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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영국 좌익공산주의의 선구(先驅) 실비아 팽크허스트

영국 좌익공산주의의 선구(先驅)
실비아 팽크허스트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한국 노동자들에겐 생소한 코뮤니스트 혁명가를 소개하려 한다. 그녀가 활동한 유럽에서조차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여성참정권 운동가,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는 세력들의 의도된 왜곡이다.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페미니스트에서 출발했지만, 좌익공산주의자가 되어 영국에서 100년 전부터 이미 의회주의를 거부하고 노동자평의회 설립을 촉구했고, 사회애국주의 개혁주의 세력인 노동당에 반대하여 자본주의 전복과 임금제도의 폐지와 공산주의를 향한 단계로 노동 계급 독재를 주장했다.
본지에서는 추후 코뮤니스트 실비아 팽크허스트에 대해 심층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며, 이번 호에는 선거 정세를 맞아 ‘선거’와 ‘노동당’을 반대하는 주장 글 두 개를 싣는다.
 
소개
 
2015년 영국에서는 주목받는 주류영화 서프러제트(여성참정권운동가)가 상영되었고,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새로운 전기가 발표되었다. 1980년대에는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삶과 정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저작물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실비아 팽크허스트를 다뤘던 책들은 1914년부터 전쟁 초기까지 설명하지 못하는 큰 틈새를 남기려는 경향이 있었다. 즉, 실비아 팽크허스트에게는 여성참정권 운동과 휴식기가 있었고, 이후 전쟁에 대한 국제주의적 반대 입장을 가진 그녀는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를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영국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그녀의 삶과 정치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전기와 서적의 출판 물결이 있었다. 이때, 자유주의 좌파들은 실비아 팽크허스트를 세계 평화와 사회 정의에 대한 페미니스트, 급진주의자, 반란군, 반파시스트, 반식민주의자 운동가로 자리매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2007년 실비아 팽크허스트 페스티벌 기사에서 "부르주아에게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페미니스트 좌파 또는 자유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 라고 썼다.
하지만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에, 급진적 여성참정권 정치를 포기하고 공산주의로 전향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동시에 계급투쟁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 정치를 깨고 공산주의자로 선언했다. 팽크허스트와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노동계급 투사들(대부분 여성)의 확고한 결단 덕분에 이 나라에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미약하지만 확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들이 힘을 얻고 배울 수 있는 글을 남겼다. 이것이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진정한 유산이다. 이것이 오늘날 코뮤니스트들이 지키려는 유산이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주아의 하수인인 자유주의자들과 좌파에게 말하는 이유이다. “실비아 팽크허스트에게서 손을 떼시오!” (실비아 팽크허스트 - 페미니즘에서 좌익공산주의로 - 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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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1917년 러시아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기억

  • 1917년 러시아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기억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인류의 최후 희망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에게는 2017년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라는 점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새해를 맞이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 또한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를 상기할 것이다.

     

    물론 그들 중 다수는 이를 무시하거나, 단지 고대의 역사일 뿐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며 그 의미를 깎아내릴 것이다. 모든 것이 그때와는 변했다. 노동계급이 더는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세계화에 의해 학살된 구 산업화 시대의 것으로 ‘노동 계급 혁명’이라는 용어가 브렉시트 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투표에 반대하는데 흡수되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폄하되는 상황에서 대체 노동계급 혁명을 이야기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또는, 1917년 세계를 뒤흔든 봉기를 떠올린다면, 확고한 교훈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공포의 이야기로 채색되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하라! 당신이 더 나은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빠진 채 현재의 시스템에 대해 도전할 때 발생할 일이다. 당신은 더욱 나쁜 상황에 처한다. 당신은 테러를 당하고, 어디에나 있는 전체주의적 국가에서 강제노동수용소(Gulags)에 갇힌다. 그것은 1917년 10월 쿠데타로 신생 민주주의 국가 러시아를 살해한 레닌과 그의 광신적 무리인 볼셰비키와 함께 시작했고, 사회의 모든 것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바꿔버린 스탈린과 함께 끝났다. 그 후 모든 것이 무너졌고, 자본주의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근대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는 20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는 환상에 절대 사로잡혀있지 않다. 오늘날은 노동계급과 그들의 소수 그룹에게 무척이나 힘든 시기이다. 민족주의의 성장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데 일조하는 인종주의에 따라, 오른편에는 대중주의의 선전으로 가득 차고 왼편에는 이러한 새로운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떠들썩한 호소로 가득한 증오에 따라, 절망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의 부재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우리에게 우리의 정치적인 선배들(좌익 공산주의자)의 작업을 떠올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좌익 공산주의자 그룹들은 1917년 러시아에서의 사건으로 발생한 혁명적 운동의 끔찍한 패배에서 살아남았고, 혁명으로 향한 길을 이끌기 위해 형성되었던 바로 그 공산당들의 결과적인 변질과 죽음을 이해하려 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스트 형태의 반혁명의 공개적인 테러와 보다 은밀한 기만으로써의 민주주의의에 모두 저항하면서, 가장 명료한 좌익 공산주의자 흐름은 – 이를테면 1930년대 빌랑(reviews Bilan)과 40년대 국제주의(Internationalizme) 근처에 있었던 이들 – 혁명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엄청난 작업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중상모략 자들에 반대하여,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본질적이고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다시 확인했다. 특히,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러시아”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승리를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희망은 지구상의 나머지 부분으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확장하는 데 있었다.

    - 부르주아 국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치권력 기관(잘 알려진 것으로는 소비에트 또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을 창조하는 노동 계급의 역량을 확인했다.

    - 국제주의와 노동계급 자율의 원칙들을 방어하는 혁명적 정치 조직이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1930년대와 40년대의 혁명가들은 또한 어떤 노동자들의 당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에 직면한 볼셰비키가 저지른 값비싼 오류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분석을 시작했다. 특히,

     

    - 당이 스스로 소비에트를 대체하고, 당과 10월 혁명 이후의 국가를 일체화하려는 경향의 증가를 지적했는데, 이는 소비에트의 권력을 껍데기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새로운 국가에도 반대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를 방어하는 당의 역량 또한 약화하는 것이었다.

    - 반혁명의 백색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의 ‘적색 테러’에 의존한 것은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조직 억압하는데 얽매이게 되었다.

    - 국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 시기로 보는 경향과 심지어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경향.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그 시작에서부터 러시아 혁명과 1917년에서 23년까지의 국제적인 혁명적 흐름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시도해 왔다. 우리는 몇 년 동안 노동 계급의 역사에서 정말로 필수불가결한 시대를 다루는 기사와 팸플릿들을 모아 자료로 구축해왔다. 내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우리는 러시아 혁명과 국제적인 혁명적 흐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사 일체를 갱신함으로써, 우리의 독자들이 이러한 문서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매달, 혹은 일정한 간격으로 우리는 혁명적 과정의 연대기적 발전과 직접 관련되거나, 부르주아 선전의 공격 또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환경 내부와 주변을 둘러싼 토론들에서 제기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반응을 담고 있는 머리기사를 낼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달, 우리는 1997년 처음 작성된 2월 혁명에 대한 기사를 우리 웹사이트의 전면에 ‘올릴’ 예정이다. 그 후에는 레닌의 4월 테제, 7월의 날들, 10월 봉기에 관한 기사 등등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오랜 기간 계속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혁명과 반혁명의 드라마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이는 러시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상하이까지, 토리노에서 파타고니아까지, 클라이드사이드에서 시애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메아리쳐 울렸던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수집에 우리가 아직 깊이 검토하지는 않은 문제들 (그 시기 지배 계급이 혁명에 저항하여 저지른 맹공격, ‘적색 테러’의 문제...) 에 대해 다룬 새로운 글들을 추가하려 한다. 이 기사들은 노동 계급의 혁명적 기억에 반대를 목적으로 하는 최근의 자본주의 선전에 대한 대응이다. 이 기사들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건들 – 러시아 혁명 시기와 무엇이 공통적인지, 그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난 100년간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는지... – 을 볼 것이다.

