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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09
    값싸지 않아야 할 단상
    이스
  2. 2007/07/06
    김규항 - 떠남
    이스
  3. 2007/06/23
    2007/06/23
    이스
  4. 2007/06/15
    2007/06/15
    이스
  5. 2007/06/06
    2007/06/06(1)
    이스
  6. 2007/05/31
    아아.
    이스
  7. 2007/05/08
    미망
    이스
  8. 2007/04/15
    오늘 처음 만난 후배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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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4/15
    책, 영화, 그리고 생각
    이스
  10. 2007/04/07
    표내지 말고 살자
    이스

값싸지 않아야 할 단상

세상에는 값싼 말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다만 표현은 값쌀 수 밖에 없다.

제 아무리 멋있는 대사를 읊조리던 간에 말이다.

 

다만 말에 내 진정이 얼마나 녹아 있는가.

내 진정이 얼마나 상대에게 전해질 수 있는 조건인가.

 

섣불리 함부로 값싸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함부로 간이라도 빼 줄 수 있다고 감언이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 일은 어떤 면에선 다 똑같다.

가벼움과 함께 진지함이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성과 실천이 함께 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겐 함께 살아가는 것, 삶을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자고.

그로써 우리의 삶이 더 확장되고, 더 힘있고, 서로에게 평안함이 되기를 바란다.

 

함께 살아갈 우리에게 건투를 빌자.  

 

- 어느 새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린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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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 떠남

떠남
 

“그리고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가다가 보니, 시몬과 시몬의 형제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따랐다.”


성서에서 예수가 첫 제자를 구하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이 예수의 신비능력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도 하지만 예수와 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라고 적혀있진 않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마치 영화처럼 앞의 여러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


세례요한이 체포되고 예수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 형제는 예수가 고심 끝에 고른 첫 동지들이다. 갈릴리의 수많은 청년들 가운데 유력한 메시아 감으로 지목되던 예수에게서 선택된 두 사람은 얼마나 기쁘고 벅찼을까. 그러나 막상 예수와 함께 떠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식구들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지는데다 밝은 미래가 보장되기는커녕 십중팔구 헤롯 안티파스의 졸개나 로마군에 잡혀 죽임을 당하기 십상인 캄캄한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했던 날 예수가 다가오자 “그물을 버려두고” 떠난다.


온갖 영상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초인적인 영웅담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선택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장면을 소파에 기대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구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떠날 수 있을까? 우리가 비루한 일상을 박차고 이상과 삶을 일치시키는 초인적인 영웅담을 즐기는 이유는 실은 우리가 그 비루한 일상의 노예로 살기 때문이다. 인문주의니 예술이니 영성이니 온갖 고급한 정신의 액세서리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우리가 가진 삶의 철학이란 실은 두어 가지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인데’ ‘맞는 이야기지만 현실적이지 않아서’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시체와 같고 세상은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다. 떠남이란 단지 공간이나 시간의 이동이 아니다. 떠남이 그런 거라면 머리 길게 묶고 일 년에 절반은 인도나 히말라야에 머물며 떠남에 관한 책들(싸구려 명상서적들)을 써서 통장잔고를 늘이는 사람이야말로, 욕망과 집착으로 범벅이 된 삶에서 도리 없이 쌓여진 스트레스를 이따금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서 날려버리고 다시 주식과 부동산 시세와 아이 시험 성적 따위를 뼈대로 하는 욕망과 집착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이야말로 떠남의 본질에 접근한 사람일 것이다.


