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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노래와 문화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6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11/28
    일본땅에 울리는 노동가요~(5)
    찌니
  2. 2011/02/05
    레디앙 연재 24 -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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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1/01/28
    레디앙 연재 23 -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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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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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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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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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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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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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1/01/01
    레디앙 연재 17 - 청계천 8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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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12/29
    레디앙연재 16 - 민들레처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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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땅에 울리는 노동가요~

일본의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노카이] 음반발매를 축하하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달여쯤 전 사무실 책상위에 우편물이 한 놓여있었다. 딱 봐도 일본에서 온 음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작년부터 계속 준비해서 편곡하고, 연습하고, 녹음한 결실이었다. 여러모로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음반을 받은 나 역시도 너무 가슴이 벅찼다.

 

처음 이들과 인연이 된건 96년 5월이었다. (나는 그 때 가진 못했지만) 꽃다지가 히비야 메이데이 행사에 초청되고, 일본에서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5.1 합창단이 꾸려졌단다.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꽃다지의 대표곡인 투쟁가를 한국발음으로 연습해서 함께 불렀다고 한다. 그 후로 이들은 종종 모여 연습도 하고, 또 일본의 노동자 집회에서도 가끔 노래를 부르고 꽃다지 음반을 보급하기도 했다. 꽃다지 일본 공연 때 이들은 <가자, 노동해방>을 동선까지 완벽하게 구사해 놀라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다가 멤버들도 줄어들고, 모임도 잘 되지 않으면서, 꽃다지 노래를 한국말로만 부르는 것의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일까? 정식으로 노래소모임을 구성하고 일본어로 번역해서도 부르기를 시도했다. 꽃다지 가수들을 초청해 틈틈이 강습도 받았다. 꽃다지 노래강사 출신인 박미영도 일본에서 몇 개월 동안 노래모임을 지도했다. 일본에는 노동자 노래패나 전문단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정말 열심히 활동을 했다.

 

2009년 가을 동경에 갔을 때 이들은 음반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노래모임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작업이기도 했고, 또 일본의 현실에서 공연만으로는 어렵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꽃다지 음반도 많이 보급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일본어로 노래의 의미와 정서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전문노래집단도 아니고 노동자와 활동가들로 구성된 노래모임이 음반을 낸다는 건 넘어야 할 산이 무척 많은 작업이고, 또 한국의 노동가요를 일본의 정서로 언어를 바꿔 그 맛을 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들은 해냈다. 해내고야 말았다. 대단한 의지와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또 마침 꽃다지 기타주자 출신으로 올 초까지 일본에서 음악을 하던 이승완(찬욱이라 불려지는)이 편곡과 녹음을 맡아주어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음반을 들으며 먼저 놀라운 건 노래실력이었다. 물론 개개인들은 다 노래를 잘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예상 이상으로 호흡도 잘맞고 화음도 잘 어우러졌다. 그 바쁜 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연습과, 또 서로의 소리에 대한 배려를 했는지 듣다보면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모르게 눈물이 난다. 번역된 노래들은 일본어 가사로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들릴 만큼 참으로 매끄럽다. (물론 일본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표현은 잘 모르지만, 틀림없이 느낌이 잘 옮겨졌을 것이라 는 확신이 든다)

장중한 피아노 반주로 느리고 유장하게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시, 김종률 곡), 그리고 경쾌하게 울리는 <바위처럼>(유인혁 글,곡), 최근 미군기지 반대투쟁 현장에서 많이 불리는 <평화가 무엇이냐>(문정현 글, 조약골 곡), 멋진 남성의 목소리로 부르는 <비수>(지민주 글,곡), 다시금 신나고 경쾌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최창현 곡)과 너무나 익숙하고 힘찬 <철의 노동자>(안치환 글,곡).

그리고 89년 수미다 일본 원정투쟁 때 일본 노동자들이 연대하며 함께 투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래 <海を越えて>(우미오 코에떼-바다를 넘어서), 꽃다지의 <반격>과 <노래의 꿈>(정윤경 글,곡), 김명준의 다큐멘터리 삽입곡이었던 <하나>(One)(윤영란 곡) ,마지막으로 노래노카이 멤버들이 함께 만든 창작곡 <うたOh! (노래여!)까지. 노래하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지나가고, 또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흘러간다.

다 듣고 나니 90년대 중후반쯤에 만들어진 공연 한 편을 본 것 같다. 90년대 중반이라고 해서 구시대적이라던가 투쟁일변도라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그 당시엔 공연들이 다양한 현장의 투쟁을 담아내고, 또 자기를 반추하게 하는 내용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들썩거리게 하는 신명과 감동이 있었는데, 바로 그 부분에서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90년대나 지금이나 노동자, 민중들의 삶에 뭐 달라진 것이 있을까? 또 그 때만 해도 함께 만들어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시금 우리들의 지금 이 시점을 돌아보고, 또 같이 만들어갈 시간들을 상상하는 즐겁고 가슴 벅찬 시간을 갖게 해준 것에 감사한다. 또 어려운 상황에서도 너무나 정성스럽게 잘 만든 음반이 세상에 나오게 된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모두들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지나온 16년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더 끈끈한 사랑과 연대로 함께 할 것을 새겨봅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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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4 -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민중가요의 캐럴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노래이야기 24] 연말의 감성 채워줘…"새로운 시작 앞두고 따스한 겨울"
 
 
 

매우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이제 2010년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네요. 날짜 생각하지 않고 달려오다가도 꼭 이렇게 며칠 남겨 두지 않고,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건 참 어쩔 수 없나봅니다. 이 코너에서 5.18을 제외하고는 굳이 계절이나 시기를 따지지 않고 '노래 이야기'를 써왔는데, 그래도 연말이라는 이 분위기는 마음을 싱숭생숭하게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과 사람들도 떠오르고, 아쉬움도 많고 그러네요.

 

음악의 힘과 위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설렘도 있는 때죠. 연말이 되면 많은 평가와 반성을 하게 되는데,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우리들이 잘한 성과를 칭찬해 주는 겁니다. 매순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잘한 부분들을 찾아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는 거지요. 여전히 변치 않고 지켜가는 신념을, 사람에 대한 사랑을, 조금은 치열한 나의 실천 노력에 대해 말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입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연말 분위기를 흠뻑 느끼게 하는 환경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와 캐럴인데요, 아무리 시국이 어지럽고 마음이 무겁더라도 좋은 음악이 우리에겐 위로도 주고 힘도 주고, 또 감성적으로 이어주기도 하지요.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는 민중가요 캐럴 같은 노래입니다. 제목과 가사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겨울에만 불리는 노래이지요. 힘이 들 때일수록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따뜻한 인사 나누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해의 마지막 곡으로 선곡해 보았습니다.

 

   
  ▲꽃다지 싱글 음반. 

이 곡은 노동극을 주로 창작, 공연하던 극단 현장의 16회 정기공연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를 위해 93년에 조민하가 창작한 노래입니다.

그 후 95년 겨울 ‘꽃다지’ 콘서트에서 다시 편곡되어 불렸고, 또 97년 겨울, ‘꽃다지’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에 실리면서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노래는 민중가요로 탄생하여 노동극이나 연극에 삽입된 곡도 있지만, 노동극이나 마당극 속에서 탄생하여 독자적인 민중가요로 대중성을 획득한 노래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노래의 인생유전

<임을 위한 행진곡>, <그날이 오면>, <잘가오 그대> 등등 80년대 민중가요는 그런 노래가 많지요. 이 노래 말고도 극단 현장 공연을 위해 창작되어 ‘꽃다지’에서 계속 불리며 사랑을 받은 노래로는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91년 병원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지금 수술중]이라는 정기공연에 삽입되었던 곡인데 후에 꽃다지 음반에 실리면서 아주 큰 인기를 얻은 곡이지요.

