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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노래와 문화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다시 일상의 영역을 이야기하자 (99)

<다시 일상영역을 이야기하자> - 1999년

   -금속산업연맹의 대중가요와 노동가요에 대한 노동자 의식 조사 결과를 보고

 

 

1.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들어 노동자문화운동의 독자적 구조구축을 위한 논의가 진행중이다. 그 논의의 중요한 출발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영역에 대한 접근 문제인데, 일상적 삶이 개인적인 취향과 욕구를 근거로한 취미나 여가활동의 부분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으로 접근되어지고 문화투쟁의 장으로 전환되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93년부터 노동가요를 집회나 시위공간에서만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영역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어왔다. 제도권 유통구조의 활용이라든가, 창작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 콘서트 문화의 정착, 매체 개발 등이 그런 노력들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일상적 영역으로의 접근에 있어서 의식의 문제와 의사소통 구조의 문제는 매우 풀기 어려운 과제였고, 창작집단들은 집회나 시위 공간이 아닌 영역에서 노동자대중들과의 접점을 어떻게 형성하고, 그를 통해 창작의 방향을 잡아갈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의 많은 측면이 노동자문화운동을 조합내에서만 이루어지는 문화활동으로 보거나, 도구로만 사고해왔던 점에 있다. 노동자문화운동을 노동자들의 취향으로 접근하여 조직하려고하는 편의적 사고와 조합밖의 생활에 대한 문제를 등한시해온 결과로 노동자들은 자신의 문화생활을 단지 소비(그들의 임금을 다시 자본에게 되돌려주는)행위로만 인식할 뿐, 삶을 주체적으로 창조하고 구성하는 방식과 의식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금속산업연맹에서 노동자 문화의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보여진다. 더 의미있어지기 위해 설문 결과에 대한 차분한 정리와 그 내용을 근거로한 이슈화, 그리고 다시 올바른 문화 사업으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느낌 정도의 수준으로 글을 풀어가고자 한다. 

 

 

2, 노동자의식의 이중성(설문조사를 중심으로)

 

금속산업 연맹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노동자문화에 대한 잘못된 의식과 노동자성과 자신의 의식간에 심각한 분리현상을 읽을 수 있다.

우선 대중문화와 노동자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없고, 자신들의 활동의 근거와 원칙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항목들로,
노조의 집회에 대중가수를 초청하는 것에 대해서 43%가 반대입장을 표시 했으나 찬성한 입장도 39.8%가 되며, 17.2%가 그저 그렇다라고 답변을 했고.(여기에서 그저 그렇다는 입장은 대중가수 초청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조합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대중가수를 초청해도 좋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60.9%가 찬성입장을 표시했고, 23.1%가 반대를 했다. 이것은 노동자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가 무척 의심스러운 대목이면서 또한 노동가요와 대중가요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문화를 단지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노동자 의식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이것을 보여주는 항목들은 여러 가지 이다. 노동가요는 노동자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85%가 긍정을 했지만, 노동가요가 나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58.2%이고 다시 노동자 문화활동이 지금 나의 감정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18.3%만이 긍정을 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이중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라는 집단으로서의 계급과 자기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의미있는 부분이고, 이것은 단지 노동자문화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이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예는 H중공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한 의식조사 보고서에서도 드러난 적이 있다. (신병현,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현장에서 미래를, 98.10, P 141-164)


이런 의식의 이중성은 노동가요를 부르거나 듣는 행위가 특별한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노동가요를 부를 때 구속감을 느낀다는 질문에 58.2%가 그렇지 않다, 17.6%가 그렇다라고 답변한 반면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에 44.5%만이 긍정을 한 점이라든가, 노동가요를 부를 때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8.9%나 된다던가, 노동가요를 부르거나 들을 때 자신이 노동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71%였으나, 자식에게 노동가요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에는 21.7%만이 긍정적 반응을 표시한 점 등을 볼 때 노동자라는 의식과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자신의 삶 전체와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한 부분에서만 존재하는 동떨어진 영역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인데, 대중가요를 거리낌없이 부른다(60%), 대중문화는 나의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61.3%), 회사에서 대중가수를 초청하면 반드시 보러갈 것이다(41.7%) 등등의 항목에서 보여지듯이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대중문화를 별 문제의식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90년대 대중문화가 더욱 발달하고 다양해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고 젊은 층일수록 더 심해진다. 노동자 문화활동이 일상적 삶이어야 하고, 그런 관점과 방식으로 조직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여전히 소비행위, 개인적 취햫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고, 공동체적 삶의 복원과, 인간적인 삶의 영위하는 측면으로 접근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부분은 뾰족한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문제라고 비판만 할 지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제를 제기하는 지점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노동가요가 의식적으로 하는 활동, 일정하게는 필요한 부분이긴하지만 부담으로 작용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부담없는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감각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형태, 소비형태에 대해,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화투쟁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되어져야 한다. 

 

 

4. 최근 3~4년간의 창작경향의 문제


노동자대중의 잘못된 인식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창작집단의 창작경향에서도 문제들은 드러난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의 노동가요는 많은 노래들이 구호적이었고, 전술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구체적이면서 하나의 장면이 연상되는 노래들이었다. 어깨쭉지에 빛나는 상처 지켜낸 파업투쟁, 막걸리잔 치켜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중에서 -라는 가사는 파업의 과정과 승리의 감동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벅찬 감동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노동가요의 대부분은 일상적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아닌 추상적, 관념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서에 있어서도 생활인의 정서가 아니라 막연히 아름다운 삶이나 당위로서의 운동을 추구하는 소시민적이고, 지식인적인 정서가 강하다. 또 인간적이고, 이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계급적 관점으로 재해석해내지 못하고, 현재 자본주의 의식에 길들여진 대중들안에 있는 흥미로운 취향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의 하나를 늘려주는 역할정도로 대중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관점없이 산만하게 넓혀, 대중의 보편적 인식과 정서의 틀에 맞추려고 하는 잘못된 관행으로 가고 있는 측면이 많다.


반면에 대중가요는 오히려 80년대 사랑타령 일색이던 모습에서 9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는 노래들이 다양해진 것과 더불어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물론 노래의 가사말의 변화만으로 대중문화의 잘못된 구조나 관행이 교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은 노동가요 창작자들이 연구해야 할 점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스밴드의 <오락실>같은 노래는 요즘 우리 아빠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고, 감동이 물씬 전해지는 노래이다.

 

한스밴드의 <오락실>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장난이 아닌걸 또 최고기록을, 처음이란 아빠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겐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시험성적 아신건 아닐까.
오늘에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 시대에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 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 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에서 신나게 코골며 잠꼬대 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아침은 오고 또 엄마의 잔소리, 도시락은 아빠꺼 내꺼 두 개.
아빠 조금 있다 또 거기서 만나요. 오늘 누가 이기나 겨뤄봐요.
승부의 세계는 어~ 너무나도 냉정해. 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한판.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5. 다시 일상생활 영역으로 접근하자.

