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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노래와 문화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레디앙 연재 15 -전화카드 한장

 

“상처입은 이들을 위로하던 그 노래”
[노래이야기⑮] <전화카드 한 장>…정파로 갈린 노래와 상처들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낸 민중운동 진영에서는 대선 때 백기완 후보를 밀었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다시 5년이 지나 92년 다시 대선을 맞아 민중운동 각진영에서는 87년 평가를 근거로 대선정국에 대한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러면서 또 입장들이 나뉘게 됩니다.

뭐 예전부터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규정짓는 시각에 따라 여러 이론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정파들이 분리되기 시작한 건 아시다시피 86년 즈음으로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정파들의 갈등이 증폭된 건 아마도 92년 대선 때였던 것 같습니다.

 

92년 대선과 정파의 분화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결국 대중관과 예술관의 차이로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대중실천의 방식과 문화도 당연히 다를 수밖엔 없습니다. 운동이 급성장하던 87년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주요한 당면 사안에 단일한 대오로 집결해서 투쟁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크게 문제로 대두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92년 대선은 조직을 분열시키기도 했고,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각 단체들은 대선을 맞아 내부 토론을 치열하게 진행했습니다. 어떤 단체는 양쪽으로 다 이름을 걸고 양쪽 문선에 다 결합하고 대선 후에 다시 모여 평가하자하여 양쪽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떤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어떤 정치적 선택도 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알아서 각자 선택하고 실천하기로 했고, 또 어떤 단체는 내부에서 한쪽으로 입장 통일을 하고 공식적으로 결합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고요.

어떤 입장이었든, 한 단체가 동일한 입장으로 함께 움직이고, 그 선택이 승리한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조직은 대선 이후 한쪽 입장을 선택한 사람들이 대거 탈퇴를 하거나, 아예 단체를 해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노래로 보면 대학생들이 주로 부르던 노래와 노동자들이 주로 부르던 노래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시기와 사안에 따라, 그리고 불러지던 시공간에 따라서 노래들이 선택되어지던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 이 노래를 부르면 안되나"

전대협이 출범 후 90년 즈음부터 대학생들이 주로 부르는 전술가요들이 급격히 많아지면서 더욱 그 차이가 드러나긴 했지만, 대규모 집회나 연합공연에서 애창되던 노래들은 또 같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가사만 보면 ‘아, 이건 어떤 정파의 노래구나’하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는 노래도 있었고, 또 애초에 의도적으로 창작된 노래도 있었지만 그렇게 구분 짓던 많은 노래들은 정파적 입장이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노래는 집단의 문화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게 당연할 경우도 있지만,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정파를 뛰어넘어 불러지던 노래들조차도 어떤 시기를 만나 색깔 논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결국 어떤 집단에게는 외면당하고 말았던 것 이지요.

반미나 민족, 통일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NL쪽 노래로, 민중, 노동자, 노동해방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PD쪽 노래로 무조건 구분하던 때였습니다. 그 즈음 대학 초청공연을 갔는데, 대학 노래패에 갓 들어왔다는 신입생이 뒤풀이 때 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노래책을 펴놓고 노래를 배우고 부르던 중에 자기는 <서울에서 평양까지>란 노래가 참 좋아서 종종 동아리 방에서 불렀더니 선배들이 그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했다며, 왜 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되냐고 말입니다. 결국 그 친구는 노래패를 그만두었더군요.

 

"노래가 불쌍해"

그 뒤로 몇 년간 대학 공연을 갈 때마다 어떤 노래를 꼭 불러달라거나, 어떤 노래는 절대로 부르면 안 된다는 요구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심지어 <동지>라는 노래도 부르지 말라는 곳이 있을 정도로 -그 노래가 뭐 어떻다는 것인지- 노래 하나하나에 대해 색깔을 입히고 선곡안을 사전 검열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 지난 13일 상상마당 LIVE HALL에서 열린 꽃다지 콘서트 (사진=오명록)

그럼에도 꽃다지는 한총련 출범식 초청공연 때도 <가자 노동해방>과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을 같이 부르곤 했습니다. 물론 꽃다지에 대해서도 예울림은 NL이었고, 노동자노래단은 PD여서 두 단체가 통합된 곳이니까 중립(?)이거나 양다리라고 평가한 분들도 계셨겠지만요.

통합 이전에도 노동자노래단의 어떤 노래를 놓고, 1절은 PD, 2절은 NL이라고 했던 분들도 계셨구요. 아주 심하게는 통일 싫어? 노동해방 싫어? 이렇게 표현하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으니, 이쯤 되면 정파가 정치적 입장과 정책, 전술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수준이 되어 버리지요.

재밌는 실화로, 집회 때 마스크나 김밥을 파시는 분들까지도 무엇으로 집단을 구분하는 지 파악을 하셔서는 한쪽 집단에 가서는 “노동해방 마스크(혹은 김밥)있어요”라고 하고, 그 집단을 지나 다른 집단에 가서는 “조국통일 마스크(혹은 김밥)있어요”라고 하셨답니다.

마스크나 김밥도 그 때 그 때 색깔을 입게 되던 때가 있었다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 노래들이 이리 불려지고, 저리 불러지다 누군가에 의해 외면당하는 것을 보고 노래평론가 이영미 선배가 “노래가 불쌍해”라고 표현했답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던 그 노래
다시 돌아와서, 이 시기에 꽃다지도 30명 가까운 이들 중, 10여명이 탈퇴를 하거나 잠적을 하였고, 남은 이들도 상처투성이로 스스로를 추스르기도 어려웠습니다. 당시 대표를 맡았던 조민하 선배도 책임을 느끼고 사임하고, 조직의 지도부라 했던 이들도 파견을 명목으로 밖으로 나가있거나 휴가라는 이름으로 잠수를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해의 계획도 목표도 쉽게 세워지지 않았고, 모두가 의기소침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민하 선배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옛 동지로부터 얼굴 표정이 안 좋다며, 언제든지 힘들면 전화하라고 건네받은 전화카드를 들고 들어와 밤새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전화카드 한 장>입니다.

대선 이 후 상처받은 많은 이들을 위로했던 노래,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부르던 노래, 그리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했던 노래, 전화카드를 선물하는 운동권의 유행을 만들었던 노래 <전화카드 한 장>을 들어보겠습니다.

노조나 단체 활동가들은 대부분 상처투성이이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겠지요. 내 마음의 상처를 보듬으며, 내 동지의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같이 따라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전화카드 한 장
                                             조민하 작사, 작곡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말 한마디 다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음원 출처 : 꽃다지 비합음반 2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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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4 - <철의 기지>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의 상징 <철의 기지>
[노래이야기⑭] 노래패 '새벽'의 변화…대중 속 민중가요의 변화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노래모임 ‘새벽’의 <철의 기지>입니다. 이 곡은 현대중공업 투쟁을 형상화한 노래인데, <저 평등의 땅에>, <선언 1, 2>, <노동자의 노래> 등을 작곡한 류형수의 곡입니다. 류형수는 85년부터 메아리 활동과 새벽활동을 같이 했고, 새벽 후반부에 꽤 비중있는 역할을 했으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도 활동을 했습니다.

