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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공연의 의미

거리공연, 노동문화의 새로운 접점 창출 계기로......

 

                                                  

노동문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 노동자가 향유하는 문화? 노동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 아니면 노동을 소재로 한 예술활동? 노동조합의 문선활동?
이러한 것이 진정한 노동문화의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문화는 무엇인가? 지금 시대에 진정 노동문화가 존재하는가?


마치 노동문화라는 영역과 대중문화라는 영역을 다른 동그라미로 그려놓고 사람들은 밖에서 살다가 필요하면 한가지 원을 선택하여 들어갔다 다시 나오고, 또 다른 원에도 들어가 보고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대중과 노동자로 나뉘어져서 노동자는 노동문화를, 대중들은 대중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대중이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각성하기 시작하면 그는 대중이라는 집단을 떠나 노동자라는 집단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일까? 노동문화라는 것의 실제 내용과 형식은 어떤 것인가?


노동문화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엄청난 질문들에 대해 하나하나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들에 대해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단순하게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엄청난 물량의 대중문화에 노출되어 있게 되고 그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집과 풍경, 그리고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들, 이러한 모든 것은 내 자신이 처한 조건(부모, 경제적 요건, 사회적환경, 교육환경등) 속에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느끼도록 훈련되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우리들의 정서와 취향, 그리고 문화는 자본주의의 상품화 전략과 경제논리로 재단되고 가치지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기것인양 이야기들을 한다. 나는 이런 음악이 좋아, 이런 스타일의 의상이 세련된 거야, 저 모양은 매우 예뻐, 라고.. 마치 그것의 가치에 대한 판단까지가 정확한 것처럼... 그리곤 '나는 나야' 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고, 또한 그것은 개성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라든가 옳다, 그르다라고 평가할 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거꾸로 한 번 되집어 보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렸을 때 자주 먹던, 아니면 어떤 특별한 날(초등학교 졸업식같은) 기분좋게 먹은 그런 음식일 것이다. 반대로 먹어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책에서든 광고에서든 접해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전혀 상상도 안되는 음식에 대해서는 좋아한다는 개념이 생기지도 않거니와 먹고 싶다는 욕구도 생기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호기심이 강하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은 기존 관념을 떠나 도전해 접해보고 나름대로 평가를 할 기회를 갖게된다. 그러나 그 기준도 역시 자신이 익숙해져온 그 경험에 의해서일 것이다. 문화는 바로 그런 특성을 지녔다. 접해보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낯설고 약간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늘 접해오고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친근한 느낌을 갖게 되는...


또한 사회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리고 고도의 상품판매 전략에 따라 미적 기준도 변화해 왔다. 70년대 영화에서 보여지는 미남, 미녀형과 그 시대의 가장 세련된 복장이라는 스타일들은 지금 우리가 보면 모두들 촌스럽다(!)라고 여겨지고, 80년대 역시 그러하다. 그러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바뀌어 왔고 우리 시야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장면들도 점점 더 서구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유럽식의 빨간 공중전화박스, 광고판의 외국 모델들, 외국어로 된 상호들, 알아들을 수 없고, 아무 의미없이 반복되는 이미지들, 그리고 사람들의 생김새와 스타일까지도...