     

    이러한 모험적인 출판의 목적은 단순히 오랜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을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1917년에 그랬던 것보다 오늘날 훨씬 더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는 관점을 방어하는 것이다.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공포에 직면하여 그 시기 혁명가들은 자본주의가 그 쇠퇴기에 진입하였음을 결론 내리고 인류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사이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고자 한 첫 번째 시도의 패배에 이은 더욱더 큰 공포 –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 가 그들의 진단을 극명하게 확인시켜주었다. 한 세기 후, 여전히 살아남은 자본주의는 인류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을 제기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독일 혁명의 전날 밤 썼던 글에서 볼셰비키의 오류, 특히 적색 테러 정책에 대한 그녀 자신의 매우 진지한 비판에도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 당과 근본적인 연대를 표현하였다. 그녀의 글은 그녀 자신이 직면했던 미래에 대해서만큼, 우리들의 미래와도 연관되어 있다.

     

    - 지금 해야 할 것은, 볼셰비키 정책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 핵심과 우연적인 방해물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결정적인 마지막 투쟁에 직면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시간을 불태우는 문제들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하는 부차적인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실천의 역량, 행동의 힘, 사회주의의 권력을 향한 의지와 같은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본보기가 될, 앞으로 나아간 첫 번째 주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지금까지 후텐(Ulrich von Hutten) 과 함께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다.”내가 감히!“

     

    이것이 볼셰비키 당의 본질이며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사회주의 실현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제기하였고, 그리고 전 세계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을 힘차게 해나갔다는, 불후의 역사적 업적을 해냈다. 러시아에서, 문제는 오직 제기될 수 있었을 뿐이다. 러시아에서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전 세계의 미래는 ‘볼셰비즘’에 속해 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702/14242/russia-1917-and-revolutionary-memory-working-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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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유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Junius-Broschu're])은 세계의 역사적 변화의 개막을 열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분석의 글이다. 이 전쟁에서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인류가 학살되었다. 예를 들어 북프랑스와 플랑드르(벨기에)에서 독가스와 같은 신무기의 사용으로 단 몇 주 동안 수만 명의 병사가 살해되었다. 종전까지 사망자가 약 2천만 명에 달했고 종전 직후 지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사람들 2천만 명이 이후 '스페인 독감'이라 알려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SPD) 소속 제국 의회 의원들은 전쟁차관 승인에 찬성했다. 처음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롤레타리아 당의 지도부 중의 하나가 국제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원칙을 배반했다. 그 배반자들에 대항해 독일에서 몇몇 남지 않은 국제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국제주의의 옹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국제주의자들 최초의 국제대회가 스위스의 침머발트1)에서 조직되었다. 전쟁의 발발과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에 대응해 혁명가들은 그 전쟁의 뿌리와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 「사회민주당의 위기」와 그녀가 초안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세우려는 국제적 노력의 일부였다. 그녀는 전쟁이 일어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15년 4월 감옥 안에서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이 팸플릿을 썼다. 전쟁 상황 속에서 그 글은 즉시 출판될 수 없었고, 1916년 1월에야 독일 밖에서 출판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을 놓고 볼 때, 그녀의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전쟁이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가차 없고 대담한 자기비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근원을 찾아서

     

    그 팸플릿의 여러 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해야만 하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너무) 뒤늦게 도착한” 나라들이 어떻게 해서 “먼저 도착한” 나라들로부터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정복 물들을 빼앗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상승을 다룬 이 장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했고 이러한 발전은 어느 한 나라 만에 의해서 개시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 (본문 제7장)

     

    1890년대에 행한 분석에서 그녀는 폴란드는 더는 독립국이 될 수 없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더는 민족자결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1차 세계대전의 사건들로 확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진영 안에서 국가 방어 전쟁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거부한 선구자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이다.”(본문 제7장)

     

    전쟁 발발 후 몇 달 만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참여국들의 경제적 폐허를 초래하는 이 전쟁의 새로운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과 이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석한 후, 그녀는 전쟁의 발발에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의 결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노동자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이 자본가들과 함께 서명한, 공장들에서의 당쟁중지(즉, 파업금지) 선언이 없었다면, 간단히 말해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자계급과 인류에게 있어서의 귀결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조국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는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체의 전쟁과 파괴충동을 제거할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희망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한다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인식했다.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과 직면했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귀결들

     

    독일 사회민주당(SPD) 지도부의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등을 중심으로 한 결연한 독일 국제주의자들은, 당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모든 국제주의적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의 부록으로 출판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초안했다. 이 초안은 몇몇 변경을 거쳐 새로이 창립된 스파르타쿠스연맹에 의해 그룹의 지침으로 채택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중요성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 팸플릿은 자본주의가 들어선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그것의 주요한 견해들(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쇠퇴기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노동자 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과 방법(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 원칙들을 규명하는 것, 가차 없는 자기비판,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한 장기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능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쓴 다른 저작, '자본의 축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들과 그 기본 모순들 그리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시기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를 초래하게 되는지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 출판이 이미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니우스 팸플릿의 출판도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열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는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의 암이 되었고 그래서 '민족자결' 요구는 더는 의제가 아니라는 로자의 결론은 큰 논쟁을 유발했다. 전쟁 중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에서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통된 국제주의의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공유된 전망의 틀 안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발전의 근원들 및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의 근원들에 관한 그리고 혁명의 전망에 관한 토론은, 억압과 추방 등 가장 어려운 조건들 아래에서도 그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줄을 당기는 것을, 즉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전쟁 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그녀를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감금의 의도였다면, 갇힌 후 그녀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녀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 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녀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찾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 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와 사기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녀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일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2)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그녀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녀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녀는 감옥 밖에서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저작들은 반복해서 감옥 밖으로 몰래 빠져나갔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녀는 많은 동지와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녀를 침묵시키고 그녀가 개인들에게, 그녀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녀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정치적 인간적인 목소리를 감옥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그녀의 수감 시기는 삶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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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뮌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그녀는 폴란드에서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들)을 수학했다. 1897년 그녀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녀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그녀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녀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녀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녀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3)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될 수가 없다. 비록 그녀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녀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갇혀있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견해를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점 증가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녀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러시아 자체에서 해결될 수는 없음이 그녀에게는 분명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그녀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녀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KPD)의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녀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파악하고 착취당하는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전망을 발전시키는데 꼭 필요한 그녀의 대작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주>

     

    1. http://en.internationalism.org/wr/290_zimmerwald.htmlhttp://en.internationalism.org/node/3154

    2.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보낸 1916년 7월 11일 자 편지

    3. 「자본의 축적 II」( 로자 룩셈부르크; 황선길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에 실린 “비판에 대한 반비판, 자본의 축적, 또는 아류들이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974쪽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100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에 대항해서 쓴 유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Junius-Broschu're])이 최초로 한국어본으로 나오는데 기여했다. 새로운 한국어본을 위해 작성한 서문을 여기에 공개한다. 지배계급과 그 선동 기구들이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대학살에 대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상황에서 다른 한편의 혁명가들은 전쟁반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맞섰던 국제주의자들의 도덕적, 지적 용기를 자랑스럽게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7월 6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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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유 군단(Freikorps)에 의해, 투쟁의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암살되었다. 이 병사들은 "사냥개가 필요하다면 내가 될 것이다"! 라고 선언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원 노스케 장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의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것도,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암살한 것도 권력을 잡은 그 사회주의자 당(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끔찍한 살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일련의 중상모략을 통해 오랫동안 준비되었다. "붉은 로자", "선동자 로자", "피의 로자", "차리즘의 첩자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거짓 비난이 그치지 않았고, 베를린에서 "피의 주간" 이었던 1918년 말 / 1919년 초에는 학살에 대한 요구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혁명을 위해 이 위대한 투사를 “명예 회복시키는”(즉,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근 몇 십 년간의 “기억”이라는 작업의 진정한 목적이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투쟁을 왜곡시키기 위한 꾸준한 캠페인

     