 

   
  ▲ 1990년 현대중공업 크레인 투쟁 모습
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가요와 민중가요를 향유할 대중적 공간이 급속히 확장되면서 다양한 전문노래단체들이 속속 등장하게 됩니다.

노래모임 ‘새벽’이 84년에 제작한 합법음반 노래를찾는사람들(이하 노찾사) 1집을 모태로 하여 전문노래단체를 결성하여 합법적 대중공간으로의 적극적 진출을 모색하였었고, 87년 10월 첫 공연을 성공리에 치루면서 노찾사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민중가요, 민중 속으로

가수나 연주자들도 새벽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주요 레퍼토리도 기존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 인기곡이었던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 <이 산하에>, <사계>, <대결> 등과 공연용으로서는 좋은 기존 노래인 <오월의 노래>, <부서지지 않으리>, <맹인부부가수> 그리고 새로이 창작된 <저 평등의 땅에>, <뒤돌아 보아도> 등이었습니다.

이들 노래는 노찾사로 인해 인기를 모으면서 민중가요의 풍부한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이 연장선상에서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와 같은 새로운 인기곡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노찾사는 그 후 몇 년간 공연이 성공을 하였고, 89년 발표한 2집 음반은 50만장 이상 판매되었을 뿐 아니라 대중가요 인기차트 7위권 안에 들기도 했답니다.

이처럼 대중공간이 열리고 민중가요 수용자 층이 확대되면서 지역 노래모임이었던 성남 노래마을도 적극적으로 대중공간으로 진출하였고, 진보적 고급 음악인들의 모임인 민족음악연구회도 국악과 고급 음악적 요소들을 민족적 음악언어로 재창조하는 새로운 유형의 창작곡들을 발표하면서 대중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은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에서도 활발히 전개됩니다. 다양한 노래집단들이 생겨나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활동을 펼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울에 비해서는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또 지역 간 편차도 많은 실정이었지요.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산 ‘노래야 나오너라’, 광주 ‘친구’, 인천 ‘노래선언’ 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창작곡으로는 소리새벽 김봉철의 <들어나봤나>, 새힘 이건의 <달동네의 부푼 꿈>, 희망새 김민하의 <아침은 빛나라> 등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변화를 꾀한 민중노래패들

특히 광주 노래패 ‘친구’, ‘우리소리 연구회’의 성과는 상당히 독특합니다. 서울에서는 찾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 외에도 개인들의 활약이 돋보이기도 했는데, 대학가의 인기 창작자로 윤민석과 박종화를 들 수 있습니다.

윤민석은 <반미출정가 1>, <어머니>, <전대협진군가>, <결전가>, <백두산>, <애국의 길>, <전사의 맹세1,2> 등의 많은 노래를 창작하여 당시 결성된 전대협을 중심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박종화 역시 광주를 중심으로 <지리산 2>, <바쳐야 한다>, <파랑새>, <투쟁의 한 길로> 등이 인기를 얻어 전국적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빼놓을 수 없는 흐름 중 하나가 노래모임 새벽의 변화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87, 88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노래운동 진영은 예측과 대응을 하지 못했고, 혜성처럼 나타난 김호철의 창작곡들이 노동자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불리는 것을 보면서 당혹감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시기까지 노래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어오던 중요한 주체로서 노래모임 새벽은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겠지요. 87년까지 <이산하에>,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만주출정가>,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의 창작과 비합법 테이프 제작으로 민중가요의 흐름을 주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꾼의 합창>, <내일의 노래> 등으로 노동자 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노래모임 새벽의 흐름이 88년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변화하게 됩니다.

<너를 위하여>, <선언 1>, <선언 2>, <오월의 노래 3>, <노동자의 노래>, <불꽃이 되어>, <철의 기지>, <바리케이트>등을 발표하면서 민중가요의 폭을 넓히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대중들의 음악적 취향과 관행들에 부합하지 못했고, 따라서 당시에는 현실적으로 노동자 대중, 학생대중이 향유할 수 있는 대중적인 노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새벽'의 자기 변화와 음악적 모색

90년에 들어 노동가요의 경향이 완전히 정착하자, 자신들의 창작곡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면서 새벽은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대폭 받아들인 <해방을 향한 진군>, <다시 또 다시>등을 창작하여 발표하기도 했답니다.

지식인적이라는 한계가 있긴 했으나 80년대로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노래운동의 중심에서 이렇듯 끊임없이 자기 변화와 음악적 모색을 해왔던 노래모임 새벽의 활동과 창작곡들은 가히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의 기지>
                                                                            류형수 작사, 작곡

무쇠바람부는 울산의 하늘아래선 육천의 전사들이 태어났다.
흩어질 줄 모르며 그들은 지칠 줄 모르며
그들은 배신할 줄 모르며 그들은 머무를 줄 모르는 그들은
자신을 가두었던 철의 감옥을 거대한 화로로 녹여 자신을 지키는 요새로 만든다.
무엇을 얻었는가 그대, 자유와 평등과 그대의 벗들
무엇을 잃었는가 그대, 폭력과 구속과 나약한 환상
무엇을 얻었는가 그대, 무엇을 잃었는가 그대
그대 철의 기지 철의 용사여

 

* 음원 출처 : 주간노동자신문 주최 노래한마당 공연실황 [우리노동자] (1989년) 중에서 노래모임 ‘새벽’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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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3 - 단결투쟁가

 

완성도 1위의 명곡 <단결투쟁가>
[노래 이야기⑬]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1989년 말인가 90년 말인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소위 고급음악계의 진보적인 몇몇 작곡가겸 교수들이 모여 80년대 민중가요 중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노래 10곡을 선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1위로 선정된 노래가 <단결투쟁가> 였습니다. 80년대의 주옥같은 서정가요와 스케일 있는 대곡들을 다 제치고 노동자 투쟁가요인 <단결투쟁가>가 1위를 차지한 건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1위로 뽑힌 <단결투쟁가>

하지만 수백만이 부르며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를 선언했던 가사 뿐 아니라 우리말과 음의 조화, 악곡의 완성도 측면에서 가장 명곡으로 꼽힌 것은, 어쩌면 김호철 개인의 성과가 아닌 노동자 대중 모두의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단결투쟁가>는 88년 발간된 백무산의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에 실린 '전진하는 노동전사' 등의 시구를 가사말로 하여 창작된 노래입니다. 백무산 시인은 노동자 시인으로 박노해와 더불어 노동가요에 많이 등장을 하지요. <장작불>과 <사랑노래>도 백무산 시를 가사로 한 곡입니다.

1987~88년 전국을 휩쓴 노동자 대투쟁. 이를 통해 사업장마다 민주노조가 세워지고, 지역별협의회들이 결성됩니다. 그리고는 민주노조의 전국적 구심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를 위해 1989년 겨울, 서울지역노동자문예운동단체협의회(서노문협) 소속 문화단체를 중심으로 집체공연이 제작되었습니다. 전노협 건설을 위한 노래판굿 꽃다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시작해 몇 개 지역 순회공연을 하고 1990년 전노협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 연합공연은 그 이후로도 몇 년간 해마다 가을이면 노동운동의 주요한 이슈를 주제로 각 장르별 창작성과를 집약해서 이어가는 새로운 공연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쏟아져 나온 노동가요

1990년 1월 22일, 경찰의 봉쇄로 수원 성균관대로 장소를 옮겨 전노협이 창립되었고, 이날 노동운동을 위시한 기층민중운동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자본과 권력은 기만적인 보수 대연합인 3당 야합을 선언했지요. 그리고 이런 보수대연합에 배신감을 느낀 진보진영의 총단결과 연대를 촉구하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자 우리 손을 잡자’라는 연합공연이 90년 3월 24일에 열립니다.

