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동가요의 현황과 과제(97년)

전국노련 기관지 "노동전선"에서 편집부에서
97년 노동자투쟁 10주년을 맞아 노동문화를 쟝르별로 돌아보는 기획이 있었습니다.
그 중 노동가요 10년이라는 제목으로 제가 썼던 글입니다.

 

<노동가요의 현황과 과제>

 

1. 들어가며

 

87년 투쟁의 10주년인 올해 초에 우리는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총파업을 단행했습니다. 두달에 걸친 총파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노동자의 힘을 확인했고 우리 노동자들은 여론의 지지를 얻으며 사회개혁의 주체로 부각되었습니다. 그것은 참다운 87년의 10주년이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와 정당건설을 눈앞에 두고 있고 그에 따라 산별시대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세력화 이후의 노동자들의 삶의 변화에 대해 우리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왜 안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이 올바른 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90년대 후반, 조직운동방식의 새로운 틀에 따라 활동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구체적 대안과 정책내용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우리는 노동자 문화가 앞으로 정책적 대안으로 무엇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난관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노동자문화의 범주와 부문운동으로서의 문화운동이 문화전선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다같이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각 장르운동속에서는 그간의 활동을 점검해보고 이 후 문화구조를 어떻게 세울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창작에 대한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공동의 노력들이 시작되고 있는 시기인 것입니다. 노동운동의 급격한 성장기와 격변기에 늘 함께 해온 투쟁의 무기로서 노동가요가 어쩌면 이제는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같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부문운동으로서 조직운동과 동등하게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위해 여기에서는 현재까지 변혁운동의 무기로서 자리매김해왔던 노동가요가 현시기 대안의 문화로서의 그 역할과 이후의 과제를 간략하게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0년의 노동가요를 되돌아보는데에는 몇가지를 구분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노동자 문화의 3주체 즉, 노조 문화부, 노조 문화패, 그리고 전문단체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해왔고, 그 셋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해 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해 왔습니다. 각각의 주체들의 변화, 발전과정을 점검하고 그들의 상호관계를 짚어내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노조문화부에 대해서는 앞, 뒤의 다른 장에서 충분히 다루어질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90년 전노협이 건설을 전후해서 전국문화부장과 문화 담당자들이 모여서 만든 문화담당자회의가 결성되고 지속적인 공동의 모색을 해왔음에도 오히려 현재 민주노총으로 변화, 발전해 오면서 문화부의 독자적인 영역이 줄어 들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부분만 문제제기를 해놓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2. 투쟁의 무기, 노동가요 10년

 