    1930년대 프랑스의 예를 들면, 루시앙 라우렛(Lucien Laurat) 주변에서 발전한 모든 흐름은 민주주의의 유혹에 점점 더 양보했고, 이윽고 “볼셰비키 혁명” 처음부터 혁명 계획의 “과실” 안에 “벌레” 레닌이 있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1936-39년의 스페인 전쟁에서 공화군을 위한 변명이 되었고,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는 구실로 제2차 세계 학살에 노동 계급을 용기병으로 참가하게 하는 변명이 되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POUM(스페인의 맑스주의 통합 노동자당 : 역주)과 그들, 민족 저항세력의 “영웅주의” 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이 구역질이 나는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Rene Lefeuvre)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1]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은 이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 그리고 말하는 김에 우리 또한 –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 :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1974년 서독(FRG)에서, 그들은 심지어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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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 조직에 반대하는 새로운 캠페인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공산주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손에 있을 때 특히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무기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 여기고 그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는데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 그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라면, 결국 실패한 공포였다면, 왜 그것을 위해 투쟁할까? 결국, 스탈린주의의 재앙으로 귀결될 뿐이라면 왜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는가? 부르주아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논리이며 독이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구역질이 나는 선전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과 "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아주 유명하고 명성 있는 신문 르몽드는 2013년 9월, ESCP 유럽의 교수인 장-마크 다니엘(Jean-Marc Daniel)이 쓴 글을 다음과 같이 잘 연상되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지배 계급에 대항한 “진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 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책이 지금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시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고 있다. 사회비판그룹의 “룩셈부르크주의자”인 민주적 역사학자들의 후원 아래 파리에서 있었던 것처럼, 회의와 토론들이 여기저기서 조직되었다. 예술계에서조차 2014 MAIF 상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획한 조각가 니콜라스 밀헤(Nicolas Milhe)가 수상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그녀가 혁명의 반대자로서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에서 그녀의 동지에게 반대했다는 조건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녀를 변환시키기 위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의 가증스러운 선전 후에는 매우 진지하고 공식적으로 학교 프로그램에서 배운 볼셰비키의 적으로서 여기는 것이 이제부터는  룩셈부르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 배후에 불신과 혁명 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말 하지 않는 목적과 함께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재조명하는 캠페인이 있다.

     

    2014년11월 7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 “사회주의 조직의 문제”(1904), “대중과 지도자”(1903), “비판의 자유와 과학의 자유”(1899).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505/13055/rosa-luxemburg-belongs-proletarian-revolution-not-social-democr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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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로자 룩셈부르크의 복원을 위하여

  • 로자 룩셈부르크의 복원을 위하여

     

     

     

    올해는 러시아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고, 2년 뒤에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내부의 적들에게 살해된 지 100년이 된다.

     

    우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왜곡시켜 다시 한 번 살해한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들은 바로 부르주아와 노동자 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를 '민주주의의 성인'으로 둔갑시키는 더러운 선전과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시도에 맞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 시대에 싸웠던 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이며,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지지하며, 이 위대한 투사를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소개하는 작업에 동참할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 작성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을 소개한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사회실천연구소의 '실천'에 처음 한국어 번역본을 실었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 독일어 원본을 번역하여 웹사이트에 게시했다. 원래는 출판을 통해 이 팸플릿을 한국에 소개하려고 했으나 우리의 문제로 계속 미루어졌고, 결국 온라인에 먼저 공개하기로 했다. 이 번역본이 독자들의 참여와 교정 제안을 통해 원본의 느낌에 가깝게 개선되기를 바라며,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소개될 수 있도록 출판 작업을 서두를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이듬해인 1915년 4월 옥중에서 쓴 이 글을 썼다. 그 후 이글은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부록으로 하여 1916년 1월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이 번역의 원본은 베를린 디이츠 출판사가 1974년 펴낸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선집 제4권(1914년 8월부터 1919년 1월까지), 51쪽부터 164쪽이다. 역자의 번역 의도는 되도록 많은 이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찰이 빛나는 이 글을 한국어로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흡한 점이 많은 상태지만 지금 이렇게 공개하게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어 원본의 맛이 완전히 전달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앞으로 독자들의 많은 충고와 교정제안을 통해 이 한국어 번역본이 차츰 더 다듬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메일: http://ko.internationalism.org/contact)

     

    이 글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단지 퍼갈 때는 가능하면 출처를 밝혀, 원한다면 모든 읽는 이들이 번역본의 개선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또 개선된 번역본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사회민주당의 위기(유니우스팜플렛) - 로자 룩셈부르크, 역자 노트,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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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코뮤니스트의 운명

  • 코뮤니스트의 운명

     

    고 남궁원 동지의 3주기를 기억함

     

     

    詩 조성웅

     

     

    이름 없이

    한 명의 코뮤니스트가 사라지는 것이

    유독 슬픈 것만은 아니다

    그의 생이 온통 프롤레타리아트의 곁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도록 눅진한 날이었으나

    그는 좀처럼 비 개인 맑은 하늘을 포기 하지 않았다

     

    곁을 내어주고 난 그의 빈 몸에

    비 개인 맑은 하늘처럼 채워지는 코뮤니즘의 길

     

    남궁원 동지의 몸은 이미 저승으로 저물었으나

    그가 남긴 웃음은

    혁명정당 강령의 첫 번째 문장 같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곁이 되고 그 웃음에 베어드는 일,

    낮은 곳에서 솟구치는 외침은 죄다 그의 문장이었다

    조용조용 들어주는 그의 문장, 문장들

    토닥토닥 토닥여 주는 그의 문장, 문장들을 거치면

     

    아물지 않는 것이 없고

    견디지 못할 것이 없고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

     

    이름 없이 계급투쟁을 살고

    이름 없이 혁명을 살고

    이름 없이 사멸하는 국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코뮤니스트의 운명,

    가장 빛나는 전망이다

     

    가장 빛나는 전망

    남궁원 동지여!

    더 할 수 없는 명예여!

     

     

     

     

    남궁원 동지와 함께 걸어온 길을 회고하면서

     

     

    지금까지 맑스주의 운동과 코뮤니스트 운동을 함께 걸어온 그 어떤 동지들보다 남궁원 동지는 나와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나는 그가 의식불명으로 투병하는 동안, 그리고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 후 거의 몇 개월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술잔을 비웠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할 일을 너무 많이 남겨두고 먼저 간 동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의 운동이 나의 운동이고 우리의 운동이었음을 더듬어보자. 1991년 내가 젊은 동지들과 민중당을 탈당하고 민중회의를 만들었을 때 남궁 동지는 은평 지부에서 활동했는데, 항상 그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그는 현장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저돌적 투사였지만 늘 폭넓게 책을 읽고 교조적이지 않게 운동의 미래를 새롭게 모색하는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 후 그는 2013년까지 22년 동안 쉬지 않고 흔들림 없이 혁명적 맑스주의자, 코뮤니스트의 길을 걸어왔다.

     

    우리 운동에서 획기적인 결절점은 2002년 「노동자의 힘」에서의 탈퇴였다. 민중당 탈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거에 대한 입장이 문제였다. 노동자의 힘의 다수안은 민중 진영 경선을 통한 선거 참여이었고, 우리의 소수안은 선거불참 그리고 대중투쟁을 통한 사회주의(혁명)당 건설 계획안이었다. 노동자의 힘을 포함한 공개 중도주의 세력, 반합•비합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과 대선 이후 함께 당을 건설하자는 안이었는데, 총회에서 열 몇 표 차로 부결되었고, 남궁동지와 나를 비롯한 몇 명 동지들은 노동자의 힘을 탈퇴하고 「사회주의정치연합」을 만든다.

     

    그 이후의 우리의 활동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 그리고 코뮤니스트 운동으로 이어졌고, 활동도 그 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2004년 사회이론 연구소 「빛나는 전망」, 「빛나는 전망 출판사」, 노동자평의회를 향한 전국모임 참여, 2005년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 제안, 2006년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 개최, 2008년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 그리고 그 후 「사노위」, 「노혁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늘 함께 했다.

     

    같은 방향과 원칙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어오면서도 남궁 동지와 나는 노선을 둘러싼 토론과 논쟁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사정연」에서는 당에 대한 세미나를, 「노동자평의회 모임」에서는 노동자 평의회와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 역사에 대한 세미나를 하면서, 그리고 안톤 판네쿡의 「노동자평의회」와 여러 관련 책을 출간하면서 당과 평의회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남궁 동지는 좌익공산주의계열 가운데 독일, 네덜란드 등의 평의회주의자의 입장을 강하게 가졌던 것으로 보였다. 그의 눈으로 보면 나는 당주의자 또는 레닌주의자로 보였을 것이다.