 

우리는 대중문화의 홍수속에 살고 있다. 문화운동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출발했으나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썩 잘 대응을 했다고 하기엔 부족한 지점들이 많다. 80년대의 문화투쟁에 대한 논의나 90년대 장르운동으로의 집중이 지금에 와서 각각 한 부분만을 담당했을 뿐 총체적인 노동자문화예술운동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을 올바른 관점으로 살펴본다면 신자유주의적인 총자본에 대응하는 총노동의 결집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 온 몸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자신의 전 삶을 일관성있게 재조정해왔었던 경험을 되살려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적 삶, 보다 인간적인 삶 - 풍요로운 삶, 질높은 삶이 아닌 -을 추구하는 노동자적 투쟁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 전과정에 흐르는 일관된, 올바른 의식을 만드는 것이 문화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단지 노래패 활동을 하는 것, 집회의 문선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문화운동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삶은 분절되어 그 영역마다 편리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기계적인 삶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소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노동자들의 욕구에 기초해서 여러 가지 매개로 조직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한 취향으로 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누구의 편에 존재하는가를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는 것, 그래서 생활방식이 바뀌고, 주체적으로 각성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상의 생활을 조직하고 재구성하는 운동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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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공연의 의미

거리공연, 노동문화의 새로운 접점 창출 계기로......

 

                                                  

노동문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 노동자가 향유하는 문화? 노동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 아니면 노동을 소재로 한 예술활동? 노동조합의 문선활동?
이러한 것이 진정한 노동문화의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문화는 무엇인가? 지금 시대에 진정 노동문화가 존재하는가?


마치 노동문화라는 영역과 대중문화라는 영역을 다른 동그라미로 그려놓고 사람들은 밖에서 살다가 필요하면 한가지 원을 선택하여 들어갔다 다시 나오고, 또 다른 원에도 들어가 보고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대중과 노동자로 나뉘어져서 노동자는 노동문화를, 대중들은 대중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대중이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각성하기 시작하면 그는 대중이라는 집단을 떠나 노동자라는 집단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일까? 노동문화라는 것의 실제 내용과 형식은 어떤 것인가?


노동문화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엄청난 질문들에 대해 하나하나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들에 대해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단순하게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엄청난 물량의 대중문화에 노출되어 있게 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집과 풍경, 그리고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들, 이러한 모든 것은 내 자신이 처한 조건(부모, 경제적 요건, 사회적환경, 교육환경등) 속에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느끼도록 훈련되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우리들의 정서와 취향, 그리고 문화는 자본주의의 상품화 전략과 경제논리로 재단되고 가치지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것인양 이야기들을 한다. 나는 이런 음악이 좋아, 이런 스타일의 의상이 세련된 거야, 저 모양은 매우 예뻐, 라고.. 마치 그것의 가치에 대한 판단까지가 정확한 것처럼... 그리곤 '나는 나야' 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고, 또한 그것은 개성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라든가 옳다, 그르다라고 평가할 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거꾸로 한 번 되집어 보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렸을 때 자주 먹던, 아니면 어떤 특별한 날(초등학교 졸업식같은) 기분좋게 먹은 그런 음식일 것이다. 반대로 먹어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책에서든 광고에서든 접해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전혀 상상도 안되는 음식에 대해서는 좋아한다는 개념이 생기지도 않거니와 먹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호기심이 강하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은 기존 관념을 떠나 도전해 접해보고 나름대로 평가를 할 기회를 갖게된다. 그러나 그 기준도 역시 자신이 익숙해져온 그 경험에 의해서일 것이다. 문화는 바로 그런 특성을 지녔다. 접해보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낯설고 약간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늘 접해오고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친근한 느낌을 갖게 되는...


또한 사회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리고 고도의 상품판매 전략에 따라 미적 기준도 변화해 왔다. 70년대 영화에서 보여지는 미남, 미녀형과 그 시대의 가장 세련된 복장이라는 스타일들은 지금 우리가 보면 모두들 촌스럽다(!)라고 여겨지고, 80년대 역시 그러하다. 그러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바뀌어 왔고 우리 시야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장면들도 점점 더 서구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유럽식의 빨간 공중전화박스, 광고판의 외국 모델들, 외국어로 된 상호들, 알아들을 수 없고, 아무 의미없이 반복되는 이미지들, 그리고 사람들의 생김새와 스타일까지도...


물론 이런 현상은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해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조장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취향과 정서가 애초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목적의식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염색체가 내 외모와 성격 등 여러 가지를 규정하는 것처럼 마치 나의 유전인자나 염색체 속에 댄스음악이나 힙합을 좋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햄버거나 피자를 좋아하는 음식 취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스스로 나의 취향이라고, 그리고 나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된 나의 것일까? 그리고 스스로 나자신이라고 규정하는 자기 정체성은 정말 내가 맞는걸까? 스스로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의식에만 존재하고 자신의 몸 속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다른 것을 좋아할 가능성, 낯선 일이지만 자꾸 해봄으로서 그것을 즐기고 싶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런 저항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머리 속으로는 생각하지만 몸은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TV를 보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고 반박을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TV를 보는 것, 그리고 TV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이 모두 나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오늘 회사에서 매우 부당한 일을 당해 너무 화가 나고 그 일 때문에 회사도 나가기 싫을 정도여서 노조에 이야기해서 싸우든지 회사를 때려 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집에 와서 TV를 보다 보니 아무 생각없이 스트레스도 모두 해소되고 마음에 안정도 찾게 되었다. 그런 후에 오늘 있었던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나쁘다기 보다는 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하게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화해를 하고 또 기분좋게 출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말 인간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무척 단편적인 예일 수 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우리의 지향을 생각해보면, 내 속에 있는 두 사고의 갈등이 이 순간 드러나게 된다. 내가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부분, 즉 노동자로살아가면서 사회적인 모순에 맞서 싸워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는 삶과 현실에 안주하고 인간적이라는(지극히 자본적인 이데올로기로 쓰여지는) 삶의 모습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대중문화가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종교가 그러하듯이 현실에 안주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여 대리만족시켜주고, 배출할 출구를 만들어 줌으로서 진정 노리는 효과가 무엇인지,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면서 착취당하면서 빈곤한 우리 삶을 미덕으로 만드는 그 이면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러나 일방적으로 쏟아부어지고, 익숙해져 버린 대중문화의 상업성과 향락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TV를 켜고 그것에 마취되고, 또한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정보가 대부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조차도 내 느낌보다 매스컴에서 이야기하는 기준에 맞춰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박사가 그랬다던가, 어느 프로에서 설문조사 결과가 어떻다더라 등등... 하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조차 대중매체를 통해 본 어떤 근사한 이미지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다양한 간접 경험과 정보를 통해 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욕구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중요한 실천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나의 선택과 실천없이 마치 모두가 다 원하는 것은 나도 원하는 것인양 욕구조차 허위이고, 이것들의 실현도 단지 스타를 통해 해소하고, 내가 못이룬 꿈들을 드라마를 통해 대리 충족하기도 하고, 가상의 만족을 얻게 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그건 정말 대중매체의 노예일 뿐, 나는 아닌 것이다. 아니 내가 어떤 것을 나의 의지로 표현한다고 한들 그것조차 자유롭냐 하는 문제이다. 이런 예들은 우리주변에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흔하게 존재한다. 즉 문화현상이나 행위 하나하나에는 특별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놓여 있는 구조가 어떠하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누군가의 편에 서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가진 욕구나 취향, 그리고 많은 정보에도 역시 이데올로기는 존재하고, 그 이데올로기에는 분명한 전선이 있다. 또한 내가 무의식중에 하는 이야기나 행동 하나하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여를 하게된다.