그건 떠남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가장 추악한 형태의 집착일 뿐이다. 떠남은 크고 무거운 게 아니다. 한없이 사소해진 우리 삶만큼이나 작은 떠남의 선택들이 우리 일상에 깔려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때론 하루에도 몇 번씩 떠남에 대해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우리는 우리가 고수하는 예의 삶의 두어 가지 철학에 의지하여 떠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가짜 떠남, 떠나지 않기 위한 떠남, 떠남 장사꾼들은 고상하게 취급되는 반면 진짜 떠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살아있는 시체들은 떠나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어리석은, 비현실적인, 인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곤란과 모멸의 아수라장을 뚫고 떠날 때 우리는 비로소 얼굴에 빛을 내며 고백하게 된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 우리는 떠남에서 작은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시체들로 가득한 거대한 공동묘지는 떠나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달라진다. 떠남은 나를 잃는 게 아니다. 떠남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더께들, 우리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 기득권, 물질적 소유 따위들에서 본디 나를 살려내는 일이다. 떠남은 실은 돌아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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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간만에 김규항 씨의 글이 심금을 울렸다.

 

나도, 떠나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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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3

강원도에 갔다.

 

그곳에 동지가 있었고 나는 한 번은 꼭 내가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서 약간 기다려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삶을 대변하는 옷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 삶은 나도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삶의 형태이다.

 

그 삶의 형태들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아무 생각없이 많이 웃었고 이야기를 했다.

 

헤어질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다가왔다.

 

철문을 열고 나와서, 버스를 기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철문 뒤에 서서 내가 가는 모습을 웃으며 보는 녀석이 있었다.

 

별 것 아닌 모습이었고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울컥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를 만나러 온 일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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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5

성실함과는 어느 새,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고

내 마음과 나의 행동은 점점 더 서로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남들이 읽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읽으라고 쓰는 모순에 가득찬

그래서 서글프지만 어찌 할 수가 없는 그런.

 

그것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 삶이라면

쌀에서 돌을 골라내듯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면 그만이라면

위에 서술한 등의 짓거리들을 안하면 그만인데

그리고 그런 짓거리를 하는 물질적 조건들을 폐기시키면 그만인데

 

나는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실로 허탈하기 그지없는 것이니

이러한 나약함과 도대체 어디서부터 싸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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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6

사회운동 세미나를 다녀왔다.

 

처음 가 보는 사회진보연대 사무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지나치게 정리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작업공간 치고는 깔끔한 편이었다. 꽤나 익숙한 얼굴들이 자주 보였다. 좌파 학생운동이라는 판에서 한 때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얼굴들이다. 세미나에 참석한 인원들 중에서는 나보다는 연배가 약간 낮지만 이미 사회에 진출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졸업하고 계속해서 운동을 결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미나를 하면서 학교에서 계획중인 세미나를 생각했다. 물론 학교에서 뻔히 잘 아는 사람들과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현실의 대학에서는 특히 더 필요한 일이다. 다만 캠에서 세미나를 진행할 때, 우리는 그것이 현실의 운동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씁쓸하다. 물론 처음 세미나라는 것을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모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어느 정도 운동을 접했고, 나름대로 자신의 고민을 풀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경우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운동을 접했고 졸업을 앞에 둔 이들은 정확히 양분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 부류는 이론에 편향하고 한 부류는 이론과 실천 모두와 관계맺지 않는다. 이 두 부류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바로 자신들이 어쩄든 이 "학생운동" 이라는 어떤 실천과 관계맺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관계맺음의 의미가 그 자신에게 "운동" 의 의미로써 남아있는가 이다. 운동이란 이론과 실천의 결합 속에서 존재하는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대상에 대한 각자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했던 어떤 정치적인 실천들이 존재할 때, 그것을 통해서 묶여졌던 "인간관계" 만이 과도하게 부각되어 의미로 남는 것도, 아니면 그 시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무용한 시간이었다고 언젠가 평가하게 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지금, 졸업을 하고 나가야 할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절실함을 느낀다. 특히 실천을 강제하고 실천을 과학화 시킬 수 있는 이론과,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그 이론에 맞추어 살 수 있도록 강제하는 실천 두 가지 모두. 그 이유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운동은 종교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저 믿음만 가지고 계속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졸업한 이후에는 점점 더 책 읽기도 힘겨워 질 것이다. 또한 실천을 지속적으로 강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저 내 조건 속에서 사는대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내가 고민할 수 있는 범위는, 어떤 부분에서 넓어지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좁아지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실천을 강제할 수 있는, 적어도 현실을 냉철히 스스로 분석해낼 수 있는 이론의 부재는 언젠가 자신에게 남은 "학생운동" 의 의미를, 더 크게는 "운동" 이라는 것의 의미를 부차화 시킬 수 있을 위험요소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론에 편향될 경우 그저 이론에 매몰된 채 자신을 강제하는 정치적 실천에는 둔감해지면서, 충분히 골방에 틀어박힐 요소로 충분하다.