     

    논쟁은 뒤풀이로 이어지고 계속되었는데, 그 시기 그는 몇 번 나에게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했고, 며칠 동안 연락이 끊긴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논쟁도 오래가지 않았다. 당과 평의회가 대립하지 않고 혁명의 총체적 과정에서 변증법적으로 결합되고 그 이후 결국 당이 소멸되는 것이라는 좌익공산주의의 입장으로 진전되면서 해소되었다.

     

    그 후 남궁 동지는 좌익공산주의의 원칙과 입장을 알리고 설명하는데 앞장섰다. 앞으로 출간될 그의 「글 모음집」을 보면 그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진정한 코뮤니스트 남궁 동지를 먼저 보낸 것도 안타깝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 마시며 논쟁하는 진정한 술동무를 잃은 것도 슬프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지 못하지만 남궁동지를 늘 안주상에 올리고 이야깃거리를 삼을 테니 섭섭해 하지 말기를!

    투쟁, 여기가 로두스다.

     

     

    사회실천연구소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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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남궁원이 부른다 '청계천 8가'에서 '인터내셔널'까지

남궁원이 부른다

'청계천 8가'에서 '인터내셔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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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여름 남궁원 동지가 떠난 지 3년이 되었고, 그의 코뮤니스트 정신을 계승하는 동지들은 3년간의 추모를 마무리하고 제대로 된 계승과 실천을 위해 추모집을 발행했다.

 

올해는 그와 함께했던 운동을 평가하는 토론회('남궁원과 사회주의' 토론회)를 개최하여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과 실천을 모색하기로 했고, 그 결과를 담은 유고집을 발행할 계획이다.

 

지난 3년간 남궁원 동지를 추모했던 모든 과정은 단순한 연례행사가 아니라 코뮤니스트의 삶을 살고자 했던 남궁원 동지를 기억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코뮤니스트 정치 운동이자 추모 문화였다. 그러나 아직 코뮤니스트 문화라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기에, 앞으로 더욱 원칙적으로 코뮤니스트 추모문화를 정립해 나갈 것이다.

 

'코뮤니스트의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라며 이 추모집을 소개한다. 또한 <코뮤니스트>의 창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남궁원 동지를 기리며 추모집 글 몇 편을 여기에 싣는다.

 

 

 

코뮤니스트 남궁원 동지 추모집을 발간하며

 

 

남궁원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습니다. 아직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 그가 필요한 사람, 그를 편히 보내지 못한 사람, 그를 계승하겠다는 사람, 아직도 3년 전에 머무른 사람...

 

동지를 추모하고 계승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 어느 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동지를 편하게 보내주려 합니다. 남궁원 동지를 그리워하며 실컷 울고, 그에게 못다 한 말도 모두 전하고,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이제 아프기만 한 기억이 아니라 그립고 아련한 기억으로 남기려 합니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동지가 남겨준 과제와 이루어나갈 세상을 위해 제대로 계승하며 실천하겠습니다.

 

코뮤니스트 남궁원 동지 계승사업회에서는 남궁원 동지의 3주기를 기하여 유고집을 발간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추모집은 남궁원 동지의 인간적인 삶과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추모의 마무리입니다. 가을에 발간될 다음 유고집은 남궁원 동지가 펼쳐 온 운동을 재구성하고 평가하여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한 계승의 시작입니다.

 

이 추모집을 통해 함께 하는 동지의 소중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운동하는 사람이 운동만큼 가족에도 충실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운동과 신념에 대한 진심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작은 책이 코뮤니스트로서 험난한 길을 걸어갔던 남궁원 동지에게,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정이 많았던 사랑하는 가족 남궁원에게, 혁명을 꿈꾸고 예술을 사랑하고 고독마저 즐겼던 남궁원 자신에게 온전히 전해져서 이제라도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손짓하길 원합니다.

 

남궁원 동지가 못다 부른 노래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함께 부르겠습니다.

 

2016년 7월

 

코뮤니스트 남궁원 동지 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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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대대적 촛불 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inspiration)

대대적 촛불 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inspiration)
 
 
1. 대대적 촛불 투쟁의 배경과 전개
 
1) 언론의 박근혜 게이트 보도와 촛불 투쟁의 점화
 
- 박근혜를 파면시키는 데까지 나아간 촛불 투쟁에서 언론의 역할은 특별했다. 촛불 투쟁 이전에도 자유주의-진보 언론으로 지칭되는 한겨레, 경향, 뉴스타파, 미디어오늘, 오마이뉴스, 고발 뉴스 등의 매체는 박근혜 정부의 여러 문제를 꾸준히 파헤치고 비판해왔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박근혜 게이트는 오히려 보수-반동 언론의 상징인 조선일보가 먼저 최순실 문제를 언급하면서 수면에 떠올랐고, 종편인 JTBC의 보도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조선일보는 청와대의 역습에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10월 24일 JTBC의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 이후 최순실의 국정개입 사태가 이슈화되자 다시 공격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점화되기 시작한 촛불 투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게 퍼져간다.

- 이러한 대폭발과 분노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보수언론과 종편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촛불 집회를 중계했고, 박근혜 게이트 폭로에 전 방위적으로 나선다. 박근혜 정권의 추락과 촛불 투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정세에 맞닥뜨린 언론은 재빠르게 촛불 민심에 맞춰 박근혜 게이트 폭로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들은 촛불 투쟁이 사회혁명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대중의식과 행동이 급진화하지 않도록 촛불 집회를 질서와 평화 집회라는 틀에 가두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여기에는 자유주의-진보 언론과 보수-반동 언론이 따로 없이 한목소리를 냈다.
국회의 탄핵 가결 이후에는 비판과 지지의 수위는 다르지만,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유지하는 황교안 체제의 안착과 대선 국면으로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 10월 29일 첫 집회를 시작으로 촛불의 행렬은 (주최 측 추산) 한 달 만에 200만을 넘어섰고, 작년 연말엔 연인원 1,000만을 넘기며 폭발하여,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파면 결정까지 1,500만 명을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역사를 만든다. 언론보도 때문에 점화된 촛불 투쟁은 기성 언론에만 의존하지 않고 거리와 광장에서 직접 소통했다. 온라인에서도 다양하고 풍부하게 소통하면서 스스로 진화했다.
촛불 투쟁에서 나타나고 있는 열린 정보 공유, 쌍방향 소통, 수평적 토론, 독립적 판단과 행동 등 새로운 ‘대중적 소통’이야말로 1,500만 촛불이 (보수반동) 언론권력을 넘어설 힘이자 가능성이다.
 
 
2) ‘퇴진행동’이 주최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확산된 촛불 투쟁
 
“대다수 언론이 의도적으로 10월 29일부터 퇴진행동이 집회를 시작한 것처럼 보도하지만, 실제 이날 집회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발의하고 주최한 집회였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당일 집회를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최할 것인지를 두고 자발적 시민참가를 방해할 수 있다며 주최 없이 가자는 제기에 맞서 논쟁한 결과였다. 이날 이후 첫 1백만 명이 넘어선 11월 12일 집회까지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퇴진운동의 커다란 밑거름이 됐다.”1)
 
“흐름과 주체역량을 살펴보면 약 일 년 이상의 기간을 통해 500여 개의 단체로 구성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결성되어 퇴진을 내걸고 ‘민중총궐기’를 준비하였고, 최순실 게이트 이후 제 시민사회단체 약 1,500개가 모여 ‘박근혜 정권 퇴진 국민 행동’이 결성되었으며 이후 민주당을 비롯하여 범야권도 뒤늦게 위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다.”2)
 
