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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역사의 주인으로 자기선언하다 " | |||||||
[노래이야기⑪] 노래패 문지방이 닳던 시절…<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 |||||||
87년 6월항쟁에 이어 전국적으로 봇물처럼 터져나온 7,8,9 노동자 대투쟁은 그 동안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의 자기 권리 선언이면서, 또 민주노조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주체적인 선택으로 향유했고, 스스로 투쟁의 문화, 집회문화, 조직의 문화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불린 노래들을 보면 기존의 민중가요 중에서는 일부 밖에 없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의 민중가요들이 서정적이고 비장했던 것에 비해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낙관의 벅찬 감동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가에서 불려지던 민중가요보다는 소모임이나 야학을 통해 보급되었던 <노동해방가>, <광주출정가>, <노동의 새벽>, <동지>, <늙은 노동자의 노래>(늙은 군인의 노래) 등과 대중가요의 노래가사를 바꾼 <막장을 간다>(전선을 간다), <아, 미운사람>, <다 그런거지>, <노동자청춘>(아빠의 청춘), <노란샤쓰의 사나이> 등의 다양한 노래들이 불려졌습니다.
노동가요와 김호철 그전까지 지식인 중심의 노래들이 현장으로 보급되었다면 이 후로는 노동자들의 노래가 대학가와 다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지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7.8.9 투쟁과정에서는 기존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지만 88년 가을 <파업가>, <노동조합가>,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 등의 노동가요가 발표되면서 입에서 입으로 파업과 집회현장을 거쳐 엄청난 속도로 확산이 됩니다. 이 노래는 대부분 김호철의 창작곡이었지요. 김호철은 80년대 중후반 구로에서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분위기와 상황을 민감하게 판단하였고, 이를 바로 창작에 반영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노래운동집단들이 노동가요의 창작에 대해, 그리고 노동자 투쟁에 완전히 무력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시키게 되었습니다. 마산 등에서도 몇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노동가요 자판기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하루가 지나면 그날 있을 투쟁의 전술가요나 일상가요를 창작해서 구로지역노패패연합을 통해 불러보게게 하고, 즉석에서 필요하다면 수정해서 보급했고, 이는 전문패들에게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의 음악단체들은 자신의 창작곡보다는 김호철의 노동가요를 비롯하여 노동자들에게 보급해야 할 노래들을 보급하는 역할이 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호철의 노래는 그의 구로지역 노동자 투쟁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 체험,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국적인 노동자 문화패 결성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을 바탕으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 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창작, 공연과 교육활동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거나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단체가 그렇게 많이 결성되었음에도 전국적인 수요를 다 채우지를 못해 풍물패의 경우 오전에 굿거리를 배우고, 저녁에 강습가서 가르칠 정도였다고 하고, 파업과 집회 문선공연은 매일 하루 세네번 공연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물론 봉쇄되면 담을 타넘고 들어가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몇박 며칠씩 같이 농성을 하면서 노래지도 및 율동지도, 촌극짜기, 깃발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굳이 노래단체 연극단체 구분할 것 없이 같이 진행하기도 했구요. 그 당시 노동자 노래단이나 삶의 노래 예울림 등의 노래단체는 공연을 다닐 때 악기를 모두 싸들고 다녔습니다. 파업상황이고 노동조합 체계가 안정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급작스런 변화들이 많았던 시기라 엠프까지도 직접 들고다니곤 했습니다. 주로 스네어 드럼과 심벌 한 장, 드럼과 심벌 스텐드, 그리고 베이스 기타와 씬디사이저, 기타, 게다가 50W 정도의 엠프까지 가지고 전철타고, 버스타고, 걸어서 파업현장에 연대공연을 가곤 했습니다. 신입단원이 들어오면 일단 가장 무거운 50W엠프를 들게 하고, 6개월이 지나면 씬디사이저를 들고다니게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떤 이는 직접 공연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늘 자신은 건반주자(건반을 들고 다니는 사람)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고, 어떤 단체는 가장 무거운 엠프를 들고다니는 사람이 대표를 하는 거라고도 했답니다.
가슴으로 기억하는 처절한 외침 노동자들도 그 동안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몸으로, 입으로 배우고 표현하면서 다가올 새날에 대한 희망을 키워갔을 겁니다. 우리들의 조직, 우리들의 희망, 민주노조에 대한 꿈, 그리고 노동해방에 대한 꿈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 시대를 열었던 쟁쟁한 투쟁가들을 엮은 <투쟁가메들리>를 같이 듣겠습니다. 노동운동을 했던 한 선배는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종종 투쟁가 메들리를 틀어놓고 따라부르며 청소를 한다는데, 매번 펑펑 울고 만다는 군요. 저 역시 어떤 서정적인 노래보다도 투쟁가들이 그 시절의 제 삶과 사람들에 대한 벅찬 감정을 떠올리게 하곤합니다. 그러니 노래에 대한 기억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노래를 목놓아 불렀던 이들에게는 그 때의 정서와 몸상태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처절하게 외쳤던 ‘인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꼭 여러분의 가슴과 몸이 기억해 내길 바랍니다.
<투쟁가 메들리> -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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