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1

이 글은 꽃사람(꽃다지 후원회인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소식지)에 수록하기 위해
93년 말 조민하씨가 정리한 글을
99년 제가 다시 정리하고 뒷부분을 보강해서
꽃사람지에 재수록 했던 글입니다.
현재 '우리시대의 노래' 라는 노래책에도 실려있습니다.

2000년 이 후도 정리를 좀 해야 하는데...
시간이 되는대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 1



Ⅰ.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의 성립

 

 1. 민중가요 문화성립의 배경 - 낭만적 학생운동기의 종말과 새로운 출발


 1975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초헌법적인 긴급조치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이전까지의 낭만적 학생운동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학생운동의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었으며,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운동권의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다른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했으며, 그것은 대학 4년 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은 대중가요의 향유를 거부하고,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전까지의 자신들의 노래문화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게 되었고, 이는 70년대 후반, 민중가요문화를 성립시키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 민중가요의 시작


 민중가요는 처음에는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되었다.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향유층과 별도의 존재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이 시기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민중가요문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이었을 따름이었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포크풍 대중가요성향을 지닌 취미써클 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민중가요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그 노래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3. 데모노래와 복음성가류


 운동권의 노래로서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60년대 이래 불려왔던 소위 데모노래와 기타 몇몇의 노래들이었다. <해방가>, <정의가>, <탄아 탄아>, <바람이 분다>, <스텐카라친>, <러시아농민가> 등에 75년 이후 <훌라송>, <정의가> 등이 운동권 노래로 덧붙여졌다.

 한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교회운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사회운동에서 가지는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교회운동의 발달을 통하여 기존의 복음성가나 외국의 반전운동, 인권운동과 관련한 노래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다시 학생운동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당시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학생운동권에 유입된 노래로는 <우리 승리하리라>, <오, 자유>,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믿음 치솟아>, <보람된 생활>, <이 세계 절반은 나>, <가라 모세>, <춤의 왕>,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혼자 소리로는>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래에서 열거한 대개의 노래들은 얽매임과 해방, 구원의 의미들을 사회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어그러지는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로의 지향과 의지를 담고 있다.


 4. 김민기에 대한 재해석과 그의 변화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김민기의 노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대중가요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방송금지조치로 인하여 대중가요로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김민기의 노래들을 운동권 학생들은 이제 민중가요로서 부르기 시작했고, 김민기의 노래들 중 사회성이 강한 노래들, 미래로의 지향과 적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노래들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또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되었다. (예를 들어, <친구>나 <아침이슬> 등은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난과 결단 등으로 재해석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당시의 김민기 노래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점들은 바로 그것이 곧 민중가요의 중요한 자산이 될 근거가 되었다.

 김민기는 70년대 후반에 군을 제대하고 야학을 체험하면서 유신말기에 들어 작품의 경향이 변화하게 된다. 우선, 작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대신, 민중이라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농민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밝은 지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났다. 이런 노래들로는 <식구생각>, <소금땀 흘리흘리>, <상록수>, <천리길>, <밤뱃놀이>,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이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김민기의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민기의 민중지향성의 최고수준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노래극 <공장의 불빛>(78년)이다. 동일방직 사건을 토대로 만든 이 작품은 민족극운동의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나 민중가요에서도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뮤지컬 같은 작품으로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5. 김영동과 다른 노래들


 60년대 그 맹아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민족극운동은, 공연 예술분야에서는 최초의 예술운동 운직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에 있어서도 연극이라는 장르의 종합예술적 성격, 악가무(樂歌舞)가 결합된 전통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어받고 있다는 특성 등으로 인해 비단 연극뿐 아니라, 춤과 음악까지 결합한 종합적인 연행예술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노래분야에서도 적잖은 작품적 성과를 남겼다. 이종구의 <마라데스>(<소리굿 아구> 삽입음악), <빈산>(김지하 시), 김구한의 <서울길>(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 <개구리 소리>(이오덕 시) 등을 그 성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되고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 <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 한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닌 포크송들(<행복의 나라로>, <서울하늘>, <타박네>, <한중가> 등)과, 그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기>, 동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60년대 대중가요 <아다다>, 민요 <아리랑>, <진주난봉가> 등까지도 이 시기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 있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