- 2016년 10월 29일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최했던 첫 번째 촛불 집회를 시작으로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대중들은 집회의 주최가 누군지 굳이 따지지 않고 거리로 광장으로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집회의 명칭도 시민촛불, 민중총궐기, 범국민행동, 부문별, 지역별, 주최 별로 다양했지만, 대중들은 개의치 않았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 집회’라는 것에 동의해 자발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 이에 고무된 약 1,500개의 시민사회단체는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을 결성한다. 2016년 11월 12일 개최된 ‘민중총궐기-범국민행동’ 이후 ‘퇴진행동’은 지난 2017년 3월 11일 ‘20차 범국민 행동의 날’ 촛불 집회까지 4개월 넘게 ‘서울 집중 집회’와 ‘전국 집회’ 등 수십 번의 촛불 집회를 개최했다.
이번 촛불 집회는 ‘퇴진행동’이 기획하고 주최했지만, 수십만 명을 넘는 인원이 지속해서 참가한 것은 단체의 조직력보다 개별(가족, 친구, 혼자) 단위의 자발적인 참가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개별 참가자들이 많다는 것은 대규모 집회 참가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언론보도를 보고 스스로 판단해 참가한 사람들이 많아 시차를 두고 분노한 사람들이 꾸준히 모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 집회 참가자 중 상당수가 처음 참가한 집회였지만, 이들의 분노는 ‘박근혜 (즉각) 퇴진’을 외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까지는 모르지만 ‘박근혜가 물러날 때까지 촛불 집회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촛불 투쟁의 확산은 바로 이러한 ‘분노’와 분노를 표출할 ‘광장’과 광장에서 주장해야 할 ‘목표’가 누구에게나 명료하게 보였고, 그것을 ‘촛불 집회’가 실현해 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촛불 투쟁의 유지와 확산에 '퇴진행동'이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집회 주최 측은 촛불 투쟁의 발전 가능성인 ‘분노’와 ‘광장’과 ‘목표’를 제한 없이 열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통제하고 가두는 역할도 했다. 촛불 투쟁을 통해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를 확장하고 나아가 촛불을 넘어선 다수의 혁명으로 발전시키는 갈림길에서 퇴진행동이 그 계기를 막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3) 대대적 촛불 투쟁의 배경
 
- 촛불 투쟁이 사상 초유의 규모로 분출한 계기는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민낯이 밝혀지면서이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늘 감춰져 있었다. 바로 박근혜 정권 이전부터 곪아 터진 자본주의 위기(공황)가 문제의 본질이다.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자본가 권력이 근본적인 처방보다는 자신들의 연명을 위해 모든 희생과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겼다. 이 때문에 분노는 언제든 계기만 주어지면 터져 나올 수 있었다. 1,000만 비정규직,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급증하는 실업, 몰락하는 자영업, 생존권 위기에 몰린 빈민과 노인, 철저한 계급사회임을 증명하는 구조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가 촛불 투쟁의 배경이다.

- 정치적으로 박근혜 정권은 콘크리트 지지층이라는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 동원 부정선거 문제와 세월호 참사 책임이라는 치명적인 약점과 최순실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남용 문제로 내부 균열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었다.
이에 박근혜는 자신의 약점을 덮기 위해 반대세력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지지층 결집만을 위한 독선적 통치로 일관해왔다.
집권 초기부터 공안탄압으로 시작하여,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투쟁을 온갖 추악한 방법을 동원해 막았다. 다음에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투쟁인 민중총궐기를 국가폭력으로 막고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을 사경에 빠뜨려 끝내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지도부를 구속하며 탄압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거칠 것 없이 공격에 매진하던 박근혜 정권은 내부 균열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해 박근혜 게이트를 정점으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 박근혜 정권 내내 밀리기만 하던 저항 세력에게 촛불 투쟁의 힘은 새로운 공간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재벌의 정경유착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성과연봉제 반대, 사드 배치 반대 투쟁, 국정교과서 추진 중단 등의 투쟁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절박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현안은 차가운 농성장과 한편에 묻혀있다.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태로 ‘표현의 자유’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음에도 <노동자의 책> 사건과 같이 국가보안법 탄압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직 적대적인 방해세력과 시스템이 건재함을 방증한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력한 투쟁 없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촛불 투쟁의 주체와 의식
 
1) 조직노동자
 
“조직노동자운동은 촛불항쟁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업 중이던 철도노동자들이 초기 동력을 형성했고, 평일 촛불의 경우 철도노동자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오롯이 끌고 갔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고, 촛불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11월 12일 백만 촛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누구도 대놓고 민주노총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조직 대중들 수백만이 거리에 모이는 동안에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통해 운동의 조직적,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데 주저했고, 거대한 사회적 압력에 떠밀려 결정하고 실행한 11월 30일 파업이 사실상 초라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는 사이 ‘즉각 퇴진’을 외친 수백만의 촛불항쟁의 정치적 주도권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탄핵으로 넘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퇴진행동’내에서 시민단체와 야권연대 세력들이 야당과의 공조를 중요하게 부각하고, ‘즉각 퇴진’ 요구가 국회 탄핵과 특검, 헌재를 압박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3)
 
-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 투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대규모 집회에서 중심이 되어 왔다. 그만큼 조직력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초기에도 조직노동자들은 집회의 중심을 유지했고 거리행진에서도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후퇴를 거듭한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 투쟁에서도 ‘조직적으로 참가하는 단체 참가자’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동안 유력한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하거나 방해했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에 맞선 총파업 투쟁은 회피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크고 작은 노조를 가리지 않고 관성처럼 자리 잡은 어용세력과 조합주의자들은 민주노조 원칙을 훼손하고 수많은 투쟁을 교란했다.
 
- 이러한 현실에서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촛불 집회의 위세에 조직노동자들은 자극받고 고무되기도 했지만, 노동조합 투쟁에서 그래왔듯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 물결에 자신들이 가진 노동자 고유의 무기로 투쟁에 힘을 싣기보다는 형식적으로 대응했다.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계급적 투쟁’보다는 편하고 이익이 되는 ‘조직적 집회 참가자’의 길을 택했다.
 
조직노동자들은 대대적인 촛불 투쟁을 만나 박근혜 정권의 공범인 ‘재벌(대자본)에 맞선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촛불이 100배로 커지는 동안 자신들의 동료인 ‘투쟁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연대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조직노동자 운동은 촛불 집회에서 유의미한 동력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 고유의 투쟁으로 촛불 투쟁과 결합할 때 자본가 정권과 지배체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 그동안 거대한 촛불 뒤에 숨어 형식적으로만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그것에 만족했던 조직노동자 운동은 이제 탄핵 인용 결정 이후 대선 국면을 맞고 있다. 선거만큼 조직노동자들이 긴밀하게 움직이고 동원되는 운동은 없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투쟁보다 선거를 위한 조직이 되어가고 있다.
촛불 투쟁이 만들어 준 반전의 기회를 자신들의 투쟁을 강화하고 확산시켜 현안을 해결하는 무기로 삼기보다는, 적당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선거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것에 관심이 쏠려있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의 역사는 자신의 위치에서 사소한 경제적 투쟁도 제대로 못 하는 세력은 사회적(혁명적) 투쟁에서도 발목을 잡는 역할만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투쟁하지 않으면 내일은 저들에게 구걸하게 될 것이다.”
 
 
 
2) 자발적 참여자
 
- 연인원 1,000만 명의 촛불 집회 참가가 다수는 노동조합, 정당, 시민단체 등의 조직적 참가자가 아닌 개별 단위(가족, 친구, 혼자)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다. 개별 참가자들의 직업과 정치성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지만, 경제 위기와 사회적 안전에 대한 위협 상황이 계속되면서 (자기방어적인) 보수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또한, 비정규직-실업 문제에 직면한 20~30대의 참여가 광우병 촛불보다 줄어든 반면, 50세 이상의 참가가 늘었다고 한다. 이는 촛불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정치 성향을 넘어 현실에 대한 분노가 크고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자발적 참가자들은 조직화 된 세력에 거리를 두기도 하고, 조직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스스로 조직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촛불 대중이 어느 정당이나 단체에 대규모로 가입하는 차원이 아니라 촛불 대중의 가장 명료한 부분이 자신을 정치(의식)적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자발적 참가자들은 10여 차례 이상의 촛불 집회를 거치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촛불 투쟁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촛불 대중의 분노가 ‘급진적 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시도되지도 못하고 막혔지만, 촛불 집회에서 나타난 ‘저항 문화의 정서적 충격과 창조력’은 또 다른 투쟁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촛불 대중 다수가 여전히 미조직-개별 참가자로 남아 있는 이유는 촛불 집회의 대형 무대와 긴장감 없는? 행진에서 집회 참가자들은 주체가 아닌 관객이 되기 때문이다.
 