그러고 보면 극단 현장과의 인연은 꽤 깊었던 것 같습니다. ‘예울림’ 시절에는 극단 현장의 창작극인 [멋있는 동지]를 노래극으로 각색해서 90년에 합동공연을 한 바 있고요. 거기서 저는 아주 재수 없는 사무직 여성 역을 맡아 곤혹을 치렀드랬습니다. 보기엔 차고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라 딱 어울린다고 연출자가 배역을 주었는데, 웃기만 하면 바보 같아진다고 웃지 말라고 해서 계속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연극을 처음해보는 ‘예울림’ 가수들의 엉성한 폼과 연기를 고쳐주느라 현장 선배들은 고생을 했고, 또 우리는 선천적 음치가 틀림없다고 사료되는 몇몇 배우들을 붙잡고 어떻게 소리라도 내게 하느라 안간힘을 썼답니다. 그리고 94년 초에는 100회 이상의 순회공연 기록을 세운 노동극 [노동의 새벽]을 노래극으로 재구성하여 문예회관 대극장에 올렸는데, 역시 이때도 같이 했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그 즈음에 결혼식을 하느라 공연을 보지도 못했고,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꽃다지 연주자 모두와 조민하 선배, 그리고 몇몇 가수들이 출연을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89년 겨울부터 몇 해간 노래판굿 꽃다지도 함께 만들고, 전국 순회도 하고 했습니다. 참 오랜 기간 많은 활동을 같이 하며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만들었지요. 하긴, 그렇게 따지면 민요연구회도 그랬고, 놀이패 ‘한두레’도 그랬고, ‘노동미술위원회’도 그랬고, ‘터울림’도 그랬던 시절이었네요.

매일 거리에서, 파업장에서, 노동자 집회에서 함께 해오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작품도 같이하고, 연대도 해왔으니까요. 그 때 함께 했던 배우들 중에는 지금 꽤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어 있는 사람도 많아 간혹 TV나 드라마를 보면서 옛 생각에 젖곤 한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해를 돌아보며 부르게 되는 이 노래는 괴롭고 힘들 때는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서로를 다지기도 하고, 또 마음이 따뜻할 때는 참으로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노래를 들으시면서 손 내밀면 닿은 듯한 곳에서 묵묵히 나를, 우리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고요, 또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자리에서 지켜보며 힘이 되어 주겠다는 다짐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여러분께 보내는 송년인사인 셈인데요, 그동안 보내주신 관심에 감사드리고, 여러분도 제게는 그런 소중한 분들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조민하 글, 곡

 

빛바랜 사진 위로 흘러간 세월 그 세월 속에 변함없는 삶의 모습들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보면 어느새 웃음이 애달파
한 겨울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그렇게 우리 사랑을 키워간다면
창 밖에 떨고 있는 겨울나무도 어느새 봄날을 맞으리
벗이여 정말 오랜만에 우리 마주 잡은 두 손 가득히
이 세상 끝까지 변함없는 마음을 변함없는 우리 사랑을
아직은 멀고 먼 길이라지만 또 지금보다 결코 쉽진 않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눈앞에 두고 벗이여 이 겨울을 따스히

 

* 음원출처 : 꽃다지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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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3 - 공장

 

매일 도망치고, 매일 돌아온다, <공장>
[노래이야기 23] IMF 경제위기 시절, 예술인들 거리로 나서다
 
 
 

지난 회에 96~97총파업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때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는지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87년 투쟁이 후 10년 만에 전국적 총파업을 맞게 된 때입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전국적 총파업으로 일어섰고, 지역별, 단위 기업별로 파업을 하면서 조직적으로 결합했습니다.

 

IMF 경제위기와 노동문화단체

총파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판이 있긴 했지만, 이 총파업을 계기로 민주노총은 사회개혁세력으로, 시민사회의 중요한 조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이 총파업이 끝난 후 97년 봄부터 여름까지 노동문화단체 대표자회의를 중심으로 전국을 돌며 총파업 과정에서 드러난 문예성과를 모아내는 작업도 이루어졌지요. 저도 광주와 전주 등 지역을 순회하며 당시 제작된 선전물과 사진, 다양한 프로그램 자료 등 노동자들의 문예적 성과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97년 대통령 선거 때 노동자 후보로 국민승리 21의 권영길 대표가 출마를 했었고, 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국사회는 엄청난 경제 위기를 맞이합니다. 건설사들이 넘어가고, 자동차 공장도 경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자본의 중복-과잉투자, 부실경영이 빚어낸 엄청난 경제 위기는 IMF 구제금융을 불러왔고, 이 모든 짐은 노동자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습니다.

은행권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줄줄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의 칼날을 맞고 직장을 잃은 채 거리로 내쫒깁니다. 언론에서는 연일 ‘깨져버린 행복, 집나온 가장, 비관자살’ 등등의 파괴된 삶을 보도했습니다. 국가차원의 대책위가 꾸려지고 국민들은 너도나도 앞 다투어 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공공근로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를 구제하겠다고 했지만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답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꽃다지>는 그 해 3월부터 거리에 나가 공연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예술은 위기를 남들보다 먼저 감지해 이를 공감하게 하고, 또 반보 앞서 나가 삶의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로에서, 서울역에서 희망을 잃은 이들을 위로하며, 같이 힘을 내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노동문화단체를 비롯한 예술인들도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작품들이 발표되었고, 노래도 많이 창작되었습니다. 노동자문화는 늘 위기의 시대,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창작물이 나오고 또 대중성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거리공연들이 지속되며 성과들이 쌓이자, 99년에는 몇 년 만에 '노래판굿 꽃다지'가 제작되어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연영석 공연 모습. 

 

늦깎이 신인가수 연영석

이런 활동 중 돋보인 사람이 바로 민중가요계의 늦깎이 신인가수 연영석이었습니다. 연영석은 98년 6월에 1집 테이프 '돼지다이어트'를 발매하여 많은 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요.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것을 어색해하고, 어눌한 말투와 무대 매너가 그를 매력적이고 진솔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활동 초반, 어디 가서 공연비라도 받으면 미안해하며 음반을 잔뜩 기증하고 오기도 해 사람들에게 걱정 어린 소리를 듣기로 했던 그였습니다.

연영석의 노래는 곡은 물론이지만 가사도 탁월했습니다. 시대 정서를 잘 표현하면서도 본질적인 부분을 직설적으로, 때론 비유적으로 기가 막히게 잘 표현했습니다. <돼지 다이어트>, <칼국수와 바카스>, <나는 부품>은 그야말로 98년 IMF 구제금융 상황을 너무나 잘 표현한 곡들입니다.

하지만 연영석의 노래는 그 시절 노동자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습니다. 기존의 노동가요들과 비교해 조금은 낯선 질감이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활동가들에게 인기를 먼저 얻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노동가요를 창작하고 보급하던 전문 집단에게는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고, 또 즐겨 불린 노래였습니다. 특히 <엄마 미안해>는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연영석은 다양한 투쟁 현장과 결합하고, 또 스스로를 문화노동자로 소개하며 기존의 단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며 활동을 펼쳤습니다.

창작 작업도 꾸준히 진행, 2001년 <간절히>, <공장>, <노란선 넘어 세상> 등이 수록된 2집 [공장]을 발매하고, 2005년에는 3집 [숨]을 발매합니다. <코리안드림>, <꼭두각시>, <나약해>, <숨> 등이 수록된 3집 음반은 제 3회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고, 심사위원의 전원일치로 특별상을 받았답니다. 그럼 이번 시간에는 연영석의 노래 중에서 2집 타이틀 곡인 <공장>을 함께 들어볼까요?