 

그렇다면 노동문화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를 하자면 노동자적인 관점을 토대로 한, 주체적인 집단의 공동체 문화, 그것을 통한 자본적 질서의 극복과 공동체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나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진 욕구, 사고, 행동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게 된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스스로가 느끼는 주체적인 감성과 취향을 찾아내고, 그에 맞는 충족법, 그리고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서 자신들만의 창조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함께 영위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노동자 스스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고 생활을 재배치하여, 그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일상영역에서의 삶의 변화는 현장에서의 삶에 의해 많은 부분 규정받기 때문에 현장에서 임투를 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인간적인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다른 영역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조금 개량하거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물질적 가치를 확보하고자 하여 그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본주의적인 질서를 공고히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 창조적인 노동, 그리고 주체적인 삶과 거침없는 표현, 자율적인 생활이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재구성되어 자본적 질서를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노동문화의 본질적 의미이다.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주체적 선택과 작은 실천으로부터 노동문화는 꽃피워지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 공동체적 질서로 재편되어 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일상의 영역에서 문화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실제 삶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삶과 사회는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영역에서 창조적인고 주체적인 문화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의 구조 속에서는 참으로 어렵다. 방송을 통하지 않고, 어떤 것들이 가능할까? 바로 문화소모임이나 함께 하는 문화생활과 교육,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서로가 교감을 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 외에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새로운 일상영역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창작단체들이 자기 공연들을 하고, 음반이나 비디오등을 제작하는 것도 바로 일상영역에서 이러한 접점을 창출하고, 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리공연은 바로 새로운 접점을 창출하는 기회이다. 시기적인 이슈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이제는 생활에서 느껴지는 제반 문제들이 문화적으로 표현되는 장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또다른 문화 양식으로 정착되어 가야한다.
작은 실천의 계기로,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는 소통의 장으로 자리잡아 가야한다.

 

- 99년 즈음에 인천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 소식지 [동네방네]에 실었던 글인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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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라 - 후기 모음-

우연히 찾은 자료입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그 당시 저는 한없이 행복했고
다시 태어나도 노래운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고
당시의 그 느낌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거리공연의 첫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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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라 !

- 예술활동 탄압하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꽃다지 가수들의 거리공연 일기 중에서 -


※ 지난 2월 5일, 국가보안법 상의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혐의로 구속된 도서출판 민맥사 대표 '원용호'씨와 노래패 꽃다지 대표 '이은진'씨의 조속한 석방촉구 및 예술활동 탄압중지,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무기한 거리공연이 매일 낮 12시 30분부터 종로 3가 탑골 공원 앞에서 노래패 '꽃다지'의 주도로 시민들의 열띤 호응 속에 열리고 있다. 
다음의 글은 꽃다지 가수들이 그날 그날의 거리공연 느낌을 자유스러운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거리공연일지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실은 것이다. 노래패 꽃다지는 3월 23일 현재, 44일째의 거리공연과 민예총 본부 사무실에서 47일째의 철야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1996년 2월 9일 / 철야농성 5일째, 거리공연 2일째 / 출연 : 최도은, 그리고 꽃다지


어떤 사람이 발로 건드렸는지 공연 중간에 전원선이 뽑혀서 잠시 음향이 나갔다. 진행자가 생소리로 멘트를 하게 되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다행히 전원을 재빨리 다시 연결하여 공연을 잘 마칠 순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지……. 그래도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전원이 나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진행을 보던 민하형이 "왜 창작자인 나를 잡아가지 않고, 유통 보급을 한 애꿎은 사람들만 잡아가느냐?"라고 그 자리에 숨어든 형사들을 찾아내어 항의성 멘트를 하셨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듯 했다. 물론, 옳은 말씀이나 만약에 그렇게 사건이 커지고, 얽어매기 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이 조직, 저 조직 마비시켜 놓았을 땐, 어찌 될꼬 싶어서…….   
오늘 함께 노래를 불러준 최도은 언니가 참 고맙게 느껴진다. 거리공연 관객들중 30대 이상의 분들에게 어필하는 몫을 분담해 준 듯 싶다. 자주 공연에 나와 주세용 -.
종로바닥을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썩 바쁘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과 가난한 연인들이 거리의 이 무료 콘서트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흐뭇한 마음 조차 든다. 아, 은진언니, 용호형 정말 고맙습니다(?)
시들어 가던 나의 열정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시련은 단련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있다!

 

 

1996년 2월 11일 / 철야농성 7일째, 거리공연 4일째 / 출연 : 꽃다지


생각외로 조용한 노래들에 대한 호응이 좋았다. 오늘은 특히 느린 발라드가 많아서 걱정을 했는데…….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콘서트 때 처럼 자기 노래를 자기 멘트에 이어 부르니 그야말로 거리에서 콘서트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수적이라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시며 음반도 사 가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우리들 모두를 격려도 해 주시는 모습이 의외이면서도 참 감사했다.
음향!
음향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지만, 비트있는 곡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서 참 아슬아슬하다.  음향기기 자체의 문제인지, 전력의 문제인지…….
음반!
오늘은 다른 날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홍보를 했는데도 유달리 음반 판매량이 많았다. 왜 일까?  아마도 노래를 잘 해서 이리라. 히히…….
합창!
우리의 신입회원 '용진'과 '정현'은 생각외로 적응을 잘 하는 듯 싶다. 물론, <통일 아리랑> 솔로 부분에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로봇트처럼 왔다 갔다 하거나, 가사를 쬐끔 까먹기도 했지만 말이다.
연일 벌어지는 이 거리공연이 결코 관성화 되어서는 안된다. 매일 같은 곡이 있을지라도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멘트준비에 신경을 더 써야 하겠고, 노래도 다양하게 준비해서 지켜보는 많은 분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의미있는 거리공연이 되게끔 해야겠다.
그리고,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가입 신청서를 함께 구비해 두면 어떨까? 아마도 호응이 꽤 괜찮을텐데…….

 

 

1996년 2월 12일 / 철야농성 8일째, 거리공연 5일째 / 출연 : 꽃다지


우리 '꽃다지'의 잠재된 팬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꽃다지는 민중가요, 노동가요를 부르는 노래패이기에 그 향유층도 특별한 사람들일거라는, 신입회원인 나의 선입견은 편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의 거리공연을 통해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질서유지를 담당하던 경찰 두 명은 호기심 있게 구경하더니 멋쩍은 모습으로 음반을 사 갔고, 한 외국인도 공연 전체를 관람한 뒤, 음반을 사 갔다. 한국말을 모르기에 가사 내용을 알 순 없지만, 노래의 느낌이 무척 좋았다는 말을 남기면서. 물론, 영어로…….
민중가요는 음악성 보다는 가사 전달에 무게를 둔 노래인 줄 알았던 그동안의 잘못된 나의 생각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다. 결코 안일한 자세로 임해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1996년 2월 14일 / 철야농성 10일째, 거리공연 7일째 / 출연 : 꽃다지


아침 10시.
서초동 서울 형사지법에서 열린 은진언니와 용호형님의 구속적부심 공판을 몇 몇 가수들과 함께 보고나서, 비록 대화는 못나누었지만, 10일만에 두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검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판사님(?)의 어처구니 없는 말씀(?)으로 인한 찝찝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전철을 타고 거리공연장인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법조계는 아직도 멀었구나....' 
거리공연장에 도착해서 밝은 웃음으로 맞이하는 동료가수들과 시민들을 보니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금지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라!'
오늘의 거리공연에 출연하지 않은 나는, 공연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르며 다시금 이 말을 되뇌이면서 준비된 유인물을 모인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리공연 7일째인 오늘은 여기저기에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7일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농성장을 지켰던 민하형은 간만에 옷 갈아 입으러 집에 들어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노래를 부르고 있는 다른 동료가수들이 약간은 지쳐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노래 속에도 피곤함이 스며있는 듯 했지만, 우리가 이렇게 거리공연을 하게 된 이유와 농성 10일째, 그리고 거리공연 7일째라는 사실을 아시고는 시민들이 더욱 안타까와 했다. 
이제는 거리공연이 어느 정도 틀이 잡혀가는 것 같다.
주의!  이럴 때, 멈칫거리거나 생각을 정지시키지 말고, 생기 발랄한,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더욱 다양한 거리공연과 농성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시간 시간을 채워 나갑시다!"
요즈음처럼 주위 사람들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던 적은 없던 것 같다. 그리고, 주위의 노조 분들과 여러 단체 분들, 그리고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든 분들이 지원해 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순간 가슴이 뜨거워진다.
"꽃다지 여러분, 그리고 꽃다지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1996년 2월 15일 / 철야농성 11일째, 거리공연 8일째
                             / 출연 : 서울대 중앙노래패 '메아리', 그리고 꽃다지


