의 피지배 민중들을 위한 ‘민족적 자기 결정권’ 정책에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양보 – 에 대한 자신의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비판을 삼간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오류가 러시아 혁명의 고립이라는 맥락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자본주의자들의 봉쇄와 침략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포위된 요새 형국으로 급격하게 축소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국제 노동 계급, 특히 그 자체로 러시아 바깥에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이러한 포위 상태를 완화해 줄 수 있는 서유럽의 노동계급의 손에 달려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시작된 이러한 비판적 연대는 그 이후로 계속 다른 세력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는 룩셈부르크의 가장 신랄한 비판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는 동시에 러시아의 제헌 의회를 방어하는 등의 그녀가 저지른 오류를 거부할 수 있게 했다. 이탈리아 좌파는 패배의 전야에 사는 혁명가들의 책무란 실제, 생동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는 모든 교훈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임을 주장했다. 나머지 혁명 운동의 동지들처럼 볼셰비키 자신도 현실에서 검증된 적이 없었던 문제들, 이를테면 당과 이행기 국가 관계와 같은 문제들을 그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서 이해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 혁명의 실패 경험은 노동 계급의 경험이며, 그 주요한 교훈을 끌어내고 그럼으로 해서 미래 혁명 운동에서 똑같은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 계급과 그 정치적 조직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들에 대해 장문의 글을 작성하였지만 (마지막의 읽을거리 목록을 보라.)여기서는 가장 의미 있는 것을 강조하기로 한다.

     

     1. 일국 사회주의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 직면하여 오래 생존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한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였을 때, 그 모든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반드시 혁명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긴박한 필요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한 국가 또는 지역에 제한되면, 혁명은 불가피하게 외부의 공격이나 내부의 타락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2.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역할은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 평의회와 다른 대중 조직들의 책무이다. 영구적으로 선출되고 소환 가능한 방식의 평의회는 국민 투표의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몇 년 동안 정부 권력을 장악하는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방식과 양립할 수 없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정치권력을 차지함으로써, 계급의 대중 조직 내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주요 기능을 즉각적으로 희생한다. 볼셰비키가 1917년 이후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권력 쟁취 시도를 한 결과, 당은 소비에트를 대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이 점차 관료적 국가 기관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왔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신의 특권을 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이전 지배계급에 대항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폭력은 지배 계급의 국가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무엇보다도 사회관계를 목표로 해야 하며, 개인을 향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복수의 정신을 혐오한다. 그 폭력은 항상 노동자 평의회의 전체적인 통제 아래 종속되어야만 한다. 그 폭력은 프롤레타리아 도덕성의 기본 원칙 –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반드시 사람들 간의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창조라는 목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이는 부르주아지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반대이다 – 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적색 테러 반대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비록 구 지배계급의 반혁명 음모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고, 그들의 억압을 목표로 하는 체카와 같은 특수한 조직의 건설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이 조직은 빠른 속도로 소비에트의 통제에서 벗어나 구사회 질서의 정신적, 물질적 타락에 오염되어갔다. 무엇보다도, 그 폭력은 곧 지배 계급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라 내전 동안의 실제 경제적 비참함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볼셰비키 정책에 비판적인 아나키스트들과 같은 이들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조직들 등 노동계급 내의 다른 의견을 가진 분파들에까지 향해졌다. 이 과정의 절정은 1921년 크론슈타트 노동자 선원 진압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과 소비에트 부활의 깃발을 들었음에도 반혁명 분자들로 비난받았다. 이것은 ‘그 자신의 아이들을 파멸시킨 혁명’의 진정한 표현으로, 소비에트 권력이 내적으로 파괴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폭력이 러시아 노동계급에 주었던 심각한 파괴적 충격은 노동계급 내의 폭력 관계가 반드시, 언제나 거부해야 함을 강조한다.

     

    4. 적군에 대한 반대는 이행기 국가의 문제에 연결된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평의회와 같은 기관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들, 계층들을 재결합시키는 소비에트의 전체 네트워크, 내전을 수행하기 위한 체카와 적군과 같은 조직들 또한 탄생시켰다. 이 일반 국가 기관은 혁명으로 끔찍하게 어려운 조건에 처하자, 특히 프롤레타리아 조직들, 평의회, 공장 위원회, 노동자 민병대를 희생시킬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당을 흡수하고 무력화시키면서 자신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1922년 레닌이 비통하게 목격하였듯이, 그것은 운전사의 통제를 벗어난 차량과 같았다. 계급들이 존재하는 한 이행기 국가는 불가피하게 필요하지만, 국가 기관은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인 본질을 가질 수밖에 없고, 혁명계급 직속 기관의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러시아 혁명은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이행기 국가에 대한 독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5. 코뮤니즘이 국가와 임노동과 상품 생산에 근거한 자본주의 경제 철폐를 위한 운동이라면, 국가가 되었든 노동자 평의회 네트워크가 되었든, 그 속에서 자본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한다면 그것이 단계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오류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국가 자본주의든 ‘노동자 자주관리’(러시아에서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가 지지했던)든 그것들은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단계가 아니며, 오히려 자본의 보전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혁명이 전 지구를 차지하지 않은 시기에 진정한 코뮤니즘으로 하룻밤 만에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관계에 반대하는 의식적이고 조직한 투쟁의 산물이며, 오직 자기-조직화하고 정치적 주류가 된 프롤레타리아만이 이 투쟁을 이끌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취하는 즉각적인 경제적 수단이 코뮤니즘 목적과는 양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의 주류는 국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필연적인 단계라는 사상을 버릴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심지어 스탈린주의 이전에도, 미래의 코뮤니스트 사회를 향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노동 계급에 대한 착취와 이들의 빈곤의 증가가 정당화되었음을 의미했다.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붙들고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여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또는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라고 여기게 되는 비극적이고 재앙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혁명의 진정한 패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의 승리는 내부에서부터, 10월의 연장선이라는 거짓 탈을 뒤집어쓴 채 일어났고, 우리가 여기서 보았듯이, 전 세계 노동 계급 내에서 가장 파괴적인 혼란을 낳았다. 이것이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과 같다는 거대한 거짓말의 객관적인 밑바탕이었다.

     

     

    1968-2011: 혁명의 유령이 여전히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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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혁명의 패배에서 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교훈이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은 가능한가? 또다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경제적 위기, 전쟁과 자기 파괴의 위험, 환경의 파괴, 범죄의 급격한 증가, 그리고 사회관계의 도덕적 부패를 지적할 수 있고, 코뮤니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객관적인 필연이라고 확신을 하고 반복해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노동계급이 더욱 세계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의 상호의존성 증가, 그리고 의사소통 수단의 아찔한 발전을 지적할 수 있고, 자본주의 착취에 저항하여 공동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단합이 객관적으로 가능함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객관적인 필연성과 가능성의 발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착취의 원천을 이해하는 착취당하는 계급의 주관적인 역량도 필요로 하는, 그 자신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모든 착취의 철폐를 위한 책무, 관점, 강령을 개발하는 역사상 최초의 혁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인 차원은 대부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숨겨져 있던 작은 무리에게서 발전하는데, 프롤레타리아의 대중 운동이 발전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도, 풍부해질 수도, 그리고 확장될 수도 없다.

