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노래와 문화는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레디앙 연재 5 - 갈 수 없는 고향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고향>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⑤] 상경한 여성노동자 현실 서정적으로 그려
 
 
 

84년 서클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선배들과 같이 보러 간 공연은 애오개 소극장에서 열린 [가지꽃]이었습니다. ‘한돌의 노래야’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한돌의 노래로 이야기를 엮고, 그것을 노래와 대사로 연결해 가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대 한소리 출신의 79학번 박미선과 성대 76학번으로 민요연구회 창단 멤버이며, 노동자 노래단과 꽃다지 초대 대표를 지낸 김애영, 두 명이 등장하여 진행한 공연 [가지꽃].
 

   
  
가난한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여성노동자의 이야기인데 <초가을>, <소>, <땅>, <가지꽃>, <난 서울간다>, <휴무일>, <오늘만 넘기면>, <외사랑>, <갈 수 없는 고향> 등의 노래를 이어가며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일상적 언어로 다룬 공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 서울 간다... 오늘만 넘기면...

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학내의 집회나 행사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습니다. 대학 내 대중 집회도 늘어났죠. 시위의 강도도 높아지고, 학도호국단 내에 학생운동 세력이 들어가 대학축제를 대동놀이와 같은 연행예술운동의 성과로 채운다거나 하는 일도 늘어났습니다.

비단 대학 내의 분위기만은 아니었습니다. 80년 광주항쟁의 충격과 패배감으로부터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민운동진영이 일정한 세력을 회복하고 각 이념서클이 조직적으로 회복하며 운동권의 수도 증가했습니다.

재야단체라고 불리는 민민운동단체들도 발족하게 됐지요, 83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시작으로 84년 4월 민중문화운동협의회, 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한국출판운동협의회, 민주교육운동협의회 등 수많은 단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85년 3월에는 이러한 민민운동단체들의 협의체적 연합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발족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니 84년이야말로 80년대 초반의 패배를 딛고 상승하는 분위기의 최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의 발족은 그 이전까지 수용자들에 의해 주도되던 노래문화를 본격적인 노래운동으로 이끌어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70년대 탈춤, 마당극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소극장운동, 소집단 운동으로 존재하던 문예운동이 그 소집단들의 협의구조인 민문협이라는 조직을 발족하게 되었는데, 당시 노래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노래분과로 창립을 하게 됩니다.

 

80년대 초반 자유화의 최정점에서 생겨난 민문협

메아리와 한소리, 석화 등을 중심으로 교류를 해오던 70년대 말~80년대 초반 민중가요 세대들은, 일부는 현장으로 이전을 하였고, 일부는 문화운동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 중 문화운동으로 남은 집단이 바로 나중에 ‘새벽’이라 이름 붙여진 민문협 노래분과의 초창기 멤버들입니다. 문승현, 표신중, 이현관, 박미선, 이미영, 조경옥, 김광석이 주축이 되었고, 후에 문대현, 윤선애, 안치환 등이 결합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84년 봄 애오개 소극장에서의 한돌 노래이야기 [가지꽃]을 시작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음반 발매(서라벌음반), 가을 [또 다시 들을 빼앗겨]라는 공연을 올리는 아주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시기에는 공연을 관람하러 가면 민민운동권의 대부분 선배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보러왔고, 서로 인사하고 뒤풀이를 하곤 했었습니다.

공연도 단순히 노래를 이어 부르는 방식이 아니라 마당극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부분 극적인 구조를 가지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거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 당시 민중가요 서클들의 정기 공연이나 대동제 공연이 대부분 노래극이었던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은 아마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서클방에서 악보를 보며 조금씩 노래를 배우고 우리끼리 해석하여 화음을 만들어 부르던 것과는 다르게 어쩐지 전문적으로 보여지는 연주와 노래실력을 가진 선배들의 공연은 가슴을 울렸고, 그야말로 노래의 힘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초기 새벽의 활동이나, 노래들도 지식인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고, 후에 지식인 정서라든가, 소시민의 정서라는 일부의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갈 수 없는 고향> 역시 노동자들을 연민적 시선으로 그려낸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 당시 실제 노동자 현실의 한 단면을 그려낸 서정적인 일상가요로 많은 이들에게 불린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84년 제작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박미선의 목소리로 수록되어 그 당시 느낌 그대로 감상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갈 수 없는 고향>

