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4)
- 찌니
- 2014
-
- 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3)(1)
- 찌니
- 2014
-
- 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2)
- 찌니
- 2014
-
- 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1)
- 찌니
- 2014
-
- 일본땅에 울리는 노동가요~(5)
- 찌니
- 2011
1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노동자, 역사의 주인으로 자기선언하다 " | |||||||
[노래이야기⑪] 노래패 문지방이 닳던 시절…<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 |||||||
87년 6월항쟁에 이어 전국적으로 봇물처럼 터져나온 7,8,9 노동자 대투쟁은 그 동안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의 자기 권리 선언이면서, 또 민주노조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주체적인 선택으로 향유했고, 스스로 투쟁의 문화, 집회문화, 조직의 문화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불린 노래들을 보면 기존의 민중가요 중에서는 일부 밖에 없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의 민중가요들이 서정적이고 비장했던 것에 비해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낙관의 벅찬 감동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가에서 불려지던 민중가요보다는 소모임이나 야학을 통해 보급되었던 <노동해방가>, <광주출정가>, <노동의 새벽>, <동지>, <늙은 노동자의 노래>(늙은 군인의 노래) 등과 대중가요의 노래가사를 바꾼 <막장을 간다>(전선을 간다), <아, 미운사람>, <다 그런거지>, <노동자청춘>(아빠의 청춘), <노란샤쓰의 사나이> 등의 다양한 노래들이 불려졌습니다.
노동가요와 김호철 그전까지 지식인 중심의 노래들이 현장으로 보급되었다면 이 후로는 노동자들의 노래가 대학가와 다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지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7.8.9 투쟁과정에서는 기존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지만 88년 가을 <파업가>, <노동조합가>,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 등의 노동가요가 발표되면서 입에서 입으로 파업과 집회현장을 거쳐 엄청난 속도로 확산이 됩니다. 이 노래는 대부분 김호철의 창작곡이었지요. 김호철은 80년대 중후반 구로에서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분위기와 상황을 민감하게 판단하였고, 이를 바로 창작에 반영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노래운동집단들이 노동가요의 창작에 대해, 그리고 노동자 투쟁에 완전히 무력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시키게 되었습니다. 마산 등에서도 몇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노동가요 자판기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하루가 지나면 그날 있을 투쟁의 전술가요나 일상가요를 창작해서 구로지역노패패연합을 통해 불러보게게 하고, 즉석에서 필요하다면 수정해서 보급했고, 이는 전문패들에게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의 음악단체들은 자신의 창작곡보다는 김호철의 노동가요를 비롯하여 노동자들에게 보급해야 할 노래들을 보급하는 역할이 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호철의 노래는 그의 구로지역 노동자 투쟁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 체험,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국적인 노동자 문화패 결성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을 바탕으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 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창작, 공연과 교육활동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거나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단체가 그렇게 많이 결성되었음에도 전국적인 수요를 다 채우지를 못해 풍물패의 경우 오전에 굿거리를 배우고, 저녁에 강습가서 가르칠 정도였다고 하고, 파업과 집회 문선공연은 매일 하루 세네번 공연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물론 봉쇄되면 담을 타넘고 들어가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몇박 며칠씩 같이 농성을 하면서 노래지도 및 율동지도, 촌극짜기, 깃발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굳이 노래단체 연극단체 구분할 것 없이 같이 진행하기도 했구요. 그 당시 노동자 노래단이나 삶의 노래 예울림 등의 노래단체는 공연을 다닐 때 악기를 모두 싸들고 다녔습니다. 파업상황이고 노동조합 체계가 안정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급작스런 변화들이 많았던 시기라 엠프까지도 직접 들고다니곤 했습니다. 주로 스네어 드럼과 심벌 한 장, 드럼과 심벌 스텐드, 그리고 베이스 기타와 씬디사이저, 기타, 게다가 50W 정도의 엠프까지 가지고 전철타고, 버스타고, 걸어서 파업현장에 연대공연을 가곤 했습니다. 신입단원이 들어오면 일단 가장 무거운 50W엠프를 들게 하고, 6개월이 지나면 씬디사이저를 들고다니게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떤 이는 직접 공연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늘 자신은 건반주자(건반을 들고 다니는 사람)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고, 어떤 단체는 가장 무거운 엠프를 들고다니는 사람이 대표를 하는 거라고도 했답니다.