     

    그러한 운동이 지난 50년 동안 세계적 무대에서 진실로 등장했다. 1917~23년의 거대한 높이의 혁명 물결 후 몇 십 년간의 반혁명이 뒤따랐는데, 혁명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나라에서 가장 잔인한 얼굴을 드러냈다 – 바로 러시아에서의 스탈린주의의 승리,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삼각형은 인민전선의 등장과 민주적 반파시즘으로 완전해졌다. 이러한 세력들의 결합은 프롤레타리아 저항의 마지막 발발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고(1936~7년의 스페인에서처럼), 프롤레타리아트를 2차 제국주의 세계 전쟁의 구렁텅이로 억지로 처넣었다. 그리고 전쟁 후 20년 동안, 계급투쟁은 경제 호황과 복지 국가의 안전망에 의해, 그뿐만 아니라 서구의 ‘민주주의’냐 동구의 ‘사회주의’냐 라는 새롭고 거짓된 선택으로 억제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무렵이 되자, 전후 호황이 사라지고,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일상생활이 동과 서를 막론하고 가난과 위선임이 밝혀지고, 두 제국주의 블록 간의 대리전쟁이 베트남에서 아프리카까지 계속됨에 따라, 부모들이 겪었던 패배와 트라우마를 경험해 보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 제기는 다른 층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거대한 대중 파업으로 터져 나왔고, 이 운동은 반혁명의 시대가 끝을 고하는, 모든 대륙에서 노동자 투쟁의 국제적 물결을 알리는 신호였다. 68년 5월 프랑스, 그 운동의 정점에서 거리 곳곳, 학교, 대학, 그리고 작업장에서, 존 리드(John Reed)가 1917년 10월 이전 러시아에서 관찰했던 바와 똑같은 깊이 있는 정치적 토론의 신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자는 생각이 노동자와 학생들 가운데 중요한 소수파 사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동요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혁명적 정치 조직의 새로운 세대였다.

     

    프랑스의 운동은 오직 이론적인 수준에서만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그 노골적인 위기의 출발 지점에 있었을 뿐이고, 지배 계급은 이미 그 후 수년 동안 사용할 많은 정치적인 속임수들, 그중 체제에 대한 가짜 ‘반대파’로서 좌익 정당과 노동조합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짓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1968년 시작된 투쟁의 물결은 20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들의 절정은 아마도 1980년 폴란드의 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은 혁명기 노동자 평의회를 연상시키는 공장 간 파업 위원회와 같은 조직 형태를 탄생시킨 진정한 대중 파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우 앞선 수준의 자기 조직화에도 폴란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 가능성을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이미 코뮤니스트 체제 아래 살고 있으며, 그들의 가장 큰 희망은 의회와 ‘자유로운 노동조합’이 있는 서구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적 형식에 있다는 환상에 빠져 억눌려졌다. 서구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형식이 텅 비었음을 경험했지만, 그들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동구 블록에 있는 노동계급의 형제자매들이 직면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경제적 방어 수준의 투쟁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공격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의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의 노동계급의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진화에 매우 중요한 충격을 주었다. 1930년, 심각한 역사적 패배의 고통에 허우적대던 노동 계급이 노골적인 경제 위기 발발에 부딪혔을 때,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의 추동을 막을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70년대와 80년대에는 세계 전쟁으로의 압력이 매우 강했음에도 국가 경제의 이해를 위해 노동계급이 자신을 희생하길 거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전쟁으로 진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전문가 부르주아지는 만약 3차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과거의 전쟁에서 교훈을 학습했기 때문이며, EU 또는 UN과 같은 국가 간 대립을 억제하는 국제 조직을 설립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또는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가장 확실한 세계 전쟁의 ‘억제력’이라고 주장한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진정한 억제력이라는 생각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이념 테두리 바깥에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세운 전쟁 경계는 의식적인 방식으로는 거의 확립되지 못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전쟁에 계급을 동원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 첫째이지만, 노동 계급이 세계 혁명이라는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적 대안을 개발하지 못하는 똑같은 무능력함에도 있다. 결과적으로 80년대 말 이후 우리는 그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회 진화의 교착 상태에서 살아왔다. 장기간 지속하고 풀리지 않는 경제적 위기의 배경에 대해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가 발끝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고 규탄한다. 두 제국주의 블록의 붕괴로 세계 전쟁의 전망은 더욱 멀어졌음에도, 자본주의 전쟁 추동은 더욱 혼란스럽지만, 그 전만큼이나 위험한 역동 속에서 계속 속도를 더해 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오랜 쇠퇴의 가장 최근 단계, 자본주의 해체의 단계는 노동계급에 새로운 어려움을 부가했다. ‘코뮤니즘의 죽음’의 선전은 지배계급이 자신 체제의 해체를 착취당하는 계급의 의식에 맞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가장 명백한 표현 중 하나이다. 전제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그들의 중심 테마는 ‘민주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리고 지배계급이 열심히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화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똑같은 테마가 포퓰리즘과 반포퓰리즘의 싸움을 둘러싼 최근의 선전에서 나타났는데, 이 두 진영은 모두 자신을 ‘인민의 진정한 의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작업장에서 이러한 해체 단계에 있는 실질적 사회적 과정은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계속 작동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수준에서 여러 파벌과 패거리들로 파편화되는 경향, 모든 종류의 비이성적 공포와 광신의 등장, 희생양을 찾아다니는 경향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과정들을 깨닫는 데 필요한 국제적 역사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심각하게 해로운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말 이후 전반적인 계급투쟁의 퇴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록 참여자들이 종종 그들 자신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한 등장을 관찰했다. 2006년 프랑스의 학생 운동은 공식적인 노동조합의 통제를 벗어났고, 그 운동이 고용된 노동자들의 영역에까지 퍼질 것이란 위협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고용 불안정이 급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법인 CPE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북아프리카,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에서의 저항의 발발 속에서 스페인의 ‘분노(indignados)’ 운동은 2006년의 프랑스의 학생 운동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과 자본주의 사회는 더는 전망이 없음에 대한 대중 토론을 자극함으로써 68년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 운동은 국제적인 성격을 매우 명확히 한 운동이었으며, 일부 작은 소수 가운데에서 ‘세계 혁명’ 슬로건이 보다 적절해졌던 운동이었다. 그리고 다시 2006년 운동과 같이, 그 운동이 채택한 조직 형태는 부르주아 사회의 공식적 기관들 바깥에 있는, 거리와 이웃에서의 대중 집회였다. 다른 말로, 약하지만 명백한 소비에트 형태 조직의 메아리였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은 짧았고, 수많은 약점과 혼란으로 고통 받았다. 그중에서도 민주주의와 시민권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와 포데모스(Podemos)와 같은 좌익 정당들에 잘 이용되었는데, 그들은 “집회, 좋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민주적인 삶을 재활성화하고, 의회와 선거에의 참여를 증가시키는 데 활용하자…”며 그 운동을 제한했다. 샌더스(Sanders)와 콜빈(Corbyn)은 똑같은 거짓을 팔고 다닌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고개를 들 수 있고, 때가 오면 과거 자신의 혁명적 전통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 노동계급 구성의 변화는 비록 지금까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혁명에 대한 훨씬 더 호의적인 전망 또한 숨겨주었다. 불안정한 고용과 만성적인 실업이 결합한 상황에 사는 젊은 프롤레타리아 세대들은 곧, 그들 스스로 코뮤니스트 선언이 이야기하듯 “노예로서의 안정을 보장 받지 못하는 노예의 비참함을 공유하는”, “족쇄 이외에 아무것도 잃을 것 없고, 얻어야 할 세계가 있는” 계급의 일부임을 깨달을 수 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와 미래 상황은,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본질의 기초라고 밝힌,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코뮤니즘을 만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을 더욱 드러낸다.

     

    -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부르주아 사회에 소외된 계급

    - 급진적 족쇄와 보편적 고통으로 인해 급진적이고 보편적인 혁명으로 향하는 계급

    - 사회 다른 계층의 모든 고통에 집중되면서 그 계층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계급, 전 인류를 해방함으로써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계급

    - 사회를 연합의 원칙으로 조직할 수 있고, 보편적 상품화라는 자본주의 영역에 반대할 수 있는 연합된 계급

    - 인간의 몸을 상품과 임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자본주의 감옥으로부터 인간의 도덕성을 해방할 수 있는 계급

     

     

    10월 만세!

     

     계급투쟁 없는 자본주의는 있어도 10월 혁명의 기억은 진정 절대 지워질 수 없다. 1917년,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기로: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냐 아니면 문명의 파괴, 아마도 인류 자신의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2017년, 우리는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는 개선되거나, 친환경적이 되거나, 또는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전복은 오랫동안 지연되었으며, 우리 계급이 러시아, 그뿐만 아니라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그리고 100여 년 가량 모든 나머지 세계에서 경험했던, 그 엄청난 경험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미래의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이 교훈들을 가능한 한 깊이, 그리고 폭넓게 공부하고, 정교히 하며, 널리 퍼뜨리는 것이 혁명적 소수의 책무이자 책임이다.