한돌 작사, 작곡

1. 저 멀리 저 산 마루에 해가 걸리면 쓸쓸한 내 맘에도 노을이 지네
물결 따라 출렁이는 그리운 얼굴 어두운 강 내음이 내 맘을 적시네
갈 수 없는 그리운 그리운 내 고향 나는 가고 싶지만 내가 갈 수가 없네

2. 이따금씩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내 고향 산 마루도 그리워지네
뜨겁던 지난 여름날 더운 바람 속에 설레이던 가슴안고 서울로 서울로
갈 수 없는 그리운 그리운 내 고향 나는 가고 싶지만 내가 갈 수가 없네

(음원:[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중에서 박미선 노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레디앙 연재 4 -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암울한 단조' 시대, 울부짖음 같은 노래들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④] 호소력 넓힌 음악 형식…<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80년대 초중반 서정가요들 중 하나인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입니다. 일명 청․소․부로 축약돼 불린, 어느 정도는 가창력이 뒷받침돼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가슴으로 불러야 됐던 노래들
하지만 또 부르다 보면 울부짖음이 되고, 그 당시 선배들의 ‘민중가요는 가슴으로 부르는 것’이라던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던 노래들 중 하나입니다. 90년대 초 [노래를 찾는 사람들 3집] 음반에 수록되었기에 많은 이들에게 보급도 되고, 기억되어지고 있는 곡입니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처럼 80년대 초반의 상황은 매우 엄혹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운동 세력들은 80년 광주항쟁에 대해 알게 되면서 분노를 느꼈고, 광주를 비롯한 정권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실체를 대중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80년 광주를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80년 광주는 그 시대를 살던 지식인과 학생집단에게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면서 아주 쓰라린 패배감을 갖게 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때에도 광주항쟁과 전태일 열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기득권에 대해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술자리에서 괴로워하며 울분을 토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까지 대학의 집행부는 지금처럼 총학생회가 아니라 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 체계였고, 84년 말부터 각 대학별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나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학민추)등이 결성되어 총학생회를 부활시킨 것이지요.  

 

학도호국단을 아시나요

또 대학의 민중가요 서클도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 고대 석화(지금의 노래얼)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통기타를 치면서 팝송이나 포크송을 화음을 넣어 아름답게 부르는 동호회였답니다. 그러다 80년 전후 현실을 자각하고 좀 더 목적의식적인 활동과 민중가요 창작을 하게 됩니다. 대학마다 민중가요 서클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은 이렇게 민중가요가 목적의식적으로 창작되고, 불린 시기에 탄생합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민중가요가 그렇듯 작곡자가 알려져 있지 않고, 악보도 제대로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됐기 때문에 각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분위기의 노래가 많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당시 상황을 한 번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까요?

집회(데모)를 할 경우 몇몇 사람이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는 비밀리에 작전(?)을 전달합니다. 그런 후 데모를 주도하는 집단은 도서관에 미리 들어가 여기저기 앉아 공부하는 척을 하다 기관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바리게이트를 치고는 도서관 창문을 깨고 밧줄에 매달려 이미 준비한 전단지를 뿌리는 것이지요. 군사독재정권의 실체를 알리는 구호로 학생들을 선동합니다.

“학우여러분, 현 군사독재 정권은 광주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고 국민을 기만하며…”

이렇게 데모를 주도하고 선동하는 것을 "동 뜬다"고 표현했다고 하지요. 아마 주동을 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주동자들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주변을 정리한 후 아주 비밀스럽게 진행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한 내용을 다 알리기 전에 대부분은 도서관에서 상주하던 기관원들이나 밖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온 전경들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하면서 끌려갔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바로 옆에 기관원이 있는 줄 모르고 동을 뜨다가 주동자가 “학우여” 하고 외치기도 전에 우르르 덮치는 바람에 “학!” 소리 밖에 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이른바 ‘학사건’이나, 밧줄에 매달렸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 뱅글뱅글 돌다보니 이야기가 뜨문뜨문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는 제가 대학 1학년 때 들은 우스꽝스런 에피소드였지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암울한 단조의 시대
그렇게 끌려간 친구들은 군대로 징집되는 가하면 구속돼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인휘 소설『내 생의 적들』에 보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답니다. 물론 그 소설을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분들이 계신 것처럼 좀처럼 믿어지지도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무튼 시절이 그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당시 창작되고 불린 노래들은 아주 암울한 단조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꼭 행진곡 풍만 단조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느리고 유장한 서정가요도 단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외에 <친구 2>, <타는 목마름으로>, <민중의 아버지>, <노래 2>, <사월 그 가슴으로>, <부활하는 산하>, <의연한 산하> 등이 모두 그러한 노래들입니다.