아! 슬프다, 반주CD 여!
어떤 도적놈이 우리 반주CD와 CD Player가 든 가방을 훔쳐 갔을까?
제발 안면몰수하고, 훔쳐갈 때처럼 몰래 도로 가져다 놓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겠지?
급한 것부터 다시 녹음해 놓고, 없는 돈에 CD Player 하나 사고 해서 저녁 때, 유구영 동지 후원의 밤 공연 부터는 당장 쓸 수 있었지만, 왜 이런 비상사태가 벌어졌는지, 도적 맞던 그 짧은 순간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내가 반주CD 관리담당이었기 때문에 없어진 뒤, 이리뛰고 저리뛰며 몹시 흥분된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짜증도 내고 그랬다. 
허나, 사라진 뒤에 탓하면 무엇하고, 후회하면 또 무엇하랴. 급할 땐 기타가 최고다, 최고!
평소부터 우리도 기타로 할 수 있는 가벼운 포크음악들을 좀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가수들도 자기 기타 들고 나와서 여럿이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공연하는 것이 좋을 듯…….
내가 잠시 짜증을 내서 마음이 상하게 됐을 우리 동지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오늘 많은 것을 느끼게 된 데 대해 감사하고픈 마음이다. 메아리 친구들도 고맙고, 그 순간 옆에서 반주를 준비해 준 우리 꽃다지의 기타리스트 성우와 필우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모두 모두 수고 많으셨구요, 고생하셨어요.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합시다!!

 

 

1996년 2월 16일 / 철야농성 12일째, 거리공연 9일째

/ 출연 : 노찾사, 조국과 청춘, 박준, 그리고 꽃다지


거리공연이란 걸 하길 정말 잘했다.
늘상 얘기하던 '열려진 공간'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노조 임투전진대회, 대의원 대회,  대학 대동제 등등 초청된 공연공간이나 우리를 잘 아는 대중들 앞에서가 아니라, 음악소리에 걸음을 멈춘 연인들, 학생들, 아저씨 아줌마, 회사원, 탑골공원을 안방삼아 생활하는 할아버님들.
그 모든 분들을 새롭게 우리의 벗들로 가슴 속에 꼭꼭 새긴다.
유인물 하나도 소중히 받아가고, 서명은 꼬박꼬박, 음반도 관심있게 구경하고, 돈 있으면 사고…….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이런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 주는 노래 동지들, 오늘 출연한 '노찾사'와 늘 활기차게 젊은 청춘을 노래하는 '조국과 청춘', 그리고 지금까지 출연해 준 '노래극단 희망새', '노래마을', '류금신', '김영남', '현성이형', '메아리', '애영누나', '작은 하늘', '최도은언니', '노동자문예교육협회', '풍물굿패 살판', '민족연희굿패 맘판', '많은 시민여러분들',  그리고 비록 아직 출연은 안했지만, 거리공연을 보며 함께 박수쳐 주신 '정태춘 선배님', '치환이형' 모두모두 고맙고, 특히 거리의 악사 '박 준' 선배님의 공연은 너무 멋졌다.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가 아닌 '두환이, 노태우, 영삼이 떡 들고'란 부분은 정말 너무도 멋진 풍자였다.
공연이 오래 지속될수록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출연진들이 좀 더 섬세하게 준비를 해서 공연장 앞을 지나가는 많은 시민들의 시선과 귀를 확 끌어당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1996년 2월 17일 / 철야농성 13일째, 거리공연 10일째 / 출연 : 꽃다지


오늘도 변함없이 많은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어 주었고, 변함없이 푸근한 만남이 있었다.
첫날부터 매일 오시던 분은 꽃다지 합법음반을 사 가셨고, 또 어떤 아저씨는 꽃바구니와 빵 한 아름을 안겨주시고는 부끄러운 듯 말 붙일 시간도 주지 않고 멀리로 도망 가셨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어제 최병수형님이 가져오신 소형 장산곶매 걸개그림을 걸고 공연을 했더니 무대가 더욱 훌륭해 보였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니, 힘이 절로 난다.  너무나 행복하다.  은진언니, 용호형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1996년 2월 20일 / 철야농성 16일째, 거리공연 13일째
                      / 출연 : 풍물굿패 살판, 노동자문예교육협회, 그리고 꽃다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모여든 사람들.
영하의 기온을 오르내리는 황소바람도 아랑곳 않고, 오늘은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꽃다지 가수와 연주자였던 상희, 명숙언니, 세라언니가 미리 스치로폴 방석으로 좌석을 만들어주어 시민들이 편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극단 현장 언니와 형들이 많이 오셔서 흐드러지는 대동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은진언니 낭군 정혁이 형과 시어머님, 그리고 세쩨 형님 가족분들이 모두 오셔서 서로 힘을 다지고 가셨다. 
엊그제 가졌던 민속놀이(1)이 함께 하는 시민들에게 왜 하는지, 무슨 의미로 하는지 자세한 설명없이 진행되었다면, 이번 민속놀이(2)는 노동자문예교육협회의 부대표 장기호 형님의 적절한 설명과 진행이 곁들여져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 되었다. 교육협회 여러분! 수고 많으셨어요!
음반 판매대와 서명대에도 시민들이 북적북적. 마치 공짜로 투호를 했거나, 제기차기, 줄넘기, 널뛰기, 윷놀이를 한데 대한 미안감이기라도 하듯, 다투어 음반을 사가지고들 가셨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아직 우리 민족성은 사라지지 않은 듯 하다. 단심줄 엮기를 할 때, 서투른 가운데서도 호기심과 감동이 뒤섞인 오묘한 감정으로 시민들과 함께 서로를 가깝게 느끼며, 비단 거리공연 측면에서의 기쁨만이 아닌 좀더 깊은 시민들과 하나됨의 마음이 울려나옴을 느꼈다.
오늘의 성과를 끌어안고, 작고 큰 것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열심히 투쟁에 임해야겠다.  어제 구정날에 이어 오늘도 은진언니 시댁과 친정을 방문하고 어른들께 세배를 올렸다. 어려움이 많으시겠지만, 잘 이겨내고 계신 듯 하다.
아무튼 내일도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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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제목 : 여러분도 기쁘시죠? 와우!!
올린이 : kesiok  (김은영  )    96/03/24 05:07    읽음 :  18  관련자료 없음


와, 우선 박수부터 치구...(짝짜짜짜작짝!!!)
석방소식 듣고, 카수 여러분들 피곤하시다면서도 신나하시는  모삭
그리고 희정이 빙긋 웃는 모습도 너무나 오랫만이었구요.
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정에도, 비정상적이었을 힘든 하루하루를
묵묵히 버틴 여러분 모두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진짜 꽃다지집(홍대사무실)에 놀러가야지...꽃 한다발 사들고
가겠습니다.
물론, 안에서 고생한 원용호, 이은진님께서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느끼신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들 애태운 마음이며,
또 그때문에 속상했을 마음이며 다 털고, 여전히 씩씩하신 모습
뵙게되길 바랍니다. 추운 겨울 지나 정말 봄이 오는군요....
다시한번 꿋꿋하게 싸워온
여러분,"축.하.합.니.다"
금/지/의/벽/을/넘/어/자/유/를/노/래/하/라!!!