     

    2017년 9월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번역┃국제코뮤니스트전망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201709/14380/manifesto-october-revolution-russia-1917

    icc1919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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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선언 (1)

  •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선언

    세계 혁명이 인류의 유일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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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학살 이후 3년, 1917년 10월, 차르 체제를 그해 2월에 전복시켰던 러시아 노동자들은 전쟁의 안개 속에서 희망의 등불이었고, 차르를 대체하였으나 여전히 승리할 때까지 전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를 타도했다. 노동자, 병사 그리고 농민 소비에트는 선두에 있던 볼셰비키당과 함께 당장 전쟁을 끝낼 것을 요구하며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혁명적 모범을 따르라고 호소했다. 이것은 헛된 꿈이 전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든 적대 국가 전쟁 산업에서 파업, 반란, 그리고 전선에서의 우애들로 불평, 불만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11월, 독일혁명의 발발은 지배 계급이 더는 전쟁 중지를 지연시키는 것은 혁명의 불길에 부채질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전쟁을 중지해야 했다. 그 당시 ‘볼셰비키주의’의 유령이란 모든 국경 지대에서의 노동 계급의 연대, 노동자 평의회에 의한 정치적 권력 쟁취를 상징했는데, 짧은 기간 ‘볼셰비키주의’ 유령이 전 세계에 출몰했다. 지배 계급에게 이것은 혼란, 무정부 상태, 문명의 붕괴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에게 10월 봉기는 새로운 세계의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2017년,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있으며, 그 100주년은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들에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에서는 푸틴 정권이 그 축사에 적절한 초안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도, (KGB가 훈련한) 푸틴이 복원을 꿈꾸는 제국, 스탈린의 강력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소련, USSR) 역시 10월 혁명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해석과 나란히(사실 완전히 정반대인) 러시아 노동 계급은 어머니 러시아가 아니라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 대해 충성해야 한다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국제주의적 관점 또한 존재한다. 서방의 ‘민주주의적’ 국가들의 혼란스러운 분석과 설명의 혼합물 또한 있을 테지만, 우리가 확신하는 것 중 하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정치, 미디어 또는 학계 대변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들은 전부 러시아 혁명의 의미를 왜곡하는데 봉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기억을 파묻거나 왜곡하려는 시도, 이데올로기적 공격의 핵심은 무엇인가?

     

     

    계급 전쟁은 끝났는가?

     

     

     첫 번째 공격 : 이것이 고대의 역사이며, 근대 세계와 거의 관련성이 없다는 주장. 우리는 더는 덜컥거리는 흑백 영화에서나 묘사하는 전쟁이란 여전히 기병대가 돌진하는 것이고, 여전히 농민들이 (만약 그들이 말을 소유할 정도로 운이 좋다면) 말이 끄는 쟁기로 땅을 경작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심지어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Putilov)와 같은, 수만 명의 노동자가 매일 철저하게 착취당했던 대공장 또한 대부분 사라졌다. 적어도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실제로 많은 국가에서 농민들의 숫자는 감소했을까? 그뿐만 아니라, 진짜 노동 계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실제 존재하기는 한 걸까? 만약 있다면 당신이 자비로운 국가로부터 복지를 주장할 수 있고,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에게는 손에 닿지 않았던 그 너머의 모든 종류의 물건을 (그것이 외상에 의한 것일지라도) 구매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 그들이 여전히 착취당하는 계급일까? 노동력을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으로 행동할 수 있는 집단적인 세력의 한 종류라기보다, 초-근대기업인 우버(Uber)가 주장하는 것처럼, 스스로 고용된 개인이라고 범주화하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우린 모두,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광범위한 민주주의 질서 속 시민으로서 더 잘 정의되지 않을까?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주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형태의) 자본주의가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든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듣는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전에 없을 정도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진정으로 세계적인 체제이며, 세계의 모든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세계적 생산 양식이며, 그것은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쿠바나 중국을 포함해서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이 있는 곳에는 그 자본을 생산하는 계급이 있으며, 이 계급의 노동은 그들이 공장, 사무실, 학교, 슈퍼마켓, 병원, 운송업 등에서 일하든 집에서 일하든 관계없이 자본에 의해 착취된다. 왜냐하면, 자본이란 그 정의에서 임금노동자들로부터 추출된 지급되지 않은 노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추려서, 맑스는 정확히 임노동과 자본이라고 불리는 팸플릿에서 “자본은 임노동을 전제로 하며, 임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 고 했다.

     

    물론 세계 노동 계급의 형태는 1917년 이후 크게 변해왔다. 전체 산업 단지들은 중국, 또는 라틴 아메리카, 또는 한때 제 ‘3세계’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서유럽의 ‘산업화한 국가’ 경제 대부분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의 물질적 상품 생산을 멈추었고, 대신 ‘지식 경제’  또는 금융 부문, 때때로 보다 더 작은 작업장의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아 일한다. 그리고 광업, 철강, 그리고 조선과 같은 전통적인 산업 영역이 대량 파괴되었고, 이와 맞먹을 정도의 노동계급 거주 공동체 또한 붕괴했다. 이 모든 것이 이 사회에서 뚜렷한 존재와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으로 노동계급이 자신을 정체화하는 수단들의 토대를 약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는 노동 계급의 역사적인 기억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계급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객관적으로 노동계급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 계급의 상당 부분 내에서, 자본주의 체계가 전복되고 더 높은 형태의 사회로 교체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는 정치적인 프로젝트 내지는 아이디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동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2017년 오늘날,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 합당하다.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그들이 대규모 행동, 파업 또는 봉기에 참여할 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또는 독일의 스파르타쿠스(Spartacists)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맑스주의 조직은 어디 있는가? ‘코뮤니즘의 붕괴’에서 포퓰리즘의 등장까지 지난 수십 년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여전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잘 봐 줘야 관계없는 괴짜, 멸종의 위기에 처한 희소 동물로 종종 비치고 있고, 적대적인 자본주의 미디어에 의해 더욱 그렇게 비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광범위한 다수에게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the Communist International)에 대한 모든 것은 잊혔고, 아마도 일종의 깊은 무의식에 갇혀, 더는 어떤 살아 숨 쉬는 전통의 일부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심지어 포퓰리즘 우파조차 그들의 자유주의 반대파들에 의해 대표되며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오늘날, 노동운동은 노동계급의 정당으로, 세계를 운영한 엘리트에 반대한 투쟁의 상속자로서의 과거를 기억해 낼 수 없는 역량 부족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망각 과정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보다 더욱 생산 수단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것, ‘지속적인 혁명화’에 의존한다. 그래서 무엇인가 한때 새로운 것, 예를 들면 최신의 스마트폰과 같은 것들도 수년 후에는 구식, 교체될 필요가 있는 것이 된다. 무엇이 ‘구식인가’,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 경험인가에 대한 이러한 중상모략은 착취당하는 계급에 유용한데, 왜냐하면 착취당하는 이들 가운데 일종의 기억상실증을 유발하는 데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그 자신의 혁명적 전통에 대해 망각할 위험에 직면해 있는데, 역사적 위기에서의 진정한 교훈을 버리고 있다. 왜냐하면, 미래 투쟁에서 적용할 필요가 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반동적 계급으로서 우리에게 과거를 잊기를 바라거나, (포퓰리스트와 성전주의자들(jihadist)과 함께) 거짓의 환상, 이상적이었던 과거를 제공한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래와 함께하는 계급이며, 바로 그 이유로 과거 인류의 최상의 것들을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으로 통합시켜낼 역량이 있는 계급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

     

     