우선 먼저 보아야 할 부분이 전문창작집단과 그 창작집단에서 대중적 요구를 대변해 왔던 창작물의 변화 즉, 노래의 변화입니다. 민중가요의 역사는 7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87년을 우리는 노동가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노동가요가 불려지기 이전의 역사를 보면, 70년대는 수용자들 스스로 노래를 선택해서 부르던 때입니다. 그때는 운동권내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대중가요나 찬송가, 그리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포크풍의 노래들 중에서 운동권 대중들의 재해석을 통해 민중가요로 정착되고 함께 부르던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창작집단이 따로 없고 수용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70년대라는 암울한 상황아래서 진보적 사회인식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변혁운동을 이끌어 오던 지식인 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84년 자율화 조치를 통해 학내에 상주하던 기관원들이 철수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집회공간과 문화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대학 노래패들이 전국적으로 무수히 결성되었고 대학 노래패를 중심으로 한 창작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위적으로 생겨난 노래들을 정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운동을 시작한 단체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내에 노래패 [새벽]이고 같은 단체에서 더 넓게 미조직 계층으로 노래들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1'이라는 음반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지식인들이 이끌어야하는 세력이고 지원해야 하는 세력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생활을 다룸에 있어서도 지극히 지식인적인 관점들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87년 7,8,9 투쟁은 봇물처럼 터져나온 함성이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역사의 주체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만방에 공표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 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 결성되면서 민주노조를 세우려는 노동조합의 행사와 파업현장에 기동성있게 뛰어다녔고, <단결투쟁가>, <파업가>, <민주노조사수가>등의 노래를 전국에 보급하였습니다. 또 87년 6월 항쟁을 통해 급격히 부각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들도 그런 민중의 힘을 담은 노래들을 선곡하여 계속 음반에 수록하였습니다. 순식간에 <광야에서>나 <솔아 푸르른 솔아>등의 노래들은 전국을 석권하면서 퍼져나갔고,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투쟁이 고양되던 시기라는 특성 때문에 노래들의 많은 부분이 행진곡풍의 투쟁가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전국적으로도 각 지역마다 이같은 위상을 갖는 전문노래패들이 생겨났고 지역별로 다양한 관점과 활동내용을 갖는 연합조직이나 협의체를 결성되면서 문예운동의 구심체로 민예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한 노동가요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침체된 조직운동과정과 함께 <민들레처럼>, <누가 나에게 이길을> 등의 서정적인 노래, 일상적인 노래들을 만들어내면서 보다 많은 노동자 대중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들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의 문화로서 노동자 문화를 사고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협의체와 연합들은 자기 활동 기반을 확보하지 못해 침체되거나 발전적으로 해소하였고, 개별단체들도 상당부분 활동의 방식을 바꾸거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체의 생존을 위한 고민속에서 전문 단체들도 [노찾사], [꽃다지], [노래마을] 등에서 [천지인], [희망새] 등 자신의 음악적 색깔로 자신의 대중을 조직해가는 다양한 노래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개인가수들도 배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집회공간과 대중공간이 줄어 들면서 개개인 노동자들의 삶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들의 일환이었습니다. 창작 역시도 80년대말 90년대초의 행진곡풍의 투쟁가나 단조 서정가요들에서 벗어난 록풍의 수용, 댄스곡의 출현등 다양한 형식의 음악속에, 투쟁하는 노동자의 상에서 생활인으로서의 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을 담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직종과 연령대의 노동자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삶의 표현방식이 다양해졌습니다. 그 이전 우리가 노동자라는 범주로 설정했던 사람들의 삶이 바뀐 것도 한 축이겠지만 중심축을 이루어온 사람들의 변화라기 보다는, 노동자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이전에는 접촉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고와 삶의 양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폭넓게 조직되면서 그 범주가 달라진 것이 또 한 축일 것입니다. 이렇듯 노동자들이 그 수와 힘을 더해감에 따라 노동운동의 조직방식이 변하고 활동방식이 달라져가는 것처럼 노동가요 역시 어떤 인물의 정서를 어떤 언어로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중심구축의 문제와 노동가요를 둘러싼 창작, 유통, 수용 전반을 포괄하는 문화구조를 어떻게 확대해서 더욱 탄탄하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문선대에서 문화패로 거듭나는 노동자 노래패

 

문화패의 경우, 87년을 계기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노동자 노래패들은 문화부의 산하조직으로 주로 투쟁시기의 문선활동을 자신의 임무로 해왔습니다. 애초에 구성당시에는 문화패로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음에도 시기적인 요구에 노조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조 노래패는 자발적으로 혹은 조합의 요구에 따라 집회에, 그리고 다른 사업장의 지원에 동원되어왔고 그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구로지역의 중소사업장들의 연합인 구로지역 노래패 연합과 풍물패 연합, 중동부 지역의 풍물패 연합인 동풍연, 그리고 병노련 서울지부 연합패, 지역 연합패등 연대 활동을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역시 노조 문화패의 많은 인자들이 대부분 간부로 올라가거나 집회에의 동원등으로 지체 동력이 떨어지게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문화패의 위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문화패를 문선대와는 다른 질로 사고하게 되었습니다. 문화패를 문화적 욕구를 토대로한 자주적인 대중조직이라고 규정하면서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욕구에 의해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노래패 내부에서는 핵심인자를 꾸리고 일상활동 정착을 위한 내용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전문패들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들이 노동자 노래패안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이전처럼 집단적 수용의 방식으로가 아닌 개별적 수용의 방식으로 노래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생겨나고, 합창단으로의 노래패라는 규정뿐만이 아니라 그룹사운드의 결성이라든가, 중창단의 출현, 또 반주팀의 결성 등 다양한 조직형식을 띠게 됩니다.
조직형식외의 음악적 부분에서도 이전에 비해 기능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급격히 기능적 욕구도 상승하게 되고, 자체 창작이나 재창작등의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패들을 수용자 집단 혹은 노동자 문화의 주체로 사고하기보다는 조직의 하부체계로 여기는 관행들로 인해 문선대로서의 하중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고, 그로인해 다양한 문화적인 욕구를 수렴해 내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문선활동이라는 역할은 전문패에게나 노동자 노래패에게나 아주 중요한 역할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선대로서의 자기질을 갖는 것과 문화패가 투쟁시기 내부의견수렴을 통해 문선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민주노총 출범 이 후 문선대와 문화패의 구별정립을 위한 논의들이 몇번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개념이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하고 실제 구성하고 있는 인자들의 인식의 문제와 현실적인 조건의 문제를 놓고 보면 좀 더 깊이 있는 논의와 경로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4. 대안의 문화로 노동자 노래를...