가슴으로 기억하는 처절한 외침 노동자들도 그 동안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몸으로, 입으로 배우고 표현하면서 다가올 새날에 대한 희망을 키워갔을 겁니다. 우리들의 조직, 우리들의 희망, 민주노조에 대한 꿈, 그리고 노동해방에 대한 꿈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 시대를 열었던 쟁쟁한 투쟁가들을 엮은 <투쟁가메들리>를 같이 듣겠습니다. 노동운동을 했던 한 선배는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종종 투쟁가 메들리를 틀어놓고 따라부르며 청소를 한다는데, 매번 펑펑 울고 만다는 군요. 저 역시 어떤 서정적인 노래보다도 투쟁가들이 그 시절의 제 삶과 사람들에 대한 벅찬 감정을 떠올리게 하곤합니다. 그러니 노래에 대한 기억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노래를 목놓아 불렀던 이들에게는 그 때의 정서와 몸상태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처절하게 외쳤던 ‘인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꼭 여러분의 가슴과 몸이 기억해 내길 바랍니다.
<투쟁가 메들리> -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 |
추모곡이 되돌이표가 되던 시절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⑩] 열사의 바람 되새기는 노래 <벗이여 해방이 온다> | |||||||
노동해방과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길에서 수많은 선후배, 동료가 죽어갔습니다.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지들이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의 죽음에는 추모곡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후일에 알려지기도 했을 겁니다.
또 죽어간 열사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며, 그들의 뜻을 받들자는 절절한 노래가사와 완성도 높은 곡 형식, 더군다나 그 시대 최고의 여가수로 손꼽혔던 윤선애의 열창 등으로 굳이 추모행사 자리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불리며 열사들의 뜻을 되새기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고문
박종철 열사의 죽음
여전히 힘든 그 시절의 기억들 <벗이여 해방이 온다> 이창학 글, 곡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 음원 출처 : 민문연 11집 [해방의 노래] 중 윤선애 노래 ** 참고 : 노래 작곡자인 오마이뉴스 이창학 기자의 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7186 |
"폭탄보다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⑨] 노동조합의 꿈과 의지 담은 <큰 힘주는 조합> | |||||||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큰 힘주는 조합’입니다. 이 노래는 60~7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 속에서 불린 노래로, 가스펠송을 번안한 곡입니다. 70년대 말 ‘우리 승리하리라’나 ‘바람만이 아는 대답’ 등 외국의 반전가요가 한국의 억압된 사회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반면 ‘큰 힘주는 조합’은 노동자의 이야기와 노조의 필요성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교회나 야학의 노동자 소모임에서 가사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총 사게 돈 보내라"
85년 봄 축제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뒷풀이 단골 노래
<큰 힘주는 조합> - 외국곡- 1. 노동자의 핏줄 속에 조합 정신 흐를 때 하늘아래 그 무엇이 보다 더욱 강하랴 우리 각 사람의 힘은 비록 약할지라도 큰 힘주는 조합 후렴)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큰 힘주는 조합 2. 방방곡곡 일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경제개발 사회발전 애써 이룬 우리들 내가 만든 기적 속에 멸시천대 받으나 큰 힘주는 조합 3. 저들 거만하게 자랑하는 많은 재산들 우리 손과 머리 못 빌리면 어림도 없다 억누르는 권력에서 참된 자유 얻도록 큰 힘주는 조합 4. 재물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게 있다. 폭탄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불탄 폐허에서 새 세계를 건설하도록 큰 힘주는 조합 음원 :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문제 대책위원회 [노동자를 위한 노래모음 1집] 중에서 제작 : 민주노동자 |
아직 끝나지 않은 5월의 노래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⑧]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정태춘 <5.18> | |||||||
5월입니다. 올해로 80년 광주항쟁이 30주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 광주항쟁이 민주화 투쟁으로 인정되면서 국가기념일이 되었지요. 이제는 누구나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재작년인가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많은 이들이 광주항쟁의 실체와 아픔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렇게 공공연하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게 된 건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었지요. 이런, 세상에!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 불과 4년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사건에 대해 기록된 글을 읽는 것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몇 장 안되는 사진의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노래써클이 공개되어 있는 써클이다 보니 많은 학우들이 입단을 했고, 나의 동기는 100여명이나 되었지만 써클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하는 단원들은 1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몇몇은 이렇게 세미나를 하면서 광주항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은 정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멈춰진 노래