 

 

공장
                                                 연영석 글, 곡

 

너도 몰래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은 익숙하다.
반복 속에 반복된다. 시간 속에 반복된다.
까도 까도 똑같은 나 까도 까도 똑같은 내가
자꾸 자꾸 생겨난다. 자꾸 내게로 다가온다.
빠르게 낯설게 때론 너무도 당연하게
자꾸 자꾸 밀려온다. 자꾸 자꾸 넘쳐난다.
능숙한가. 신속한가. 필요한 만큼 유연한가.
시간 속에 맞춰가도 나는 네게서 밀려난다.

넘쳐도 점점 줄어간다. 넘쳐도 점점 죽어간다.
넘쳐도 점점 줄어간다. 넘쳐도 점점 죽어간다.

나는 매일 도망친다. 나는 매일 돌아온다.
죽고 싶다가 살고 싶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돌아보면 돌아갈 만하다. 살아보면 살아갈만하다.
반복 속에 내가 있고 그런대로 돌아 갈만하다.
빠르게 낯설게 때론 너무도 친숙하게
시간 속에 반복 속에 모든 것은 당연하다.
답답한가. 궁금한가. 살아가기에 막막한가.
시간 속에 반복 속에 살아보면 살아갈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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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2 - 강

 

서태지 노래도 민중가요라고?
[노래이야기 22] 90년대 논쟁과 노동자 율동단 등장 & <강>
 
 
 

90년대 중반 민중가요에 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95년 초, 나우누리 민중가요 동호회에서 누군가의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민중가요일 수도 있다’는 글에 공방이 벌어지다가 결국 ‘민중가요가 무엇이냐’는 문제로 넘어간 적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름 그 시절 활동을 하던 유명 평론가와 창작자들이 가세를 하면서 확산되었습니다.

 

서태지 노래도 민중가요?

온라인 상의 논란이 그렇듯 딱히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그 즈음 민중가요, 노동가요가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논쟁은 민중가요의 개념과 범주, 정체성과 방향까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민중가요가 어떻게 가야할지 관심은 지대했지만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대중들에게 검증되는 새로운 민중가요가 활발하게 창작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96년에는 홍대 앞 인디 밴드들과 민중가요 진영의 록밴드들이 만나 독자적인 유통망을 만들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조금은 낯설고 선정적인 멘트들이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96년 국회에서 노동법,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노동조합은 총파업에 돌입합니다. 96~97 총파업을 거치며 ‘언제 그런 논쟁이 있었냐’는 듯이 노동문화는 다양한 양상으로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역시 노동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투쟁시기인 것 같습니다.

 

   
  ▲노동자 율동패 공연 모습. 

이 시기의 특징을 꼽으라면 화려하고 웅장한 노래들과 흥겨운 노래들이 인기를 끌면서 율동문선대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불나비>, <바위처럼> 등의 흥겨운 노래에 율동을 붙여 같이 부르면서 노래도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고, 또한 총파업 투쟁도 힘을 얻게 됩니다. 각 매체마다 특성이 있고, 시기에 따라, 노동자 대중들의 정서에 따라, 매체별로 뜨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하는데 이때부터 가장 인기 있고 선동적인 매체로 율동이 부각됩니다.

과거에도 율동 문선대가 있었지만 그 당시는 대부분 선동을 위해 임시로 문선대를 꾸려 임단투 때나 파업시기에 활동을 하였고, 구성원도 노래패나 풍물패 중에 선별해서 율동을 배워 일시적으로 활동을 했더랬습니다. 전문패들 역시 노래공연을 하더라도 임단투 시기에는 임투문화학교, 문선대 학교에서 율동을 같이 만들거나 가르치기도 했고요.

 

노동자 율동단

그러니 전문패 중에 율동패라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춤패, 탈패 등이 있었고, 연극집단에서도 필요에 따라 춤을 배우기도 했었지만 문선율동을 전문적으로 창작하고 보급하는 단체는 없었던 겁니다. 주로 단위사업장의 노동자 율동패가 있었는데 지하철 율동패 ‘두더지’가 아주 힘찬 선동율동으로 대표적이었습니다.

<다시 노동자로 태어나>, <선포> 등 노문창 노래에 맞춘 율동들로 대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렇게 파업이나 투쟁시기에 문선과 놀이로서 활용이 되던 율동이 96~97 총파업 이후 본격적으로 노동자율동단을 결성하여 문선 율동을 창작하고 지도하고 보급하기 시작했지요.

노동자 율동단은 전문단체는 아니었지만 한 단사의 조직도 아니었고 율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노동문화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집단으로, 창작 율동을 발표하여 보급하고, 지도하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98년 겨울 창작율동을 모아서 자체 공연도 했고,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는 전국의 율동패들을 모아 율동 집체공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매 시기 대중적 인기를 얻은 노래들에 율동을 창작해서 보급하였고, 단지 선동 율동 뿐 아니라 경쾌한 노래에 맞춰 흥겹게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창작해 보급하였습니다.

선동적인 율동으로는 <동지>, <세상을 바꾸자>, <강> 등이 대표적이고, 흥겨운 율동으로는 <불나비>, <내일의 노래>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동은 이미 인기를 얻은 노래를 선곡해서 음반을 틀어놓고 공연을 할 수밖에 없고, 음악을 창작하여 몸짓, 춤으로 연결해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몸짓들

또 기존의 노래라 할지라도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게 되면 백댄서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딜레마도 있었지요. 노동자율동단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주제를 정해 율동을 창작하며 음악을 새로 만드는 시도를 하거나, 가수가 무선마이크를 달고 율동패와 섞여 공연하는 시도도 했었지만 그 성과가 지속되진 못했습니다.

전문 율동패가 없고, 또 가수들이 율동을 전문적으로 연습하기 어려운 현실을 더 이상 극복해 내기는 힘들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가장 선동적이기도 하고, 가장 흥겹게 함께 할 수 있는 율동문선이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여전히 그런 요구들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번 시간에는 율동패들의 많은 창작 율동 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만들어지고, 보급되었던 노래, <강>을 들으실 텐데요. 율동과 함께 들을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 <강>이라는 노래에 맞춘 율동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파도 같은 힘과 출렁거림을 어렵지 않은 율동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강>은 도종환 님의 시에 윤민석이 곡을 붙여 95년 금속산업연맹에서 제작한 음반에 박은영의 목소리로 수록되면서 처음 발표되었는데, 후에 꽃다지에서 편곡해 부른 서기상의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율동을 본 적이 있는 분들은 출렁대듯 밀려오던 율동을 상상하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강>


                                                                   도종환 시, 윤민석 곡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 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음원 출처 : 서기상 1집 [세상속으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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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1 - 사람이 태어나

 

일본 할아버지 노동자에 힘을 준 노래
[노래이야기] <사람이 태어나>…60세 노동자 홋타 눈물흘리다
 
 
 

96년은 여러 가지로 일이 많았던 해입니다. 구속된 사건도 사건이지만 ‘꽃다지’가 처음으로 일본 공연을 간 해이기도 합니다. 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던 노동자대회 전야제는 연대 노천극장에서 열렸습니다. 한국의 노동자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노조 간부들이 참석을 했고, 그 때 꽃다지가 <단결투쟁가>를 대합창 편성으로 불렀지요.

 

꽃다지 일본 공연

그것을 보고 일본에서 온 전통일(젠또이쯔)노조 서기장과 상근활동가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사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힘을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 노동자투쟁의 정서와 에너지를 노래와 문화를 통해 일본 노동자들에게도 전달해주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96년 메이데이 때 꽃다지를 초청하게 됩니다. 민주노총 문화국과 협의를 해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한국의 메이데이 집회에서 빠지고, 일본 전노협의 메이데이 집회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답니다. 물론 집회 말고 콘서트도 있었지요.