     역사적 과거에 대한 교훈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본은 자신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사멸할 운명을 가진 사회 체계이며, 1915년 전 세계를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세계를 야만으로 가속하여 밀어 넣으려는 위협과 같기 때문이다. 생산과 파괴에 관한 계획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이뤄질 필요와 세계를 경쟁하는 국가들로 나눌 필요 사이의 모순은, 거대한 제국주의 전쟁과 20세기의 분쟁들 너머에 있으며, 중동,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 전체를 파괴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군사적 대립들 너머에 있다. 또한, 1929년부터 1973년까지, 그리고 2008년 세계 자본주의를 뒤흔들었던 경제적 격동과 지구에서 삶의 바탕을 위협하는 생태적 파괴를 가속하는 것 모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사회화된 생산과 그 사적 전유의 하나의 표현인 바로 그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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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모스크바에 모였던 혁명가들은 제3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의 제국주의 전쟁이 세계 자본주의가 정체와 쇠퇴기,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 시기에 진입했다는 신호임을 선언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만약 자본주의가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복되지 않는다면, 1914-18년의 전쟁보다 더욱 파괴적인 전쟁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자본주의자들의 지배 형태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하리라 예측했다. 또한, 국제적 혁명 물결의 패배는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타락이라는 결과와 함께 그들이 너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치즘, 스탈린주의와 2차 세계대전의 공포는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것보다 진정으로 더 나쁜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그 복원력, 생존과 심지어 번영하는 그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내는 역량에 있어서 혁명가들을 반복해서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두 제국주의 블록의 손에 있었던 핵전쟁의 위협을 동반하긴 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은 20여 년 넘는 경제 호황을 누렸다. 이러한 호황이 1960년대 말 무렵에는 새로운, 그리고 지연된 경제적 위기에 자리를 내어주긴 했지만,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는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거에는 ‘미개발되었던’ 인도나 중국과 같은 지역에까지 확장하는 새로운 형태를 내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개발은, 많은 부분 엄청난 신용 투여로 부채질 된 것이었으며, (2008년의 금융 위기가 이미 경고한) 미래의 엄청난 경제적 문제들을 축적했다. 동시에, 지난 수십 년간의 성장은 자연환경으로부터 끔찍한 대가를 짜낸 것이었고, 군사적 분쟁 위험 또한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두 거대한 블록 간의 세계 전쟁 위협은 가라앉았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더 많은 국가가 핵무기로 무장을 했고, 유럽과 미국에서의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사태 급증,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악몽과도 같은 전쟁으로부터 필사적인 탈출을 하는 난민들의 물결 때문에 한때 저개발 지역에 다소 제한되어 있었던 강대국 간의 대리전쟁이 이제 그들 중심 국가에 직접 충격을 주고 있다. 자본주의 생존은, 그 이전보다 훨씬 인류의 생존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혁명은 1917년보다 더욱 필수적으로 되었다. 혁명은 완전히 부패한 사회 시스템에 직면한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선 최후의 희망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오직 세계 혁명을 의미하며, 전 지구상의 자본주의 체계를 일소하고 지구를 ‘공동의 보물’로 만들 수 있는 세계 인류 공동체로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며, 시장과 이윤이라는 비인간의 요구로부터 생산과 분배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1917년 혁명의 진정한 의미였다. 그 주역들은 그 혁명을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그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타격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은 1917년에서 1923년 사이에 전 세계에서 퍼진 거대한 대중 파업과 봉기의 진실로 필수불가결한 적극적 요인이었다.

     

    혁명은 모든 것을 악화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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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만약 새로운 사회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정말 가능한가? 그리고 사실, 1917년 10월의 기억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은 혁명이 모든 것을 오직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증거? 러시아혁명이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로 끝났다는 것. 대중 테러, 재판 쇼, 역사의 위조, 다른 의견의 억압. 거대한 군사적 병기창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지만, 품위 있는 소비자 상품을 제공할 역량이 없었던 경제를 창조했다는 것.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그리고 1981년 폴란드에서처럼 프롤레타리아 반란을 분쇄하는 탱크를 사용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설립.

     

    이 모든 것은 1924년 레닌의 죽음과 스탈린의 권력 획득 이후에 도달한 우울함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심지어 레닌 생전에도 노동자들의 파업과 반란은 무장된 군대에 직면했고, 체카의 통제되지 않은 폭력에 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희생자가 되었다. 심지어 레닌 생전에도, 소비에트는 점차 국가에 대한 어떠한 실질적 통제의 행사를 멈추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미 진즉에 볼셰비키당 독재로 거의 교체되었다.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한 사람들은 노동계급이 직면한 과업의 거대함이나, 그들이 자본주의 체계에 맞서고 전복시킬 대담성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진실을 감추거나 최소화하는 데 관심이 없다. 혁명한다는 것은 시대의 쓰레기- 자본주의 사회와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의 계급 지배로부터 비롯된 모든 환상과 해로운 습관들을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혁명은 과거의 정권, 국가, 그 경제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더는 경쟁이나 배제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연대와 협력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관계를 창조해내는 것. 또한, 그것은 전 지구적 수준에서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하며, 굉장한 물리적, 도덕적, 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거대함,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 규모가 노동계급의 현재의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수동적으로 후퇴하거나, 현재 체제가 깊은 곳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있지만 포퓰리스트적인 강한 지도자 또는 허무주의적 ‘성전’을 주장하는 사람. 또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에 사회주의 사회를 도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좌파’ 정당들이 제시하는 ‘더 쉬운’ 대안을 찾는 사람이 되기는 훨씬 쉽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현실성 – 그 엄청난 어려움과 비극적인 오류로부터 숨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오류들로부터 올바른 길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즘은 스탈린주의와 그 출발에서부터 다른 것이 없으며, 현존하는 정세를 전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가피하게 대규모 테러와 억압으로 귀결될 것이라거나, 또는 인간의 본성이 그러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는, 낡은 역사가 제시하는 결론에 이르기 전에, 먼저 1917년 지배계급이 단순히 인간 본성의 이기심에 의존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이 “내가 그럴 거라고 당신에게 이야기했잖아.”라고 빈정거릴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잘못될 때까지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1917년과 그 후 수년, 전 세계의 지배계급은 혁명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진실로,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1918년 독일 혁명의 일어났을 때, 대중 파업과 반란 너머의 주요한 동기 중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전쟁의 종결을 서둘렀다. 이에 더해 동맹국들은 과거의 적이었던 독일의 지배계급이 10월 봉기의 모범을 따르려 하던 혁명적 노동자들, 선원들, 그리고 군인들을 찍어 누르려 하자 이를 도우러 왔다.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에 직면하여 제국주의 전쟁의 양편은 볼셰비키 위험을 그 원천에서부터 없애려는 목표로 개입했다. 내전에서 러시아의 반혁명 군대에 의해 자극되어 조직된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이들은 고향 땅에서 자란 백군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일본, 독일과 그 외의 국가들에서 백군을 돕기 위해 보낸 군대와 조언자들로 이뤄진 원정 군대도 상대해야만 했다. 내전은 서유럽 동맹국들에 의해 부과된 경제적 봉쇄로 강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미 3년의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러시아 경제는 빠르게 축소되어 파괴되고, 끔찍한 결핍과 대규모 기근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내전의 조건 또한 혁명 뒤에서 가장 적극적인 세력이었던 산업 노동계급의 요새를 약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 가장 헌신적인 이들이 전선으로 가길 지원하였으며, 그들 중 셀 수 없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잃어야 했고, 그동안 다른 노동자들은 도시의 굶주림을 피해 농촌으로 가 음식과 일거리를 찾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러시아 안팎에서 볼셰비키를 어린이들의 살인자, 여성의 강간범으로 묘사하거나, 때때로 볼셰비키주의가 유대인들의 세계적 음모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식의 반-유대적 테마를 빌리는 식의 선전이 계속하여 흘러나왔다.