가사만 봐도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어두운 그림자 하늘 가려’, ‘억압의 발길에 짓밟혀도’, ‘어두운 죽음의 시대’, ‘밤’, ‘하나님의 혀가 잘린 세계’, ‘사슬의 묶임’ 등 비유적 표현이긴 했지만, ‘죽음’과 ‘희생’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비장한 가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음악 형식면에서 단조 스탠더드와 가곡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70년대 포크에 비해 넓은 계층과 연령층에 호소력을 갖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80년대 초, 중반을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고, 또 민중가요의 전성기라고도 했는데, 바로 그런 표현을 만들어 냈던 노래들로 수많은 이들에게 애창되던 노래입니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울부짖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나지막히 따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음원 : 인천문화운동연합 노래패 산하 1집 [너를 부르마] 중에서)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작시

1.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2.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신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저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레디앙 연재 3 - 이세상 어딘가에

 

부르면 울게 만든 그때의 노래들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③] <이 세상 어딘가에>…서정적 가사에 노동자 삶 담아
 
 
 

제가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접한 민중가요들은 아주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이었습니다. 같이 어깨를 걸고 목 놓아 부르는가 하면, 혼자 흥얼거리다가도 울컥하고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그 노래들. 70~80년대 초반 민중가요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실 행진곡 풍보다는 바로 이런 서정적이고 고운 노래들입니다.

 

서정적이고 고운 민중가요
오늘은 그 중 한 곡인 <이 세상 어딘가에>를 소개하려 합니다. “노동조합은 근로자들의 권리입니다. 막연한 분홍빛 꿈에서 깨어나 우리들 스스로 찬란한 미래를 만들어갑시다”라는 낯선 멘트와 함께 들었던 김민기 씨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 의 마지막 노래가 <이 세상 어딘가에>입니다. 오늘은 '메아리'의 목소리를 통해 <이 세상 어딘가에>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원 : 메아리 Origin2 중에서 (일천구백팔십년 여름 녹음, 98년 4월 복각)
<이 세상 어딘가에> (김민기 글, 곡)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는 1984년이었습니다. 학원자율화 조치가 있던 해죠. 즉, 그 이전까지는 대학 내에 기관원들이 상주하며 학생들과 같이 수업도 듣기도, 벤치에 앉아 잡담도 나누며 감시를 했습니다. 그러다 돌변해 친구를 연행해 가기도 했고요.
집회 한 번 하기도 쉽지 않았고,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어야 했겠지요. 아마도 그 시절부터 약자나 줄임말들이 운동권 생존을 위한 문화로 유행한 게 아닐까 싶네요.

 

기관원과 함께 수업 듣던 시절
하지만 제가 대학을 들어가던 그 해부터는 기관원들이 철수를 해서 대중 활동이 좀 더 자유로웠습니다. 학내 집회도 자주 열렸고, '민주'와 '민중'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혜택(?)’으로 저는 대학에 입학해 노래 서클에 가입하며 활동하게 됐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시작된 서클 활동은 가히 '학과 공부를 하러 대학을 다닌 게 아니라 서클활동을 하러 다녔다’고 할 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처음 접한 민중가요들은 가사말도 낯설고, 멜로디도 대중가요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지만 대체로 예뻤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서글펐습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했고, 술자리에서 부르면 괜스레 눈물도 흘렀습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이 땅의 축복 위하여>, <친구>, <영산강>, <약수 뜨러가는 길>, <진달래> 등이 주로 그러한 노래였습니다.