대본을 짜고, 노래선곡을 하고, 배역을 정하고, 독창자들을 정하고 부분장면을 연습하면서 공연 연습을 했습니다. 독창자들은 의식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오디션 같이 노래를 불러보게 하고 맞는 목소리와 분위기, 가창력을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습니다. 물론 이런 기준에 대해 선배들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지만, 그래도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또 총연출의 권한으로 배역과 독창자들이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살장면과 비명소리가 나오자 노래를 부르던 친구는 그만 충격에 노래를 멈추어 버렸습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공연 이 끝날 무렵 선배언니는 선동을 하고는 합창을 하다말고 실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공연 하나 올리는 것, 노래 한곡 부르는 것조차도 힘들고 버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오월의 노래를 부른 여리고 고운 그 친구는 오래지 않아 써클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뜨고는 두려움에 차츰차츰 멀어져 가기도 했습니다.
5.18,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광주에 관련된 노래를 선곡하면서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작동을 했는데요, 대부분 그렇듯, 저 역시도 거의 해마다 5.18 즈음 광주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광주 신묘역을 참배한 후 5.18 행사를 참여하고는 그 이후로 광주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 많은 분들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20년간 수도 없이 많은 희생과 댓가를 치르고, 또 처절하리만치 힘들게 활동을 해오신 것을 잘 알고, 또 그래서 그만큼도 너무나 벅찬 일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이후로는 5월 항쟁일에 정태춘 선배의 <5.18>을 들으며 혼자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오늘은 그런 마음으로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광주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과 노래를 연결해서 부를 때는 노래에 심취해서 감동을 받는 것도 좋지만, 과연 그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광주의 억울한 영혼들은 위로받고, 이제 편안한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인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겐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오월, 여전히 과제로 남은 오월이기 때문입니다.
(음원 : 정태춘 7집 중) |
민요적 감수성, 민중가요에 담겨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⑦]시대를 풍자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 |||||||
민중가요가 확산되던 80년대 중반에 대학의 문화써클들은 단순히 자기 장르만 배우고 익힌 게 아니라 다른 문화써클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탈춤반, 민요반, 풍물반, 마당극 등의 써클 성원들은 날씨가 좋은 주말, 노천강당에 모여 민요를 배우거나 새로운 민중가요를 배우거나, 간단한 탈춤 동작을 배우곤 했습니다. 물론 뭐 탈춤을 배운다고 해봐야 고작 오금질과 사위 정도를 가볍게 배우는 것이었고, 장단도 굿거리나 노래에 필요한 간단한 장단을 배우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그리곤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함께 해방춤이나 농민춤을 추며 놀거나 써클대항 차전놀이, 기마전 등을 하면서 놀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중 민요는 제대로 배우려고 하면 아주 어렵지만 멜로디만 간단하게 익히면 자기 음역에 맞게 키를 잡아서 앞소리를 즉흥가사로 바꾸어 돌아가며 부를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래가사바꿔부르기(노가바)가 유행을 했던 것도 아마 이런 민요운동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요연구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듬지 민요연구회는 84년 6월에 창립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90년대 중반에 해산을 합니다. 안양에도 80년대 후반 민요연구회가 결성되어 활동하다 역시, 90년대 중반 해산했지만, 당시 안민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2000년대에 우듬지라는 노동자 민요패를 결성하고 공연을 다니기도 했었지요. 