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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9 - 큰힘주는조합

 

"폭탄보다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⑨] 노동조합의 꿈과 의지 담은 <큰 힘주는 조합>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큰 힘주는 조합’입니다. 이 노래는 60~7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 속에서 불린 노래로, 가스펠송을 번안한 곡입니다. 70년대 말 ‘우리 승리하리라’나 ‘바람만이 아는 대답’ 등 외국의 반전가요가 한국의 억압된 사회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반면 ‘큰 힘주는 조합’은 노동자의 이야기와 노조의 필요성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교회나 야학의 노동자 소모임에서 가사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각 대학마다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학민추)나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학자추) 등이 결성돼 총학생회를 부활시켰습니다. 이듬해 몇몇 대학교를 시작으로 20년 만에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다시 대학 총학생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지요.

 

"총 사게 돈 보내라"
당시에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군사체계에 자동 편입되는 관행도 차츰 사라집니다. 군사체계에 편입되면 1학년 초 문무대에 입소하고 2학년이 되면 전방입소 훈련을 시행하게 됩니다.

물론 문무대나 전방 입소 반대투쟁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온 가난한 유학생들이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 용돈이나 술값이라도 뜯어내려 한 일이겠지만요.

 

   
  ▲ 군사독재 정권 시절 백골단에 끌려가는 학생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학생활이나 물정을 잘 모르시는 부모님께 ‘전방 입소 때 총을 사가야 한다’며 ‘돈을 보내라’고 하거나, 그도 부족해 ‘알고 보니 총알도 사가는 거였다’며 돈을 요구했다는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떠돌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농담 같은 상황보다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은 더 치열한 투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온 학우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은 그 당시 아주 적은 용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엔 생맥주 500CC 한잔에 500원이었고, 소주와 막걸리는 400원, 김치찌개 푸짐한 한 냄비에 2500원, 라면 한 그릇에 300~400원이었지만 늘 쪼들렸던 운동권 학생들은 매일 계속되는 집회와 시위가 끝난 뒷풀이에서 라면 하나 먹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고, 생맥주는 신입생 동기끼리 선배 몰래 모이는 자리에서나 마실 수 있는 술이었습니다.

 

85년 봄 축제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원칙이었다고도 생각되지만, 그 당시 노동자·민중을 생각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운동권의 문화와 정서가 그랬던 것은 또 나름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늘 술자리에선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고 대학생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울부짖음과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난 85년의 봄 축제는 이전과 또 달랐습니다. 축제를 대동제로 바꾸고, 가을의 스포츠 제전도 대동제 성격을 부여하여 총학생회와 서클연합회가 내용적으로 주도해갔습니다. 노래공연이 핵심적인 무대를 차지하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다 같이 행진을 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물론 자율화 조치 이후에도 최루탄을 쏘며 전경들이 학내에 진입하기도 했고, 페퍼포그도 교내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오기도 했으니 집회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위해 준비한 팸플릿 등의 인쇄물도 학교 앞 인쇄소에서 압수되기도 했고, 그로 인해 팸플릿을 찾으러 갔던 동기나 후배들이 연행되고, 구속되는 일도 잦았던 때입니다. 어떤 공연에는 주요한 배역을 맡은 선배가 연행되어 공연 당일 부랴부랴 다른 사람이 대타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마침 85년 봄 대동제를 계기로 자체 노래책을 발간하여 배포하려던 계획이 인쇄소에서 노래책 2000권을 통째로 압수당하는 바람에 항의 농성을 준비하고 대동제 때 선전전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겨울 방학 때도 매일 학교에 나와 노래 수집하고, 악보로 옮겨 그리고, 또 글과 판화 등을 넣고 편집하여 완성한 책이니 모두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와 서클연합회의 지원 하에 학생회관 앞에 책상을 놓고 매일 선전전과 거리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노래책이나 테이프들에 대한 탄압과 압수 수색은 계속되었던 것 같네요.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그런 상황에서 5월 대동제에서는 민중가요를 보다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유해 보고자 100인 합창단을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에 각 단과대에 연락을 해서 대동제 공연에 함께할 학생들을 조직하고, 모아서 합창연습을 시켰습니다.

그 동안은 한 두 곡을 빼놓고는 단순합창으로 부르거나 한 성부정도의 화성을 넣어 부르던 노래들을 4부 합창으로 편곡하여 대합창을 시도한 것입니다. 제목은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당시 유행했던 전영록의 노래를 개사한 곡으로 ‘아직도 어두운 밤 인가봐, 공장엔 신음하는 노동자…’로 현실을 풍자한 곡이었습니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요 내용은,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두돌이가 나이트 클럽과 미팅 등 새로운 환경을 즐기다가 꿈속에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만나면서 각성을 해가는 구성으로 현대판 스크루지 (찰스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였습니다.

그 때까지 항상 공연 첫 곡으로 불렀던 <내나라 내겨레>는 20명이 무대 앞에 나란히 앉아 모두 기타를 치면서 불렀고, <그루터기>, <터> 등의 합창곡들로 무대를 열었습니다. 그런 후에 본 공연으로 들어가면 중간 중간에 극을 배치하고, 또 극에 맞는 노래들이 선곡되어 합창 혹은 독창으로 불렸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역시 합창곡들로 <큰 힘주는 조합>, <진실을 찾아> 등 주제를 담은 노래들로 마무리를 하고, 다함께 대동판을 만들거나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전진합니다.

 

뒷풀이 단골 노래
그 뒤로는 대부분의 노래를 3, 4부로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고, 연합 집회에 가서도 민중가요를 같이 부르면 ‘화음 넣는 애들은 oo애들’ 이라고 소문날 정도로 좀 심하게 화음을 넣곤 했지요. 그 중 가장 자주 불렀던 노래가 바로 <큰 힘주는 조합>입니다. 대학생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잘 와닿지 않는 노래였을 텐데도 유독 뒷풀이 때마다 빼놓지 않고 4부 화성을 넣어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뿐 아니라 올해 초 모임 때도 여전히 이 노래를 4부로 불렀으니 앞으로도 십년 이상은 더 부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총 4절까지 있는 이 곡은 노래가사가 좀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다분히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곡인 듯 한 구성에 1~4절이 총체적으로 헛갈리기 쉽기는 하지만, 조금만 앞뒤 맥락을 생각하면서 노래한다면 덜 헛갈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이의 한계는 극복이 잘 안 된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결성되지 않았던 시절, 노동조합에 대한 꿈과 의지는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요?

 

<큰 힘주는 조합>
- 외국곡-


1. 노동자의 핏줄 속에 조합 정신 흐를 때 하늘아래 그 무엇이 보다 더욱 강하랴
우리 각 사람의 힘은 비록 약할지라도 큰 힘주는 조합
후렴)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큰 힘주는 조합

2. 방방곡곡 일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경제개발 사회발전 애써 이룬 우리들
내가 만든 기적 속에 멸시천대 받으나 큰 힘주는 조합

3. 저들 거만하게 자랑하는 많은 재산들 우리 손과 머리 못 빌리면 어림도 없다
억누르는 권력에서 참된 자유 얻도록 큰 힘주는 조합

4. 재물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게 있다. 폭탄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불탄 폐허에서 새 세계를 건설하도록 큰 힘주는 조합


음원 :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문제 대책위원회
[노동자를 위한 노래모음 1집] 중에서
제작 : 민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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