- 이제 촛불 투쟁이 열어 놓은 광장을 제한 없이 넓혀야 한다. 거리, 일상, 지역, 공동체에서 다양한 형식과 열정적인 내용으로 수백, 수천, 수만 개의 광장토론-대중총회(집회, 회합)를 만들어야 한다. 그곳에서 토론하고 결정된 것을 함께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광장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조직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발적 참여자들도 아직은 촛불 광장에서의 열린 정치와 직접 민주주의 요구를 일터, 생활공간, 지역 사회로 확산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서 토론과 투쟁을 통해, 크고 작은 권리를 찾고, 공동체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촛불 투쟁이 아직 집회 참가자들의 삶과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작은 의미에서도 촛불 투쟁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3. 촛불 투쟁과 자극(inspiration)
 
1) 역사적 투쟁과 자극
 
- 1871년 ‘파리코뮨’은 노동자 스스로 사회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도시구역에 따라 구성된 무장한 노동자들이 지키는 위원회가 지도자를 선출하였으며 노동자 민병대를 창설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평의회’4)이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온 ‘대대적 파업’의 물결은 전대미문의 폭발이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들과 혁명투쟁 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이에 (창조적) 자극을 받은 노동자 대중들은 파리코뮨에 이어 스스로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를 탄생시킨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 부분, 국가 등의 구분들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또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의- 이러한 분리들이 의문시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 시기의 폭풍 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의 낭만주의자'로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5)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는 1905년에 소비에트는 갑자기 자발적으로 출현한다. 소비에트의 본질은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다양한 계획들, 토론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들,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면,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9월부터 대중 내부에 생겨난 주목할 만한 '의식의 성숙'은 토론에 대한 엄청난 욕구의 발전을 나타냈다. 공장, 대학, 지방으로 퍼진 격론은 9월 한 달 동안 발전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트레포프의 무한한 테러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대학 담장에서 생겨나고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대중들의 모임은 1905년 가을의 가장 놀라운 정치적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복도, 강당 그리고 홀을 가득 채웠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곧장 대학으로 갔다. 블라디미르대학 강당에 모인 청중을 보고 깜짝 놀란 공식 전신기관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학생들 외에도 군중은 ‘다수의 관련 없는 모든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 도시 사립학교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잡다한 무리’로 구성되었다."6)
 
하지만 이 모임은 잡다한 무리가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는 집단적 그룹이었다.
 
소비에트 회의는 부르주아 의회 또는 탁상공론적인 학자들 내의 논쟁과는 정반대였다.
 
"소비에트 회의에는 대의제도의 궤양인 어떠한 과장과 허풍도 존재하지 않았다! 논의 중인 문제 - 파업의 확산 및 두마 앞으로 보낼 요구 - 는 전적으로 현실적이었고 토론은 간결하고, 활기차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쥐꼬리만 한 매시간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전체 회의에 엄격한 승인을 가진 의장은 미사여구로 흐르는 최소한의 흐름도 꼼꼼히 살폈다."7)
 
활기 넘치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심오하고 구체적인 토론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사회 심리학에 변화를 나타냈고, 이 두 가지의 발전에 있어서 강력한 요인이었다. 의식은 사회 정세와 그 전망에 대한, 대중 행동에서 생겨나는 진정한 힘에 대한, 그리고 동지와 적을 구분하고, 미래 세계의 목표를 정교히 하는 경로 설정의 필요성에 대한 집단적인 이해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심리학은 의식과 다르지만, 그것과 함께 실재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 심리학은 노동자들의 도덕과 생활태도를, 그들의 확산하는 연대를, 그들의 다른 노동자들과의 공감을, 그들의 열린 마음 및 학습을 그리고 공동의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이타적인 헌신을 나타내는 요인이다.
 
- 그리고 1905년의 ‘기억과 자극’은 1917년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러시아에서 재탄생한다.
러시아 혁명의 자극과 1920년대 혁명적 물결은 독일과 헝가리에서 노동자계급에 생동하는 힘과 넘치는 생각들을 강하게 분출하게 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 평의회’와 ‘총회’가 나타났다.
 
"1920년대 혁명적 물결 속에서 계급의식의 뛰어나고, 실천적이고, 생동하는 특질이 확인되었다.
모든 곳에서 즉흥적 화합과 진실한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무수한 교류가 발생했다. 어제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부과한 심각한 무지 속에 침체하여 있었지만, 오늘의 노동자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연설자가 된다. 자본의 지배에 침묵하며 속박되어 있던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별안간 연설하기 시작하여, 모든 곳에서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모으며, 함께 정치 토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주도성과 창의력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정치적인 환경은 열정적인 음조를 띠고,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창조된다(…) 계급의식이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8)
 
- 그리고 암흑과도 같았던 기나긴 반혁명의 시기가 지나가고,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폭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적 부활은 ‘상상력’의 해방과 함께 더 큰 자극이 되어 ‘급진적인 행동’과 ‘혁명적인 운동’에 새로운 세대를 낳았다. 1968년 프랑스와 1969년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의 특징인 ‘폭넓고 심도 있는 토론’ 문화를 만들었다.
 
-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은 그해 여름 노동자대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2011년 국제적인 차원의 ‘분노’ 물결은 ‘광장을 점거하자!’는 공통의 구호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광장’의 정치는 앞선 모든 ‘역사적 자극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진정한 연대’, ‘대중총회’, ‘토론문화’로 재현되었다.
 
“2011년 폭발적인 '진정한 연대'가 있었는데, 이는 지배계급이 설교하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보기를 들어, 마드리드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의 방면을 위하거나 경찰이 난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들이 있었다. 또한, 스페인과 그리스 그리고 미국에서는 주거지로부터의 강제이주를 막기 위한 대대적인 집회들이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는, 파업집회에서 다른 작업장들로 '파업파괴 저지단' 파견을 결정했고, 11월 2일 총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직원이나 학생을 처벌한 작업장이나 대학을 점거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은 비록 아주 간헐적이고 짧게 지속하였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에 의해 지지가 되고 보호된다는 느낌을 함께 느끼게 했다. 이는 불안감과 무방비 상태와 가망 없음이 지배적인 이 사회의 '정상적인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9)
 
- 위와 같은 역사적(혁명적) 사건이 준 자극과 촛불 투쟁이 준 영향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토론해야 할 것은 눈앞의 정세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촛불 투쟁에서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을 찾아내고 실현 가능한 것을 당장 실천하는 일이다.
 
2) 촛불 투쟁’의 자극과 토론할 주제들
 
- 촛불 투쟁의 주체(자발적 참가자, 조직노동자, 퇴진행동)들은 박근혜 탄핵 인용 이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촛불 투쟁을 통해 누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
 
- 계급(대중)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대대적 파업’, ‘민중 봉기’와 같이 혁명적 사건-상황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저항 속에서도 ‘진정한(계급적) 연대’와 ‘대대적인 토론’이 가능하다.
촛불 광장의 ‘열린 정치’와 ‘직접 민주주의’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나?
일상적 저항에서 대대적인 토론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 촛불 투쟁은 ‘박근혜 탄핵 인용 결정’으로 막을 내렸고,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으로 마무리하려는 세력이 노동자 운동 내의 다수이다. 한편 촛불 정세를 무사히? 넘긴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촛불에 자극받아 보다 세련된 통치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계급투쟁을 잠재울 것이다.
촛불 투쟁 다음의 투쟁은 무엇이어야 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글을 마치며
 
- 2017년 봄, 우리가 맞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혹독해서 아직 한겨울이다.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노동자민중의 생활조건은 악화하였다. 실업은 점점 더 커져 일상이 되었고, 비정규직 확대는 이 사회를 점점 더 깊이 잠식하고 있다. 최소한의 생활 조건도 기대할 수 없는 가난과 굶주림마저 만연하다. 촛불 투쟁은 이렇게 비참한 현실과 박근혜에 대한 분노가 결합한 결과이다.
이에 수십, 수백만의 분노한 사람들이 ‘박근혜 퇴진’과 함께 마음속으로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염원하며 거리에 나섰다. 이러한 분노와 염원은 그동안의 수동성을 넘어 광장과 거리를 ‘거대한 인파’라는 물리력으로 점거했다. 광장에서는 지난 수년 동안 막혀있던 분노와 현재의 위기에 대한 문제들을 주장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 수백만의 대중들이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가져야 할 ‘필수적인 의식’은 단상에 선 지도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거나 그의 지침을 따른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대적인 토론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그러한 토론을 이끌어내는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촛불 투쟁의 미래는 여기에 있다.
역사적인 투쟁들의 자극은 계급의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다수계급을 위한 다수의 의식적이고 독자적인 운동'이 그러했다. 의식적인 토론과 결정, 그리고 노동자 대중이 선출하고 대중에게 책임지는 독자적 운동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러한 노동자평의회는 현실 투쟁에서는 대중총회, 파업위원회 등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촛불 투쟁을 통해 자극해야 할 일을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 이 체제는 박근혜와 같은 대표자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다. 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자본가 계급’의 이윤추구를 보장하고 이 사회의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이다. 그 배후에 ‘국가’라는 폭력기구가 환상(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주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질적인 지배자들’이 기대는 곳이 바로 국가기구이다. 그들은 한 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본가 계급의 국가를 지키고 강화할수록 그들도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촛불 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한 줌 안 되는 지배계급의 착취와 불평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국가(통치)기구의 일부인 정부를 야당으로 교체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지배계급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해주고 노동자민중에게는 불리한 ‘선거제도’로는 더욱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로지 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 권력을 무너뜨리고, 다수 계급이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해야 가능하다.
 