 

   
  
그저 노래가 좋아서 매일매일 서클방으로 출석을 하던 어느 날, 이름도 없던 복제 테이프에 맞춰 상황극을 짜는 훈련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것이 바로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이었습니다.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78년 겨울에 만든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서정적인 몇 곡의 노래들과 연극적 상황, 그리고 개사곡을 변주해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김민기 노래극 '공장의 불빛'의 파격

그 당시 대학가의 노래패 공연은 대부분 통기타 한두 대로 연주를 하며 노래에 단순 화음 정도를 넣는 것이었는데, 이 [공장의 불빛]은 신디사이저와 드럼을 파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공장에 들어와 저임금에 야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 그러다 산재를 당해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 난 신세,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지만 사측의 음모와 탄압에 부딪혀 좌절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힘을 추스릅니다. [공장의 불빛]은 고향에 편지를 보내는 여공의 목소리로 시작해 야간 교대, 사고, 노조동합 결성, 음모, 선거, 해고 등 전체가 19장면으로 이루어진 40여 분짜리 뮤지컬인 셈입니다. 여기에 삽입된 노래는 <공장의 불빛>, <두어라 가자>, <돈만 벌어라>, <야근>이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엔딩곡으로 불리게 됩니다.

노래극의 시작과 끝부분 멘트에서 노동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접한 노동자 현실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군대에서 불렸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야근>은 단순한 한 곡을 단조와 장조, 그리고 4박자와 3박자, 빠르기와 가창법 등을 달리해 마치 공연 한편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이 노래는 원래 ‘대령 중령 소령은 00000, 상사, 중사, 하사는 00000~~’ 하는 소위 ‘군대 사가’를 따서 변주한 곡입니다.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싹둑 잘려서 한 개에 오만 원씩 이십만 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타이밍약 사다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립니다.

그거야 순전히 댁 사정이죠 병 걸려 있으니까 그런 거죠. 묵묵히 참으면서 일만 하세요 윗분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예요. 3년만 지내보면 알게 될 거다. 귀머거리 폐병쟁이 누구누군지…”(이 노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중가요에서도 타자화됐던 노동자
87년 이후의 노동가요는 구체적이고 진취적이며 또 강인한 노동자 상을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그렇기에 진취적이나 구체적인 희망과 투쟁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어딘가에>와 이 곡이 삽입된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다른 누군가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자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이 세상 어딘가에> 중에서

이렇듯 당시의 민중가요가 노동자의 이야기를 타자적 시각에서 이야기한데 반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가사와 멜로디이지만 그 어떤 곡보다도 노동자 스스로의 의지와 각성을 강조합니다.

노동자 삶은 무조건 강한 비트의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만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시를 쓰듯 부드럽고 아름답게도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어딘가에>는 꼭 한 번 들어보면 좋은 곡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레디앙연재2 -미칠것같은이세상

 

민중가요의 탄생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②] 새 세상 염원하는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
세상 어딜 가나 슬픔뿐이요, 먹고 자고 애써 일할 뿐.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는 무엇하리까”



(음원 : 안치환 [Beyond Nostalsia] 중에서)

이렇게 시작하는 민중가요가 있다면 아마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복음성가 아닌가?’ 하고요. 맞습니다. 이 노래는 복음성가입니다. 하지만 70년대에 불린 초기의 민중가요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 노래가 민중가요가 되었는지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1970년대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시대였습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가난해서 제대로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입니다. 따라서 수출과 산업증진에 박차를 가하며 경제성장을 이유로 자유는 반납해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박정희 정권은 18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장기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권에 반하는 세력을 억압했고, 국민들의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까지 통제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1975년에는 이른바 초헌법적인 긴급조치가 내려집니다. 영화 <고고 70>을 보신 분들은 대충 이해를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통행금지가 있었고,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집단적으로 모여 춤을 추는 것 역시 풍기문란 등의 이유로 금지되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통제 방식이 바로 음반의 사전검열 제도였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 정책으로 시작된 음반 사전 검열은 국민들의 머릿속까지 규제를 했고, 상상력조차 억제했습니다.

'긴급조치' 낳은 블랙코미디 

사전 심의에 의해 검열당한 노래는 발표조차 되지 못했으며, 음반으로 발매가 되었다 해도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으레 심의에 통과가 되지 않을 것 같은 가사는 생각도, 쓰지도 않게 되는 겁니다. -음반의 사전심의제도는 시행 70년만인 1996년에 폐지되었지만 사후 심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1975년 ‘긴급조치’와 함께 ‘대중가요 재심의’라 하여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던가, 퇴폐․ 선정적이라던가, 외래풍조를 무분별하게 모방했다던가, 패배․자학․비판적인 내용은 모두 재심의를 하여 방송금지와 레코드 판매금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 수만도 무려 200여곡이나 됩니다.