 

   
  ▲히비야 공원 공연 모습.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메이데이 집회에 꽃다지가 공연하던 순간에 물론 저는 없었습니다. 재판 중이라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구청에 전화해 항의도 해보고, 아는 빽(?)도 써보고 했지만, 결국 출발 당일까지 여권이 나오지 않아 혼자 남았지요.

그 후 다시 가을에 일본 공연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전 준비를 할 때 일본에서 협의를 하러 오신 활동가, 오자와구니꼬씨가 우리에게 "일본에서 어떤 곳에 가고 싶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기업 단위 사업장에 찾아가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약 10여 차례의 노조 순회공연을 잡게 되었고 콘서트도 2개 도시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이 중 인상적인 몇 개의 투쟁과 사업장들이 있었습니다. 국철 해고 투쟁은 많이들 알고 계신 것처럼 1987년 1,047명이 해고되어 복직 투쟁을 20여 년간 계속 해오고 있지요.

 

현장 노동자들 앞에서 공연하다

그분들을 만나 그 긴 세월의 이야기를 들으며 민영화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다니구찌라는 작은 공장이었는데, 여기는 기업이 부도나서 은행에 넘어가고, 공장 문을 닫게 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조합에서 못 받은 임금을 대신해 은행보다 우선권을 주장하며 싸워서 회사를 인수 받아 노조가 관리하는 자주관리기업입니다. 전체 노동자 수가 9명이었고, 그들의 가족까지 모여 공장 앞마당에서 파티를 열며 의자 뺏기 놀이, 바위처럼 율동과 해방춤을 추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치 8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한군데 기억에 남는 곳은 고구레 보탄이라는 단추공장인데, 재래적인 수공업 방식으로 교복단추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이곳은 노동자가 4명이고, 수동으로 단추를 만드는 공정을 4명이 돌아가며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홋타라는 할아버지가 60세 즈음에 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추는 규정을 졸속으로 만들고 홋타 할아버지를 강제 퇴직시켰습니다.

홋타 할아버지는 이에 맞서 싸웠고, 이 투쟁을 전통일 노조가 지원을 했습니다. 우리가 방문할 당시 회사 정문에는 ‘부당해고니 복직시키고,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 공고문이 붙어있지만, 회사는 전혀 미동도 안하는 상태였습니다.

 

   
  ▲두번째 공연. 국철 해고자 단결대회 공연 모습. 

 

홋타 할아버지

이렇게 일주일간 10여 군데의 사업장을 돌고,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가운데 느낀 점들을 콘서트 때 담았습니다. 그 당시 연출을 맡았던 조민하 선배의 순발력과 대중감이었지요.

그 공연 중에 한 부분에서 홋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60세가 넘었는데도 노동조합을 스스로 결성하고 부당해고에 맞서 4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 투쟁을 하신 그 열정과 근성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담아 꽃다지 가수 김용진이 부른 노래가 <사람이 태어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연이 끝나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부끄러웠지요.

98년 홋타 할아버지는 끈질긴 투쟁 끝에 승리했고, 보상도 받았다고 합니다. 투쟁 승리 보고대회에 그 노래를 부른 당사자인 가수 김용진이 초청을 받아 참석을 하여 축하 공연을 했고요. 그리고 10년이 훌쩍 지나 2009년 동경 공연에서 70세를 훌쩍 넘기셨지만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계신 홋따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본어에 서툰 저에게 할아버지는 꼭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그 당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시절은 아주 힘들었다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전통일 노조가 지원해 주긴 했지만 일반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투쟁하면서 지쳐있었다고요. 그런데 그 때 ‘꽃다지’가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때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고, 일본인들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지지와 용기를 받았다고요. 그래서 그 뒤에도 더 열심히 힘내서 버틸 수 있었고 자신의 투쟁은 승리할 수 있었다고요. 그건 다 그 때 꽃다지의 덕분이라고, 꽃다지가 그 때 그런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길 수 없었을 거라 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라 하시며 제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자

한국에서도 많은 노동자가 더 처절한 투쟁을 끈질기게 하고 있고, 그리고 승리하기도 하고, 또 패배하기도 합니다만, 이미 노동운동이 침체되었다고 하는 일본에서 어쩌면 더 어려운 투쟁을 하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바위처럼>으로 잘 알려진 유인혁의 곡입니다. 91년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정서에 맞게 창작되어 집회나 투쟁현장에서 뿐 아니라 일상 시기에도 많이 불린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일본의 한 노동자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는 건, 바로 노동자의 정서를 잘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노래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더라도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노동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시키는가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갈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고요. 늘 강조하지만 여러분도 각자 자신의 노래를 꼭 만드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태어나>

                                                                                   유인혁 글, 곡

1. 사람이 태어나서 세 번을 운다지만 노동자는 오직 한번 동지를 위해 운다.
끝없는 노동 속에 우리 젊음 흘러가도 머리띠를 묶으면 다시 또 청춘이다.
노동자 가는 길에 후회일랑 없구나 오늘은 투쟁이다. 내일은 해방
2. 사람이 태어나서 육십을 산다지만 노동자는 오직 하루 해방의 그날위해
자본가 너희 놈들 아무리 빼앗아도 가져갈 수 없는 건 동지의 굳은 사랑
노동자 가는 길에 후회일랑 없구나 오늘은 투쟁이다 내일은 해방

 

*음원출처 : 노동가요 공식음반 중에서 김태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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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0 - 동지

 

15년 전, 엄혹한 세월 함께 한 '동지'
[노래이야기⑳]아내의 연행 후 의식화 당한 남편…눈물로 하나돼
 
 
 

지난 회에 이어서 96년 이야기를 좀 더 하려 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우스운 에피소드가 몇 개 있었습니다. 연행이 되면서 경찰들은 출판사 ‘민맥’ 사무실과 ‘꽃다지’ 사무실을 압수수색 했습니다. 지금은 명확하게 저에 해당하는 물건들만 압수수색을 하라고 버티고 싸울 수 있지만, 처음 당하는 일이다 보니 그냥 넋 놓고 이것저것 가져가는 것을 지켜만 봤겠지요.

책상 서랍과 책꽂이를 뒤져 이것저것 챙기더니 급기야 컴퓨터 본체와 자판, 모니터, 프린터까지 가지고 갔다는 겁니다. 지켜보던 사람들 눈에도 그것들을 왜 가져가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내용을 보여준 모니터와 프린터, 그리고 뭔가를 입력해 준 자판들이 무엇을 입출력하고 보여줬는지 취조하려는 모양이었겠지만,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정작 본체는 연결도 하지 않고 플로피 디스켓에 있는 내용들만 잔뜩 출력을 해왔더군요.

근데 플로피 디스켓이라는 게 이사람 저사람이 들고 다니다가 돌고 도는 물건이던 때라 저도 알 수 없는 다른 단체들 자료나 개인들의 자료까지 잔뜩 있어서 참으로 난감했더랬습니다. 그 시절 모 통신사의 한총련 CUG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듣고 경찰들이 그 회사를 찾아가 어느 방이 한총련 방이냐고 했다는 기사를 시사월간지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그저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한총련 방은 어디?