- 그 희망은 비록 지금 소수이긴 하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생산과 일상을 직접민주주의로 조직해, 자신의 삶을 조절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법 제도에 맡기지 않고 투쟁으로 돌파하면서 스스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자기 권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야 박근혜 파면이라는 작은 승리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탄핵당하고 감옥에 간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대로이다. 특히 노동자 민중의 생존현장과 일상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 투쟁에서 멈추지 않고 노동자민중의 삶과 투쟁이 있는 모든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킨다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1,500만 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촛불 투쟁의 경험과 자극으로 우리의 일터와 모든 일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나가기 시작한다면 비로소 세상에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자기 권력'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첫 번째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 우리는 촛불 투쟁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하거나 기대해도 안 되지만, 촛불 투쟁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자극을 축소해도 안 된다. 우리는 촛불을 주도하지도 넘어서지도 못했지만, 냉철하고 끈질기게 촛불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최대한 한 넓고 깊게 토론해야 한다. 토론의 결과는 반드시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근본적이고 새로운 투쟁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조직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시도와 실천만이 야만의 사회, 자본주의와 다른 세상을 만드는 기초가 될 수 있다. 그 길은 험난하고 길어서 꾸준히 가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

<주>

1) 최영준,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과 노동자 운동의 과제> 토론회 자료집, 2016.12.29
2) 최인기,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1차 워크숍> 자료집, 2016.11.18
3) 이청우,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과 노동자 운동의 과제> 토론회 자료집, 2016.12.29
4)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을 "최종적으로 발견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형태로 인식했다는 사실과 코뮌이 차후 소비에트의 전조가 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파리코뮌은 프랑스 혁명기 도시 대중에게 특별한 급진 민주주의의 조직 형태와 더 관련이 있다." - 안바일러, <소비에트 : 러시아 노동자, 농민 및 병사소비에트, 1905-1921>, 1974
5)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 (Rosa Luxemburg Gesammelte Werke), 133p
6) 트로츠키, <1905년 "10월 파업>
7) 같은 책
8) 국제코뮤니스트흐름, <Communist Organisations and Class Consciousness>,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classconc
9)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011년: 분노에서 희망으로>, 2012.3.12

2017년 3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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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2017년 3월 10일, 우리는 선거로 선출된 최고 권력자를 직접 끌어내리지 못하고,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이라는 절차를 통해 대통령 파면을 얻어냈다. 연인원 1,500만 명이 넘게 참여한 대대적인 촛불 투쟁은 박근혜를 물러나게는 했지만, 권력(주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박근혜 일당이 유린한 헌법에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쓰여 있지만, 그 헌법으로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직접 통제할 수도, 끌어내릴 수도 없다.

탄핵이 마무리되자 한국 사회는 또다시 유권자가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를 선출하는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7개월이나 앞당겨진 대선을 맞이하여 이른바 노동자-진보 정치 세력들은 ‘야권연대-정권교체론’에서 이름만 바꾼 ‘정권교체-대세론’에 무기력하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투쟁 없는 ‘대선 투쟁’이라는 허상을 잡고 부르주아 정치(헌법질서)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동안에도 꾸준히 선거를 통해 대중투쟁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고, 노동자(민중) 후보를 내세웠지만, 후보를 선출한 노동자에 어떻게 통제할지, 노동자강령(공약이 아닌)을 어떻게 준수할지, 선거기간 대중투쟁/현안투쟁에 어떻게 복무할지 아무런 보장도 강제도 없이 부르주아 정치와 뒤섞여 표를 구하기에 바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박근혜를 당선시킨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주의’와 ‘노동자 후보 전술’을 반대하면서 ‘계급적 대중행동 투쟁 촉구’를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 선거판에 ‘진보정당’ ‘노동자 후보’의 이름으로 끼어들어 노동계급을 배신하고 부르주아의 한 분파로 행세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이보다 왼편에는 노동자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는 세력들이 소수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정치를 노동자계급 고유의 영역인 투쟁의 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선거공간에서 할 수 있다면서 그 속에서 선전선동과 조직화를 꿈꾸며 선거운동을 선거투쟁으로 미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을 위한 어떠한 성과도 선거나 그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없다.

 

현 시기 대선 정국을 둘러싼 사민주의와 동거, 의회 선거정치 몰입은 계급적 대중행동을 저해할 뿐이다. 대중에게 선거는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후보) 중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선거 결과가 마치 계급 대중 의지가 실제 실현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든다. 이것이 부르주아 선거제도의 핵심 기제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선거에 개입했던 노동자정당, 진보정당들은 완전한 의회주의 정당으로 자리 잡았고, 이들을 지지했던 민주노총의 정치는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수많은 배신과 운동권 출세주의를 양산했다. 통진당, 진보정의당류와 진보신당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다. 또한, 이들과의 정치적 공동전선이나 입당전술을 사용하는 자칭 사회주의 세력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다.

 

말로는 선거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참여하는 선거는 훌륭한 전술로 둔갑한다. 선거에 휩쓸리지 않고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선거 이후를 준비하는 운동의 흐름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선거주의자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건강한 노동자와 혁명세력을 대기주의, 기권주의로 몰아가면서 모든 운동을 대선 블랙홀에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이것이 운동마저 삼키는 부르주아 선거다.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은 지배계급의 위기를 평화롭게 넘기는 것이며, 격화되는 대중 투쟁을 잠재우고 대중의 불만 표출을 잠시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선거에 휩쓸리지 말고 투쟁의 동력을 유지해 선거 이후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지배계급에 맞서야 한다.

 

선거는 짧다. 두 개의 노선은 대립하고 있다. 사민주의와 동거, 선거정치 몰입이냐, 계급적 대중행동 투쟁 촉구냐?

 

이제라도 부르주아 잔치판에서 뛰쳐나와 노동자계급의 자리에서 자본주의가 인류 참상의 원인이고, 이를 넘어서는 공산주의 사회만이 대안이라고 대중적으로 공개적으로 말하고 싸워야 한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함께 투쟁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내세워야 한다.

 

선거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대중총회를 개최하자. 대중총회, 대중집회를 통해 노동자들이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 직접정치’를 실현하자!“

 

대대적인 촛불 투쟁이 만들어 낸 조기 대선을 앞두고 노동자-진보 정치 세력의 대응방식은 4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는 이번 대선 참여가 내년 지방선거를 위한 포석이라고 한다. 하지만 촛불 투쟁이 노동자들에게 던져준 과제는 선거(대의) 민주주의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 자체였고, 노동 중심 정치가 아니라 ‘국가와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지배(통제) 문제였다.

 

우리는 지난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을 밝히면서 ‘선거환상’을 넘어서자고 주장했다. 우리의 능력이 그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3년 전 비판의 칼날은 여전히 유효하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그리고 1991년 부활하여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진 지방선거 이래 19년에서 27년이라는 기간,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누구도 보장받을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각종 차별에 직면해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으며, 투쟁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이제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노동정당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를 ‘서커스’나 ‘환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며, 투표행위로 자신들도 권력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즉,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라는 이벤트에서만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정치세력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차려놓은 서커스 공연에 곡예사로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선거를 통해 투쟁을 확산시킨다거나 후보를 내세워 투쟁의 구심을 세우겠다는 발상 역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하다.