노동자대회 때나 집회 때 우듬지의 공연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민요연구회는 민요 부흥 운동으로 시작해서 전통 민요의 발굴 및 보급 뿐만 아니라 창작 민요까지 아우르는 활동을 합니다. <둥당에타령>, <액맥이 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같은 전통민요와 신민요를 발굴, 보급하였고, 그 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자 하였습니다. 창작민요로는 <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 /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박선욱 작시․이정란 작곡)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국악계의 보수성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맞는 음악문화를 만들어가고자 진보적인 국인인들을 규합하는 데도 힘을 쏟았습니다. 주 1회 교사모임들을 만들어 중고등학교의 음악문화를 바꿔보려는 시도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민요운동은 기존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 민중가요적 계승에 노력을 기울여 커다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성과, 그러나 민중가요를 넘어서지는 못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요는 쉽게 대중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수용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노래풍들이 가곡이나 고급음악적인 요소들이 강한 것에서 보여지듯이 오히려 일반 대중보다도 더 민요적, 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운동은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고 불 수 있습니다.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역시 처음에 양성우 시인의 시로 1절만 발표되었으나 이후 불려지고 퍼져나가면서 공연 주제나 상황에 맞게 가사가 덧붙여졌습니다. 아마도 다른 집단에서 또 새로운 가사가 덧붙여졌을테지만, 아래 적어드린 2절만큼은 참 많이 불려졌답니다. 여기서 들으시는 곡에는 발표될 당시 민요연구회 성원이었던 김애영님이 부른 노래로, 1절만 있습니다. 하지만 2절을 생각하며 한 번 더 들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 *
음원 : 민중문화운동연합 제6집 [우리가락 좋을시고] 중에서
양성우 시, 김용수 곡 |
2010년 11월, 인천문화재단 아트플랫폼 수록 원고입니다.
--------------------------------------------------------------------------------------------------------
문화예술과 사회적기업의 공생가능성
- 지역 문화예술생산자조합이라는 자바르떼의 시도를 토대로 -
이은진 (신나는문화학교 자바르떼 대표)
최근 1~2년 사이 사회적기업에 대한 관심이 가히 전국적인 붐이라 할 만큼 높아졌다.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시행된지 3년하고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인증된 사회적기업의 수는 2010년 10월현재 400개소를 넘었고, 서울형이나 예비사회적기업까지 하면 500개가 넘을 것이라 예상되고, 앞으로도 더 속도를 붙여 사회적기업을 육성한다고 하니, 마치 한국사회 고질화된 실업문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인식되어지기도 한다. 노동부는 사회적기업 육성 계획에서 ‘새로운 수요가 많고 시장과의 충돌이 적어 사회적기업의 진출가능성이 높은 지역개발, 문화, 환경 등’을 미래성장형 사업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사회적기업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사회적이라는 말과 특히 잘 어울리는 영역이 문화예술분야라고 생각되었다. 문화예술의 공공재적 성격과 사회적가치는 잘 부합되고 또 문화예술분야의 많은 인력들이 안정적인 활동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많은 일자리 창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여졌다.
이에 대한 근거는 간단한 몇 개의 자료만 찾아봐도 알 수 있다. 문화예술향수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구성원 중 70% 정도의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향유한다. 고전적 개념의 예술행사 관람률은 아주 저조하고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나이가 어리고 대도시에 살고 있을수록, 그리고 학력이 높고 가구소득이 많을수록 예술행사 관람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문예술인 교육을 받고 배출되는 인력은 교육인적자원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6만~7만명 정도인데, 전문예술인들의 예술활동관련수입은 없음(23.5%), 100만원 이하(38.4%), 100~200만원(19.1%)의 분포를 나타냈다. 이처럼 문화예술분야는 수요의 측면에서 문화소외와 편중현상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로 인해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활동을 통해 먹고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문화소외를 극복하는 문화다양성과 문화기본권의 개념 도입이 중요하고,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수요는 증가하게 되고, 당연히 예술인일자리도 늘어나야하고 예술인들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반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보여졌다.