     

    진실로, ‘민주적’ 강국들의 정치인 중 다수에게는 –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포함하여 - , 볼셰비키의 파도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의지할 수만 있다면 이탈리아의 (그리고 후에는 독일의) 파시스트 정권은 필요악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와 유사하게, 스탈린 아래의 소련이 ‘국가들의 콘서트’에 다시 참여하고자 했을 때, 많은 부르주아 정치인과 국가는 스탈린이 ‘함께 사업을 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그의 ‘일국 사회주의’ 정책은 그가 더는 세계 혁명에 관심이 없음을 – 실제로는 그에 반대하는 것임을 – 이해했다. 소련이 제국주의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허락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에의 참여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스탈린주의가 볼셰비키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을 파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명이었다. 1914-18년의 볼셰비즘은 제국주의 전쟁, 모든 교전국의 반대하여 계급투쟁을 위해 혁명적 반대파에 섰다. 1941년 스탈린주의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일시적 협정에 따라 ‘위대한 애국 전쟁’의 깃발을 들었으며, 그 끝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지구를 분할해 차지하는 데 참여하였다.

     

     

    거대한 거짓말 “스탈린주의는 코뮤니즘과 같다”

     

     

     그 당시 스탈린주의는 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고립과 패배의 산물이었다. 1923년 즈음, 이 시기는 10월 봉기로 촉발된 국제적 혁명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볼셰비키 당내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던 관료층이 현재 급한 일은 세계 혁명이 아니라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필요한 총알을 공급하던 때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적 규모에서만 사회주의가 건설 가능하다는, 사회주의의 고립된 섬은 불가능하다는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이념을 포기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관료의 무자비한 5개년 계획이 만든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개별 자본가들이 한 국가의 사장으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국가 자본주의를 향한 이러한 경향은 비단 소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미국의 뉴딜,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케인지언 복지 국가, 상대적으로 약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군사 독재와 같이 여러 가지 형식을 취했지만, 이것들은 전쟁과 경제적 위기에 대한 보편적인 자본주의의 대응이었다. 소련의 상황에서 독특했던 것은 국가 자본주의를 향한 추동력이 여기서 가장 집중되고 극단적인 형태, 혁명 중 사적 자본가들의 실질적인 제거(도피든 몰수든)라는 결과에 이르렀다는 점, 그리고 혁명으로 등장한 국가 내부에서 반혁명이 성장했기 때문에, 그리고 거의 국가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 된 볼셰비키 당이 관계되어 있어서, 스탈린주의 정권은 나머지 기간 이미 시체 더미 속에 묻혀버렸던 10월 혁명의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짓된 동일시는 러시아 외부의 스탈린주의 정당들에 급진적이라는 광택을 내게 해 주었고, 또한 자본주의와 각각 자신들의 국가의 민족적 이해에 대한 자신들의 완전한 헌신을 붉은 10월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방의 지배 계급의 주요 파벌들에 스탈린주의 정권은 ‘코뮤니즘’과 같다는 역사의 가장 거대한 거짓말을 공표할 자격을 주었다.

     

    이 거짓말의 거대함은 스탈린주의 체계를, 적어도 맑스와 엥겔스 시절부터의 노동자 운동 속에서 방어해 왔던, 코뮤니즘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이해와 비교했을 때 가늠할 수 있다. 그 당시의 각성을 따랐던 이들로서 그들에게 코뮤니즘이란 1000년의 인간 소외,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물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적대 세력이 되는 어떠한 사회적 질서도 극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치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국가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의 명확한 표현이며, 따라서 광범위한 대중이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정치적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스탈린주의 정권은 개인, 사회, 무엇보다 노동계급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지배의 전형이었다. 경제적 수준에서 코뮤니즘은 인류가 비인간적인 경제적 법칙과 이윤과 시장의 냉혹한 요구에 더는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코뮤니즘에서는 돈, 시장, 또는 임노동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직 생산성 전쟁이 전체 경제 체제를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국가의 전체주의적 권력은 임금노동자 계급에서 추출한 잉여가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자본은 본질에서 사회적 관계이지 단순히 법적 소유의 형태가 아니다. 임금노동자들에게는 그 또는 그녀의 노동력이 사적 기업가에 팔리든 국가 관료에게 팔리든 차이가 없다. 자본주의 착취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코뮤니즘이 인류를 여러 민족으로 분리의 끝, 국경 철폐를 의미하는 한, 스탈린주의 정권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광신적 조달자이며, 이들은 그들의 국경의 방어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세계라는 투기장에서 그들의 민족적, 제국주의적 이해를 추구한다.

     

    그러나 만약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이라는 주장이 그토록 엄청난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 무엇보다도,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동서 일련의 지배자들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인류, 특히 노동계급에 대한 그들의 모든 범죄를 위해 스탈린주의 국가 부르주아지는 그것이 10월 혁명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매달렸다. 코뮤니즘으로 이행해 가는 ‘사회주의’국가라는 개념은 이러한 정권들을 이데올로기로 정당화시켜 주었다. 이 속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아무리 타락하거나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정권을 노동자들이 방어해야 하는 진정한 노동자의 국가라는 주장을 계속해 온 트로츠키주의자에 의해 ‘좌익’으로 응원을 받았다. 서구의 많은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형태를 띤 자본주의의 장점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이 지구상 어딘가에 자본주의의 실제 대안이 있다는 개념은 중요한 희망의 원천이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실제로 자본주의였지만, 왜곡된 형태의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는 다른 사회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구 대다수 이들에게는, 그리고 실제로 스탈린주의 정권 내의 노동 계급의 다수에게도, 소련과 그 위성이 사회주의라거나 또는 코뮤니스트였다는 생각은 서방의 다양한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가능한 체계이며, 방어되어야 하고, 추구해야만 하는 체계라는 궁극적인 증거였다. 바꿔 말하면, 스탈린주의 정권을 특징짓는 비참함, 결핍, 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경쟁, 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이것이 서방의 지배 계급이 동쪽의 적을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스트로 묘사하는데 단호했는지, 동쪽의 정권이 80년대 말 몰락했을 때, 맑스주의 그리고 코뮤니즘 실패의 최종적 증거라는 거짓말이 전 세계로 증폭되면서 오늘날에도 전혀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가 되는 정치 선전으로 들리지 않게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선전은 노동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으며, 노동계급은 1980년대에 이미 더 높은, 좀 더 통일된 수준으로의 즉각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전망, 역사적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현재 사회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널리 알려진 아이디어는 노동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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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 쟁점 토론의 주제들

  • 쟁점 토론의 주제들 (발제문 중심)

     

     

    <편집자 주>

    "어떤 조직도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배타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다.

    코뮤니스트의 논쟁/토론은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공헌으로부터도 도움을 받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공헌을 환영하고 그것을 고려할 것이다."


    제1부 기본원칙

     

    인용문에서

     

    ① 맑스가 살았던 자본주의의 우세기(상승기)에서 내다본 코뮤니즘의 상(모습)과 오늘날 자본주의 쇠퇴기(해체기)의 물질적 필요성으로서의 코뮤니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

     

    1) ① 유일한 노동계급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 이후는 “낮은 단계의 코뮤니즘”인 이행기였나? “경제적 강제의 모순 흔적이 제거되는” 시기였나?

     

    ② 이행기에서 노동계급은 새로운 사회의 유일한 계급인가? 다양한 비착취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독재인가? 아니면 연대와 집합적 공동작업 관계로의 통합인가?

     

    2) 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말이 어떻게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으로 퇴행했는가? 또한, 부르주아 좌파의 비판에 의해 조롱당했는가?

     

    ②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폭력과 부르주아지의 계급폭력은 어떻게 다른가? 비착취계급에 대한 폭력의 한계는 무엇인가?

     

    ③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은 무엇인가?

     

    3) ① 이행기에 국가는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그 국가는 왜 반(半)국가인가?

    ② 국가가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와 반혁명의 실체가 된 것은 노동자평의회의 통제가 부족했기 때문인가? 이때의 정치 권력은 당인가? 노동자평의회인가?