 

유권자의 측면에서도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한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 회사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자본가를 포함한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으니 따르라’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부르주아 야당 세력의 의도이든, 노동자 독자정치의 무능이든, 이번 촛불 투쟁의 열망은 ‘정권교체’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촛불 투쟁의 다양한 요구가 반(反) 박근혜 전선으로 모이고 가장 넓게 형성된 결과이다. 반 박근혜 전선에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시민이 되어 참여했고, 부르주아계급과 중간 계층은 민주주의자가 되어 참여했다. 이러한 현상은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지배계급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이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나아가지 못한 결과이다. 촛불 투쟁의 광장은 넓었지만, 광장의 요구는 (부르주아) 국가를 넘어서지 못했고,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사회(헌법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 문제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사회 안의 민주주의로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적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욱이 노동자 시민과 자본가 민주주의자가 힘을 합쳐 만들어 낸 정권교체로는 위기에 처한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의 생존과 생활수준은 노동자 자신의 투쟁으로 쟁취해야만 후퇴 없이 유지할 수 있고,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자기조직화를 통해 독자적인 힘을 키워야 거대한 자본가 권력과 맞설 수 있다.

 

노동자 운동이 후퇴하고 투쟁의 힘이 지속해서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자본가 계급에 밀려있는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것의 첫걸음은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 계급의 방식으로 직접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선거와 의회주의에 대한 코뮤니스트 정치입장을 제시하며, 열린 토론과 근본적이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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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회주의 혁명전략

 

의회 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들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에 자신들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들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관의 파괴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자본가계급은 국가의 폭력을 통해 전 사회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특권을 갖고 있으므로, 어떤 특권이나 착취도 필요가 없는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국가를 그대로 이용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국가기구나 그것의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자신들의 계급영역에서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회주의 제도에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들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서 의회가 이용될 수 있었다. 유럽에서의 19세기 동안, 그리고 1970·80년대에도 독재정권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사회에서의 보통 선거권을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것을 위해 자신을 조직했던 가장 중요한 요구들 중의 하나였다. 선거 시기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자계급의 강령을 위한 선전 및 선동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코뮤니스트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개입에 대한 전술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개입, 그것과 관련된 각종의 선거 연합들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강령들, 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의회의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를 입법화하는 동안 지배계급이 평화적으로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는 의회주의의 환상일 뿐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위장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자본주의 사회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기관은 의회 밖의 군대, 사법기관, 국가관료, 보안세력,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는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의회제도 포함)들을 파괴하는 것이 혁명의 과제이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의회주의 보통선거권의 잔해 위에 노동자평의회의 계급기구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사회의 다른 잔재들 위에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세워야하는 역사적 장도에 올라있다. 이때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떠한 혁명적 의도들과는 무관하게 단지 죽어 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직접적인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지금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과제는 바로 낡은 사회질서인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노동자계급은 이제는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들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 자기조직화로 나타나야 한다. 의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대리주의는 계급의 자립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의 영역인 의회가 아닌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싸워야 하며, 대리주의가 아닌 계급 전체의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대중투쟁만이 승리를 보장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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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제안하며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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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1년 세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패배한 이후 노동자계급은 오랜기간 암흑의 침체와 반혁명 시대를 거쳐 1968년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 노동자계급은 1970년대 초 제국주의적 긴장과 격렬함이 세계전쟁으로 확산하는 것을 멈추게 할 만큼 세계 곳곳을 휩쓸며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부활하였다. 하지만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전투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은 자기해방의 전망인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으로까지 나아갈 수는 없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자본주의는 진보적인 생산양식이기를 멈추고, 인류에게 두 차례에 걸친 위기와 세계전쟁 그리고 파괴와 재건, 다시 새로운 위기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1차 대전까지 계속 확장되었고, 그 이후 파괴의 시기(1914-1945)를 지나 더 높은 생산 수준으로의 재건의 시기가 있었으나, 다시 새로운 위기가 발생했고 세계적 축적조건을 재구축하려는 시기를 거쳐 왔다. 세계 자본주의는 영국이 주도하던 축적국면을 지나, 미국이 세계자본주의를 주도하면서 80년대 이후 30년 넘게 쇠퇴의 국면을 지속하고 있다.

 

2007~2008년의 금융위기로 촉발된 최대의 자본의 위기는 단순한 ‘주기적’, ‘순환적’ 의미의 경기침체를 넘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모순으로부터 생겨난 피할 수 없는 ‘위기와 파국’을 맞이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무능과 끝 모를 혼란을 보여주는 현재의 위기는, 아프리카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유럽과 남미의 노동자투쟁, 북미와 아시아의 노동자투쟁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강타하며, 노동자계급에 1차 대전 이후 가장 거대한 계급투쟁의 장을 열어놓고 있다.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를 뒤흔들고 있는 이 위기는,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시작과 더불어 우연히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쇠퇴에 빠진 자본주의 경기침체가 30여 년 전부터 1974, 1981, 1991, 2001년에 차례로 있었다. 수십 년간 실업은 사회의 지속적인 현상의 하나가 되었고, 그동안 노동자계급은 생활 수준과 생존 자체에 대한 공격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경험해왔다. 이는 자본주의가 인간사회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장과 이윤을 위해서 생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수많은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빈곤에 빠지고 기아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충분히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판매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은 넘쳐나지만, 세계인구의 절대다수는 생산된 상품을 살 구매력이 없다. 그동안 자본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인위적인 시장의 창출을 통해 잠시 비껴 나가곤 했으나, 부채에 의지한 위기의 탈출은 신용의 대대적인 상환의 시기가 오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위기상황은 자본가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관리, 또는 금융자본의 투기, 은행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 수호자인 이들 모두는 단지 자본주의의 법칙에 충실해 왔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 법칙이 바로 체제의 재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모든 국가와 중앙은행들이 쏟아부은 천문학적 자금들은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빚더미만 키워 놓았다. 더욱이 자본은 이러한 구제계획들의 실패를 오히려 노동자계급에 전가하며 더욱 깊은 공황의 나락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치명적인 불치의 병에 걸려 진정한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의 노동자 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심각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아직 이에 맞서 적극적 투쟁으로 나서지 못하는 계급 역관계의 커다란 불균형 상태에 머물러 있다. 생산과 분배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지배는 전체 사회정치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더욱 넓혀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가계급뿐 아니라 그들과 자본주의 국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사민주의(진보, 좌파, 노동) 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들을 통해서도 노동자계급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상태이다. 이들은 그동안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는데 실질적 도움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제 자본은 자신들이 만든 위기를 노동자계급에 전가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싹부터 잘라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쇠퇴기에 접어든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는 노동자계급에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깨고,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타도할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열어주고 있다. 이것은 대대적인 계급투쟁의 파고가 갑작스럽게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이며, 혁명조직(당)은 이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다시 계급투쟁의 주도권을 잡고 자본가계급에 맞서 전면전을 시작할 때, 혁명조직은 모든 자본주의 수호 세력에 맞서 정치적, 조직적 전투를 벌일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모순은 코뮤니스트 혁명 이전에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또한,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은 한 억압받는 계급의 저항과 투쟁의 물결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다만 자본에 맞선 모든 투쟁은 오직 혁명(코뮤니스트) 강령이 계급 속으로 깊이 뿌리내릴 때만 비로소 혁명을 향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적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되돌아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에게는 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혁명조직이 필요하다.

 

혁명 강령과 혁명조직은 계급투쟁으로부터 창출된 경험과 성과물이 실천적으로 강화되어야만 건설될 수 있으며, 계급투쟁의 역사적 경험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게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교훈들을 얻어낼 수 있게 하고, 미래의 혁명적 투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혁명(코뮤니스트)조직의 과업이다. 혁명가(코뮤니스트)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일반화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혁명가들의 개입은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을 설정하고 혁명적 무장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이 모든 투쟁의 순간에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 계급적으로 부활하고, 세계적으로 새로운 계급투쟁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은, 코뮤니스트 혁명의 실재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혁명가들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반드시 혁명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세계혁명을 위해 세계적 수준에서 개입하여 전 세계의 혁명진영을 재규합하는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건설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코뮤니스트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 건설을 위해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위한 혁명조직을 건설하고자 한다. 우리는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들과 전투적 노동자 동지들에게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제안하고, 코뮤니스트 혁명의 길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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