그러나 막상 2년이 좀 넘게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을 운영해보고, 또 문화예술영역에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은 사회적가치가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적가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계량되어 외화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예술이 가진 공공성과 사회적가치 실현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연예산업 역시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공의 영역일 수 있지만 사회적가치를 실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산업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미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의 공연이나 드라마 등이 취약계층에게도 제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적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문화예술분야에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는 사회적가치, 사회서비스는 어떻게 규정하고, 또 구분지어야 하는가, 나아가 문화예술사회적기업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회적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던 문화예술 영역의 단체들이 인증제도를 거쳐 사회적기업에 진입하는 것은 이를 기반으로 좀 더 확대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는 것인데, 막상 시작을 하면 기업이라는 단어에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해왔던 단체운영방식이 아니라 기업으로서의 조직운영이라는 크나큰 과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영역에서는 많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문화예술인들을 고용하고 출퇴근 관리 등 통제를 한다는 것, 수익창출이라는 지점이 그러하다. 기업운영이라는 것이 인간 중심이라기보다는 이윤추구가 존재 목적이기에 경제적 가치를 우선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밖에 없고, 개개인 특성을 인정해 가면서 인간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이 생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이 쉽게 가능했다면 수많은 공연단체, 문화예술단체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단체를 해산하거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개인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본력이 없으면 예술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기조차 어렵고, 이미 거대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 속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예술활동을 하면서 먹고사는 것이 가능했는가 말이다. 이렇게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적기업이나 지원이라는 조건들이 오히려 기존에 활동의 근본까지 흔들거나 그나마 어떻게든 유지해 오던 자생성마저 와해시킬 소지도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문화예술인들에게 인건비를 포함한 지원과 혜택도 중요하나 이러한 지원을 기금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된다.
흔히들 사회적기업을 사회적이라는 단어와 기업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인식하면서 두가지를 공존시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즉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안정된 수익구조와 고용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회적가치를 실현하거나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어떻게 시장에서 경쟁하여 살아남을 것인가를 모색하면서 사회적가치 실현을 위한 활동을 어느 정도 비중으로 놓을 것인가하는 줄타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기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안정적인 수익구조 확보를 우선으로 두고 여기서 나온 수익 중 잉여분을 사회로 환원하거나 소외계층에게 수혜를 일부 주는 것이라면, 굳이 국민의 세금을 풀어 사회적기업을 왜 육성해야 하는 걸까. 이는 모든 기업들이 하고 있고, 또 앞으로 더 확대되어야 할 기업의 사회적책임인데.
그러다 보니 경제적가치와 사회적가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어떤 것을 우선에 놓을 것인가, 혹은 두 가지를 어떤 비중으로 배분할 것인가도 문제이지만, 실제 사회적가치를 어떻게 산출하여 이를 경제적 효과로 드러내야 하는지도 어려운 문제이고, 또 과연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도 참 어려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없는것일까? 이런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 해결해야만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이 가능한 것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초심에서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문화예술단체들은 과거에는 훨씬 더 결속력이 높은 공동체적인 운영과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경제적으로나 대중과의 소통의 측면에서 잘 해결되지 못하면서 많은 단체들이 거의 해체를 하였고, 공간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일이 있을 때만 합주나 회의를 하러 모이게 되었고, 그 결과 오히려 단체의 목적에 맞는 활동이 더 어려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당연 상근활동을 하는 사람이 줄었고, 한두명의 기획자나 창작자만 남아 예술가들을 상황과 필요에 따라 그 때 그 때 채용하거나 모집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일상적인 창작활동과 연속적인 고민이 없어지면서 주변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도, 향유자들의 욕구를 들여다볼 계기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렇게 또 활동력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장기적인 비전과 활동토대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가야했다.