 

   
  ▲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 (사진=한내)

때문에 봄이면 음악 중심의 범 진보진영의 연대를 위한 연합공연 ‘자 우리 손을 잡자’와 가을이면 노동운동의 핵심적 이슈를 집체공연으로 형상화하는 ‘노래판굿 꽃다지’가 열려 새로운 노동가요를 보급하기도 하고, 대중적으로 검증된 노래들을 대중들과 함께 부르기도 했답니다.

대학 신입생이나 신규조합원들을 교육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그 시기 부문운동의 이슈들이 망라되는 선전, 선동의 장으로, 또 수 만 명이 모이는 문화집회의 장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자리입니다.

노동가요도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지요. 아무래도 투쟁이 고조되는 시기다 보니 행진곡풍의 투쟁가요가 주도하긴 했지만 광범위한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노동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노래들이 창작되어 불리게 된 것이지요.

<포장마차>, <사랑과 행복>, <진짜 노동자3>, <참사랑>, <부모님께>(이상 김호철), <내가 왕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 <달동네의 부푼 꿈>,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상 이건), <내사랑 민주노조>, <우리들의 사랑>(이상 조민하) 등이 이 시기에 창작되어 불린 일상가요들입니다.

 

노동자노래단과 예울림

이러한 노래들은 <사노라면>, <불나비>의 뒤를 이으면서 노동자의 일상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 역동성과 상호 전환하고 상생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이 시기의 일상가요들은 여태까지는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뽕짝과 스탠더드, 속화된 포크의 영향을 받은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노동자노래의 관행을 만들어갑니다. 이는 노동대중의 노래 문화적 관행 때문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또 90년을 전후한 이즈음 <전노협진군가>, <구속동지 구출가>, <무노동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 <연대투쟁가>(윤민석) 등 당시의 전술적 투쟁과제를 담은 전술가요가 출현한 것도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노협 결성으로 최고조에 오른 노동조합운동은 자본과 정권의 어마어마한 물리적 탄압에 부딪혀 상대적으로 주춤하게 되고, 이전에 비해 파업과 집회의 수는 줄어들게 됩니다. 이 시기 노동가요를 창작하고 보급하는 서울의 두 단체, 즉 ‘노동자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은 그 전까지 하루에도 서너 건씩 다니던 지원공연의 숫자도 줄어들고, 비슷한 위상을 가진 두 단체가 서노문협 산하에 따로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간을 각각 유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노동자노래단은 연주단이 부족하고, 예울림은 가창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노래판굿 ‘꽃다지’를 계기로 두 팀이 같이 공연을 다니거나 서로 가수나 연주자를 꿔주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가능했던 것이지요.

 

<단결투쟁가> 대합창 편성

1991년부터 통합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고, 그간 두 단체의 음악적 성과를 집약하고, 확대하는 합동공연을 해보면서 통합 여부를 판단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올린 공연이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땅, 아름다운 노래’라는 제목의 합동공연입니다.

1991년 12월 말, 중앙대학교 대학극장에서 이틀간 진행된 이 공연에 가수 15명과 연주자 7명이 무대에 서려니 자연스럽게 곡의 구성을 대합창곡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보게 됩니다. 이 때 발표된 <단결투쟁가> 대합창 편성은 두고두고 많은 문화패들에게 전수되기도 하였고, 몇 년간 대합창 편성을 유행시켰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의 거대한 물결과 함성을 잘 드러낸 편곡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답니다.

물론 저희는 그 공연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 서노문협 송년회를 겸하는 바람에 100만 원이 넘는 뒤풀이비 만큼 적자를 봤지만요. (그 당시 김치찌개 안주 1그릇에 2,500원이었고, 소주나 막걸리도 5~600원 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먹은 거지요^^)

결국 서로의 음악적 성과들을 집약하는 과정에서 활동방식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보다 폭넓게, 다양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두 단체는 통합하여 92년 3월 꽃다지를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수백만이 목 놓아 부르던 80년대 최고의 명곡을 노동자 대투쟁의 모습을 음악적으로 잘 형상화했다는 찬사를 받은 대합창 편성으로 들어보겠습니다.

<단결투쟁가>

백무산 시 / 김호철 글,곡 / 편곡 신양묘

1.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백골단 구사대 몰아쳐도 꺾어 버리고 하나 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

2. 수천의 산맥 넘고 넘어 망치되어, 죽창되어
적들의 총칼 가로막아도 우리는 기필코 가리라
거짓 선전 분열의 음모 꺾어 버리고 하나 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마침내 가리라 자유와 평등 해방의 깃발 들고 우리는 간다
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

*음원출처 : 꽃다지 합법음반 1집 [금지의 벽을 넘어 완전한 자유를 노래하리라!] (1994년 5월 발매, 한국음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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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2 - 철의 노동자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래이야기⑫]80년대 노동운동 현실 반영한 <철의 노동자>
 
 
 

<철의 노동자>는 안치환의 곡으로, 90년 영화 [파업전야]를 통해 대중들에게 발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투쟁가요들이 김호철의 창작곡이었던 상황에서 영화의 인기를 타고 노동자대중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하여 95년 노동가요에 대한 인식과 인기도 설문조사를 통해 <단결투쟁가>와 함께 가장 많이 불린 노동가요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가수 안치환은 연세대학교 중앙노래패 ‘울림터’ 출신으로 노래모임 새벽을 거쳐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가수겸 창작자로 활동을 하다가 90년 솔로로 독립을 했습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가요제 출전이 목표였던 안치환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울림터’ 선배의 노래실력에 반해 민중가요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을 접하게 됩니다.

초기 진달래 가요제, 무악가요제 등에서 창작곡으로 참가하기도 하면서 대학 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다 86년 구속된 선배를 생각하며 당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노동자 시인 고 박영근의 시를 개작하여 <솔아 푸르른 솔아>를 창작하면서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제주 4.3 항쟁을 노래한 <잠들지 않은 남도>, 이한열 열사 추모가인 <이한열 추모가>와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게 됩니다. <솔아 푸르른 솔아>는 87년 총학생회장 선거 때 우상호 후보 진영의 참모 한 명이 유세 때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면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80년대 후반 ‘노래를찾는사람들’ 음반에 수록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불리게 됩니다.

 

<철의 노동자>를 <전대협 진군가>로 착각

안치환은 ‘노래를찾는사람들’에서 활동을 하면서 김수영 시에 곡을 붙인 <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여 ‘제2의 김민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철의 노동자>는 파업전야의 삽입곡을 제안 받고 영화 스토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제철 공장을 견학한 후에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당시 <파업전야>는 80년대의 아주 열악한 노동조건,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위장취업, 노조 결성, 해고, 구사대 등장과 같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로 영화의 내용이 파업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법으로 순회상영을 했습니다.