 

 

[442] 제목 : 축하!축하!
올린이 : 푸른한강(노지원  )    96/03/24 13:19    읽음 :  12  관련자료 없음


에고,에고,
이제야 경우 봤네요,이은진씨,원용호씨 석방소식을...
마음이 떨려서 축하만 해야겠네요
마음 좀 가라 앉으면 또다시 축하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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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요의 현황과 과제(97년)

전국노련 기관지 "노동전선"에서 편집부에서
97년 노동자투쟁 10주년을 맞아 노동문화를 쟝르별로 돌아보는 기획이 있었습니다.
그 중 노동가요 10년이라는 제목으로 제가 썼던 글입니다.

 

<노동가요의 현황과 과제>

 

1. 들어가며

 

87년 투쟁의 10주년인 올해 초에 우리는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총파업을 단행했습니다. 두달에 걸친 총파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노동자의 힘을 확인했고 우리 노동자들은 여론의 지지를 얻으며 사회개혁의 주체로 부각되었습니다. 그것은 참다운 87년의 10주년이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와 정당건설을 눈앞에 두고 있고 그에 따라 산별시대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세력화 이후의 노동자들의 삶의 변화에 대해 우리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왜 안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이 올바른 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90년대 후반, 조직운동방식의 새로운 틀에 따라 활동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구체적 대안과 정책내용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우리는 노동자 문화가 앞으로 정책적 대안으로 무엇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난관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노동자문화의 범주와 부문운동으로서의 문화운동이 문화전선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다같이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각 장르운동속에서는 그간의 활동을 점검해보고 이 후 문화구조를 어떻게 세울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창작에 대한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공동의 노력들이 시작되고 있는 시기인 것입니다. 노동운동의 급격한 성장기와 격변기에 늘 함께 해온 투쟁의 무기로서 노동가요가 어쩌면 이제는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같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부문운동으로서 조직운동과 동등하게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위해 여기에서는 현재까지 변혁운동의 무기로서 자리매김해왔던 노동가요가 현시기 대안의 문화로서의 그 역할과 이후의 과제를 간략하게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0년의 노동가요를 되돌아보는데에는 몇가지를 구분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노동자 문화의 3주체 즉, 노조 문화부, 노조 문화패, 그리고 전문단체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해왔고, 그 셋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해 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해 왔습니다. 각각의 주체들의 변화, 발전과정을 점검하고 그들의 상호관계를 짚어내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노조문화부에 대해서는 앞, 뒤의 다른 장에서 충분히 다루어질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90년 전노협이 건설을 전후해서 전국문화부장과 문화 담당자들이 모여서 만든 문화담당자회의가 결성되고 지속적인 공동의 모색을 해왔음에도 오히려 현재 민주노총으로 변화, 발전해 오면서 문화부의 독자적인 영역이 줄어 들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부분만 문제제기를 해놓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2. 투쟁의 무기, 노동가요 10년

 

우선 먼저 보아야 할 부분이 전문창작집단과 그 창작집단에서 대중적 요구를 대변해 왔던 창작물의 변화 즉, 노래의 변화입니다. 민중가요의 역사는 7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87년을 우리는 노동가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불려지기 이전의 역사를 보면, 70년대는 수용자들 스스로 노래를 선택해서 부르던 때입니다. 그때는 운동권내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대중가요나 찬송가, 그리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포크풍의 노래들 중에서 운동권 대중들의 재해석을 통해 민중가요로 정착되고 함께 부르던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창작집단이 따로 없고 수용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70년대라는 암울한 상황아래서 진보적 사회인식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변혁운동을 이끌어 오던 지식인 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84년 자율화 조치를 통해 학내에 상주하던 기관원들이 철수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집회공간과 문화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대학 노래패들이 전국적으로 무수히 결성되었고 대학 노래패를 중심으로 한 창작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위적으로 생겨난 노래들을 정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운동을 시작한 단체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내에 노래패 [새벽]이고 같은 단체에서 더 넓게 미조직 계층으로 노래들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1'이라는 음반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지식인들이 이끌어야하는 세력이고 지원해야 하는 세력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생활을 다룸에 있어서도 지극히 지식인적인 관점들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87년 7,8,9 투쟁은 봇물처럼 터져나온 함성이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역사의 주체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만방에 공표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 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 결성되면서 민주노조를 세우려는 노동조합의 행사와 파업현장에 기동성있게 뛰어다녔고, <단결투쟁가>, <파업가>, <민주노조사수가>등의 노래를 전국에 보급하였습니다. 또 87년 6월 항쟁을 통해 급격히 부각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들도 그런 민중의 힘을 담은 노래들을 선곡하여 계속 음반에 수록하였습니다. 순식간에 <광야에서>나 <솔아 푸르른 솔아>등의 노래들은 전국을 석권하면서 퍼져나갔고,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투쟁이 고양되던 시기라는 특성 때문에 노래들의 많은 부분이 행진곡풍의 투쟁가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전국적으로도 각 지역마다 이같은 위상을 갖는 전문노래패들이 생겨났고 지역별로 다양한 관점과 활동내용을 갖는 연합조직이나 협의체를 결성되면서 문예운동의 구심체로 민예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한 노동가요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침체된 조직운동과정과 함께 <민들레처럼>, <누가 나에게 이길을> 등의 서정적인 노래, 일상적인 노래들을 만들어내면서 보다 많은 노동자 대중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들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의 문화로서 노동자 문화를 사고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협의체와 연합들은 자기 활동 기반을 확보하지 못해 침체되거나 발전적으로 해소하였고, 개별단체들도 상당부분 활동의 방식을 바꾸거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체의 생존을 위한 고민속에서 전문 단체들도 [노찾사], [꽃다지], [노래마을] 등에서 [천지인], [희망새] 등 자신의 음악적 색깔로 자신의 대중을 조직해가는 다양한 노래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개인가수들도 배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집회공간과 대중공간이 줄어 들면서 개개인 노동자들의 삶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들의 일환이었습니다. 창작 역시도 80년대말 90년대초의 행진곡풍의 투쟁가나 단조 서정가요들에서 벗어난 록풍의 수용, 댄스곡의 출현등 다양한 형식의 음악속에, 투쟁하는 노동자의 상에서 생활인으로서의 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을 담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직종과 연령대의 노동자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삶의 표현방식이 다양해졌습니다. 그 이전 우리가 노동자라는 범주로 설정했던 사람들의 삶이 바뀐 것도 한 축이겠지만 중심축을 이루어온 사람들의 변화라기 보다는, 노동자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이전에는 접촉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고와 삶의 양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폭넓게 조직되면서 그 범주가 달라진 것이 또 한 축일 것입니다. 이렇듯 노동자들이 그 수와 힘을 더해감에 따라 노동운동의 조직방식이 변하고 활동방식이 달라져가는 것처럼 노동가요 역시 어떤 인물의 정서를 어떤 언어로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중심구축의 문제와 노동가요를 둘러싼 창작, 유통, 수용 전반을 포괄하는 문화구조를 어떻게 확대해서 더욱 탄탄하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문선대에서 문화패로 거듭나는 노동자 노래패

 