     

     

    제2부

     

    ① 혁명 후 소련(관료국가)을 코뮨 국가와 동일시한 맑스, 엥겔스, 레닌의 입장을 오류로 보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코뮌 국가, 평의회 국가를 혁명 후 국가의 조직화 방식일 뿐이라는 견해(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입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② 이행기가 없다는 공산화 이론 등에 대한 입장(발제문 4), 5), 6), 7))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특히 자본주의에 실질적으로 포섭된 노동계급의 즉각적 혁명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본과 노동에 맞서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추가> 논쟁의 중심쟁점 (1970년대 논쟁에서 제기된 질문)

     

    ① 이행기 국가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는 우리다”라고 주장해야 하는가?

    ② 반대로 국가와 계급 이해를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하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방어해야 하는가?

    ③ 사회주의 혁명과 국가는 같은가?

     

    1917년 전 맑스주의자는 국가 일반과 이행기 국가에 관해 썼지만 이러한 질문은 1917년 전 문헌에는 제기된 바 없다.

     

     

    1) 반대의견

     

    ① 이는 새로운 질문이 아니다. “정통” 맑스주의는 이행기 국가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

     

    (반 비판)

     

    •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에서 국가문제를 체계적으로 종합하지 못했다. (1848 투쟁과 코뮨으로부터의 교훈에 한정)

     

    • 레닌도 1914년까지 정립된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 사상을 재확인했지만 그를 넘어서지 못했다. (‘국가와 혁명’은 ‘노동자·농민 국가’라는 용어의 오류, 국가자본주의를 노동자국가로 규정)

     

    • 맑스주의는 ‘정통’이지도 않고 될 수도 없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혁신”하는 문제가 아니고 1914년까지의 역사적 시기의 한계의 결과인 과거의 오류를 수정하고 이론적 틈을 줄이는 것이다.

     

     

    2) 기본입장은 러시아 혁명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 러시아 경험, 이행기 국가의 주요 국면은 무엇인가?

     

    ① 부르주아지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 자신의 힘으로 봉기했다. (이행기 국가, 지역 소비에트의 국가는 노동자 평의회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② 혁명 과정 동안 계급의 단일기관(평의회, 공장위원회)은 국가기관의 편이 되어 점점 주변화되었고 노동계급의 혁명당은 국가당이 되었다.

     

    ③ 혁명 동안 취해진 서로 다른 조치들은 엄청난 혼란의 증거였다. (국가자본주의, 1인 경영, 노동의 군사화 등)

     

    • 노동계급은 노동자 평의회가 아닌 노동조합과 동일시되었다.

    • 국가는 본질적으로 보수적 기관으로 남았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를 통해서나 국가 안에서 행사되지 않고 국가 위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오세철

     

    *이글은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이하 평가와 전망 모임)> 토론회에 발표한 글이며, 평가와 전망 모임에서는 오는 11월 '러시아 혁명 100주년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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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선언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연합하는

코뮤니스트 평화 세상을 쟁취하자!

-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선언 -

 

 

혁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렇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이는 1848년 혁명, 1871년 파리 코뮨, 1905년 러시아혁명의 사상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투쟁경험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의 세계적 투쟁이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낸 세계혁명의 출발점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공산주의(코뮤니즘)에 대한 전략〮〮⦁전술⦁강령 그리고 목표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봉기하여 혁명하지 않는다. 더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가난과 굶주림, 전쟁과 착취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 정치적인 위기가 전반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 바로 이러한 결정적인 물질적 조건의 압력 아래에서 현존하는 체제를 끝장내려는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한다. 또한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싸워온 코뮤니스트들, 그들의 조직인 혁명당과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었을 때 혁명으로 나아간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이러한 전형을 보여준 인류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러시아 혁명은 1905년 ~ 1917년 소비에트 역사의 지속 과정에서 권력 주체는 노동계급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지배계급에는 혼란과 문명의 붕괴였고, 노동계급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이었다. 노동계급은 과거 인류가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통합시켜 낼 역량 있는 계급임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내적 모순으로 사멸할 운명을 가진 자본주의를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복하지 않는다면,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욱 파괴적인 제국주의 전쟁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일깨워주었다. 이는 그 이후 세계혁명 물결의 패배,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퇴행 그리고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로 증명되었다.

 

우리는 10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어떠한 교훈을 얻을 것인가?

 

첫째, 가장 큰 교훈은 파리 코뮨 이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전복과 코뮤니스트 혁명의 당위와 가능성을 주체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이다.

둘째, 일국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시켜 주었다. 스탈린주의와 평의회주의는 서로 적대적이지만, 일국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들 모두 전 지구적 사회주의와 세계혁명이라는 국제주의 원칙을 벗어났음을 입증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혁명의 실패가 러시아 혁명을 일국사회주의에 갇히게 만들었고, 결국 스탈린주의라는 반혁명으로 퇴행했기 때문이다.

셋째, 노동자평의회가 노동계급 미래 혁명투쟁의 기본적 형태임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혁명당을 통한 대리주의를 거부하고 비판하게 만든 근거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체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권력이라는 교훈이었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적 관계에 반대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넷째, 스탈린주의는 혁명의 산물이 아닌 고립과 패배의 산물이다. 스탈린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술책임을 인식시켜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오류는 소련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미국의 뉴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케인지언(Keynesian) 복지국가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전쟁과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패 이후, 소련은 (국가) 자본주의였음이 증명되었다.

 

2017년 지금,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더욱더 인류를 착취, 가난, 기근, 황폐, 전쟁의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 모든 정치·경제·문화·사회·성적 소수자에 대한 폭력, 모든 수준의 사회생활의 무의미함, 인간관계의 퇴행, 환경파괴, 인종주의, 포퓰리즘, 그리고 남성 쇼비니즘이 심화되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더 많은 국가들이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테러리즘이 급증하고 있다. 중동⦁아프리카에서는 전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난민들이 넘쳐나고 있다. 동북아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의 핵무장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파시즘과 민족주의가 세계전쟁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을 끝장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전쟁을 반대하고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세력은 여전히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가 지켜내야 할 원칙은 바로 1848년, 1871년, 1905년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교훈인 혁명적 패배주의, 곧 국제주의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참상과 재난의 원천이다. 인류 생존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가능성이며 물질적 필요성이다.

 

1917년,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이냐, 문명의 파괴와 야만이냐 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엄청난 경험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미래의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2017년, 우리는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이 교훈들을 가능한 한 깊이, 그리고 폭넓게 공부하고, 정교히 하며, 널리 퍼뜨리는 것이 혁명적 소수의 책무이자 책임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 철폐!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코뮤니스트 평화 세상 쟁취!

 

2017년 11월 25일

 

러시아 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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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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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토론회|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7/11/21 20:15
  • 수정일
    2017/11/21 20:15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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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

2018년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20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설 100주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토론회

 

사회 l 김종원

 

순서

-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발제 l 양효식]

- 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발제 l 이형로]

 

- 종합토론 [토론 l 최규진]

- 자유토론

 

일시 l  2017년 11월 25일(토) 오후 2시

장소 l  민주노총 대회의실 (경향신문사 13층)

 

주관 l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모임

 

문의 l  marxrevol19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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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6호를 내면서

코뮤니스트 6호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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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촛불의 물결이 지나가고, 촛불이 만들어낸 ‘정권교체 환상’을 경고하며 두 계절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가을, 우리는 러시아혁명 100주년, 87년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의 붉은 계절을 무겁게 보내고 있다. 
 
『코뮤니스트』는 ‘정세에 맞는 정기발간’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발간이 약간 늦어졌다. 올여름 코뮤니스트 조직 간의 국제 토론이 2개월간 심도 있게 진행되었고,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승리와 패배의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의 국제토론에서는 ‘자본주의 쇠퇴기 규정’에 대한 토론부터 ‘혁명 운동의 침체기 대응(극복) 방안’,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와 코뮤니스트 조직 문제’, ‘북핵-제국주의 전쟁위협’ 등 여러 주제가 다루어졌다. 이 토론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고, 원칙의 문제에서 현실 쟁점까지 더욱 깊고 넓게 이루어질 것이다. 
 