 

   
  ▲ 1984년 전투경찰이 서울대에 진입, 잔디밭에 배치되어 있는 모습

예를 들어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중략…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면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라는 가사로 이뤄진 <길가에 앉아서> 라는 대중가요는 “이런 바쁜 시절에 왜 하릴없이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여자를 쳐다보냐”는 이유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눈물도 거짓말’이라는 가사의 <거짓말이야>는 “국민에게 부정적인 사고를 심어주고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김민기 씨의 <아침이슬> 역시 이 중 하나입니다. 이미 음반으로 발표가 돼서 많은 대학생과 젊은이가 듣고 부르고 하던 노래였는데도 말이지요.

 

민중가요의 탄생

일반 국민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도 이러했으니 대학 내의 집회나 시위는 더더군다나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긴급조치 이전의 시대라고 해서 별로 자유롭진 않았지만 긴급조치 이후 그 탄압은 말할 수 없이 심했고, 70년대 학생운동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70년대 대학문화라고 하면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를 대표적으로 꼽는데, 그런 낭만적이고 서구적인 문화와 더불어, 나름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가진 대학생들마저 자유가 박탈당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던 학생운동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운동권’이라는 말이 등장하며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분리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여건상 운동권의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 다른 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했습니다.

긴급조치 하에서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일 일지도 모릅니다. 또 군대나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운동권 학생들은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권 학생들은 누구나 쉽게 듣고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가 아닌 다른 노래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택된 노래들이 바로 민중가요입니다. 특별히 어떤 노래라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해서 재해석을 하고, 운동권 내에서 같이 공유하며 불렀던 노래문화인 셈이지요.

미칠 것 같던 그때

초창기 민중가요로 선택된 노래들은 주로 앞서 말한 판매금지 당한 노래 중 사회성이 담겼다고 보여 지는 노래들입니다. 여기에 소위 데모 노래와 외국의 반전․인권 운동 속에서 불린 노래, 그리고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주였습니다.

특히 찬송가와 복음성가는 ‘얽매임에서의 해방’ ‘구원의 의미’를 담은 노래들로, 이를 종교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의미로 재해석해 불렀습니다.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로운 새 세상을 염원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할 수 있겠지요.

눈 가리고, 귀 먹고, 말도 못하는, 그야말로 ‘미칠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제발 구원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답하고 복잡한 심정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청춘이라면 울부짖듯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레디앙연재1-불나비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이은진의 노래이야기①] 트롯에서 록으로, 천의 얼굴을 가진 '불나비'
 
 이글은 레디앙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2010년 2월)
 

 

'민중가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 시대와 집단에 따라서도 범주와 정서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민중가요에서 가장 중요하고 공통된 요소는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자신의 노래로 삼고, 불렀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노래 역시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고 자신의 것이 될 때 의미가 커진다.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찌니의 노래 이야기]는 우리가 목청껏 불렀던 그리고 지금도 무심코 흥얼거리는 민중가요들의 사연을 전한다. 그 노래들에 얽힌 우리네 이야기와 나의 삶을 연결하고, 자신만의 주체적인 노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편집자 주

 

부르는 사람이 주인인 노래, 천의 얼굴을 가진 '불나비'

[찌니의 노래 이야기]의 첫 번째 곡으로 흥겨운 노래, ‘불나비’를 골라봤습니다. ‘불나비’는 시대를 뛰어넘어 민중으로부터 30년 넘게 꾸준히 불리며 사랑받고 있는 대단한 노래입니다.  

사실 노래는 목적의식적으로 부르고 다니는 주체가 있어야 보급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노래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리지 않으면 의미와 정서가 공유되지 못하지요. 어떤 식이건 음원(정식음반이 아닐지라도)이 있으면 보다 많은 이가 듣고 부르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음원 하나 없이도, 목적의식적으로 부르는 주체 없이도 노래가 불리고 퍼져나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입니다. 그렇게 불리고 퍼져나간 노래를 ‘민중가요’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입니다.

민중가요는 주로 대학과 기독교 청년, 지식인이 부르던 노래로, 학생과 지식인에서 야학 및 교회소모임으로, 또 다시 민주노조를 준비하던 노동자와 노동운동 활동가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많은 민중가요가 지식인적 정서를 내포한 데다가 비장하고 무거운 단조 풍이어서 노동현장에서는 그리 많이 불리지 않았습니다.