 

지금 졸업을 앞둔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제기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삶을 조직하거나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의 "운동" 의 의미를 언젠가 실천적으로 부정하게 되거나, 추억으로, 인간관계로만 환원시켰을 때 그들의 젊었던 시간은 그리고 그들과 함꼐 했던 나의 젊은 시간들이 그만큼 초라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운동의 삶에 있어서도 그만큼, 조야해지고 더욱 더 외로워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 한 명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알면서도 계속해서 교안을 보내고, 연락하고, 그들에게 실천을 말하는 것이고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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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겨울철쭉님의 [[독서]소금꽃나무,김진숙] 에 관련된 글.

이 책,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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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

미망에 빠져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후일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부끄러울 것이다.

그 지나가버린 세월 때문에 또 아플 것이다.

가버린 세월을 탓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을 미망 속에 흘려보낸 자신을 탓할 것이다.

 

미망에 빠져있는 누군가를 보는 것보다 미망에 빠져있는 자신을 관조하게 되었을 때가 가장 슬픈 순간이다.

 

그 얼마나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인가.

 

당신은 어처구니없는 미망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미망이라는 것은 당신의 꿈이 아니다.

미망이라는 것은 단지 독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독소도 제 살이 되면 잘라낼 때 아픈 법이다.

하지만 독소를 잘라내야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독소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잘라내는 것만이 남았다.

모질고 단호하게 당신의 독소를, 피흘리며 잘라내거라!

 

다소 건조하다 할 지라도, 당신에게 남은 것은 현실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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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만난 후배의 눈물

장애인 차별철폐 문화제를 갔다오면서 그 때 처음 만난 장애인권 동아리의 후배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장애우와 장애인의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회적인 명칭은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호칭이 가능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단지 호칭의 문제를 논하면서 나오는 눈물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것때문에 그가 느꼈던 수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내가 감히 그 아픔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 해야 했다. 바로 그래서 맞싸워야 할 것이라고. 그것이 어쩌면 너무나 가벼운 이야기가 아닐까 라고,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느꼈던 고통, 외로움, 아픔은 지극히 현실인 것이다. '현실이 이래' 라고 함부로 떠들면서 이래서 안 된다고 떠들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었다. 적어도 효율의 논리로 세상을 가르는 신자유주의자들, 지배계급들이 함부로 떠들 수는 있어도, 지배계급이 아닌 이들이 떠들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정상인' 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계급의 말이 자기 말인줄 알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5년전 6년전 떠들었던 이 말이 여전히 새롭지 않은 이유는 현실이 새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후배의 눈물과 5년 전 함께 장애인권문화제를 준비하면서 흘렸던 내 친구의 눈물을 보면서 여전히 똑같이 뜨거워진 눈시울을 훔칠 수 밖에 없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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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그리고 생각

1. 책 - 아내가 결혼했다.