특별히 국제적인 코뮤니스트 동지들은 한국의 운동 문화(조직과 연대 활동에서의 불평등 문화, 투쟁을 갉아먹는 음주문화, 운동 내부의 비운동적 요소 증대 등)의 위험성과 코뮤니스트 조직의 인적 구성(정치의식 균질화 부족)에 대해 우려를 전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충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의 몰락을 가속할 큰 위험요소라 판단하고 반드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혁명 운동의 발전과 계급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혁명조직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안의 혁명적 부분이며, 그 조건은 코뮤니스트 강령에 동의하고 그것을 옹호할 태세를 갖추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에 참여하여 개입하고, 그 안에서 항상 계급의 전체 이익 및 운동의 최종목표를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코뮤니스트 혁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특별한 지위나 명예도 갖지 않는다.”

 

『코뮤니스트』 6호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평가와 교훈 그리고 복원’이라는 장기적 운동 전망을 위한 특집으로 준비했다. 또한, 87년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을 맞이해서는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동조합(주의)’ 문제를 깊게 다루었다.

 

□ 코뮤니스트 정치에서는 문재인 정권 아래 더욱 국가로 포섭되는 노조운동 비판과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끌어내자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을 실었다. 민주노조운동을 넘어 코뮤니스트노동자 운동을, 국가주의를 넘어 국제주의 사수를 주장한다.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에서는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정부와 노동조합, 노동조합의 역사와 역할 변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해 다루었고, 노동조합에 대한 코뮤니스트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코뮤니스트의 역할은 이러한 투쟁에 대한 잘못된 환상이 퍼지지 않도록 근본적인 혁명 전망을 제시하는 일이다. 노동자 투쟁에서 노동조합과 그 조직질서가 어떻게 투쟁을 이탈시키고 통제하는가를 지적하고, 단호하게 비판하며, 노동조합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투쟁을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노동조합주의와 노동조합의 본질을 밝힌 국제코뮤니스트 흐름의 글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노동조합이 계급투쟁 방해 활동을 한 것을 폭로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글을 참고자료로 소개했다.

 

□ 코뮤니스트 혁명가는 안톤 판네쿡 개인에 대한 소개 차원이 아니라 그가 활동했던 시대와 운동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보아도 된다. 아직 한국에서는 판네쿡에 대한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평가를 하지 못하고 있다. 좌익 급진주의자에서 시작하여 좌익공산주의 기초를 세웠고, 혁명의 실패 후에는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로서 많은 저작을 남긴 판네쿡의 사상적 흐름은 독일혁명, 러시아혁명 실패의 경험과 맞닿아있다. 우리가 그와 그 시대 운동으로부터 계승해야 할 긍정적 유산은 바로 혁명의 주체 - 노동자 자기해방의 경로를 명확히 하는 것과 계급투쟁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제주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정파-분파 간의 논쟁에 있어 무엇보다 전체 계급의 이해관계, 운동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당시 국제주의자들의 한계도 지적해야 한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집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와 국제단체에서 러시아혁명 100주년 ‘선언’과 ‘입장’을 발표했는데, 그중에서 세 가지 입장을 실었다. 한국에서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혁명적 관점으로 선언을 발표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수많은 국제주의자, 코뮤니스트들의 견해와 맥락을 같이하는 이 선언을 코뮤니스트는 적극 지지한다. 
 
매우 긴 내용을 발표한 국제코뮤니스트 흐름의 선언 마지막 부분은 100년 전 혁명의 경험과 현재 우리의 과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계급투쟁 없는 자본주의는 있어도 10월 혁명의 기억은 진정 절대 지워질 수 없다. 1917년,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기로: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냐 아니면 문명의 파괴, 아마도 인류 자신의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2017년, 우리는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는 개선되거나, 친환경적이 되거나, 또는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전복은 오랫동안 지연되었으며, 우리 계급이 러시아, 그뿐만 아니라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그리고 100여 년가량 모든 나머지 세계에서 경험했던, 그 엄청난 경험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미래의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이 교훈들을 가능한 한 깊이, 그리고 폭넓게 공부하고, 정교히 하며, 널리 퍼뜨리는 것이 혁명적 소수의 책무이자 책임이다.”

 

『코뮤니스트』 6호를 만드는 우리의 생각도 여기에 있었다. 1848년, 1871년, 1905년, 1917년, 1919년... 그리고 1968년, 1987년... 수많은 투쟁과 혁명의 기억, 이 엄청난 경험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무너진 운동의 복원은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데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극심한 침체가 운동의 미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운동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하고 계급 안에 튼튼히 뿌리내리는’ 장기적인 운동에 나설 것이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억하고 패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과 새로운 승리를 장기적으로 준비할 것이다.

 

2017년 11월
코뮤니스트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87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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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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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6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정치

‣ 러시아혁명 100년, 87년 노동자대투쟁 30년

- 승리와 실패의 유산 모두를 기억하고, 새로운 승리를 준비하자 -

‣ 문재인 정부와 미국의 사드 배치 강행을 규탄한다.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나아가자.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2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 모든 형태의 노동조합주의와 단절하자.

‣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

 

□ 코뮤니스트 혁명가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판네쿡과 노동자평의회

‣ 안톤 판네쿡

-노동자평의회-

 

□ 국제 정세

‣ 금융 위기 이후 10년 : 교육의 가격은 얼마인가?

‣ 세계의 노동계급 투쟁

‣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전쟁 위협: 비합리적인 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집

‣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선언

‣ 국제코뮤니스트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선언-

‣ 10월 혁명 100주년에 즈음하여 : 1917년의 명백한 유산

‣ 코뮤니즘의 역사 : 패배를 기억하고 미래의 전망을 간직하자.

 

□ 혁명운동 정신 계승

‣ 혁명운동 정신 계승을 위하여

‣ 프롤레타리아 조직 - 당과 평의회에 대한 문제의식

 

 

 

◆ 가격 : 1만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또는 카페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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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제1부 기본원칙

     

    오늘날 우리는 코뮤니즘의 위기를 단순히 재구성해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이 목표가 더는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역사상 최초로 코뮤니즘은 역사적 가능성과 필요성이 됐다. 그것은 오직 혁명계급의 의식적 개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 맑스주의 이론에서 국가의 소멸.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소책자, 1982, 서문에서)

     

    1) 맑스주의자에게 노동계급은 국제코뮤니스트 혁명의 담지자이다. 그러나 코뮤니즘은 혁명 후 단순히 선언될 수 없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가 있고, 자본주의 생산단계의 규칙으로부터 통합된 계급 없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순간까지의 이행기가 있다. 이러한 이행기는 불안정한 사회이고 경제적 강제의 모순 흔적이 제거되는 끊임없는 변화의 시기이다. 이행기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떠한 “경제”도 없이 수행하기 때문에 안정된 생산양식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경제” 즉 희소성의 관계를 소멸시키는 시기이다. 본질적으로 운동의 역동적 시기일 것이고 만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퇴행할 것이다.

     

    정치혁명의 승리 직후의 사회는 어떨 것인가? 하나의 큰 걸림돌인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착취자들의 정치 권력을 패퇴시키고, 자본가계급의 어떠한 정치적 표현도 억압하며 그들의 주요 경제 집합체를 몰수하면서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노동계급은 새로운 사회의 유일한 구성인자가 아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비 착취계급과 계층인 농민, 장인, 소부르주아, 도시의 “중간계급”, 그리고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무산계급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저개발 사회의 빈민 대중이 있다.

     

    생산력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개별적이고 연합되지 않는 노동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길만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자본가계급의 반혁명을 막는 투쟁, 가치법칙의 흔적을 절멸시키고, 농업을 사회화하며, 생산자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면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투쟁, 그리고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할 수 있는 연대와 집합적 작업의 관계로 사회를 결합하는 것도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이다.