민중가요와 노가바

이에 노동현장에서는 일부 가사와 악곡을 변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민중가요보다는 대중가요에 노래가사를 바꾼 ‘노가바’(‘노래가사바꿔부르기’의 줄임말)라는 말이 애칭으로 붙기도 했습니다.

'불나비'는 7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에 나왔을 법한 전형적인 8비트 고고에 한국적 트롯정서가 가미된 노래로, 창작자가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창작 배경은 알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공동창작을 했다’는 가설도 있지만, 곡의 완성도나 가사의 흐름으로 볼 때 공동창작의 가능성은 다소 희박합니다.  

   
  ▲ 공연 중인 꽃다지 (사진=꽃다지)

누군가의 창작에 의해 탄생한 곡을 노동자들이 함께 불렀거나, 불리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가사나 일부 악곡을 변형시켰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70년대 후반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입니다. 청계 피복노조를 시작으로 동일방직, 원풍모방, YH 등의 민주노조가 설립되거나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선배, 언니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운동으로, 1978년 동일방직 투쟁과 민주노조 와해, 1979년 YH노조의 신민당사 점거 사건 등은 노동운동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대학생 노래와는 다른 '불나비'

물론 유신 말기였기에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탄압이 있었고, 그만큼 처절하고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불나비’는 그 억압적이고 삼엄한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의 신명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잘 드러난 곡입니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노동현장을 소재로 다룬 민중가요가 어둡고 비장하며, 가련한 느낌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노동자 스스로가 느끼는 노동자 삶은 희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양측의 간극이 다소 존재하지요.

‘불나비’가 대학가에 소개된 것은 1984년쯤입니다. 하지만 몇몇 테이프에 수록돼 있을 뿐, 학생들의 공연 중 노동현장을 묘사할 때나 간혹 불렸고, 집단적으로 불린 것은 1980년대 중후반 정도입니다.

‘불나비’는 문화모임, 서클 등의 소모임에서 주로 불립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나 산업선교회의 야학, 소모임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급됐지요. 모임이나 수련회에서 분위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불나비, 가자~~”라고 다함께 외치며 흥겹게 불렀답니다.

원곡의 ‘불나비’라는 가사는 87, 88년 투쟁을 거치며 ‘노동자’라는 단어로 대체돼 불리다 최근에는 원곡대로 ‘불나비’라는 가사로 다시 불리고 있습니다. 또 음악적으로도 변화, 발전을 해왔습니다. 다양한 리듬으로 변주가 자유로운 8비트 곡이기에 처음에는 기타 하나로 붙점(附點 : 원래 길이의 반만큼의 길이를 더함-편집자 주) 없이 읊조리듯 부르다 80년대 중후반 베이스를 강조한 셔플리듬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불나비'의 변천

하지만 90년대 중반, 사무직 젊은 노동자들이 대거 등장하며 ‘불나비’는 일렉기타의 사운드가 강조된 빠른 8비트의 록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흥겨운 율동도 가미됐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나비’의 변천사는 단지 시대에 따른 노래문화의 변화를 넘어 그 시대 운동을 주도해온 대중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현장에서 가장 긴 생명력으로, 큰 인기를 구가하며 불린 ‘불나비’는 그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노래이며, 현재에도 다양한 느낌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구의 ‘불나비’라 할 것 없이 혼자 불러도 좋고, 같이 불러도 좋은, 춤을 추며 불러도 좋고, 누가 더 개성껏 부르는지 경연대회를 열어도 좋을 만큼 ‘불나비’는 천의 얼굴을 가진 노래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회적기업 자바르떼

사회적기업이란 말을 처음 들어본 게 2년전 11월인데

어느덧 사회적기업이 예술인들 사이에서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적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예술인들이 자주 찾아오고 상담을 하곤한다.

아직 우리도 버벅거리고 있는데, 누굴 상담할 처지는 아니지만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사회적기업은 몇 되지않고, 또 특수성이 있는데다가

문화운동 진영에서 달리 상담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

선후배들이 종종 나를 찾곤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회적기업을 단순히 정부에서 기금 나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제 9개월을 해보니 그렇게 접근을 하면 낭패를 보기가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일단 좀 더 체계적으로 자바르떼의 고민과 과정을 정리해야 하지...싶다.

아직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요즘 사회적경제와 같이 생각하는 논의 단위가 있어서

마침 1차로 두서없는 고민을 정리한 글을 소개한다.