물론 이런 현상은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의해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조장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취향과 정서가 애초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목적의식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염색체가 내 외모와 성격 등 여러 가지를 규정하는 것처럼 마치 나의 유전인자나 염색체 속에 댄스음악이나 힙합을 좋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햄버거나 피자를 좋아하는 음식 취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스스로 나의 취향이라고, 그리고 나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된 나의 것일까? 그리고 스스로 나자신이라고 규정하는 자기 정체성은 정말 내가 맞는걸까? 스스로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의식에만 존재하고 자신의 몸 속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다른 것을 좋아할 가능성, 낯선 일이지만 자꾸 해봄으로서 그것을 즐기고 싶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런 저항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머리 속으로는 생각하지만 몸은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TV를 보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고 반박을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TV를 보는 것, 그리고 TV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이 모두 나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오늘 회사에서 매우 부당한 일을 당해 너무 화가 나고 그 일 때문에 회사도 나가기 싫을 정도여서 노조에 이야기해서 싸우든지 회사를 때려 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집에 와서 TV를 보다 보니 아무 생각없이 스트레스도 모두 해소되고 마음에 안정도 찾게 되었다. 그런 후에 오늘 있었던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나쁘다기 보다는 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하게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화해를 하고 또 기분좋게 출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말 인간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무척 단편적인 예일 수 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우리의 지향을 생각해보면, 내 속에 있는 두 사고의 갈등이 이 순간 드러나게 된다. 내가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부분, 즉 노동자로살아가면서 사회적인 모순에 맞서 싸워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는 삶과 현실에 안주하고 인간적이라는(지극히 자본적인 이데올로기로 쓰여지는) 삶의 모습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대중문화가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종교가 그러하듯이 현실에 안주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여 대리만족시켜주고, 배출할 출구를 만들어 줌으로서 진정 노리는 효과가 무엇인지,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면서 착취당하면서 빈곤한 우리 삶을 미덕으로 만드는 그 이면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러나 일방적으로 쏟아부어지고, 익숙해져 버린 대중문화의 상업성과 향락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TV를 켜고 그것에 마취되고, 또한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정보가 대부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조차도 내 느낌보다 매스컴에서 이야기하는 기준에 맞춰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박사가 그랬다던가, 어느 프로에서 설문조사 결과가 어떻다더라 등등... 하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조차 대중매체를 통해 본 어떤 근사한 이미지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다양한 간접 경험과 정보를 통해 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욕구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중요한 실천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나의 선택과 실천없이 마치 모두가 다 원하는 것은 나도 원하는 것인양 욕구조차 허위이고, 이것들의 실현도 단지 스타를 통해 해소하고, 내가 못이룬 꿈들을 드라마를 통해 대리 충족하기도 하고, 가상의 만족을 얻게 되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그건 정말 대중매체의 노예일 뿐, 나는 아닌 것이다. 아니 내가 어떤 것을 나의 의지로 표현한다고 한들 그것조차 자유롭냐 하는 문제이다. 이런 예들은 우리주변에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흔하게 존재한다. 즉 문화현상이나 행위 하나하나에는 특별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놓여 있는 구조가 어떠하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누군가의 편에 서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가진 욕구나 취향, 그리고 많은 정보에도 역시 이데올로기는 존재하고, 그 이데올로기에는 분명한 전선이 있다. 또한 내가 무의식중에 하는 이야기나 행동 하나하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여를 하게된다.

 

그렇다면 노동문화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를 하자면 노동자적인 관점을 토대로 한, 주체적인 집단의 공동체 문화, 그것을 통한 자본적 질서의 극복과 공동체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나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내가 가진 욕구, 사고, 행동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게 된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스스로가 느끼는 주체적인 감성과 취향을 찾아내고, 그에 맞는 충족법, 그리고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서 자신들만의 창조적인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함께 영위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노동자 스스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고 생활을 재배치하여, 그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일상영역에서의 삶의 변화는 현장에서의 삶에 의해 많은 부분 규정받기 때문에 현장에서 임투를 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인간적인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다른 영역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조금 개량하거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물질적 가치를 확보하고자 하여 그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본주의적인 질서를 공고히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 창조적인 노동, 그리고 주체적인 삶과 거침없는 표현, 자율적인 생활이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재구성되어 자본적 질서를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노동문화의 본질적 의미이다.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주체적 선택과 작은 실천으로부터 노동문화는 꽃피워지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 공동체적 질서로 재편되어 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일상의 영역에서 문화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실제 삶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삶과 사회는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영역에서 창조적인고 주체적인 문화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의 구조 속에서는 참으로 어렵다. 방송을 통하지 않고, 어떤 것들이 가능할까? 바로 문화소모임이나 함께 하는 문화생활과 교육,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서로가 교감을 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 외에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새로운 일상영역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창작단체들이 자기 공연들을 하고, 음반이나 비디오등을 제작하는 것도 바로 일상영역에서 이러한 접점을 창출하고, 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리공연은 바로 새로운 접점을 창출하는 기회이다. 시기적인 이슈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이제는 생활에서 느껴지는 제반 문제들이 문화적으로 표현되는 장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또다른 문화 양식으로 정착되어 가야한다.
작은 실천의 계기로,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는 소통의 장으로 자리잡아 가야한다.

 

- 99년 즈음에 인천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 소식지 [동네방네]에 실었던 글인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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