자본이 없으면 창작물이 제대로 생산되기도 어렵고, 대중들과 소통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자바르떼가 사회적기업을 준비한 것은 이처럼 뿔뿔이 흩어져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창작활동마져 저조해진 현재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함이었다.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지속적인 활동의 토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일정한 지원과 틀을 바탕으로 가능한 모색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이라는 고민을 같이 하게 된 것은 문화예술분야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업’이라는 틀에 대한 부담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초기에는 모두들 불편하고 어색했다. 나 역시도 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나, 예술가들을 고용하는 고용주라는 자리가 늘 어색하고 불편했고, 또 기존의 활동방식과 관계들의 관성도 많이 남아있어 조직운영에 원칙들을 고수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자신이 어떤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도, 출퇴근 시간을 통제당하는 것도 불편했을 것이고, 꼭 하고 싶지 않은 활동이라도 회사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억지로 수행해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매일 업무일지를 올리고, 각종 행정서류를 작성하면서 왜 이런 것을 해야할까하는 회의도 들었을 것이다. 이전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싫고 불편하고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고, 또 공유하더라도 그것을 가능케하는 구체적인 방안과 믿음을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정리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또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지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3개월마다 평가를 하고, 재정 분석을 하고, 6개월마다 인력 재배치를 하고 조직체계를 재편하면서 3년차에 들어서 보니,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본 친구들은, 많은 돈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면서 재밌게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갖게 되었다. 현재 100%는 아니지만 점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초기부터 계속 강조해왔던 예술활동을 사회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의미,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예술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정리도 조금씩 되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여러 번에 걸친 조직진단 워크숍과 컨설팅을 통해 교육하고, 토론하고 고민해 온 결과이고 그래서 현재 자바르떼의 예술가들은 이렇게 끝까지 계속 함께 잘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직은 좀 더 조직의 비전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실현계획과 그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겠지만 이제야 이들과 함께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결국 중요한 건 지속성일 것이다.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만들어갈 것인가? 만약 자바르떼가 인건비 지원이 종료된 후 운영할 대책이 없다면 많은 이들이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아가던가, 과거의 생활도 돌아갈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그동안 쌓아온 역량들과 가능성조차 소실될까 걱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운영진들이 수익구조의 확대라던가, 조직운영방식에 대해 고민을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속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시장에서 성공하는 어떤 수익구조를 만들어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수익구조는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은 것도 중요하긴 하나 그 외에도 가능한 방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화복지 차원에서 보호된 공공시장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이는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같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화를 기본적인 사회권이라고 보면 주민들의 문화욕구를 발굴하고 이를 충족시켜주는 문화예술활동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게 확대될 수 밖에 없다. 복지 바우처를 문화영역으로 연결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영역을 사회적기업에게 맡겨준다면 지역에서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외의 다양한 활동을 펼쳐갈 기반을 갖출 수 있다. 실제로 자바르떼 경기지부의 경우 안산시와 협력해서 복지부 청년사업단을 문화예술분야로 받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공급자가 많아지면 경쟁이 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전 국민의 기본권으로 확대해 간다면, 문화예술사회적기업이 많아져도 수요를 다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아마도 이런 활동을 자신의 활동으로 삼을 예술가가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예술은 다른 서비스와는 달리 문화소외를 해결하는 방식이 사람에 따라 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개개인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가 필요한 영역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려면 오히려 지역에서 건강하고 자기 철학을 가진 젊은 예술인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생겨야 할지도 모른다.
수익구조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접근해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은 지역 안에서 대안적 경제구조로 해결하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시도를 하고 있지는 못했으나 이미 지역에는 이런 구조 속에서 상호 협조하는 단위들이 꽤 많이 있다. 수익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에 사는 예술인들이 지역에서 관계를 맺고,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활욕구를 충족시켜가는 것도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서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만 해결하려하지 말고, 지출을 줄이면서 지역내 협동구조에 들어가 같이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지역이다. 사회적기업이 성공하려면 지역을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지역 주민의 문화예술 욕구를 발굴하고,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지자체와도 협력하고, 주민들의 지지도 받고, 지역의 소외계층에게도 같은 질의 문화예술활동을 제공하면서 공동체적인 기반을 만들어가지 못하면 일반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밖에는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조직운영과 관리, 시스템의 문제인데, 물론 순서로는 이 부분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예술가들의 출퇴근 통제가 어렵다고는 하나, 함께 모여서 창작하고, 연습하고, 지역 주민들의 욕구를 탐색하고, 이를 충족시킬 방안을 고민하고, 조직의 비전과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일자리와는 분명 다르다. 몇몇 사람이 사회적가치를 고민하여 사업단을 만들고 일자리로서 예술가들을 고용하는 것이라면 현재까지 처해있는 문화예술의 현실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이 운영의 주체가 되기는 쉽지 않다. 초기부터 참여할 중심적인 예술가들과 기획자, 운영진들이 함께 사회적기업의 비전을 세우고, 우리 지역의 주민들과 어떤 문화예술활동을 할 것인지, 수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찾아나가야 한다. 최소한 각 조직의 10년 후 모습을 그려보면서,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인증과 그 과정이 어떤 단계의 어떤 역할을 할지 판단한 후 도전하는 것이 좋다.