물론... 진짜 두서없는 고민이지만...

자바르떼는 내부 전략단위를 구성하고 좀 더 고민을 구체화하고 대안을 모색해 보기로 했으니

앞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는대로 소개를 좀 할까 한다.

혹시라도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분들이 활용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회적기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해서...

 

----------------------------------------------------------------------------------------------------------------------------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경제의 가능성은?

  

이은진(자바르떼 대표) 

 

 

1. 아직은 사회적경제에 대해 함께 논의해 본적도 없고, 또 문화운동 내부에서 고민해왔던 바가 개념은 비슷하겠으나 사회적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익숙치도 않은 상태이다. 또 철학적 근거들을 정리하지 못한 초기 고민수준의 문제의식만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터라 이런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이 아주 조심스럽기도 하거니와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 지역에서의 가능성과 단초를 함께 모색하는 자리라 생각되어 정리도 되지 않은 고민을 두서없이 제출해 본다.

 

 

2. 사회적기업에 대한 관심도와 인지도가 무척 높아지고 있고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가들에게도 사회적기업은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2004년 신나는문화학교를 시작할 때 4대보험 가입을 교사전체가 거부하고 스스로를 실업자나 취약계층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돌이켜보면 5년사이 엄청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신나는문화학교의 경우 현재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은 교사들의 자발성과 의지에 있다. 2005년 사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지역의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무급 진행을 결의하고 1년간 사업을 계속하지 않았다면 아마 현재의 자바르떼도 없었을지 모른다. 문화예술 활동가들은 과거부터, 또 현재에도 지역의 다양한 계층들과 연대하면서 재정과는 무관하게 활동을 해왔다. 이것은 문화예술운동단체들의 역사와도 연관이 있는데, 문화예술운동단체들은 전통적으로 공동체적 운영방식을 채택해 왔다. 시민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도 비슷하긴 하겠지만 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이 모두 주체가 되어 사업을 결정하고 운영에 참여하며 함께 책임을 져왔다. 즉 같이 벌어 같이 쓰고, 수익이 남으면 약간의 활동비를 나누어 갖는 식으로 운영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도 문화운동에 몸담았거나 몸담고 있는 활동가들의 경우에는 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퇴직을 하더라도 지역에서 함께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편 예술가들은 초기 문화학교의 경우처럼 급여 방식에 익숙치 않고, 출퇴근이나 업무일지 등의 형식에 적응이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급여나 활동비로 보상되지 않더라도 자기 창작의 성과나 대중들과의 교감, 지역에서의 연대활동에 대한 보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3. 문화운동 내부의 고민은 재생산구조의 구축과 생활문화운동으로서 문화를 변화시키려는 노력, 그리고 지역 거점 구축과 이를 통한 소공동체 구성으로 많이 집중되어 왔다.

문화운동은 급속히 확산되던 8,90년대에는 조직운동과 같이 성장해 왔지만 그만큼 또 조직운동에 종속되어 왔고, 문선의 역할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문화를 도구로 사고하기도 한다. 현재보다 상태가 덜 심각하던 90년대 중, 후반에 문화운동은 독자적인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기존의 조직방식과 다른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대안적인 가치, 대안적인 삶의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 거점을 구축하고, 이를 조직하기 위한 방안들을 검토해왔다. 그리고 각 지역을 잇는 전국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식도 논의 되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이다.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라는 슬로건을 걸고, 반 자본적인 영역에서부터 비자본적 영역을 아우르는 일상 문화투쟁들을 연결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이 가지는 공공적 가치와 예술 노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문화기본권적인 관점에서 ‘누구나 예술을 향유하고 창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90년대 초반의 대중문예교육 철학을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장르틀에 기반한 전문가 중심의 예술이 아니라 향유자 중심의 생활예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확장되었다.