 

지난 10년동안 우리는 집단의식의 표출로서의 노동자 문화를 일구어왔고 새로운 집회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또한 투쟁의 문화를 만들어왔습니다. 그속에서 노동가요는 공동체성을 표현하는 노래로,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의 의지를 다지고 열기를 고조시키는 수단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시기 우리가 달라진 시대에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 내고 다양한 삶의 표현으로서 문화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면 그간의 성과를 챙기는 것조차도 힘든 엄청난 문화적 대치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대안의 문화로서 노동자 문화를 중심에 세우고 건강한 노동자의 문화가 타 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3주체가 올바른 관계로 정립되면서 함께 풀어가야 하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것이 노동자문화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길이고 또한 문화적 경쟁력을 갖는 방법입니다.

 

대중가요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노동자 문화를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지는 대중가요를 막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용자들이 스스로 문화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문화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도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 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판의식을 가지고 또 자신의 이유를 가지고 선택해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인식교육과 내용이 필요합니다.


또 스스로의 문화적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경연대회든 소공연이든 조합원대중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문화역량을 표현하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이후 노동자 문화의 활성화방안과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지난 10월 12일 노동자 문화제에서도 드러났듯이 노동자 노래패의 기능적 수준과 욕구는 엄청나게 상승되어 있고, 자신들의 특성에 맞는 노래를 선별해서 재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이미 몇몇 노래패에서는 자체 창작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창작의 성과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것의 추진주체가 누가되든지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렇게 검증된 노동자노래는 전문단체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보다 질높은 노동가요를 만들어내도록 할 것입니다.

 

전문단체 역시 문화운동을 사회운동속에서의 부문운동으로 사고하면서 스스로 창작자로서 열려진 사고를 가지고 노동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와 정서를 포착해서 그에 맞는 언어로 음악을 창작해야만 대중들과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1차적인 대중성을 확보하는 길이고 중심을 세우는 일입니다. 2차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공간과 조건의 해결에 있습니다. 즉 문화구조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유통의 문제, 제반 악법에 대응하는 문제, 공영방송들의 활용의 문제등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좋은 노래를 만들어도 불려질 자리가 없다면 그 노래는 아무런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구조의 구축이 언더그라운드 블록의 형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민중가요의 구조를 확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누군가가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단체들과 수용자들이 함께 검증해내고 이후의 정책을 제대로 세울 때만이 그것의 옳고 그름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마치면서

 

올해 들어 여러번 한 이야기이지만, 작년 12월 20일 '민중가요는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노동문화월례포럼을 했었습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리하게 논쟁을 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총파업이 터지자마자 문화단체들, 특히 노래단체들은 너도 나도 앞다투어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함께 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는 1주일 앞도 예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96년인 작년 초에 노래책에 실린 노래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었을 때도, '민중가요는 죽었다'라는 포럼을 준비할 때도, 그리고 총파업이 터지자 부랴부랴 따라다녔을 때도 노래운동진영은 제대로 모이질 못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사안이 있었음에도 사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아니 합의된 대응책을 내지도 못했습니다. 정책의 부재를 하소연만하고 스스로 정책을 세우는 것에는 게을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건강한 노래문화를 만들어가고 수용자층을 조직해가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합니다. 어떤것만이 옳다고 주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문화는 그런 다양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분야입니다. 그러함에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정책과 이념은 방법론의 차이를 드러내더라도 우선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바른 정책을 통해 부문운동으로서 새롭게 문화운동을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는 제기를 강력하게 하면서 부끄러운 글을 마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