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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1.

그녀, 겨우 어지러운 악몽에서 탈출했다.

온 몸 어디에도 힘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 흐느적 주저앉았다.

여리게 떨리는 몸을 느끼며, 깨질 듯한 머리를 수습하려 애를 써본다.

그러나, 풀석 주저앉은 채 몸을 일으킬 수 없다.

그대로 그자리에서 저 깊은 곳으로 꺼져 들어가고 있는 듯도 하다.

억지로 벌여 뜬 눈이 아리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안도가 감돈다.

도대체 어디있다가 온거지?

거기가 어디였지?

어쨋거나 탈출해야 만 할 곳에서 벗어나고서,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이 사라진다.

아련하게 다시 눈이 감길려고 한다.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이 탈두려움을 유지하려 애쓴다.

온 몸은 그대로 꼼작하지 않지만 의식만이라도 깨어있으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다.

거실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필사적으로 굴렀다. 침대의 이불을 젖히고 땅바닥으로 그냥 냅다 굴러서 방문을 열고 또 굴러서

여기 까지 왔다.

휑한 거실바닥에 맥주 캔 3개가 뒹굴고 있다. 아리는 눈이 잠시 캔을 응시하지만 그것을 치워놓겠다는 의식이 없다. 다시 시선이 옮겨지고 3시를 가르키고 있는 시계를 발견한다. 

'이런, 해뜰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겠군!'

그리고 다시 시선이 담배갑에 닿는다.

담배 하나를 꺼내 문다. 천천히 불을 당기고,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다.

살 것 같다. 정신이 든다. 절절하게 고맙다. 이 순간, 이 외딴섬에서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무엇이다. 움직이는 연기가 신기하다.

모든 것이 그저 납작 엎드린 채 숨도 쉬지 않은 공기속에서 자신의 숨소리조차 두려워지는 때

자신을 떠나 훨훨 날려가는 연기...살아있는 듯, 반갑다.

유유히 일상을 사는 듯, 이 두려운 공기를 감싸는 연기가 고맙다.

 

담배를 물고서 거실 문을 열어본다.

마당에는 그녀의 차만이 덩그러니 있다.

아무도 안들어왔나보다.

검은 하늘을 잠시 확인하고서, 문을 닫는다.

비로소 물 한모금을 마신다. 

이 상황이 낯설지 않다.

언젠가, 또 이런 상황이 있었지 아마...

그게...언제더라.... 

이런 밤, 이런 상황...

그렇다. 그 무렵이었다.

 

 

2.

그녀는 언제나처럼 불을 켠다. 그리고는 다시 잠자리에 앉는다.

눈과 얼굴을 맛사지하듯 어루만져 남은 잠기운을 보낸다.

굳어 있던 얼굴에 얼핏 붉은 기운이 도는 게 느껴진다. 훨씬 부드러워진 근육을 느끼며

시계를 본다. 역시 틀림없는 2시 40분이다.

.

 

그녀는 머리맡에 있는 소반위에서 다기하나를 들어 온수통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내려 놓는다.

차통에서 감잎차 몇잎을 꺼내서 찻잔에 넣고 온수를 부어둔다.

옆에 있는 김보살님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뒤척인다.

그녀가 불을 키고 다기를 달가닥거리는 소리에 잠이 떠나려 하나본다.

잠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인지 깨어나려는 의식을 잠재우려고 이리뒤척 저리뒤척 한다.

어쩌면, 겨우 살아난 의식을 붙잡으려고 잠에 대한 미련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가 우러났다. 맑은 빛깔이 여린 김을 품고 있다. 차잎을 담은 용기를 꺼내서 찻잔 뚜겅에 놓고

한 모금을 혀끝에 넣어보고 돌려본다.

향기가 혀를 돌고 온 입안과 머리속을 돌아가는 듯하다.

'보살님...이제 그만 일어나이소~'

그리고는 남은 차를 들이키고 다기를 정리한다.

자고 난 이부자리를 정리하려하자 김보살은 더이상은 안되겠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엉덩이를 하늘로 들고서 엎드려서 고양이처럼 온몸을 쭉쭉 늘인다.

그녀가 잠과 결별하는 방식이다.

이제, 3시를 가르킨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서 그녀는 일어선다. 김보살은 좀 더 이별의 시간이 필요하다.

'먼저 가께요. 어뜩 오이소~'

문 밖에 나와서서 하늘을 본다. 검은 하늘에서 푸름이 시작되고 있다.

언젠가의 밤들이 떠오른다. 여기 처음왔을 무렵, 그저 검은 하늘만 보였던 때,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하늘과 세상...

너무 달라진 밤이다.

처음 얼마간 아무리 알람을 맞춰놔도 듣지 못했다. 옆 사람들이 일어나 분주히 움직여도 큰 대자로 뻗은 몸음 꼼작하지 않고 우뢰같은 소리를 내며 잠속에 머물렀다.

문득, 웃음이 난다. 그리고, 여린 아림이 일어난다.

세상을 탈출할 수 있은 유일한 길이 그것밖에 없어서 였을까?

마치 잠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필사의 의지처럼, 장승처럼 그렇게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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