운영방식에 있어서도 예술가를 통제해서는 좋은 창작물이 안나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편 맞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도 이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기획자들이 물꼬를 터주고, 계기를 마련해주면서 같이 소통할 때 더욱 그 빛을 발한다는 건 또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또 자기의 방식대로만 예술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에서,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좋은 예술이 나오기 힘들다. 한 공간에 모여 고민하고, 합주하고, 또 창작하고 공연하는 것이 주는 즐거움도 무척 크다는 것을 해보면 또 느낄 수 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 후에 사회적기업으로서 조직 시스템을 안정화 시키기 위해 관계를 재규정하고, 인력을 재배치 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모든 예술가가 사회적기업가나 사회적기업의 직원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허나 사회적기업은 준비하는 주체 모두의 철학의 문제이고, 조직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공동의 책임감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같이 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꿈을 꾸고 이것을 실천해갈 사람인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에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정부도 꼭 해결해 줘야 할 부분이 있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가치냐, 기업으로서의 운영과 수익창출이냐의 분리된 고민이 아니라 사회적기업을 하나의 개념으로 놓고 이의 새로운 조직형태, 운영방식 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의 사회적기업이라면 문화예술생태계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기업 하나로 모든 예술계의 문제나 문화복지 실현 등등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정책방향, 문화복지에 대한 고민들 속에서 사회적기업이 어떤 위치에 서게 할 것인지, 어떤 사회적기업을 육성할 것인지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예술가들이 많이 놀고 있으니 일자리를 늘리겠다거나, 예술단체들이 어려우니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창작력을 고양시켜 사회적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하도록 한다는 발상보다는, 국민들의 문화 향수권, 참여권, 창의력 향상 등 문화복지와 문화예술생태계 차원에서 접근하여 방안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열사들이 꿈꾸던 세상을 향한 노래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⑥]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 |||||||
(음원 : 민문협 9집 [그날이 오면] 중에서)
학생운동의 문선대가 된 노래써클
노래운동을 주도한 '새벽'
전태일 열사의 꿈을 담다
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고 문익환 목사께서 열사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목놓아 부르며 대신한 조사에 백뮤직으로 쓰여지면서 모든 열사들이 꿈꾸던 세상, 우리가 염원하는 세상을 향한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88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에 수록되면서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노래이고, 또 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나 전문단체 공연 때 항상 마지막 곡으로 선곡되었던 선택받은 노래, <그날이 오면>을 들으시면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열사들이 꿈꿨을 세상을 다시금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고향>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⑤] 상경한 여성노동자 현실 서정적으로 그려 | ||||||
84년 서클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선배들과 같이 보러 간 공연은 애오개 소극장에서 열린 [가지꽃]이었습니다. ‘한돌의 노래야’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한돌의 노래로 이야기를 엮고, 그것을 노래와 대사로 연결해 가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대 한소리 출신의 79학번 박미선과 성대 76학번으로 민요연구회 창단 멤버이며, 노동자 노래단과 꽃다지 초대 대표를 지낸 김애영, 두 명이 등장하여 진행한 공연 [가지꽃].
난 서울 간다... 오늘만 넘기면... 그 중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의 발족은 그 이전까지 수용자들에 의해 주도되던 노래문화를 본격적인 노래운동으로 이끌어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70년대 탈춤, 마당극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소극장운동, 소집단 운동으로 존재하던 문예운동이 그 소집단들의 협의구조인 민문협이라는 조직을 발족하게 되었는데, 당시 노래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노래분과로 창립을 하게 됩니다.
