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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공간? 1

1. 최초의 정서충돌 시점;문화 단체와 문화공간...

 

1) 약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

 

언제부터였더라...

언제라고 할 것 것없이,

그때, 노동자 현장조직 연합체를 만들겠다고,

그래서 제대로 공장위원회의 그림을 그려보려했을 때였다.

노동조합말고 현장조직들이 모여서 철학이며 경제를 공부하고

지역연대를 도모할 수 있게 하려고, 어떤 단체를 만들었을 때였다.

거대사업장들 틈에서 숨쉬기 힘들어하던 작은 사업장들을 모아서

해고자들이 앞장서서 그렇게 만들었다.

돈을 만들고 직접 공사를 하고

작은 공장 사람들이 이 곳을 오고가면서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다가 선진활동가로 성장해가기를 바라면서...

교육하고, 연대투쟁을 계획하고, 소식지를 내면서 이런저런 이데올로기를 전하고

......날마다 뒷풀이를 하고....

 

이런 생각도 깔려 있었다.

작은 사업장들간의 연대로 내부에 힘이 쌓이면, 거대사업장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동네 운동판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그들이 그들 그룹노동자들끼리의 운동에서 벗어나서

작은 사업장, 작은 투쟁들까지 바라보고 우위에서가 아니라

갖은 힘으로 연대하는 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놈들끼리 먼저 힘모으고 힘키우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단체를 만들었다.

단체는 공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이 오고가고 모일려면 공간은 필수였다.

이왕이면 쾌적한 공간이면 좋을 것이라고, 오고가지 편한 곳이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교육관 겸 각종 문화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사무공간도 만들었다.

현장 사람들이 자기 돈을 털어서 만들었다.

좋아라 했다.

직접 칸막이 공사도 하고, 이런 저런 디스플레이도 하면서

함께 꿈을 만들었다.

 

모여서 기타치고 노래도 하고, 편집작업도 하고, 교육도 하고, 회의도 하고....

 

그런데, 이 공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동안, 나는 이 공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괘했었다.

내가 지키지 못했노라고, 내가 해체를 위한 수습을 하면서, 내 잘못을

나의 무책임을 탓하며 가슴을 치고

이런 상황을 결정적으로 만든 어떤 사람들에 대해

지독한 원망을 품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얼굴을 무척 혐오하기도 했었다.

 

공간이 사라진 건, 시대적 소명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니, 그 공간을 필요로 했던 이들의 에너지가 사멸해갔기 때문이며

애초부터 공간지키기를 주로 했던 실무자라는 사람들과

그 공간의 주체라고 하는 현장사람들이 가지는 공간에 대한 기대와 상이

달랐음을 나중에 깨닫는다.

 

민주노총이 준비중이었던 때다.

현장사람들은 노동조합간의 연대조직이 더 절박했던 것이다.

그룹의 연대체가 전국민주노조총연맹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산별노조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었다.

지역에서도 지역노협이 생겼다.

거기에는 지역이 골고루 포함되어야 그림이 되는 거였다.

그 그림에 이 단체에 포함되었던 작은 사업장들이

포함되는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다행히 단체로 모여있어서, 우리는 거대그룹사업장연대체에서 늘

무시(?)받던 설움을 딛고

당당히(?) 지역노협의 상근 실무자 자리까지 배정받았다.

 

그렇게 노조연대체가 만들어지면서 단체는 할 일이 없어졌다.

왜냐하면, 단체가 하던 일도 노조관련사업이었으니까...

물론, 다른 관점으로 교육을 하기도 했지만

그게 결국은 노조 활동가를 교육하는 것이었을 뿐이며

다른 전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대도 거기까지 였던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럴 무렵, 나는 어이없이 감옥을 다녀왔고

두번째가는 감옥살이가 싫었고

그래서 쉬고 싶다고 했던가?

사실은, 함께 일하던 어떤 남자와 부딪힘도 싫었다.

뒤에서 자기 호박씨 까는 것 같고, 이 변두리 현장에 대한 관심도

기실은 거대사업장 운동으로 들어가려는 교두보정도로 사고 하는 듯하고

귀하게 자란 장남이라 그런지,

여자후배들한테 대우받으려고 하고

내가 보기엔 어설픈 정치적인 행위들...

나는 그런 것들에 지쳐갔다.

도대체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과 하루하루 한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이

에너지를 잡아먹었다.

회의때마다 부딪치고...

권력을 놓기로 했다.

이 지역에서의 짬밥으로 보자면

그 남자보다는 내 권력이 꽤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유지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쉬기로 했다.

감옥후유증이나 결혼 휴가정도로 처리하고서....

 

결국, 쉬는 동안 그 남자는 어떤 정치적인 사고를 저질렀다.

아마 연애사고도 있었던 것 같고....

그리곤, 사라졌다.

그 전에도 단체에는 몇명의 그런 남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시골에 와서 운동해보겠다고 왔다가

거대사업장으로 바로 인입하지 못하여 이 단체에 머물렀다가는

전망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든,

하다보니 힘겨웠든,

뭔가 요상한 사고를 치고 사라진....

 

구체적인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다시 그 단체의 마무리를 책임지겠다고 나섰고

공간정리며, 재정정리등을 했었다.

석고보드 칸막이를 뜯고,

그날, 뭔가 하나를 해치우고 막걸리를 마셨을까?

 

그때, 그 단체를 해산하더라도

그 공간을 오고간 사람들이 그냥 흩어지기는 아쉬워서

다른 공간을 시도했다.

 

이제 좀 다르게, 그렇게 정치적인 것 말고

좀 편하게 현장사람들이 오고갈 수 있는 문화공간같은 것을 만들자고...

동아리들이 모이는 공간을 만들자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던, 그러나 생존이 위태롭던 한 문화단체와 통합을 시도했다.

노래, 풍물만이 아니라 다른 동아리도 만들자는 전망으로...

토론동아리, 역사기행 동아리 등등...

 

어떤 상이어야 할까를 놓고 많이들 이야기했지 싶다.

아마 나는 또 어떤 그림을 마구 펼쳐놓았을 것이다.

어떤 단체를 만들것인가?

문화단체이면서 노동단체?

계급적인 노동문화단체!!

현장의 대중과 함께 하는...

 

그때,  제대로 잘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로

선배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나는 쉽게 인정되지 않는 정서적 충돌을 만났다.

그때가 90년대 중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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