문화패의 경우, 87년을 계기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노동자 노래패들은 문화부의 산하조직으로 주로 투쟁시기의 문선활동을 자신의 임무로 해왔습니다. 애초에 구성당시에는 문화패로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음에도 시기적인 요구에 노조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조 노래패는 자발적으로 혹은 조합의 요구에 따라 집회에, 그리고 다른 사업장의 지원에 동원되어왔고 그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로지역의 중소사업장들의 연합인 구로지역 노래패 연합과 풍물패 연합, 중동부 지역의 풍물패 연합인 동풍연, 그리고 병노련 서울지부 연합패, 지역 연합패등 연대 활동을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역시 노조 문화패의 많은 인자들이 대부분 간부로 올라가거나 집회에의 동원등으로 지체 동력이 떨어지게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문화패의 위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문화패를 문선대와는 다른 질로 사고하게 되었습니다. 문화패를 문화적 욕구를 토대로한 자주적인 대중조직이라고 규정하면서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욕구에 의해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노래패 내부에서는 핵심인자를 꾸리고 일상활동 정착을 위한 내용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전문패들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들이 노동자 노래패안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이전처럼 집단적 수용의 방식으로가 아닌 개별적 수용의 방식으로 노래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생겨나고, 합창단으로의 노래패라는 규정뿐만이 아니라 그룹사운드의 결성이라든가, 중창단의 출현, 또 반주팀의 결성 등 다양한 조직형식을 띠게 됩니다.
조직형식외의 음악적 부분에서도 이전에 비해 기능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급격히 기능적 욕구도 상승하게 되고, 자체 창작이나 재창작등의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패들을 수용자 집단 혹은 노동자 문화의 주체로 사고하기보다는 조직의 하부체계로 여기는 관행들로 인해 문선대로서의 하중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고, 그로인해 다양한 문화적인 욕구를 수렴해 내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문선활동이라는 역할은 전문패에게나 노동자 노래패에게나 아주 중요한 역할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선대로서의 자기질을 갖는 것과 문화패가 투쟁시기 내부의견수렴을 통해 문선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민주노총 출범 이 후 문선대와 문화패의 구별정립을 위한 논의들이 몇번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개념이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하고 실제 구성하고 있는 인자들의 인식의 문제와 현실적인 조건의 문제를 놓고 보면 좀 더 깊이 있는 논의와 경로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4. 대안의 문화로 노동자 노래를...

 

지난 10년동안 우리는 집단의식의 표출로서의 노동자 문화를 일구어왔고 새로운 집회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또한 투쟁의 문화를 만들어왔습니다. 그속에서 노동가요는 공동체성을 표현하는 노래로,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의 의지를 다지고 열기를 고조시키는 수단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시기 우리가 달라진 시대에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 내고 다양한 삶의 표현으로서 문화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면 그간의 성과를 챙기는 것조차도 힘든 엄청난 문화적 대치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대안의 문화로서 노동자 문화를 중심에 세우고 건강한 노동자의 문화가 타 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3주체가 올바른 관계로 정립되면서 함께 풀어가야 하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것이 노동자문화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길이고 또한 문화적 경쟁력을 갖는 방법입니다.

 

대중가요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노동자 문화를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지는 대중가요를 막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용자들이 스스로 문화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문화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도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 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판의식을 가지고 또 자신의 이유를 가지고 선택해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인식교육과 내용이 필요합니다.


또 스스로의 문화적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경연대회든 소공연이든 조합원대중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문화역량을 표현하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이후 노동자 문화의 활성화방안과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지난 10월 12일 노동자 문화제에서도 드러났듯이 노동자 노래패의 기능적 수준과 욕구는 엄청나게 상승되어 있고, 자신들의 특성에 맞는 노래를 선별해서 재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이미 몇몇 노래패에서는 자체 창작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창작의 성과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것의 추진주체가 누가되든지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렇게 검증된 노동자노래는 전문단체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보다 질높은 노동가요를 만들어내도록 할 것입니다.

 

전문단체 역시 문화운동을 사회운동속에서의 부문운동으로 사고하면서 스스로 창작자로서 열려진 사고를 가지고 노동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와 정서를 포착해서 그에 맞는 언어로 음악을 창작해야만 대중들과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1차적인 대중성을 확보하는 길이고 중심을 세우는 일입니다. 2차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공간과 조건의 해결에 있습니다. 즉 문화구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유통의 문제, 제반 악법에 대응하는 문제, 공영방송들의 활용의 문제등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좋은 노래를 만들어도 불려질 자리가 없다면 그 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구조의 구축이 언더그라운드 블록의 형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민중가요의 구조를 확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누군가가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단체들과 수용자들이 함께 검증해내고 이후의 정책을 제대로 세울 때만이 그것의 옳고 그름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마치면서

 

올해 들어 여러번 한 이야기이지만, 작년 12월 20일 '민중가요는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노동문화월례포럼을 했었습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리하게 논쟁을 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총파업이 터지자마자 문화단체들, 특히 노래단체들은 너도 나도 앞다투어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함께 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는 1주일 앞도 예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96년인 작년 초에 노래책에 실린 노래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었을 때도, '민중가요는 죽었다'라는 포럼을 준비할 때도, 그리고 총파업이 터지자 부랴부랴 따라다녔을 때도 노래운동진영은 제대로 모이질 못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사안이 있었음에도 사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아니 합의된 대응책을 내지도 못했습니다. 정책의 부재를 하소연만하고 스스로 정책을 세우는 것에는 게을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건강한 노래문화를 만들어가고 수용자층을 조직해가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합니다. 어떤것만이 옳다고 주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문화는 그런 다양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분야입니다. 그러함에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정책과 이념은 방법론의 차이를 드러내더라도 우선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바른 정책을 통해 부문운동으로서 새롭게 문화운동을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는 제기를 강력하게 하면서 부끄러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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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7

7. 문화노동자 연영석이 사는 방식 <게으르게 살고 싶다> (135호)

 

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창작되고 발표된 노래들을 보면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임을 절감하게 된다. 최근 2-3년 사이에 발표된 노래만도 200곡 가까이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를 노래가 없다고도 한다. 창작자들이 민중가요다운 민중가요를 만들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렇게 많은 노래가 만들어지고 솔로가수만도 꽃다지 출신의 류금신, 서기상, 윤미진, 노래마을 출신의 이지상, 손병휘, 윤정희, 노래모임 새벽출신의 정윤경, 조국과 청춘 출신의 곽주림, 천지인 출신의 손현숙등과 이전 노래단체의 맥을 잇고 있지는 않지만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색깔로 대중들과 소통하길 원하는 박준, 박창근, 연영석, 박성환, 견명인 등 열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만큼 많은데, 왜 부를 노래가 없다고 하는걸까... 그 부를 만한 노래의 기준은 무엇일까?

 

요즘엔 대부분의 집회에 가보면 음반을 틀어놓는데 그 음반에 들어 있는 노래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단결투쟁가>, <철의 노동자>에서부터 <바위처럼>, <서울에서 평양까지> 등 흔히 우리가 대표적인 민중가요, 노동가요라고 손꼽는 노래들은 다 들을 수가 있다. 이른바 짜집기 테입이다. 노조 집행부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보급한 음반인데,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이런 노래들을 도대체 누가 만들고 누가 불렀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노래는 누가 만들고 불렀던 상관없이 대중들에 의해 살아남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고, 그리보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닐성싶다. 그러나 제도권의 상업적인 대중매체에서 소외되어 있는 민중가요는 주로 집회나 문화제라고 하는 시공간이 유일한 유통망이며 소통채널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는 몇 안된다. 집회 시간과 횟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도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 잘 알고 있는 단체, 가수만을 선호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대중문화 어떤 것을 좋아한다고 할 때 그 욕구나 취향이 어디서 비롯되어 발현, 형성되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을 정확하게 잘 표현한 "열개의 취향과 한 개의 해방정서"라는 모토를 달고 등장한 연영석은, 약간 특이한 경우이긴 하나 전형적인 저예산 독립음반인 1집, [돼지 다이어트]를 들고 97년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음반을 내고 초기에는 잘 불려지진 않았지만 꾸준히 활동을 하며 이제는 어느덧 '문화노동자 연영석', '게으른 피 연영석'으로 통한다.

