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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침묵, 그 뒤 자괴를 딛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들이 있다.

사건 그 자체의 트라우마와 사건으로 싸우다 생긴 트라우마 등...

 

여성이라면 한번쯤  겪었던 성폭력,

그러나, '성폭력'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시절,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자신만이 안고 사는 아주 아주 특별하게 불행한 사건이라고 여기며

무의식 저편으로 밀어넣고 뚜껑을 닫으며 알 수 없는 응어리를 가슴에 키우며 살던 사람들이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싸우면서 겪어야 했던 상처가 만만치 않았다.

가해자와 싸우다 피해자가 죽어가는 것을 본의 아니게 방치하기도 했고

피해자를 지지하며 싸우던 대책위 사람들이

가해자의 태도와 가해자 옹호세력들의 태도들을 만나며

저마다 자신의 몸에 각인된 피해의 역사를 떠올리며

호되게 아파야 했다.

상식이 다른 사람과 세상앞에서

함께 만들어갈 세상이 아득하고

관계의 불신과 냉소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했다.

특히, 운동사회라는 곳에서는...

그래서,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성폭력 사건 근처에 가기를 주저했다.

몹쓸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럴 수록, 침묵하게 되고 그럴수록 가해자들은 활개를 치게 되었다.

 

이 동네에 천인공로할 성폭력 가해자가 살고 있다.

피해자는 수년동안 다수에 이른다.

그 피해자들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모진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기간이 조금씩 다르지만 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이 동네가 통째로 피해를 겪은 셈이다.

이제야 피해자들이 서로를 보게 되었다.

우연한 계기로.

맥락을 재구성하다 기절할 지경이다.

 

내 눈을 찌르고 싶다.  

한 때나마 가해자의 서식처를 주선한 꼴이 되었고

방패막이가 된 꼴이 된 것이다.

자책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 자를 즉각 단죄하지 않은 것을.

'동정'이라는 코드에 주저 앉아 가해를 강화한 꼴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인연인 줄 아는 순간, 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두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 따위 인연이 가져다 준 해악따위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된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저 편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침묵했다.

그런데, 침묵하는 동안 가해는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각종 성폭력 사건 해결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가 피해를 양산했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한동안 이 동네는 이 문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에너지를 쓰게 되었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대책위가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를 증언할 사람들이 나서서 싸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동네 사람들이 서로 안전하게 관계 맺으며 살 수 있는 환경만들기가 시작되길 바란다.

논쟁은 필요없다.

운동사회의 조직보신 논리는 한 치도 허용치 않을 것이다.

증언자와 지지자의 연대로 싸우면서

성폭력에 대한 태도와 관계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는 지형을 넓혀 갈 것이다.

지금 보다 단 한 명이라도 더 공유한다면

그 만큼 안전지대가 넓어지는 것이니.

 

정세도 그렇고 정말 할 일 많은 사람들이지만

이런 것에 눈감고는 대안사회에 대한 전망은 허구라 믿기에

비겁하지 않고 정직하게 불쾌한 사건에 직면한다.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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