대학 상영회 때조차도 공권력이 들어와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기도 했고, 장소를 옮겨 상영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는 전대협이 결성되어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도 결성되었고, 윤민석의 <전대협 진군가>가 학생운동진영의 최고의 인기곡이었는데, 영화를 보던 학생들이 <철의 노동자>가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전대협 진군가>로 착각을 하고 모두 일어나 함께 불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곡 전체적으로 코드진행이 매우 유사하고, 후렴 시작 부분과 클라이맥스의 멜로디 진행이 거의 흡사해서 생긴 현상이기도 합니다. 물론 안치환은 이미 학생운동권이 아니었고, <전대협 진군가>를 모르는 상황에서 작곡을 했다고 하지요.

 

제도권 진입 성공한 김광석, 안치환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전문노래패들이 아주 많긴 했지만 전문노래패라고 해서 음악활동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습니다. 전업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었지요. 그래서 각자 창작을 하지만 꼭 누구의 노래라는 개념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노래패들은 노동가요를 보급하는 것이 더 큰 사명이라고 여겼으니까요.

먹고 사는 문제 역시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자기 악기들을 가져와서 창작과 공연을 했고, 공연비를 받으면 그 돈을 모아서 악기를 사거나 연습실을 마련하기도 하고, 주머니를 털어 공간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공연하고, 지방에 갔다가 밤늦게 올라오면 택시비를 아끼느라 연습실에서 술을 먹고 밤을 샜고 그저 끼니는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있던 단체에서는 제가 가수겸, 기획자 겸, 총무였는데 (그 당시엔 모두 몇 가지 일을 겸했고, 활동가라면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름 숫자 개념이 있었던 터라 활동비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매일 연습비 500원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날 500원씩을 받고 다들 일당 받았다고 하늘에라도 오를 듯이 기뻐하며 그 돈으로 술을 먹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 후에 월급제를 도입해서 기본급 10만 원에 3~5만원의 공연수당과 강습수당을 책정해 받기 시작했고, 파업과 대학 행사가 많은 3월~5월에는 어떤 단원은 50만 원 이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인 부분 뿐 아니라 음악활동에서도 전문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노동가요나 민중가요를 알려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노래를찾는사람들’ 출신의 가수 고 김광석 선배가 솔로로 제도권 진출에 성공을 했고, 그에 힘입어 안치환도 솔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지만 <철의 노동자>는 안치환의 노래보다는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에서 훨씬 많이 불렸습니다. 아마도 가사 중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사랑’ 하는 이 부분이 정말 노동자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이가 5,60대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노동조합을 결성했을 것이며,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을 감수했을까요, 그야말로 비록 단 하루를 살더라도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아니었을까요? <철의 노동자>는 바로 그런 면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80년대 민중가요 중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고,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단결투쟁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의 노동자>  

안치환 글, 곡

민주노조 깃발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으세
강철 같은 해방의지 와서 모여 지키세 투쟁 속에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껴보세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단결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

* 음원 : 전노협 제작, 전노협 노래모음 1집 [철의 노동자] 중 노동자노래단, 예울림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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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1 <투쟁가 메들리>

 

"노동자, 역사의 주인으로 자기선언하다 "
[노래이야기⑪] 노래패 문지방이 닳던 시절…<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87년 6월항쟁에 이어 전국적으로 봇물처럼 터져나온 7,8,9 노동자 대투쟁은 그 동안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의 자기 권리 선언이면서, 또 민주노조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주체적인 선택으로 향유했고, 스스로 투쟁의 문화, 집회문화, 조직의 문화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불린 노래들을 보면 기존의 민중가요 중에서는 일부 밖에 없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의 민중가요들이 서정적이고 비장했던 것에 비해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낙관의 벅찬 감동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가에서 불려지던 민중가요보다는 소모임이나 야학을 통해 보급되었던 <노동해방가>, <광주출정가>, <노동의 새벽>, <동지>, <늙은 노동자의 노래>(늙은 군인의 노래) 등과 대중가요의 노래가사를 바꾼 <막장을 간다>(전선을 간다), <아, 미운사람>, <다 그런거지>, <노동자청춘>(아빠의 청춘), <노란샤쓰의 사나이> 등의 다양한 노래들이 불려졌습니다.

<아, 미운사람>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해야 아 살수 있나요.
우리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렸는데 아 슬픈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에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친 눈에 빛이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다 그런거지(작살조)>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착취뿐이지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착취뿐이지
처음만나 인사할땐 상냥하던 사장이 늑대같이 변할 줄이야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작살내야지


87년 시민항쟁과 노동자 투쟁을 경과하면서 민중가요는 두 개의 대중화를 실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 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 확산된 것이고, 또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화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까지 확산된 것입니다.

 

노동가요와 김호철

그전까지 지식인 중심의 노래들이 현장으로 보급되었다면 이 후로는 노동자들의 노래가 대학가와 다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지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7.8.9 투쟁과정에서는 기존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지만 88년 가을 <파업가>, <노동조합가>,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 등의 노동가요가 발표되면서 입에서 입으로 파업과 집회현장을 거쳐 엄청난 속도로 확산이 됩니다. 이 노래는 대부분 김호철의 창작곡이었지요.

김호철은 80년대 중후반 구로에서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분위기와 상황을 민감하게 판단하였고, 이를 바로 창작에 반영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노래운동집단들이 노동가요의 창작에 대해, 그리고 노동자 투쟁에 완전히 무력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시키게 되었습니다.

마산 등에서도 몇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노동가요 자판기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하루가 지나면 그날 있을 투쟁의 전술가요나 일상가요를 창작해서 구로지역노패패연합을 통해 불러보게게 하고, 즉석에서 필요하다면 수정해서 보급했고, 이는 전문패들에게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의 음악단체들은 자신의 창작곡보다는 김호철의 노동가요를 비롯하여 노동자들에게 보급해야 할 노래들을 보급하는 역할이 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호철의 노래는 그의 구로지역 노동자 투쟁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의식, 체험,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국적인 노동자 문화패 결성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을 바탕으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 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창작, 공연과 교육활동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거나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87년에서 90년까지 노동가요, 노동자 문화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성과는 전국적인 노동자 문화패들의 결성인데요, 노래패 뿐 아니라 풍물패, 연극패, 만화패, 판화패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패들이 결성되어 지역별로 연대활동을 펼치거나 연합을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단체가 그렇게 많이 결성되었음에도 전국적인 수요를 다 채우지를 못해 풍물패의 경우 오전에 굿거리를 배우고, 저녁에 강습가서 가르칠 정도였다고 하고, 파업과 집회 문선공연은 매일 하루 세네번 공연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물론 봉쇄되면 담을 타넘고 들어가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몇박 며칠씩 같이 농성을 하면서 노래지도 및 율동지도, 촌극짜기, 깃발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굳이 노래단체 연극단체 구분할 것 없이 같이 진행하기도 했구요.

그 당시 노동자 노래단이나 삶의 노래 예울림 등의 노래단체는 공연을 다닐 때 악기를 모두 싸들고 다녔습니다. 파업상황이고 노동조합 체계가 안정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급작스런 변화들이 많았던 시기라 엠프까지도 직접 들고다니곤 했습니다.

