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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영역을 이야기하자> - 1999년
-금속산업연맹의 대중가요와 노동가요에 대한 노동자 의식 조사 결과를 보고
1.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들어 노동자문화운동의 독자적 구조구축을 위한 논의가 진행중이다. 그 논의의 중요한 출발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영역에 대한 접근 문제인데, 일상적 삶이 개인적인 취향과 욕구를 근거로한 취미나 여가활동의 부분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으로 접근되어지고 문화투쟁의 장으로 전환되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93년부터 노동가요를 집회나 시위공간에서만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영역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어왔다. 제도권 유통구조의 활용이라든가, 창작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 콘서트 문화의 정착, 매체 개발 등이 그런 노력들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일상적 영역으로의 접근에 있어서 의식의 문제와 의사소통 구조의 문제는 매우 풀기 어려운 과제였고, 창작집단들은 집회나 시위 공간이 아닌 영역에서 노동자대중들과의 접점을 어떻게 형성하고, 그를 통해 창작의 방향을 잡아갈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의 많은 측면이 노동자문화운동을 조합내에서만 이루어지는 문화활동으로 보거나, 도구로만 사고해왔던 점에 있다. 노동자문화운동을 노동자들의 취향으로 접근하여 조직하려고하는 편의적 사고와 조합밖의 생활에 대한 문제를 등한시해온 결과로 노동자들은 자신의 문화생활을 단지 소비(그들의 임금을 다시 자본에게 되돌려주는)행위로만 인식할 뿐, 삶을 주체적으로 창조하고 구성하는 방식과 의식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금속산업연맹에서 노동자 문화의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보여진다. 더 의미있어지기 위해 설문 결과에 대한 차분한 정리와 그 내용을 근거로한 이슈화, 그리고 다시 올바른 문화 사업으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느낌 정도의 수준으로 글을 풀어가고자 한다.
2, 노동자의식의 이중성(설문조사를 중심으로)
금속산업 연맹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노동자문화에 대한 잘못된 의식과 노동자성과 자신의 의식간에 심각한 분리현상을 읽을 수 있다.
우선 대중문화와 노동자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없고, 자신들의 활동의 근거와 원칙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항목들로,
노조의 집회에 대중가수를 초청하는 것에 대해서 43%가 반대입장을 표시 했으나 찬성한 입장도 39.8%가 되며, 17.2%가 그저 그렇다라고 답변을 했고.(여기에서 그저 그렇다는 입장은 대중가수 초청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조합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대중가수를 초청해도 좋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60.9%가 찬성입장을 표시했고, 23.1%가 반대를 했다. 이것은 노동자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가 무척 의심스러운 대목이면서 또한 노동가요와 대중가요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문화를 단지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노동자 의식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이것을 보여주는 항목들은 여러 가지 이다. 노동가요는 노동자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85%가 긍정을 했지만, 노동가요가 나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58.2%이고 다시 노동자 문화활동이 지금 나의 감정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18.3%만이 긍정을 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이중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라는 집단으로서의 계급과 자기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의미있는 부분이고, 이것은 단지 노동자문화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이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예는 H중공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한 의식조사 보고서에서도 드러난 적이 있다. (신병현,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현장에서 미래를, 98.10, P 141-164)
이런 의식의 이중성은 노동가요를 부르거나 듣는 행위가 특별한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노동가요를 부를 때 구속감을 느낀다는 질문에 58.2%가 그렇지 않다, 17.6%가 그렇다라고 답변한 반면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에 44.5%만이 긍정을 한 점이라든가, 노동가요를 부를 때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8.9%나 된다던가, 노동가요를 부르거나 들을 때 자신이 노동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71%였으나, 자식에게 노동가요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에는 21.7%만이 긍정적 반응을 표시한 점 등을 볼 때 노동자라는 의식과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자신의 삶 전체와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한 부분에서만 존재하는 동떨어진 영역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중문화에 대한 태도인데, 대중가요를 거리낌없이 부른다(60%), 대중문화는 나의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61.3%), 회사에서 대중가수를 초청하면 반드시 보러갈 것이다(41.7%) 등등의 항목에서 보여지듯이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대중문화를 별 문제의식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90년대 대중문화가 더욱 발달하고 다양해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고 젊은 층일수록 더 심해진다. 노동자 문화활동이 일상적 삶이어야 하고, 그런 관점과 방식으로 조직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여전히 소비행위, 개인적 취햫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고, 공동체적 삶의 복원과, 인간적인 삶의 영위하는 측면으로 접근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부분은 뾰족한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문제라고 비판만 할 지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제를 제기하는 지점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노동가요가 의식적으로 하는 활동, 일정하게는 필요한 부분이긴하지만 부담으로 작용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부담없는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감각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형태, 소비형태에 대해,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화투쟁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되어져야 한다.