     

    2)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의 가장 앞선 중심쟁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수많은 맑스주의 용어처럼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좌파의 풍자가 그 의미를 왜곡시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억압자와 착취자의 특권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할 때에만 그 폭력의 정당성을 담보한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폭력은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 부르주아지의 계급폭력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테러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폭력은 방어적이고 부르주아 혁명이 만든 테러의 모델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 부르주아 세력의 재구축에 대항할, 그리고 필요하다면 사회화의 조직들에 대한 무장 항거를 진압하는 정도로 폭력을 엄격하게 최소화하는 문제가 있다.

     

    비착취계층은 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독재”는 다른 계층이 무장 항거를 하는 경우에만, 사회혁명 내의 총체로서 폭력을 사용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을 의미한다.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로 조직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 권력을 갖는다.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어떤 부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폭력이 아니다. 노동자평의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꽃피어 언론, 회합, 집단의사결정의 자유가 최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통찰력과 힘을 줄 수 있다.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분명히 정치적 권리와 표현에서 제외되는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비착취계층에게는 어떠한가? 그들을 이행기 동안 구석으로 몰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탈린주의적, 파시스트적, 위선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논리를 가진 자본주의적 논리를 거부한다. 이행기에 비착취계층은 계급의 존재를 위한 기반은 제거되지만, 사회혁명과정에 연합되어야 한다.

     

    3) 이행기에 왜 국가가 있고 어떤 국가가 존재하는가?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지만, 즉각 국가를 사라지게 할 수 없고 형식과 내용에서 수정된 새로운 국가를 막을 수 없다. 분화되고 갈등하는 사회적 실재는 불가피하게 정치적 상부구조로 표현된다.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적으로부터 혁명을 보호하고 이행기 사회의 결속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행기의 국가는 “잘라야 할 최악의 측면을 지닌 국가” “반(半)국가”다. 맑스주의가 “국가의 폐절”이라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행기의 국가를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국가의 소멸(시들어가기) 생각, 이러한 역동성을 표현한 “반-국가”의 생각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행기의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어서 “반-국가”의 실재적 가능성은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이론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위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이 문제와 씨름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완전하게 밝히지 못한 중심쟁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4) 위에서 언급한 소책자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 맑스주의 이론에서 국가의 소멸’ 은 우리가 답해야 할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새로운 ‘민주주의’를 통해 어떻게 표현되는가? 국가가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와 반혁명의 실체가 된 것처럼 우리는 국가가 어떻게 노동자평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국가에 부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국가의 독재에 맞설 수 있는가? 국가 형식에 대해서 그리고 그 국가 안에서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반-국가’는 ‘노동자국가’인가? 노동자평의회는 이러한 ‘필요악’의 부정적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가?”

     

     

    [참고문헌]

     

    1.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본질에 관한 테제. m.c. 1946

    2. 이행기의 문제들. Italy, 1974

    3. 이행기의 문제들. m.c. 국제평론 1호, 1975

    4. 이행기의 문제들. Italy 국제평론 1호, 1975

    5.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국제평론 8호, 1976

     

     

    제2부 최근 코뮤니스트 진영의 논쟁

     

    1) 1970년대 좌익코뮤니스트 진영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토론과 논쟁은 이행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가 그리고 코뮤니즘의 구체적 모습에 관련되어 이루어졌다. 모든 논의의 출발은 1875년 코뮤니스트 선언이라고 부르는 ‘고타강령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른바 ‘낮은 단계의 코뮤니즘(공산주의)’으로 부르는 이행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시기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실제로 존재했는가가 가장 핵심적인 쟁점일 수밖에 없다.

     

    2) 2010년 이후 이행기를 둘러싼 논쟁이 주로 좌익코뮤니스트 진영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하나는 이행기의 존재에 동의하면서도 평의회 체계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행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이다.

     

    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평의회 체계를 분리하고 코뮨 국가와 평의회 국가를 분리하는 맑스•엥겔스 그리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견해를 비판하는 ICC 내의 이견 그룹인 브라질의 opop(workers' opposition) 그룹의 주장이 있다.

     

    (이 그룹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은 다음 글을 참조할 것.

    ①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 국가(ⅰ)” 국제평론 2012 1st Quarter, 148호, 5-11쪽

    ②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 국가(ⅱ)” 국제평론 2012, 150호, 9-14쪽)

     

    4) 좌익코뮤니스트 그룹 내에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과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은 이행기의 존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국제주의자전망(IP)은 이행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화 이론(Communication Theory)을 주장하고 있다. IP 이외에 이행기를 부정하는 그룹은 영국사회당(SPGB)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대안”(A Buick과 J. Crump)에서 코뮤니스트 사회가 이행기 없이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한 그룹은 Marxist Humanist Initiative로 Andrew Killman의 “맑스주의 개념으로서 ‘이행사회’의 불일치”라는 강연에 기초하고 있다. 킬맨은 하부구조로부터 직접 결정되지 않은 의식은 인민의 의지를 통해 새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의 제3 테제에서의 혁명적 실천을 인용한다.

     

    5) IP의 공산화 이론은 1968년에서 1975년에 발전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Invariance의 J. Camatte의 이론에 근거하여 이행기는 러시아 경험의 국가자본주의 반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을 의심했으며 Dauve와 Nesic (Tropikin그룹)은 레닌주의자들이 맑스의 임노동 폐절이라는 목적을 잊고 오직 계획경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불평한다. 이들은 이행기는 반(反)혁명의 방안이므로 혁명을 통한 즉각적 코뮤니즘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마트는 1914-45년 사이를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경과였고 그것이 반혁명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6) Theorie Communiste는 실질적 포섭을 두 단계로 구분하고 1단계를 1970년까지, 2단계는 그 이후 현재까지로 보며 1974-95를 반혁명으로 규정하면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일국 노동시장의 붕괴, 복지의 사유화, 신자유주의 등으로 자본은 계급 관계의 본질을 변혁시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에 내부화되었고 노동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쓸모없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자본 / 노동의 축이 존재하지만, 자본주의는 폐절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 조건의 일반화는 자본주의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행기라는 전통적 맑스주의적 견해가 정치혁명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 코뮤니스트적 조치가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고 혁명과 함께 그리고 혁명 전에 즉각적 코뮤니스트적 조치를 요구한다. 가치법칙은 점진적으로 파괴될 수 없고 노동계급의 투쟁은 자본과 노동에 맞서 동시에 벌여야 하고 이것만이 계급의 폐지와 보편계급의 출현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7) 이행기를 거부하는 IP의 공산화 이론은 맑스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을 노동과정에서의 잉여가치 추출과 관련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 문제가 있다. 맑스는 형식적 포섭을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 실질적 포섭을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 연관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실질적 포섭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에 전적으로 통합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통합이 지적이고 문화적인 종속을 말하고 있고 핵심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에게만 적용하고 주변부 국가 노동자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질적 포섭에 종속된 노동계급이 계급을 폐절시키는 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고 혁명의 주체가 되어 즉각적 공산화를 이룰 수 있는가가 근본적 문제로 남는다. 즉각적 사회화의 요구는 새로운 사회가 자본주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고, 마치 공산화가 혁명 없이 가능하다는 인상을 준다.

     

    8) 위와 같은 논쟁을 검토해보면 ‘고타강령비판’ 이래 140년의 자본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행기의 필요성에 관한 맑스·엥겔스의 이론적 결론은 여전히 옳다고 인정된다. 그리고 여전히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코뮤니스트 세상을 건설할 유일한 계급으로 남아있고 그들의 자본과의 적대적 관계 때문에 자본주의에 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9) 최근 논의의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① “공산화 이론과 가치 형식의 폐기”, 국제주의자전망, 2012, 가을/겨울, 57호, 11~16쪽

     

    ② “IP와 좌익코뮤니스트의 전통 (3부) - 혁명에 대한 이해”, 국제주의자전망, 2013/14, 겨울, 58/59호, 46~53쪽

     

    ③ “Bilan,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코뮤니즘으로의 이행 (제 2부)”, 국제평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014, 1st Quarter, 152호, 25~30쪽

     

    ④ “이행기와 그 반대 관점들”, 혁명적 전망,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2014, 여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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