주로 스네어 드럼과 심벌 한 장, 드럼과 심벌 스텐드, 그리고 베이스 기타와 씬디사이저, 기타, 게다가 50W 정도의 엠프까지 가지고 전철타고, 버스타고, 걸어서 파업현장에 연대공연을 가곤 했습니다. 신입단원이 들어오면 일단 가장 무거운 50W엠프를 들게 하고, 6개월이 지나면 씬디사이저를 들고다니게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떤 이는 직접 공연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늘 자신은 건반주자(건반을 들고 다니는 사람)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고, 어떤 단체는 가장 무거운 엠프를 들고다니는 사람이 대표를 하는 거라고도 했답니다.

 

가슴으로 기억하는 처절한 외침
그러나 이렇게 각자 양손에 무거운 악기와 짐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장거리를 다니면서도, 그리고 봉쇄된 사업장을 짐을 들고 담을 타넘어 들어가더라도, 곧 노동자의 세상이 올것만 같은 벅찬 감동과 긴장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루에 몇 번 씩이나 제대로 공연비도 못받고 연대공연을 다니고 문화패 강습을 다녀도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던 때였습니다.

노동자들도 그 동안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몸으로, 입으로 배우고 표현하면서 다가올 새날에 대한 희망을 키워갔을 겁니다. 우리들의 조직, 우리들의 희망, 민주노조에 대한 꿈, 그리고 노동해방에 대한 꿈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 시대를 열었던 쟁쟁한 투쟁가들을 엮은 <투쟁가메들리>를 같이 듣겠습니다. 노동운동을 했던 한 선배는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종종 투쟁가 메들리를 틀어놓고 따라부르며 청소를 한다는데, 매번 펑펑 울고 만다는 군요. 저 역시 어떤 서정적인 노래보다도 투쟁가들이 그 시절의 제 삶과 사람들에 대한 벅찬 감정을 떠올리게 하곤합니다.

그러니 노래에 대한 기억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노래를 목놓아 불렀던 이들에게는 그 때의 정서와 몸상태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처절하게 외쳤던 ‘인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꼭 여러분의 가슴과 몸이 기억해 내길 바랍니다.

<투쟁가 메들리> -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 -

<동지여 내가 있다>(고승하 곡)-<딸들아 일어나라>-<노동조합가>-<파업가>-<구속동지구출가>-<민주노조사수사>-<진짜노동가2>-<전노협진군가>(이살 김호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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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10 - 벗이여 해방이 온다

 

추모곡이 되돌이표가 되던 시절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⑩] 열사의 바람 되새기는 노래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동해방과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길에서 수많은 선후배, 동료가 죽어갔습니다.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지들이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의 죽음에는 추모곡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후일에 알려지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굳이 누구의 추모곡이라는 이름이 붙기보다는 먼저가신 선배 열사들을 위한 추모곡으로 광범위하게 해석돼 불려 지곤 했었습니다. 예전에 만들어진 노래책에는 추모곡이라는 분류가 따로 있을 정도로 수많은 추모곡이 있었지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 역시 추모곡으로 탄생을 했습니다. 86년 봄 분신한 서울대 학우 김세진, 이재호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입니다. 이 곡은 당시 노래모임 ‘새벽’에서 활동하던 메아리 출신의 이창학에 의해 창작되어 불렸고, 당시에는 이성지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습니다.

 

   
  ▲ 사진=경계를넘어

또 죽어간 열사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며, 그들의 뜻을 받들자는 절절한 노래가사와 완성도 높은 곡 형식, 더군다나 그 시대 최고의 여가수로 손꼽혔던 윤선애의 열창 등으로 굳이 추모행사 자리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불리며 열사들의 뜻을 되새기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의 포문을 열게 된 사건은 잘 아시는 것처럼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었습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이 알려지면서 그간 운동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연행과 고문 사실이 폭로된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고문
84년 학원자율화조치가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대중집회가 허용되긴 했지만 감시와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던 때라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습니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고추가루물 고문, 무릎에 봉 끼워 넣고 밟기, 여성들에 대한 성고문 등이 자행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름끼치는 다양한 고문에 대한 설명과 그럴 때 오래 잘 버티는 요령과 정보를 실토하는 단계 및 요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그런 일이 자신의 인생에 닥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었고, 설사 닥친다 해도 스스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86년에 들어 민민 운동권의 투쟁이 거세지자 물리적 탄압도 노골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을 하고 난 직후, 우리 노래 서클은 봄 정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공연당일 팸플릿을 찾으러 갔던 선배와 동기 3명이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됐고, 그 중 한 명을 대신해 공연 마지막 부분 민민투 결성식을 상징화하는 장면에서 선배와 같이 혈서를 쓰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이틀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집에 가서는 문건들을 동생 방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겼습니다. 그 때 연행됐던 선배와 동기는 가을에 카투사로 입대를 예정했지만 결국 그것이 취소되면서 바로 강제 징집되어버렸습니다.

교문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페퍼포그와 최루탄은 물론, 32연발탄이나 64연발탄으로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언제 누가 어떻게 끌려가거나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끌려간 곳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고, 대여섯 명의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죽거나 부러지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지요. 생각 같아선 잘 버티고, 당당하게 대항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
그리고 뭔가 어떻게든 이야기를 잘 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정말로 여기서 죽을 수 있구나’ 하는 두려움밖엔 들지 않더군요. 엄마 아빠, 가족들의 얼굴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기에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조직에서 그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도, 공개되어 있지도 않은 터라 어찌어찌 사오일 후에 풀려나오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조직의 모든 선들이 끊어지고, 혼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시간은 흘러, 복학을 하고 학회 쪽으로 옮겨 나름대로 조용한 생활이 계속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87년이 되면서 접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이전에 접했던 다른 어떤 열사들의 죽음과는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불과 8개월 전에 내가 거기서 구차하게 살아나왔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죄책감마저 들어 견딜 수가 없더군요.

다시 다른 조직으로 복귀를 하고 매일 매일을 거리에서 보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건 처음 봤지요. 정말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 질 것 같았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신촌으로 종로로, 시청으로 돌아다녔지만 힘든 줄도 몰랐고, 또 최루탄이 터지거나 전경들이 쫒아 와도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있어 덜 무섭고, 서로서로 도와주곤 했으니 이런 게 해방구로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이한열 열사마저 사망하면서 장례식 준비와 6.10 대회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회관 합창연습실에서 모여 회의를 하고, 준비하며, 또 동기, 후배들과 노래연습을 하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피곤했지만,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버텨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힘든 그 시절의 기억들
23년이 지났지만 그 세월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붙잡혀갔는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고, 우리 해방의 나라는 눈물과 피를 먹고 동터온다고 위로하고, 또 위로해보지만 그래도 더 이상 이 길에서 죽거나 아프거나, 잡혀가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 시절을 살았던 누구라도 비슷한 경험을 직, 간접적으로 했을 것이기에 6월 항쟁은 몇몇의 성과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창밖으로 바라보면서라도 염원하던 모두의 것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함께 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공감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여전히 힘이 듭니다. 좀 더 자세한 그 때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분들은  ‘87년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이라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이창학 글, 곡

그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 음원 출처 : 민문연 11집 [해방의 노래] 중 윤선애 노래

** 참고 : 노래 작곡자인 오마이뉴스 이창학 기자의 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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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9 - 큰힘주는조합

 

"폭탄보다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⑨] 노동조합의 꿈과 의지 담은 <큰 힘주는 조합>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큰 힘주는 조합’입니다. 이 노래는 60~7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 속에서 불린 노래로, 가스펠송을 번안한 곡입니다. 70년대 말 ‘우리 승리하리라’나 ‘바람만이 아는 대답’ 등 외국의 반전가요가 한국의 억압된 사회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반면 ‘큰 힘주는 조합’은 노동자의 이야기와 노조의 필요성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교회나 야학의 노동자 소모임에서 가사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각 대학마다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학민추)나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학자추) 등이 결성돼 총학생회를 부활시켰습니다. 이듬해 몇몇 대학교를 시작으로 20년 만에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다시 대학 총학생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지요.