 

어제 우연찮게 생도에 누군가가 책을 기증했다고 했는데 마침 있는 책이 '아내가 결혼했다' 였다. 아내가 결혼한다. 아내가 결혼한다? 아내라고 하면 결혼이라는 계약을 이미 맺은 사람인데 어떻게 또 결혼할 수 있지? 의구심을 갖고 읽었는데 한 두 세시간 만에 쫘악 완독을 해 버리고 말았다. 간만에 즐겁게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

 

내 아내는, 나와 이혼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와 결혼했다. 속칭 일처다부? 한국의 법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녀는 참으로 영리하고 능숙하게 모든 사태를 해결해 가고 있다. 뭐 중요한 건 그녀의 엄청난 요령과 삶의 지혜와 말빨이 아니다. 중요한 건 결혼제도, 이성애와 일부일처의 가족제도 전반에 대한 논쟁적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갔을 때, '질투' 라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는' (개인적으로 이성에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오직 자신이 믿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관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타인과 타인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연애관계라 해도 똑같다. 생각해 보건대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솔직히 기분 좋지는 않다. 하지만 도대체 왜 기분이 나쁜 것일까? 그건 그녀의 권리이지 않을까? 물론 감정적으로는 아주 짜증이 난다. 정념이다. 그냥 만나는 거면 모르겠는데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하지만 양다리건 세다리건 간에 나 역시도 그녀와 하나의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타인일 뿐이다.

 

물론 이건 생각이다. 생각에 다름 아닌 것인데 감정적으로는 나도 이러한 생각과는 별개로 아주 기분이 나빴던 경험, 슬퍼하기도 했고 절망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는 관계로 무어라 말하긴 힘들지만 도대체 이런 기분이 그냥 가부장제적인 이성애 및 일 대 일의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만 생기는 걸까? 사실 그런 게 없는 게 가장 올바른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하는데, 뭐 여튼 폴리뭐시기인가 소설에서도 제시하는 방향성이 있기는 있다. 다만, 그런 것보다도 나는 왜 도대체 내 여자친구가(참고로 나는 여자친구가 없다.) 나 말고 다른 애인을 만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상황을 가정하고)  

 

그런 작은 의문 하나.

 

2. 영화 - 밴디트 퀸

 

수업 시간 내내 영화 하나를 풀로 틀어주는 수업 형식 덕분에 한 영화를 다 보게 되었다. 웬지 배우들의 쏼라가 영어가 아니고 뭔가 아시아틱한 데다가 분위기도 딱 그런게 '인도 영화' 구나 싶었긴 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어야 할 발표수업이 존재함에 따라서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주의깊게 보게 되었다. 어쨌든 발표수업도 레포트이고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졸업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밴디트 퀸은 몇년 전 암살당한 풀란 데비라는 여성의 삶을 영화화 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서술되는 풀란 데비의 삶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끔찍한지는 영화를 한 번 직접 보시기 바란다. 보고 나서 신문기사나 여러 가지를 검색했는데 거기서 글로 나오는 내용은 아주 쉽게 몇 개의 문장으로 간추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 과정은 정말로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상물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던 적이 없는 나로서는 참으로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였다.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고 다우리 제도가 있으며 각각 신분계급과 성차의 차별을 상징한다. 그것은 고착화되어 있고 폭력으로 유지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억압과 착취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민중은 대안적인 삶을 고민할 여지조차 없다. 그곳은 혹자가 말하듯이 고차원적 정신세계와 여유로운 삶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족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착취받는 민중이 있고 억압이 존재하는 한 사회일 뿐이다.

 

환상이란 필요하지 않다. 민중의 삶의 비참함은 그대로 현실이며, 그것은 그 어디를 막론하고도 존재하는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흘렸던 눈물은 풀란 데비를 대중이 환영하는 그  순간 때문이 아니라 풀란 데비의 삶이 바로 인도의 민중의 삶이며 동시에 그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삶이라는 생각, 정확히는 생각 이전에 그런 느낌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되고자 하는 그 노력 앞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이 밀려올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아픈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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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내지 말고 살자

표내지 말고 살자.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들으며 표 내지 않으려면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표정 자체도 언제나 밝게 하며 관련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표내지 말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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