또 하나 어이없었던 일은 검찰 조사 내용 중에 ‘민맥’에서 출판된 서적들에 대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난 그 책들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남편에게 의식화 당했을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제가 지난 회 때 이야기한 것처럼 남편은 사실 전혀 운동의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처음 93년 범민족대회 무대 미술을 도와줄 때도 총 기획자한테 한참 설명을 듣고 난 후 제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범대회가 무슨 대회야? 남한 호랑이랑 북한 호랑이 데려다 싸움시키는 건가?”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툭하면 물었습니다. “민가협은 무슨 뜻이냐”고, “사람이름이냐”고, “가노방(가자 노동해방의 줄임말)은 무슨 가게 이름이냐, 열사는 무슨 뜻이냐” 등등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 제가 남편에게 의식화 당했다 하니 기가 막혀 정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남편이 제가 구속이 되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한겨레신문 기자와 민가협에 연락을 했답니다. 그러자 민가협 상근자들과 몇몇 사람들이 모두 장안동 대공분실 앞으로 바로 모였답니다. 장안동 대공분실 철문 앞에서 임신 8개월인 한 여성이 깡통을 들고와 문을 마구 두들기고 발로 걷어차며 당장 석방하라고 외치더랍니다.

그 여성간사는 남편의 절친한 친구의 부인이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까 하는 생각에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 존경스럽기도 했답니다. 정작 자신은 소리도 나오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런 후에 같이 노래를 부르고 해산을 했는데, 그 노래가 <동지>였습니다.

 

가슴에 와닿은 노래, '동지'

남편은 <동지>라는 노래가 그렇게 아름답고 가슴에 와 닿는 노래인 걸 처음 느꼈다지요. 결혼 전부터 꽃다지 공연이나 집회에서 그 노래를 많이 들었지만, 그 노래의 가사가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로 들리면서 우리들의 노래가 얼마나 절절하고, 각 상황마다의 아픔이나 동지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는지를 그때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매일매일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꽃다지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탑골에 가고, 또 면회를 오고, 민가협 집회에 가고, 꽃다지 공연을 같이 다녔습니다. 면회를 와서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과 변호사(아, 그 때 제 변호를 맡아주셨던 백승헌 변호사님께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에게 들은 사건의 진척상황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50일 만에 보석으로 나왔는데, 그날은 같이 구속이 된 원용호 대표의 결혼 10여 년 만에 얻은 첫아이 100일이었고, 또 석방된 이틀 뒤엔 친정어머니의 회갑이 있었지요. 석방되기 전날 남편이 면회를 와서 우울한 표정으로 내일은 면회를 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매일 와준 것도 고마운데, 괜찮다고 했더니 금새 장난스런 웃음을 지면서 내일 석방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고생도 고생이지만 밖에서 저보다 더 힘겨운 투쟁을 했을 모든 이들에게 감사했고, 또 안도했지요. 석방이 되던 날 서울구치소 앞에는 꽃다지 식구들과 많은 지인들이 모여 저와 원용호 대표를 맞아주었고, 다음날 탑골공원에서는 석방 환영식과 그간 지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지막 거리공연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꽃다지 거리공연에 큰 도움을 주셨던 탑골 공원 어르신들께도 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재판이 계속되던 4월에 꽃다지 봄 정기 콘서트가 시청 앞 세실극장에서 열렸고 공연 중 한 부분에 제가 무대에 출연해서 많은 이들에게 감사를 드릴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시부모님들도 공연에 오셨고, 연일 공연장은 꽃다지를 아껴주시는 많은 분들이 빼곡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약 1주일간의 콘서트라 매회 무대에 올라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자리였지만, 매번 다른 분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새로운 느낌이었고, 그 때마다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거르지 않는 결혼기념일 여행

남편은 아직도 결혼기념일에 여행을 가지 않으면 잡혀갈지도 모른다며 꼭 여행을 가자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또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결혼기념일 여행을 가지요. 또 그 당시 제가 뜨개질로 시아버님 덧신을 짜고 있었는데, 제가 다시 뜨개질을 하려 하면 불길하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일조차도 다 그런 사건으로 연결이 되게끔 남편의 몸과 머리에 각인이 된 것이겠지요.

15년가량이 지났지만 아직도 몇몇 노래를 들으면 그 때 생각이 납니다. 어떤 상황에 접했을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고, 또 어떤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사람, 기억, 느낌이 있지요. 여러분 모두에게도 그런 노래들이 많길 바랍니다. 남편에게 노래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준 <동지>를 같이 들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부르는 노래도 좋지만 좀 아쉬운 감이 있으니 꽃다지 대합창 편성으로 듣겠습니다.

 

   
  

 

<동지>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보았다
살을 에는 밤, 고통 받는 밤,
차디찬 새벽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사랑 영원한 사랑 변치 않을 동지여
사랑 영원한 사랑 너는 나의 동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먼저 죽는다 해도
그 뜻은 반드시 이루리라 승리하리라
통일되는 날 해방되는 날
희망찬 내일위해 싸우며 우린 맞섰다
투쟁 영원한 투쟁 변치 않을 동지여
투쟁 영원한 투쟁 너는 나의 동지

 

*음원출처 : 노동가요 공식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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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9 - 행복한 인생

 

감옥에서 수백번 부른 '행복한 인생'
[노래이야기⑲] 노래책 만들고 갇혀…“구속이 내게 남겨준 큰 선물들"
 
 
 

이번에는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96년 2월, 당시 희망의 노래 꽃다지 대표였던 저와 민맥출판사 대표는 『희망의 노래1, 2, 3, 4』(1992~1995 도서출판 민맥)라는 제목의 노래책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이 됐습니다. 노래책에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실어 배포했다는 이유였지요.

 

노래책 내고 구속되다

   
  ▲노래책 <희망의 노래>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나 자주, 민주, 통일, 투쟁, 해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노래에 밑줄을 그어 조각조각 짜깁기하더니 그게 북한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겁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이고, 꽃다지가 ‘열린 음악회’나 ‘샘이 깊은 물’ 같은 방송 출연도 몇 번 했던 터라 다들 어이없어했지만, 그 당시에도 몇 건의 국가보안법 사건이 계속 만들어지곤 했던 때였습니다.

연행되던 2월 3일은 토요일이었고, 그날은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꽃다지 공연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장애인 노점상이셨던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외치는 집회였던 듯합니다.

그날 결혼 2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남편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가 우리 공연 담당자의 급한 집안 사정으로 제가 대신 공연을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여행 출발을 저녁으로 미루고 공연을 같이 갔더랬지요.

그 당시에는 핸드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때고, 삐삐를 통해 급한 연락을 하곤 했던 시절입니다. 공연을 하는 중에 계속 삐삐가 울렸고, 전화번호 끝에 8282라는 숫자가 붙어 뭔가 급한 연락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연 중이었고, 제가 반주 CD를 조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근처 공중전화에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민맥출판사 대표가 오늘 아침 출근길에 집 앞에서 연행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민맥출판사는 서울매체라는 민중가요 음반 유통의 총판을 담당하고 있었고, 사회과학 도서와 음반의 배포를 담당하는 사람이 제 남편이었습니다.

 

"형사들이 저를 보고 반색하더군요"

바로 민맥출판사로 전화를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분명 출근을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니, 아마 출판사를 털어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직원이니까 남편도 연행이 된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왔습니다.

남편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운동권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인연이 닿아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문화운동이라든가,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꽃다지 활동이나 문화운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어떤 사전 정보나 지식도 없을 터이니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부랴부랴 뒷정리를 하고 꽃다지 식구들과 민맥출판사 사무실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어이없게도 형사들이 포진해 있었고 저를 보자마자 아주 반색을 하면서 영장을 보여주더군요. 형사들은 제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새벽에 저희 친정에서 잠복해 있다가 허탕을 쳤던 것입니다.