 

"총 사게 돈 보내라"
당시에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군사체계에 자동 편입되는 관행도 차츰 사라집니다. 군사체계에 편입되면 1학년 초 문무대에 입소하고 2학년이 되면 전방입소 훈련을 시행하게 됩니다.

물론 문무대나 전방 입소 반대투쟁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온 가난한 유학생들이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 용돈이나 술값이라도 뜯어내려 한 일이겠지만요.

 

   
  ▲ 군사독재 정권 시절 백골단에 끌려가는 학생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학생활이나 물정을 잘 모르시는 부모님께 ‘전방 입소 때 총을 사가야 한다’며 ‘돈을 보내라’고 하거나, 그도 부족해 ‘알고 보니 총알도 사가는 거였다’며 돈을 요구했다는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떠돌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농담 같은 상황보다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은 더 치열한 투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온 학우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은 그 당시 아주 적은 용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엔 생맥주 500CC 한잔에 500원이었고, 소주와 막걸리는 400원, 김치찌개 푸짐한 한 냄비에 2500원, 라면 한 그릇에 300~400원이었지만 늘 쪼들렸던 운동권 학생들은 매일 계속되는 집회와 시위가 끝난 뒷풀이에서 라면 하나 먹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고, 생맥주는 신입생 동기끼리 선배 몰래 모이는 자리에서나 마실 수 있는 술이었습니다.

 

85년 봄 축제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원칙이었다고도 생각되지만, 그 당시 노동자·민중을 생각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운동권의 문화와 정서가 그랬던 것은 또 나름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늘 술자리에선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고 대학생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울부짖음과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난 85년의 봄 축제는 이전과 또 달랐습니다. 축제를 대동제로 바꾸고, 가을의 스포츠 제전도 대동제 성격을 부여하여 총학생회와 서클연합회가 내용적으로 주도해갔습니다. 노래공연이 핵심적인 무대를 차지하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다 같이 행진을 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물론 자율화 조치 이후에도 최루탄을 쏘며 전경들이 학내에 진입하기도 했고, 페퍼포그도 교내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오기도 했으니 집회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위해 준비한 팸플릿 등의 인쇄물도 학교 앞 인쇄소에서 압수되기도 했고, 그로 인해 팸플릿을 찾으러 갔던 동기나 후배들이 연행되고, 구속되는 일도 잦았던 때입니다. 어떤 공연에는 주요한 배역을 맡은 선배가 연행되어 공연 당일 부랴부랴 다른 사람이 대타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마침 85년 봄 대동제를 계기로 자체 노래책을 발간하여 배포하려던 계획이 인쇄소에서 노래책 2000권을 통째로 압수당하는 바람에 항의 농성을 준비하고 대동제 때 선전전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겨울 방학 때도 매일 학교에 나와 노래 수집하고, 악보로 옮겨 그리고, 또 글과 판화 등을 넣고 편집하여 완성한 책이니 모두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와 서클연합회의 지원 하에 학생회관 앞에 책상을 놓고 매일 선전전과 거리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노래책이나 테이프들에 대한 탄압과 압수 수색은 계속되었던 것 같네요.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그런 상황에서 5월 대동제에서는 민중가요를 보다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유해 보고자 100인 합창단을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에 각 단과대에 연락을 해서 대동제 공연에 함께할 학생들을 조직하고, 모아서 합창연습을 시켰습니다.

그 동안은 한 두 곡을 빼놓고는 단순합창으로 부르거나 한 성부정도의 화성을 넣어 부르던 노래들을 4부 합창으로 편곡하여 대합창을 시도한 것입니다. 제목은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당시 유행했던 전영록의 노래를 개사한 곡으로 ‘아직도 어두운 밤 인가봐, 공장엔 신음하는 노동자…’로 현실을 풍자한 곡이었습니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요 내용은,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두돌이가 나이트 클럽과 미팅 등 새로운 환경을 즐기다가 꿈속에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만나면서 각성을 해가는 구성으로 현대판 스크루지 (찰스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였습니다.

그 때까지 항상 공연 첫 곡으로 불렀던 <내나라 내겨레>는 20명이 무대 앞에 나란히 앉아 모두 기타를 치면서 불렀고, <그루터기>, <터> 등의 합창곡들로 무대를 열었습니다. 그런 후에 본 공연으로 들어가면 중간 중간에 극을 배치하고, 또 극에 맞는 노래들이 선곡되어 합창 혹은 독창으로 불렸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역시 합창곡들로 <큰 힘주는 조합>, <진실을 찾아> 등 주제를 담은 노래들로 마무리를 하고, 다함께 대동판을 만들거나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전진합니다.

 

뒷풀이 단골 노래
그 뒤로는 대부분의 노래를 3, 4부로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고, 연합 집회에 가서도 민중가요를 같이 부르면 ‘화음 넣는 애들은 oo애들’ 이라고 소문날 정도로 좀 심하게 화음을 넣곤 했지요. 그 중 가장 자주 불렀던 노래가 바로 <큰 힘주는 조합>입니다. 대학생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잘 와닿지 않는 노래였을 텐데도 유독 뒷풀이 때마다 빼놓지 않고 4부 화성을 넣어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뿐 아니라 올해 초 모임 때도 여전히 이 노래를 4부로 불렀으니 앞으로도 십년 이상은 더 부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총 4절까지 있는 이 곡은 노래가사가 좀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다분히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곡인 듯 한 구성에 1~4절이 총체적으로 헛갈리기 쉽기는 하지만, 조금만 앞뒤 맥락을 생각하면서 노래한다면 덜 헛갈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이의 한계는 극복이 잘 안 된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결성되지 않았던 시절, 노동조합에 대한 꿈과 의지는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요?

