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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1인 시위'를 한다. 인터넷 실명제 반대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지문날인 폐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위압적인 건물 앞 바삐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몸만한 피켓을 걸거나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뻘쭘하기도 하지만, 30분 정도 서 있다 보면 피로하기 이를 데 없다.
사실 1인 시위는 궁여지책이었다. 모이고 싶은 곳에 모일 수 없고, 항의해야 할 곳에 항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시위 문화이다. 1999년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정부 부처 100m 이내에서 2인 이상이 시위하는 것이 불법이 되었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규탄하며 정보통신부 앞에서 시위를 할 수 없었고, 지문날인 폐지를 요구하며 행정안전부 앞에서 집회를 할 수 없었다. 여당이나 국회 앞에서 시위하려고 하면, 경찰이 이런저런 이유로 집회신고를 내주지 않았다. 실제로는 열리지 않는 유령 집회가 선점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정부 각 부처 앞, 여당과 국회 앞에는 제각기 하나씩 커다란 피켓을 몸에 건 사람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오래된 풍경으로 자리잡았다. 광장을 둘러싼 경찰 버스나 병력들 만큼이나 이상한 풍경이다.
이상한 풍경이 여기 또 있다. 기자회견이다. 인권단체들이 어떤 사건에 대하여 입장을 표명하고 싶을 때는 기자회견을 연다. 가난한 인권단체들이 버젓한 실내 공간을 빌리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개는 그냥 거리에 서서 한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고 한다. 한여름 한낮 뙤약볕 아래 기자회견을 갖다 보면 서 있는 사람도 취재하는 사람도 고역이다.
그런데 그 기자회견이란 것이 요상하다. 기자가 없는 기자회견도 많다. 언론 앞에 입장을 발표하는 외양을 띄고 있지만, 사실은 명백한 항의 대상을 가지고 있는 시위성 기자회견도 많다. 수없이 많은 기자회견에 참석해 보았고, 또 수없이 많은 기자회견을 개최해 보았지만, 답답할 때가 많다. 사회운동이 대중과 괴리되고 점점 언론에 의존하게 되는 현실에 대해 평소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기자회견 중심 활동이 아닐까 한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모여 기자회견 대신 집회나 시위를 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안될 말이다. 1인 시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이다. 항의대상이 되어야 하는 정부나 공공기관 앞에서는 2명 이상 모일 수 없다. 그러다보니 인권단체들은 궁여지책으로 기자회견을 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0년 전 1인 시위는 집시법 개악에 저항하기 위한 신종 시위 문화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게라도 목소리를 내고 싶은 사람들의 고달픈 풍경이다. 목소리 밖에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 기자회견 형식으로 언론과 만나는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기자회견 밖에 하지 못하는 인권운동은 대한민국 집회 시위 권리의 초라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정부는 그조차도 못하게 할 심산이다. 기자회견을 개최하거나 참석했다가 연행된 인권 활동가들 수가 점점 늘고 있다. 피켓을 들거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면 무조건 미신고 집회로 간주하고 연행하는 것이 경찰 방침이라고 한다. 아예 활동하지 말란 말과 다름이 없다. '그림'이 없는데 언론에 얼마나 날 수 있을지도 걱정된다. 없는 사람들의 얘기가 언론 지상에서 지금보다 더 사라질지도 모른다. 사실 기자회견을 금지시키는 정권의 계산속에는 그런 의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나마 1인 시위도 못하게 할 작정인갑다. 지난주 수요일부터 용산 참사 해결을 위한 1인 시위가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첫날은 경찰이 17개 중대 1천500여명을 광화문 광장 일대에 비치해 1인 시위를 원천 봉쇄했다. 누군가 피켓만 들면 방패를 든 경찰이 떼거리로 몰려와 노상에 감금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1인 시위는 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용산은 참사 이후 집회시위 권리 문제로도 계속 싸우고 있다. 기막히고 힘겨운 싸움이다.
* 이 글은 미디어오늘 2008.9.15자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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