80년대 초반 자유화의 최정점에서 생겨난 민문협
2. 이따금씩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내 고향 산 마루도 그리워지네 |
'암울한 단조' 시대, 울부짖음 같은 노래들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④] 호소력 넓힌 음악 형식…<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 ||||||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80년대 초중반 서정가요들 중 하나인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입니다. 일명 청․소․부로 축약돼 불린, 어느 정도는 가창력이 뒷받침돼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가슴으로 불러야 됐던 노래들
80년 광주는 그 시대를 살던 지식인과 학생집단에게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면서 아주 쓰라린 패배감을 갖게 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때에도 광주항쟁과 전태일 열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기득권에 대해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술자리에서 괴로워하며 울분을 토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까지 대학의 집행부는 지금처럼 총학생회가 아니라 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 체계였고, 84년 말부터 각 대학별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나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학민추)등이 결성되어 총학생회를 부활시킨 것이지요.
학도호국단을 아시나요
또 대학의 민중가요 서클도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 고대 석화(지금의 노래얼)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통기타를 치면서 팝송이나 포크송을 화음을 넣어 아름답게 부르는 동호회였답니다. 그러다 80년 전후 현실을 자각하고 좀 더 목적의식적인 활동과 민중가요 창작을 하게 됩니다. 대학마다 민중가요 서클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한 내용을 다 알리기 전에 대부분은 도서관에서 상주하던 기관원들이나 밖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온 전경들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하면서 끌려갔다고 합니다.
암울한 단조의 시대 80년대 초, 중반을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고, 또 민중가요의 전성기라고도 했는데, 바로 그런 표현을 만들어 냈던 노래들로 수많은 이들에게 애창되던 노래입니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울부짖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나지막히 따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
부르면 울게 만든 그때의 노래들 | ||||||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③] <이 세상 어딘가에>…서정적 가사에 노동자 삶 담아 | ||||||
제가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접한 민중가요들은 아주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이었습니다. 같이 어깨를 걸고 목 놓아 부르는가 하면, 혼자 흥얼거리다가도 울컥하고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그 노래들. 70~80년대 초반 민중가요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실 행진곡 풍보다는 바로 이런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입니다.
서정적이고 고운 민중가요
음원 : 메아리 Origin2 중에서 (일천구백팔십년 여름 녹음, 98년 4월 복각)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는 1984년이었습니다. 학원자율화 조치가 있던 해죠. 즉, 그 이전까지는 대학 내에 기관원들이 상주하며 학생들과 같이 수업도 듣기도, 벤치에 앉아 잡담도 나누며 감시를 했습니다. 그러다 돌변해 친구를 연행해 가기도 했고요.
기관원과 함께 수업 듣던 시절
그런 ‘혜택(?)’으로 저는 대학에 입학해 노래 서클에 가입하며 활동하게 됐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시작된 서클 활동은 가히 '학과 공부를 하러 대학을 다닌 게 아니라 서클활동을 하러 다녔다’고 할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했고, 술자리에서 부르면 괜스레 눈물도 흘렀습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이 땅의 축복 위하여>, <친구>, <영산강>, <약수 뜨러가는 길>, <진달래> 등이 주로 그러한 노래였습니다.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78년 겨울에 만든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서정적인 몇 곡의 노래들과 연극적 상황, 그리고 개사곡을 변주해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김민기 노래극 '공장의 불빛'의 파격
그 당시 대학가의 노래패 공연은 대부분 통기타 한두 대로 연주를 하며 노래에 단순 화음 정도를 넣는 것이었는데, 이 [공장의 불빛]은 신디사이저와 드럼을 파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공장에 들어와 저임금에 야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 그러다 산재를 당해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 난 신세,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지만 사측의 음모와 탄압에 부딪혀 좌절하고 맙니다. 그거야 순전히 댁 사정이죠 병 걸려 있으니까 그런 거죠. 묵묵히 참으면서 일만 하세요 윗분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예요. 3년만 지내보면 알게 될 거다. 귀머거리 폐병쟁이 누구누군지…”(이 노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중가요에서도 타자화됐던 노동자 |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