 

<큰 힘주는 조합>
- 외국곡-


1. 노동자의 핏줄 속에 조합 정신 흐를 때 하늘아래 그 무엇이 보다 더욱 강하랴
우리 각 사람의 힘은 비록 약할지라도 큰 힘주는 조합
후렴)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단결하자 영원토록 큰 힘주는 조합

2. 방방곡곡 일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경제개발 사회발전 애써 이룬 우리들
내가 만든 기적 속에 멸시천대 받으나 큰 힘주는 조합

3. 저들 거만하게 자랑하는 많은 재산들 우리 손과 머리 못 빌리면 어림도 없다
억누르는 권력에서 참된 자유 얻도록 큰 힘주는 조합

4. 재물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게 있다. 폭탄보다 더욱 강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불탄 폐허에서 새 세계를 건설하도록 큰 힘주는 조합


음원 :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문제 대책위원회
[노동자를 위한 노래모음 1집] 중에서
제작 : 민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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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8 - 5.18

 

아직 끝나지 않은 5월의 노래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⑧]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정태춘 <5.18>
 
 
 

5월입니다. 올해로 80년 광주항쟁이 30주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 광주항쟁이 민주화 투쟁으로 인정되면서 국가기념일이 되었지요. 이제는 누구나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재작년인가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많은 이들이 광주항쟁의 실체와 아픔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렇게 공공연하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게 된 건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80년대 대학에 들어가 가장 처음 접한 사건은 4.19였습니다. 4.19는 역사 교과서에도 서술되어있기 때문에 뭐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 후에 바로 5월이 되어 대학 축제 때 올릴 정기공연을 준비하면서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었지요. 이런, 세상에!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 불과 4년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사건에 대해 기록된 글을 읽는 것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몇 장 안되는 사진의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 중에서

 

하지만 대학의 노래써클이 공개되어 있는 써클이다 보니 많은 학우들이 입단을 했고, 나의 동기는 100여명이나 되었지만 써클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하는 단원들은 1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몇몇은 이렇게 세미나를 하면서 광주항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은 정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5월 축제의 공연은 노래극 형식이었습니다. 내용은 한국의 현대사와 그 속에서 고통받는 다양한 기층 민중들의 삶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 광주의 학살 장면이 그림자 극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공연을 준비한 선배들과 연출팀 몇 명만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많은 공연자들은 단지 노래가 좋아서 기능적으로 연습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멈춰진 노래

대본을 짜고, 노래선곡을 하고, 배역을 정하고, 독창자들을 정하고 부분장면을 연습하면서 공연 연습을 했습니다. 독창자들은 의식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오디션 같이 노래를 불러보게 하고 맞는 목소리와 분위기, 가창력을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습니다. 물론 이런 기준에 대해 선배들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지만, 그래도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또 총연출의 권한으로 배역과 독창자들이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연습은 진행이 되고, 뭐 그 당시 연이은 학내 집회와 기타 활동으로 제대로 리허설도 못한 채 축제 공연은 시작되었습니다. 학내에서는 처음으로, 준비된 극장 공연인지라 다들 기대도 컸고, 공연을 하는 내내 공연을 하는 이들도, 공연을 보는 이들도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관객석에서는 어떤 장면에서는 욕도 튀어나왔고, 어떤 장면에서는 흐느낌이 배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광주항쟁 장면에서 <오월의 노래>를 부르는 여학우 뒤로 그림자극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살장면과 비명소리가 나오자 노래를 부르던 친구는 그만 충격에 노래를 멈추어 버렸습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공연 이 끝날 무렵 선배언니는 선동을 하고는 합창을 하다말고 실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공연 하나 올리는 것, 노래 한곡 부르는 것조차도 힘들고 버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오월의 노래를 부른 여리고 고운 그 친구는 오래지 않아 써클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뜨고는 두려움에 차츰차츰 멀어져 가기도 했습니다.

광주하면 떠오르는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오월의 노래>, <오월의 노래 2>, <광주 출전가>, <전진하는 오월>, <오월이야기> 등 80년대 노래들과 90년대 후반 정태춘 선배가 발표한 <5.18> 등 아주 많습니다. 모든 노래들이 다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다 들려드리고 싶지만 이번에는 정태춘 선배의 <5.18>을 들어보겠습니다.

 

5.18,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광주에 관련된 노래를 선곡하면서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작동을 했는데요, 대부분 그렇듯, 저 역시도 거의 해마다 5.18 즈음 광주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 광주 신묘역을 참배한 후 5.18 행사를 참여하고는 그 이후로 광주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 많은 분들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20년간 수도 없이 많은 희생과 댓가를 치르고, 또 처절하리만치 힘들게 활동을 해오신 것을 잘 알고, 또 그래서 그만큼도 너무나 벅찬 일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이후로는 5월 항쟁일에 정태춘 선배의 <5.18>을 들으며 혼자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오늘은 그런 마음으로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광주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역사적 사건과 노래를 연결해서 부를 때는 노래에 심취해서 감동을 받는 것도 좋지만, 과연 그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광주의 억울한 영혼들은 위로받고, 이제 편안한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인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겐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오월, 여전히 과제로 남은 오월이기 때문입니다.

(음원 : 정태춘 7집 중)
- 앞 삽입곡 <님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작사. 김종률 작곡)의 일부
- 뒷부분 삽입곡 <5월의 노래>(문승현 작사.작곡)의 후렴

<5.18>

정태춘 글, 곡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넘어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리를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고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위에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리를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는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너희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리를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워어어~~ 워어 워어어~ 워어 워어어~ 워어 워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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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7- 저놀부 두손에 떡들고

 

민요적 감수성, 민중가요에 담겨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⑦]시대를 풍자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민중가요가 확산되던 80년대 중반에 대학의 문화써클들은 단순히 자기 장르만 배우고 익힌 게 아니라 다른 문화써클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탈춤반, 민요반, 풍물반, 마당극 등의 써클 성원들은 날씨가 좋은 주말, 노천강당에 모여 민요를 배우거나 새로운 민중가요를 배우거나, 간단한 탈춤 동작을 배우곤 했습니다.

물론 뭐 탈춤을 배운다고 해봐야 고작 오금질과 사위 정도를 가볍게 배우는 것이었고, 장단도 굿거리나 노래에 필요한 간단한 장단을 배우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그리곤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함께 해방춤이나 농민춤을 추며 놀거나 써클대항 차전놀이, 기마전 등을 하면서 놀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중 민요는 제대로 배우려고 하면 아주 어렵지만 멜로디만 간단하게 익히면 자기 음역에 맞게 키를 잡아서 앞소리를 즉흥가사로 바꾸어 돌아가며 부를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래가사바꿔부르기(노가바)가 유행을 했던 것도 아마 이런 민요운동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요연구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듬지

민요연구회는 84년 6월에 창립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90년대 중반에 해산을 합니다. 안양에도 80년대 후반 민요연구회가 결성되어 활동하다 역시, 90년대 중반 해산했지만, 당시 안민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2000년대에 우듬지라는 노동자 민요패를 결성하고 공연을 다니기도 했었지요. 노동자대회 때나 집회 때 우듬지의 공연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민요연구회는 민요 부흥 운동으로 시작해서 전통 민요의 발굴 및 보급 뿐만 아니라 창작 민요까지 아우르는 활동을 합니다. <둥당에타령>, <액맥이 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같은 전통민요와 신민요를 발굴, 보급하였고, 그 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자 하였습니다.