4. 최근 3~4년간의 창작경향의 문제
노동자대중의 잘못된 인식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창작집단의 창작경향에서도 문제들은 드러난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의 노동가요는 많은 노래들이 구호적이었고, 전술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구체적이면서 하나의 장면이 연상되는 노래들이었다. 어깨쭉지에 빛나는 상처 지켜낸 파업투쟁, 막걸리잔 치켜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중에서 -라는 가사는 파업의 과정과 승리의 감동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벅찬 감동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노동가요의 대부분은 일상적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아닌 추상적, 관념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서에 있어서도 생활인의 정서가 아니라 막연히 아름다운 삶이나 당위로서의 운동을 추구하는 소시민적이고, 지식인적인 정서가 강하다. 또 인간적이고, 이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계급적 관점으로 재해석해내지 못하고, 현재 자본주의 의식에 길들여진 대중들안에 있는 흥미로운 취향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의 하나를 늘려주는 역할정도로 대중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관점없이 산만하게 넓혀, 대중의 보편적 인식과 정서의 틀에 맞추려고 하는 잘못된 관행으로 가고 있는 측면이 많다.
반면에 대중가요는 오히려 80년대 사랑타령 일색이던 모습에서 9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는 노래들이 다양해진 것과 더불어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물론 노래의 가사말의 변화만으로 대중문화의 잘못된 구조나 관행이 교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은 노동가요 창작자들이 연구해야 할 점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스밴드의 <오락실>같은 노래는 요즘 우리 아빠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고, 감동이 물씬 전해지는 노래이다.
한스밴드의 <오락실>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장난이 아닌걸 또 최고기록을, 처음이란 아빠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겐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시험성적 아신건 아닐까.
오늘에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 시대에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 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 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에서 신나게 코골며 잠꼬대 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아침은 오고 또 엄마의 잔소리, 도시락은 아빠꺼 내꺼 두 개.
아빠 조금 있다 또 거기서 만나요. 오늘 누가 이기나 겨뤄봐요.
승부의 세계는 어~ 너무나도 냉정해. 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한판.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5. 다시 일상생활 영역으로 접근하자.
우리는 대중문화의 홍수속에 살고 있다. 문화운동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출발했으나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썩 잘 대응을 했다고 하기엔 부족한 지점들이 많다. 80년대의 문화투쟁에 대한 논의나 90년대 장르운동으로의 집중이 지금에 와서 각각 한 부분만을 담당했을 뿐 총체적인 노동자문화예술운동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을 올바른 관점으로 살펴본다면 신자유주의적인 총자본에 대응하는 총노동의 결집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 온 몸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자신의 전 삶을 일관성있게 재조정해왔었던 경험을 되살려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적 삶, 보다 인간적인 삶 - 풍요로운 삶, 질높은 삶이 아닌 -을 추구하는 노동자적 투쟁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 전과정에 흐르는 일관된, 올바른 의식을 만드는 것이 문화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단지 노래패 활동을 하는 것, 집회의 문선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문화운동을 바라본다면 자신의 삶은 분절되어 그 영역마다 편리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기계적인 삶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소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노동자들의 욕구에 기초해서 여러 가지 매개로 조직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한 취향으로 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누구의 편에 존재하는가를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는 것, 그래서 생활방식이 바뀌고, 주체적으로 각성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상의 생활을 조직하고 재구성하는 운동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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