 

문화노동자 연영석의 2집 [공장]에 수록된 <간절히>, <게으르게 살고 싶다>, <노란 선 넘어 세상>, <밥> 등은 가장 구체적인 우리 삶의 모습이면서 또 우리가 타성에 젖어 접어놓고 가던 일상투쟁의 한 측면이다. 노동자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언어가 되어 굳이 노동자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떤 것과의 변별점으로 느껴지지 않는 요즘, 누구는 세상은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 없이 오히려 점점 더 조여오는 우리들의 삶을 보면 일상의 모든 것과 맞서 싸울 때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싸워가는 우리의 삶 역시 자본주의가 우리를 길들여온 사상과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전선은 하나다. 그러나 그 전선은 여러형태로 우리의 취향, 욕구, 자율성까지도 억압하면서 다가온다. 각각의 상황에서 좀 더 힘이 되는 노래들이 필요하다면 그들을 만나보자.

 

단체의 음악은 그 나름대로 색과 힘이 있고, 솔로의 음악은 또 그 나름대로의 맛과 질감이 있다. 거기에도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가치관과 전망이 있고 또 살아가면서 투쟁해야 하는 것, 간혹은 우리가 사소하다고 놓아버렸던 이야기들이 있으며,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삶과 정서의 한측면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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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6

6. <착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착한 메시지 (133호)

 

90년대 중반에 들어서 대중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자 대중집회나 파업장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급되거나 불리어지는 것도 한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노래단체나 개인가수, 창작자들은 일상적인 소통공간들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를 해야만 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권진원', '윤도현', '이정열'의 활동 영역을 제도권 방송까지 넓혀내고 종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전문기획사 '다음'과 독립적인 재정과 제도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활동을 하려는 '인디'레이블의 설립등은 다양한 가수집단의 활동을 보장하고 창작과 수용의 토양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하면서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들이었다.

 

긴혹 스스로를 부각시키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과거 민중가요의 자산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는 내용들이 있어 설립초기에 많은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으나, 그들의 시도와 노력들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을 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출구를 뚫어 내려는 생존전략이었다. 그 시도는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수용자를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데 일정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유통구조를 구축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은 공고한 기성의 벽에 부딪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여전히 그들이 대중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장은 국한되어 있었다. 2,3년간의 노력들이 '소수집단들의 의미있는 어떤 실험' 정도로만 인식되고, 이제는 어떤 구조에서 어떤 내용과 음악으로 대중을 만난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으로만 남게 된 듯 보인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97년말 대통령 선거와 98초부터 불어닥친 IMF 한파, 실업대란을 겪으면서 대중들은 위축되고 불안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국민의 정부가 무엇인가를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과연 그럴까/ 아직도 대중들은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걸까?

<착한 사람들에게>는 80년대 말 [노동자문화운동연합](구민중문화운동연합)의 노래집단 '새벽'에서 활동하다가 '새벽' 해산 이후 노동자 노래패 강습활동, 창작활동을 개인적으로 해왔던 정윤경(가수/ 작곡가)이 음반작업을 준비하면서 만든 노래이다. 몇 년의 공백이 지나 그가 어떤 구조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나타난 것이다. 서기상, 연영석, 윤미진, 류금신 등, 그들처럼...

 

98년 4월에 발매된 꽃다지 출신의 솔로가수 서기상 1집 음반과 98년 1월 발표된 정윤경의 싱글 음반에 수록되어 각각 다른 느낌으로 맛을 내고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선동하는 듯한 전술가요같은 가삿말을 아주 편안한 언어로 빗대서 표현하고 있지만 물론 특정정당을 지지하거나 하는 내용은 아니다. 현재 유.정.고밴드의 일원이기도 한 정윤경의 <착한 사람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인식과 그의 오랜기간 음악활동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노래이고, <문민시대>, <주문>, <나의광주>, <친구에게> 등과 함께, 들으면 들을수록 맛나는 노래이다. 그는 이시대를 살아가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지금은 우리가 스스로를 믿어야 할 때. 부족하더라도 잡은 손 놓치지 말아야 할 때. 그러나 너무 힘들면 같은 날에,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로 욕이라도 실컷해봐요. 아직 부족해서라는 말은 말아요. 아직 때가 아니라서 라는 말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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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5

5.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인생> (132호)

 

96년 2월 3일,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 시경 정보과에 연행되었다. 위반 사항은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 즉, [희망의 노래 1, 2, 3, 4]에 북한의 사상에 동조, 혹은 찬양하는 표현의 노래들을 수록하여 판매한 혐의였다. 공소장에 언급된 노래들은 주로 <갈꺼야>, <반미 출정가>, <출정전야>,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6월의 노래> 등 '자주', '민주', '통일' 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거나 과거 군사독재를 '적'이라 표현한 노래들이었다.

바야흐로 문민정부가 들어선 시대에 심의를 통과한 노래나, 이미 대학가와 진보진영에서 수 십만이 알고 함께 부르는 노래들이 이적 표현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를 구속한 검사는 내가 꽃다지 대표인 것도 잘 알고, 꽃다지가 <바위처럼>을 열린 음악회에서 부르는 것을 보면서 그런 노래를 방영하는 방송이 한심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단다. 그 검사는 80년대 대학물을 먹었다는 소위 386세대였음에도 투철한 반공의식과 철저한 편집증에 빠져있었다.

 

구속이 확정되던 날(그날은 두 번째 결혼 기념일이었다.) 면회를 온 남편은 꽃다지 식구들과 민가협 어머니들, 그리고 주변의 문화 활동가들이 매일 탑골공원 앞에서 규탄집회와 거리공연을 하기로 했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 구치소로 날아온 수많은 편지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탑골 공원의 거리공연에 참가하면서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힘내라는, 작지만 힘이 되고 싶다는...

 

꽃다지의 거리공연은 내가 구치소에 있던 50일간 계속되었고, 그들은 돌아가면서 매일 면회를 왔다. 보석출감 후 4월 초에 열린 꽃다지 콘서트에 나는 게스트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의 사건과 구치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지켜봐 주고, 함께 한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50일간 내 입가에서 맴돌던 노래, 그래서 눈시울도 많이 적셨지만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던 노래를.

내가 꽃다지 식구들에게 늘 해왔던 '우리, 우리가 부르는 노래 가사처럼 살자'라는 말을 다시금 되뇌인다. 앞으로도 내가 지칠 때면 늘 힘이 되어 주리라 믿는 노래, 행복한 인생을.