창작민요로는 <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 /이상,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박선욱 작시․이정란 작곡)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민요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민요의 날 정기공연을 개최했고, 전래민요와 신민요를 전파하면서 노동자들과의 결합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새로운 노동요를 창작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국악계의 보수성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맞는 음악문화를 만들어가고자 진보적인 국인인들을 규합하는 데도 힘을 쏟았습니다. 주 1회 교사모임들을 만들어 중고등학교의 음악문화를 바꿔보려는 시도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민요운동은 기존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 민중가요적 계승에 노력을 기울여 커다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써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성과, 그러나 민중가요를 넘어서지는 못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요는 쉽게 대중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수용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노래풍들이 가곡이나 고급음악적인 요소들이 강한 것에서 보여지듯이 오히려 일반 대중보다도 더 민요적, 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운동은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민요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앞소리와 뒷소리를 배우고 나면 다같이 뒷소리를 부르고, 앞소리는 돌아가면서 각자 지어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거치면서 가사가 더 붙기도 하고, 또 변형되기도 합니다.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역시 처음에 양성우 시인의 시로 1절만 발표되었으나 이후 불려지고 퍼져나가면서 공연 주제나 상황에 맞게 가사가 덧붙여졌습니다. 아마도 다른 집단에서 또 새로운 가사가 덧붙여졌을테지만, 아래 적어드린 2절만큼은 참 많이 불려졌답니다.

여기서 들으시는 곡에는 발표될 당시 민요연구회 성원이었던 김애영님이 부른 노래로, 1절만 있습니다. 하지만 2절을 생각하며 한 번 더 들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     *

음원 : 민중문화운동연합 제6집 [우리가락 좋을시고] 중에서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양성우 시, 김용수 곡

1.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가난뱅이 등치고
애비없는 아이들 주먹으로 때리며 콧노래 부르며 물장구치며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어절씨구 침묵의 바다
호박에 말뚝박고 똥싸는 놈 까뭉개고 애 밴 년 배 차대고
콧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저 놀부 떡 들고 덩실 춤춘다.

2. 저 목사 한 손에 십자가, 또 한 손엔 헌금통
믿음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라, 찬송가 부르며 놀랠루야
저 목사 뱃때지 볼~록 포니에 몸을 싣고서 어절씨구 방석집으로
기생첩 옆에 끼고 교회 가서 설교하고 내일이면 말세라네
하늘엔 영광 덩실 덩실, 땅에는 비교적 평화, 땅에는 어쩌면 평등
예수님 땅치고 통곡하신다.


(85, 6년 당시 공연 중에 불려졌던 부분이며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할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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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6 - 그날이 오면

 

열사들이 꿈꾸던 세상을 향한 노래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⑥]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음원 : 민문협 9집 [그날이 오면] 중에서)

80년대 중반 큰 인기를 누린 노래들 중에는 문승현의 창작곡이 많습니다. 문승현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출신으로 80년대 중반 노래모임 '새벽'의 중심 멤버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활동을 하면서 <기도>, <영산강>, <찬비오는 새벽>, <오월의 노래1>, <바다여 바다여>, <이 산하에>, <뒤돌아보아도>, <그날이 오면>, <사계> 등 많은 대중적인 민중가요를 발표했습니다.

그 중 <그날이 오면>은 전태일 열사의 생을 그린 노래극 [불꽃]의 삽입곡으로 극중 전태일 열사가 분신을 하기 전에 직접 부르는 마지막 장면의 노래로 창작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의 문선대가 된 노래써클
84년에 결성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래분과 '새벽'의 창립으로 민중가요는 본격적으로 목적의식적인 창작과 보급의 주체를 갖게 되고, 노래운동, 문화운동이라는 성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지역에서도 교회나 문화공간을 통해 노동자나 지식인들의 소모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속에서도 민중가요가 창작되고, 또 보급되던 시기입니다. 또한 많은 민민운동단체들을 통해 지역의 문화활동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교류하였습니다. 각 대학마다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써클들이 결성되었으며 학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집회나 문화제 등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였습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잡히는 집회에도 항상 노래써클은 문선대로 동원이 되었고, 그 횟수가 너무 잦아서 총학생회나 선배들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성원들도 꽤 많았습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노래패는 언제든 연락이 오면 무조건 문선대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래가 좋아서 들어온 동기들이나 후배들은 버티지 못하고 탈퇴를 하기도 하고, 어떤 여학우는 ‘치마도 입고 싶고, 하이힐도 신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그만두기도 했답니다. 대학의 노래써클은 학생운동의 문선대였고, 1학년 시기를 버티고 2학년에 올라가서도 써클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노동운동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던 시기였습니다.

 

노래운동을 주도한 '새벽'
그러다가 새벽이 결성되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통해, 1년에 수차례의 기획 공연과 3~4개의 테이프 제작들이 이루어지자 문화운동에 자신의 뜻을 두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벽은 80년대 노래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음악 뿐 아니라 공연 방식, 유통 방식 등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어 냅니다.

새벽은 그동안 구전되어 불려지던 민중가요를 엮어 공연으로 만들기도 했고, 또 주제를 가지고 극 형식을 도입한 노래공연을 만들면서 창작곡도 많이 나왔습니다. 새벽의 공연 형태와 창작곡들은 대학 노래써클들에게 항상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기타 두 대나 세대로 반주를 하던 공연 형태에서 새벽은 가장 먼저 씬디사이저를 도입해 공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에는 각 대학마다 노래 공연 때 씬디사이저가 도입이 되곤 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씬디사이저를 민중가요 공연 때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중문화적 요소라고 해서 적잖은 치열한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80년대 이후의 장르나 양식 논쟁이 그렇듯 대중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일종의 관행이 되었습니다.

테이프 녹음 방식은 80년대 초 방안에 이불과 커텐으로 벽을 둘러싸고 소리가 큰 꽹가리 같은 악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음량을 스스로 조절하면서 동시 녹음을 했던 것에서 4채널 정도의 릴 녹음기를 통해 반주와 노래를 분리해서 녹음을 하는 것으로 발전을 했고, 80년대 후반에는 정식 녹음실을 빌려 16채널이나 24채널로 각 악기와 목소리를 따로따로 녹음 할 수 있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의 꿈을 담다
복제와 유통에서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음반의 복제는 레코드 회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비합법으로 제작된 이 음반들의 경우 직접 복사를 해서 라벨지를 붙이고, 쟈켓을 접어 케이스에 넣는 작업을 직접 해야 했습니다.

또 유통도 민민 단체들을 통해 직접 배포하거나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을 통해 판매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더블 데크로 하나씩 복사를 했으나 새벽은 1:5 고속 복사기를 구입해서 마스터 테이프를 걸고 한번에 5개씩 앞뒤로 복사를 하는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이는 90년대 초반까지 노동가요 음반들의 제작방식에 활용되었습니다. 90년대초에 나온 노동자노래단 1, 2 집 테이프도 10만여개를 이렇게 제작해서 배포했다면 믿어지십니까?

 

   
  
85년에 하반기에 만들어진 노래공연 [불꽃]은 새벽의 초기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창작된 공연이었고,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중 예수가 잡혀가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에 착안하여 만들었다는 <그날이 오면>은 전태일 열사가 꿈꾸던 세상을 향한 염원을 담은 노래로 창작되었습니다.

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고 문익환 목사께서 열사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목놓아 부르며 대신한 조사에 백뮤직으로 쓰여지면서 모든 열사들이 꿈꾸던 세상, 우리가 염원하는 세상을 향한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88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에 수록되면서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노래이고, 또 9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나 전문단체 공연 때 항상 마지막 곡으로 선곡되었던 선택받은 노래, <그날이 오면>을 들으시면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열사들이 꿈꿨을 세상을 다시금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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