민맥 사무실을 수색하면서 그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고 남편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형사들이 아무 곳에도 전화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 발로 호랑이 굴에 찾아간 거지요. 저는 영장을 자세히 확인한 후 가까운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내용을 읽어주고, 담당 검사의 이름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남편에게는 ‘민가협과 <한겨레> 기자에게 연락을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저는 장안동 대공분실로 연행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어쩔 줄 모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구치소로 이송

이틀간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은 후 결혼기념일인 2월 5일 서울구치소로 이송이 되었고 검찰 조사는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연행이 되던 날부터 장안동 밖에서는 매일 민가협 상근자들과 단체 사람들이 항의집회를 열었고, 꽃다지는 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하며 매일 탑골 공원에서 ‘구속 예술인 석방을 위한 거리공연’을 열었답니다.

여러 신문에 기사화 되었고, 많은 이들이 농성장과 거리공연에 함께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매일 남편과 꽃다지 식구들이 면회를 와 상황을 전해주고, 또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구치소 안에서는 조사가 없는 날은 주로 책을 읽거나 편지를 읽고 쓰는 일이 전부였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많은 분들의 격려 편지를 받았고, 또 면회를 오지 못한 꽃사람, 꽃다지 식구들의 수많은 편지들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가장 걱정을 했던 시부모님도 제 편이 되어 힘을 주셨지요. 시어머니는 민가협 집회 단상에서 “꽃다지 가수들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청년들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들만 잘살려 하지 않고 스스로 힘든 일 마다 않으며 남들과 같이 나누려는 아주 훌륭한 사람들인데 왜 탄압을 하느냐”며, “내 착한 며느리 은진이를 당장 내놔라”하고 호통치셔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아주버님들과 시누이 식구들도 모두 번갈아가며 탑골공원에 나가 후원도 해주시고, 고생하는 꽃다지 식구들에게 밥도 사주고 하셨지요. 다만 친정어머니만큼은 그 안에 있는 저를 안쓰러워 하셔서, 다음 달에 예정된 회갑연을 취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를 이 안에 두고 내가 어떻게 그런 잔치를 하느냐"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지요. 단 한 번도 친정엄마한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걸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거리공연 당시 탑골에 계신 어르신들이 처음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셨다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다들 앰프를 날라주시고, 따뜻한 음료수를 사다주셨고, 오히려 공연을 방해하려는 외부인들을 나서서 막아주셨다더군요. 그분들은 제가 석방이 되고 나서도 종종 사무실에도 놀러 오시고, 공연도 보러 오시곤 하셨답니다.

 

구속이 준 큰 선물

꽃다지 식구들도 외롭진 않았을 겁니다. 꽃사람들과 꽃다지 팬들, 그리고 민족음악협의회 소속 가수들과 노동문화단체들, 그 외에도 대중가수들까지 참여해서 지지해 주셨지요. 그러니 매일 그 소식과 편지들을 접하면서 저는 정말 너무 벅찼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습니다. 눈보라치고 추운 겨울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농성과 거리공연을 진행해준 모든 이들에게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란 마음이었습니다.

인간이 한 평생 살면서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의 사랑을 한 번에 받았기에 이 모든 이들의 사랑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선택한 삶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그 때 이미 다 받았던 거지요. 그래서 저는 50일간 그 안에서 매일 다짐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에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 모든 사랑은 저 개인이 아니라 꽃다지와 우리들 모두에 대한 사랑이었지요. 지금도 사람들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을 때면 그 때와 그 감정을 떠올립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줬던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쉽게 실망하지 말자, 가능성을 믿고 기다리자, 좀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자, 하면서 말입니다.

어찌 보면 그 사건으로 꽃다지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알려지긴 했으니 고맙다 해야 할까요? 그리고 제가 이 길을 선택하고 살아온 걸 후회하지 않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그 안에서 매일 매일 감사하고 다짐하면서 저도 모르게 입안에서 흥얼거려지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노래의 가사를 읊조리면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정말 그 안에서 몇 백번도 넘게 되뇌던 노래 <행복한 인생>, 같이 들어보시지요.

 

 

행복한 인생

                                                           조민하 글, 곡

 

삶은 나에게도 주어지고 때론 햇살이 드리우고
때론 견디기 힘든 시련을 만나 방황도 했었지만
그런 나의 삶의 지금까지 가장 소중한 선택은
진정 사랑할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을 산다는 것
잠시 쉬어갈 순 있지만 주저앉지 말고
넘어질 수는 있다 해도 절망하지 말고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늘을 살아야지

 

* 음원출처 : 93, 희망의 노래 꽃다지 2집 테이프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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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8 - 가자, 노동해방

 

노동자 노래패 기량 뽐낸 <가자 노동해방>
[노래이야기 ⑱] 노동문화 장르발전 전망 잃어, 노동자대회 전야제 경연대회 폐기
 
 
 

노동가요의 확산과 보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은 역시 민주노조의 조합원이고, 그 장은 주로 집회와 파업현장들입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입으로 노래를 부르고 또 같이 부르면서 서로 단결하고, 결의를 다지고, 목 놓아 울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급의 선봉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노조노래패들은 노래를 정서적으로 검증하고 보급하는 창구로서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처음 노래를 만들면 노조노래패들에게 먼저 부르게 하고, 노래를 검증받은 후에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곡이 좀 어렵다거나 부르기 어색한 부분이 있다싶으면 곡을 고치기도 했었고, 창작된 노래가 노동자노래패들에게 어떤 정서를 받아들여지는가를 보면서 다시 창작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노래패들은 민주노조가 세워진 웬만한 규모의 사업장마다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되었고, 지역별 연합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노래패 뿐 아니라 연극패나 풍물패들도 모여서 노동가요를 즐겨 부르곤 했고요.

 

노래운동의 선봉, 노조노래패

이러한 지역의 노래패나 문화패들은 문선대로서, 연대의 선봉으로서, 또 노동가요를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노래는 지역 집회나 단사 파업에 전문패가 서지 않아도 노조노래패가 노래를 보급하고, 그 자리를 통해서 테이프도 엄청나게 판매되곤 했지요.
 

   
  
또 지역별로 노동자문화제들이 있었는데, 주로 가을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지역별로 문화패들의 그간의 성과를 모아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89년 즈음부터 시작해 각 지역별로 해방가요제, 가을문화제 등으로 자리를 잡았고, 단순한 노동자들의 문화축제를 넘어서 노동운동의 주요 이슈를 공유하고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습니다.

방식은 주로 경선대회 형식이었지만 굳이 기능적 우수성을 가리기 보다는 단결과 연대, 투쟁을 자기 정서에 맞게 얼마나 잘 표현했는가를 기준으로 약간의 기념품과 명예를 상으로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지역에서 선발된 문화패들이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모여 공연 형식으로 경연을 벌였습니다.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업종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올라왔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대규모화되거나 종합집체극 형식을 띠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천의 해방가요제나 노동자대회 전야제 심사위원으로 종종 결합을 했는데 전문패 공연과는 다르게 독특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연합적인 문화제 이외에도 단사 노래패나 문화패들의 독자공연도 종종 있었지요.

온전히 자신들의 이야기로 구성해서 조합원들과 주변 동지들 앞에서 공연을 하면 아주 구체적인 사안들이 담겨져 공감대를 훨씬 잘 만들어가기 때문에 함께 분노하고 결의하고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문화패 공연에서는 극중 한 노동자가 자살을 하려는 장면에서 객석의 조합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뜯어말리기도 했고, 극중에서 자본가 역할을 맡은 문화패원에게 온갖 욕설과 신발을 벗어던지는 등의 일들도 종종 벌어졌습니다.

 

문화패원들에게 왜 욕설을?