 

- 삶은 나에게도 주어지고, 때론 햇살이 드리우고, 때론 견디기 힘든 시련을 만나 방황도 했었지만. 그런 나의 삶에 지금까지 가장 소중한 선택은 진정 사랑할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을 산다는 것. 잠시 쉬어갈 순 있지만 주저 앉지말고, 넘어질 수는 있다해도 절망하지 말고.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순간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늘을 살아야지 - 조민하 <행복한 인생>, [꽃다지 발췌곡집]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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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4

4. <전화카드 한 장>에 실어 보내는 동지애 (131호)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땐, 네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 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92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 국면이 늘 그렇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패배의식을 안겨주었다. 80년대 말 승승장구하던 노동운동 조직에 위혐을 느낀 자본과 정권은 전노협 출범과 같은 날, 기만적인 3당 야합을 단행했고, 이는 곧 단위 사업장을 넘어 총자본과 총노동의 전선을 형성하면서 엄청난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으로 이어졌다. 91년 초, 육,해.공군 상륙작전으로 진압당한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열사정국,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간의 활동을 되짚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들레처럼>,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골리앗의 그림자> 등 서정적인 일상가요들이 이전의 행진곡풍의 투쟁가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불려졌고, 조직운동도 상대적으로 침체되었다. 

그렇게 스스로와 조직을 추슬러 가면서 맞이한 대선 국면은 그나마 안정적인 활동을 해오던 만은 조직과 단체들을 분열, 혹은 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선 이후 대통령 이름만 바뀐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수많은 동지들이 과거의 방식을 부정하며 떠나갔다. 대선의 후유증으로 지치고 무기력해져있던 93년 초, 꽃다지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조민하는 우연히 길에서 오래 전 같이 활동했던 옛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동지가 자신을 보고 힘들어 보인다고 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전화를 하라면서 주고 간 전화카드가 바로 이 노래를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93년 겨울 꽃다지 콘서트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에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불리어지면서 공연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그 후로, 동지에게 전화카드를 선물하는 운동권 내의 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고, 활동에 지쳐 다소 이기적이 되기도 하고, 회의적이 되기도 했던 우리들에게 따뜻한 동지애로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었다.

 

93년 꽃다지 [비합법 음반 2집]에 수록되고, 94년 [꽃다지 공식음반 1집]에 재 수록된 이 노래는 <민들레처럼>, <행복한 인생>,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 <강철 새 잎>, <네 가슴에 하고픈 말>,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등 조민하의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삶의 모습이 담긴 주옥같은 노래들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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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3

3. <포장마차>에서 세상씹기 (130호)

 

하루종일 고된 노동을 마치고 나선 퇴근길, 다리도 후들거리고 온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졌지만 그래도 동료들과 함께 소주 한 잔 걸치러 들어선 포장마차. 그곳에서 공장에서 있었던 여러가?일들을 이야기하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다독거리기도 한다.

 

풍자 가요는 대체로 우리의 세력이 상승되는 시기, 주체의 의지가 충천할 때 만들어지는 노래 형태이다. <포장마차>는 80년대 말 '노동가 자판기'라는 별명을 가진 작곡가 김호철이 만든 뽕짝풍의 노래이다. 80년대 구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총파업 투쟁이 일어나자 잔신의 장기인 음악을 통해 노동자들의 노래를 만듥, 그 자리에서 노래패를 연습시켜 다른 사업장이나 집회에서 문선활동을 하면서 보급을 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89년 구로지역 노래패 연합에 강습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처음 만난 노동가요 작곡가 김호철은 그동안 들었던 김호철의 노래들이 주는 느낌이 전혀 연결이 안되는 아주 인상좋고, 웃음이 해맑은 그런 아저씨였다. 강습이 끝나면 가리봉 5거리에서 곱창, 닭똥집 등과 소주를 마시며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내일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똥집이 벌벌벌, 닭다리 덜덜덜, 잔업철야 지친 몸, 소주로 달래네. 세상은 삐까번쩍 거꾸로 돈다네. 제자리 찾아 간다네... 깡소주에 문어발, 생맥주 노가리, 오공비리 대머리, 속이구 노가리..."

 

노동자 노래단 3집 [노동자 행진곡]의 수록곡이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조직, 전국 노동조합 협의회를 건설하기 위한 공연인 "노래판굿 꽃다지"가 전국 순회 공연을 할 때 극 중 농성장 장면에 '미아리 아줌마'라는 호칭의 가수 김애영이 지원방문을 와서 파업장에서 흥겹게 부르는 노래였다. 엄숙하고, 비장한 투쟁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승리적 낙관과 넉넉한 정서가 잘 드러나 있는 노래로 그 시기의 수많은 전술가요들 속에서 빛나는 일상가요이자 풍자가요이기도 하다.

 

87,88년 전국을 휩쓴 민주노조 사수투쟁은 노동자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시킨 소중한 경험이었다. 과거에는 공순이, 공돌이라는 호칭으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퇴근 후에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공장에 다니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지식인적이고 고급음악적인 노래관행들도 바뀌게 된다. 이른바 하층문화적 정서, 노동자 계급적 정서를 노래가 체득하게 된 것이다.

 

전술적 투쟁가요의 시기였던 80년대 말, <민주노조 사수가>, <파업가>, <단결투쟁가>, <전노협 진군가>,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구속동지 구출가>등은 제목에서부터 풍기듯이 그 시기 노동운동의 전술적인 과제를 노래에 담아 함께 부르면서 이슈를 외치고, 투쟁 의지를 다지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즉, 공동체적 정서와 투쟁의 정서를 공유하는 중요한 무기는 그동안 자신의 문화를 갖지 못했던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일상의 정서를 담은 <포장마차> 등을 시작으로 투쟁의 시기뿐만 아니라 일상적 공간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일상가요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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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속의 역사, 역사속의 노래 2

2. 진보진영의 영원한 애국가 <임을 위한 행진곡> (129호)

 

70년대 후반의 자생적인 민중가요가 사회적 영향력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낸다는 검증을 통해 의식적인 민중가요 창작활동이 시작되었다. 주로 대학 내 노래서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까지 단지 취미 써클이었던 노래써클들이 운동성을 획득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 광주항쟁과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난 뒤라 학생운동 진영과 진보진영은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에 만들어진 노래의 대부분은 비장하고, 억압적인 세상에 대응하려는 굳은 의지, 희생등이 부각되었다. 이른바 단조 행진곡의 시대.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시기에 만들어져 불려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노래는 81년에 김종률이 백기완 선생님의 시들 중 일부분을 인용하여 만든 곡으로, 광주항쟁 당시 희생당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창작된 황석영 등이 제작한 '빛의 결혼식'이라는 공연에서 발표되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84년은 전두환 정권이 학내에 주둔시켰던 기관원들을 철수하고 학원 자율화 조치를 취했던 해였다.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학내에서 대중적인 집회나 공연들이 많았고, 학교 안에서 그래도 흔하게 민중가요를 들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물론 집회 이후 교문으로 행진을 하면 가스차를 앞세운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학교 건물안까지 마구 들어오긴 했지만.

 

그러하던 대학 입학초기, 4.19와 5월 광주의 이야기를 글로, 이야기로 전해들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고, 몇 날 며칠을 고통스러워 했었다. 광주 이야기와 함께 들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른 오월노래들이 절망과 어두움을 표현한 것에 비해 광주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담은 곡인데,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87년 6월 항쟁 때이다. 백만이 넘는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모여 집회를 하면서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선구자>, <우리의 소원>, <아침이슬>, <상록수>, <임을 위한 행진곡> 등 몇 안되는 노래들이었고, 집회공간을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는 가사말이 스스로와 서로에게 의지를 다지는 의미로 다가오고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오래동안 불려지고 있는 곡이다.

 

지금은 진보진영의 애국가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지만, 며칠 전 어느 게임 사이트에서 게임음악으로 이 노래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군다나 역시 민중가요는 어떤 노래가 고정적으로 민중가요라는 규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리어지고, 공감대를 만들어내면서, 또 부르는 사람들과 그 공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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