그러다가 95년 11월, 서울지역 예선에서 <가자 노동해방>을 각기 다른 업종, 연령대의 노동자 노래패 대 여섯 팀이 거의 똑같이 부르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다양한 정서의 노동자 문화를 보여주는 자리로서 의미는 축소되었다는 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자 노동해방>은 그 해 초에 발표되었는데, 노동자노래패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는 곡으로 대합창곡을 선호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96년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지역의 공연들이 대부분 풍물, 깃발춤, 노래, 극등이 결합된 집체극의 형식으로 문선공연을 짜서 올라온 것을 보면서 더 이상의 노동문화 장르발전전망을 보여주기도 어렵다고 평가되어, 이것을 마지막으로 전야제의 경연대회 방식을 폐기하게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노동자대회 전야제는 아니었지만 97년 여름, 보라매 공원에서 87년 노동자투쟁 10주년 기념문화제를 한 때가 경연대회로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네요. 물론 지역이나 단사별로는 경연대회 방식을 계속 가져가는 곳도 있지요. 또 그즈음부터 지역별 문화제들이 많이 없어지기도 했고요.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문화패들은 점점 축소되거나 해체되기 시작했고, 대규모 집회도 많이 줄어 노동문화, 노동가요를 향유하고 보급할 수 있는 장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래서 지난 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일상의 접점들을 만들어가는 노력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경연대회 방식은 노동자문화패들이 기량을 쌓고, 창작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검증받고자 하는 욕구를 작동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조건과 시대가 변화하면서 노동가요를 향유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노동문화를 계속 투쟁시기의 문화로만 국한하는 풍토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기에 일상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인식한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자문화패가 몇 군데 남지 않았고, 또 문화패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문선대적 성격이 강해 이전처럼 문예적 욕구에 기반해 자주적인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자들의 정서를 드러내고 창작과 보급의 유통체계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화패에서 문선대로, 후퇴

98년쯤인가 노동문화일꾼 수련회를 했을 때 전국에서 약 400여명의 문화패, 문화단체들이 모였었고, 그 때 일이년 후에 1000명 수련회를 성취해보자는 결의를 했었는데, 당연히 아직 1,000명 수련회는 열지 못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여전히 그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 목표가 가능하려면 산별시대에 맞게 지역별 거점을 만들고 단사의 벽을 넘어서는 지역문화활동을 통해 다시금 노동문화를 세워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90년대 중반 노래패들에게 가장 많이 불린 노래, <가자 노동해방>을 감상할 것입니다. 이 곡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고, 둘 다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 <철의 사나이(Czlowiek z Zelaza)> 포스터
폴란드 영화 ‘철의 사나이(Man of Iron)’(1981년, 안제이 바이다 감독) 삽입곡이고, 여기에 지금의 가사를 붙여 <가자 노동해방>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한 단체는 부산 [노동자문예창작단](이하 노문창)입니다.

90년대 초, 아주 선동적인 집체극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한동안 순회공연을 하며 많은 이들의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이 후 [바리케이트]라는 음반을 발매하고, 그 속에 선동멘트와 함께 수록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한 노동자 율동패에게는 특히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대합창 편성이 나온 후에도 율동패들은 주로 노문창 버전으로 공연을 하고 다니곤 했습니다.

또 하나의 버전은 꽃다지에 의해 발표된 대합창 편성인데, 95년 봄 [노동가요공식음반]에 수록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인기에 비해 현장에서 다함께 부르기 어려운 편성 탓에 대중적으로 불렸다기보다는 노래패를 중심으로 공연 때 주로 불렀습니다.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빠르기가 계속 변하는 때문에 악기를 각각 녹음할 수가 없어서, 이 노래에 완전히 매료된 당시 녹음실 엔지니어의 지휘에 맞춰 전체 악기들이 녹음실에 모두 들어가 동시에 연주하면서 한 번에 녹음을 했습니다. 이 두 개의 버전은 각각 너무 의미가 있고 인기도 있었던 터라 선택을 하기가 참 어렵군요. 그래서 오늘은 두 가지 버전을 모두 들려드리겠습니다. 

<가자! 노동해방>

 

                                          폴란드 곡, 노문창 작사

 

아흔 아홉번 패배할지라도 단 한번 승리 단 한번 승리
바리케이트 넘어 저 너머 마침내 노동해방
멈출 수 없는 우리의 투쟁 아무도 우릴 막을 수 없어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
위대한 노동 그 억센 주먹 기계를 멈춰 열어라 역사를
피 묻은 깃발 노동자 군대 가자 노동해방

 

*음원출처 1 : [노동가요공식음반 2] 중에서 꽃다지 합창
*음원출처 2 : 부산 노동자문예창작단 [바리케이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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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7 - 청계천 8가

 

문제곡에서 인기곡으로 <청계천 8가>
[노래이야기⑰] 공안정국 사전심의…가사 곳곳에 빨간 줄
 
 
 

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각 조직들은 내부 상처를 추스르면서 변화된 시대에 맞춰 새로운 방향 모색을 시작합니다. 문화예술운동의 전국조직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여 제도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외연을 넓히고 기존 문화운동의 바람막이 역할을 자처하였고, 노동자문화운동을 주도해 오던 연합조직들은 93년~94년 사이 각기 다른 내부 논의를 통해 해산을 합니다.

노래단체들도 제각기 자기 대중 기반을 만들어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며 지역 대중들과 만나고, 또 노조를 통해 각기 다른 정서의 조합원 대중들을 만나게 됩니다.

 

천지인과 희망새

90년대 초부터 상대적으로 노조운동이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전노협에 대기업 노조와 사무전문직 노조들이 속속 결합하면서 대공장 남성 노동자 중심의 투쟁하는 노동자에서 보건의료, 사무전문직 등의 다양한 노동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전처럼 하나의 정서, 하나의 이슈로 노동자 대중들이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됩니다.

 

   
  

이전처럼 전국을 휩쓰는 노래는 잘 창작되지도 않았고, 노래가 창작되어도 제각기 다른 정서와 연령대, 다양한 노동자들 모두를 공감시키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노래는 더 다양해지지만 그 이전과 같은 대중세를 갖지는 못합니다.

그 즈음의 다양하게 분화되어가던 활동 중에 두드러진 건 ‘천지인’과 ‘희망새’의 등장입니다. 민중록그룹을 표방하며 천지인이 결성되었고, 통일운동의 자기 정치색을 드러낸 희망새가 결성이 되어 음반을 발매하면서 각기 다른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지요.

희망새는 정치적인 색채와 발성으로 논란이 되긴 했으나 애초부터 지향을 명확히한 출발이라 일정한 집단에서 수용되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천지인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민중가요, 노동가요의 형식에 대한 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노동자노래단을 거쳐 꽃다지에서 활동을 하던 <누가 나에게…>, <열사가 전사에게>의 작곡자인 김성민이 꽃다지를 그만두고 나가 결성을 한 것도 그랬고, 또 록이라는 형식에 대한 선진적인 노동자대중들의 반발과 비판은 엄청 완강했습니다.

특히 <열사가 전사에게>의 천지인 버전은 열사의 정신을 왜곡했느니, 노래를 망쳐놨다느니 하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나 이 후의 논쟁처럼 특별한 결론이나 장르에 대한 발전적인 모색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노래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합법음반 발매

한 편으로는 노동가요가 투쟁의 현장에서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일상의 공간에서 함께 향유하고 즐겨야 하고, 이를 위한 노래들도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에 따라 꽃다지도 93년 겨울, 기존의 집체극 형식의 대규모 공연에서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공연을 1주일간의 콘서트를 시도하였고, 수용자들을 조직하는 후원 모임도 결성하게 됩니다.

이는 일상에서 노동자 대중들을 투쟁의 정서만이 아닌 일상의 정서로 조직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꽃다지는 합법음반을 준비하여 발매를 합니다. 합법음반이라 함은 제도권에 공식적인 등록을 하고 심의를 거쳐 음반을 제작하여 레코드점에서 판매가 가능하고, 또 방송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이슬>이 민중가요로 세대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곡 자체가 좋아서도 있지만 이미 음반으로 발매되어 소장하고 있거나 방송에 나왔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십, 수백만이 부르는 노동가요도 그러한 반열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음반 사전심의에서 거의 대부분 곡에 밑줄이 그어진 채 되돌아 왔습니다. 붉은 줄이 그어진 부분의 가사를 수정하라는 지시와 함께 말입니다. <누가 나에게…>에서는 ‘어느 새 적들의 목전에…’를 ‘저들의 목전에’로 한 글자만 바꿔달라고 했으나 <단결투쟁가>는 하도 밑줄 친 곳이 많아서 노래가사를 아예 다시 써야만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미 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전혀 다르게 수정해서 음반에 싣는다면 그건 <단결투쟁가>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한 글자도 수정할 수 없다고 버티며 무작정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심의위원회 쪽에서도 완강하게 나왔지만 결국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전곡을 가사 한 자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켜 줄 수밖엔 없었습니다.

 

청계천은 변했지만

그리하여 94년 5월, 노동가요로서는 처음이라 할 수 있는 꽃다지 합법음반 1집이 한국음반을 통해 발매되었고 전국의 레코드점에도 진열이 되고, 라디오에서도 <단결투쟁가>가 흘러나오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레코드점에 음반이 꽂혀있다고 꽃다지나 노동가요를 모르는 사람들이 음반을 사지는 않았으며, 방송에도 초기에 좀 나오다가 94년 여름이 지나면서 공안정국으로 다시 회귀하자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더군다나 방송에 나오는 것을 의식한 부드러운 편곡으로 노동가요의 질감을 희석시켰다는 비판도 받았구요.

이번에는 이 시기에 논란이 되었던 노래들 중에서 천지인 1집에 실렸던 <청계천 8가>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들어보면 그 당시에 왜 이런 노래들이 논쟁거리가 되었는지 참으로 이해가 잘 안 가실 겁니다. 이미 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인기곡 반열에 오른 노래이고, 아주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기도 하니까요. 청계천의 모습도 그 때와는 달라졌지만 이제는 그 당시 논쟁과 무관하게 즐겁게 감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청계천 8가>
                                           김성민 글, 곡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한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 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서린 리어커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 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 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워~워~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음원 출처 : [천지인 1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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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연재 16 - 민들레처럼

 

인기 노동가요 1위곡은?
[노래이야기⑯] <민들레처럼> 행진곡풍 퇴조와 서정성 선호
 
 
 

95년 가을, 민주노총 출범을 앞두고 노동가요 공식음반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민주노총의 건설 경로에 대한 몇가지 이견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던 민주노총 출범을 앞두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몇몇 기획자들과 문화활동가 안에서 이 시기 노동가요를 한 번 정리하고 갈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전노협 문화국과 함께 전문가들로 '노동가요 공식음반 제작위원회'가 구성이 되었습니다.

 

노동가요 공식음반 제작위원회

곡 선정을 위해 내부에 선정위원회가 꾸려졌고, 기존의 곡 중 설문을 통해 선정된 노래 반, 공모를 통해 수집된 신곡 반, 이렇게 방향을 잡았습니다. 신곡은 창작공모를 통해 심사하여 음반에 수록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대중적 공모와 함께 기존 노동가요 작곡자들에게 노동가요 전망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곡 작업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기존 곡에 대한 설문은 노동자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노래 100곡을 우선 선정한 뒤, 노동자들의 집회현장에서 무작위로 배포한 뒤 수거된 800여부의 내용을 수렴하였지요. 설문의 항목은 예시로 제공된 100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노래, 가장 많이 불린 노래,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이런 항목들로 다양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 <민들레처럼>은 꽃다지 1집 앨범 수록곡이다
그 결과 가장 많이 알고 있고, 또 불린 노래로는 <단결투쟁가>와 <철의노동자>가 공동 1위를 했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민들레처럼>과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그리고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민들레처럼>과 <전화카드 한 장>이었답니다.

물론 이 설문 결과만으로 선곡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 활발하게 활동을 했던 노동운동의 주체들이 필요에 의해 즐겨 부르고, 또 그 당시 직접 접하면서 인기를 얻은 노래들을 중심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내포한 설문조사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선정위원회에서는 낮은 순위를 차지했더라도 80~90년대 초반 노래운동과 노동문화운동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는 <노동의 새벽>, <고백>, <불나비> 등을 포함해서 대표곡들을 선정하게 되었답니다.

 

상처와 패배 그리고 반성

그런데 이렇게 설문결과로 나온 인기 순위나 인지도면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한 노래들은 대부분이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 노래들인데, 그 중 서정가요라고 분류되던 노래들이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 노동가요는 흔히 투쟁의 현장이라고 하는 집회나 파업을 통해 불려 보급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투쟁가를 중심으로 노동가요를 이해했고, 또 인기곡으로 선정된 이러한 서정가요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상처와 패배, 반성이었다는 면에서 보면 의외일 수 있다는 거지요.

앞서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87, 88년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민주노조와 노동운동 진영의 급성장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자본과 권력의 엄청난 물리적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에 주춤하기 시작합니다.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이 육해공군 상륙작전이라 표현되듯 군사력을 동원한 탄압에 80여일 만에 내려오고,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의 의문의 죽음을 보면서 참으로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이전까지도 많은 탄압이 있긴 했지만 공권력 투입, 대량구속, 자본철수, 공장이전 등 노동운동의 탄압이 정말 엄청나기도 했고, 또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노동가요에 있어서도 91년 상반기부터는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이 주춤하게 됩니다.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지고,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가장 많이 불린 노래들, '철의 노동자, 단결투쟁가' 등

워낙 긴밀하게 결합해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었겠지요.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 굵은 투쟁가의 호소력이 떨어지고, 또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린 노래는 <철의 노동자>,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등인데, 이들 노래는 구체적인 투쟁의 주장보다는 당당하고 멋진 노동자의 인간상을 그려냈다는 점이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노동가요 창작자들은 91년 하반기부터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생산하게 됩니다.

주로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지나간 2~3년 동안 투쟁을 반추하면서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나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비해 투쟁가요들이 바로바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장도 줄어들어, 창작자들은 노동자의 에너지에서 곡에 대한 소스를 받기보다는 이제는 스스로들이 노동자들의 정서를 북돋아 가고자 했습니다.

매일을 파업과 집회현장에서 보내다가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도 생겨 연습실에서 함께 술을 먹으며 토론을 하기도 하고, 같이 아파하기도 하면서 창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다들 창작에 몰두하다보니 연습실에서 집단 합숙을 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이나 샤워시설이 부실한 연습공간에서 살다보니 다들 머리에 떡을 이고 있거나(머리를 오래 감지 못했을 때 기름기에 의해 머리가 달라붙는 현상을 말함), 양말을 세우는 진기록들을 수립하기도 했답니다. 또 부엌 전체를 맥주병으로 빽빽하게 메우는 설치미술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고요. 그 당시 단체들은 대부분 공동체 생활을 했고, 작업을 할 때는 서로가 서로의 문선대 겸 술 친구가 되어주곤 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개인 느낌 강해지고, 내면으로 깊숙이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들이 <민들레처럼>, <사람이 태어나>,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이고, 또 그 외에도 <희망의 노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등이 그 시기에 창작된 대표적인 노래들입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노래들보다는 더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왔으며, 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즐겨 부르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힌 <민들레처럼>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 노래가 자신의 애창곡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무척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흥얼흥얼 따라서 같이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민들레처럼

                                           박노해 시, 조민하 곡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 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 음원 출처 : [노동가요공식음반](95년 발매, 노동가요공식음반제작위원회) 중에서 꽃다지 가수 곽경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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