 

 

4. 문화생태를 일구는 자바르떼

자바르떼가 추구하는 문화생태에는 몇가지 의미가 같이 들어있다. 누구나 예술창작과 향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문화예술 생태계의 선순환구조를 활성화시키고, 이를 위한 기본 동력으로서 생활예술동아리 활동을 활성화시키자는 것, 그리고 생태적인 문화예술활동을 의미하고 있다. 또 자바르떼는 신나는문화학교 1기가 끝날 무렵, 문화예술 지역공동체를 꿈꾸었고 사회적기업으로 전환을 준비하면서는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추진하게 된 것은 앞에서 서술한 지난 시기의 고민들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몇가지 이유가 더 있다. 한 가지는 예술가들이 스스로 노동자 주체가 되어 자기 노동의 사회적 권리를 주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영리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사회적기업에서 일반적인 직장인 수준의 급여보장은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과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 받는 급여 외에 다른 방식으로 채울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작은 마을 단위, 지역과 결합해서 노동력을 교환한다던가, 지역화폐로 다른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다던가, 사회적 예술노동의 댓가로 공간을 제공받는다던가 하는 등 돈이 아닌 영역으로 해결될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자바르떼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지역에서 공동체적인 운영을 하는 공연예술단체들이 행정적 준비에 어려움은 약간 있으나 사회적기업 전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을 최근에 확인할 수 있었고, 특히 문화예술교육을 병행하는 단체들이 핵심이 될 것이다. 공연 예술 단체들 뿐 아니라 미술작업자들 중에도 지역에서 마을의 소단위, 개별 요구에 맞추어 작업하고 싶어하는 활동가들이 많다. 최근엔 생활 예술로의 접근과 생활예술동아리 활동에 대한 중요성이 확산되어 지원이나 사업영역을 확대해 가는 추세여서 지역에서의 교육과 창작활동, 주민들과의 작업들이 원활히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자바르떼는 올해 각 지역에서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과 문화(향유자)생활협동조합 구축의 단초를 만들어 갈 계획을 갖고 있다. 또 하나의 대안으로서 협동조합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는 것이고, 2년간의 훈련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5. 하지만 아직 상에 대해서도 구체적이지도 못하고,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부분도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적 전망을 구체화하여 추진전략과 단계별 목표를 세우는 것은 올 상반기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 예술가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방식, 커리큘럼을 만들어가는 것과 문화향유자 협동조합 구축을 위한 교육커리큘럼, 접근 방법, 핵심 주체를 세우는 문제도 아직 백지 상태이다. 더군다나 예측되는 어려움도 매우 많다. 아직도 문화에 대한 편견이 많아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뒤에나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던가, 문화를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그런 상태에서 문화를 기본권인 동시에 생활로 받아들여 지속적인 향유를 하는 것이 어느 정도가 가능할 것인지도 아직은 미지수이다. 또 지역에서 동아리 활동이나 사회공익적 활동을 연계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공간 제공 등의 문제는 지자체와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영역이고 지역과 지역을 잇는 방식은 또 어떨 것인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난감한 부분은 예술 노동의 가치가 어떻게 계량되어 다른 재화서비스, 사회서비스와 교환될 수 있는지를 정리하는 문제일 것이다.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계량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그리고 기준을 우리끼리 합의한다고 해서 우리 내부가 아닌 예술계의 설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두서없이 쓰다보니 더 두서가 없어진 것 같다. 이렇듯 아직은 넘어야 할 산도 많고, 밑그림도 안그려져 있지만, 문화예술 영역에서 사회적경제 영역을 만들고 확장시켜갈 가능성은 매우 많다고 생각된다. 지역에서 함께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고 또 같이 풀어갈 파트너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7, 8)

 7. 5月21日   觀光  관광

 

 아침 10시쯤 사람들은 이시카와하고 슈리성으로 출발했다. 나와 정혁, 선봉형은 재작년에 가봤기 때문에 쇼핑이나 하자고 남았다. 우리는 다시 시장들을 돌아 물건을 좀 산 후 회를 사가지고 숙소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은 슈리성 관광 후 점심을 먹고 다시 숙소에 들어왔다.

일부 쇼핑하거나 남은 사람을 빼고 4시 쯤에는 가까운 바다로 갔다. 돗자리를 피고 맥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안나를 비롯한 몇 명은 바다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바다는 인공으로 만든 곳이라 우라소에나 다카에 바다와는 달리 별로 좋지 않았다.

 자진해서 첫날 식사당번을 했던 우리셋이 장을 봐서 삼결살을 구워먹기로 했다. 준꼬씨의 집을 들러서 고기판과 불루스타, 전기 냄비를 가져왔고 거실을 가득메우고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었다. 토미야마 씨도 오셨다. 한참 먹고 나서 돌아가면서 소감을 한 마디씩 이야기 했다. 토미야마씨는 오키나와 인들은 여유있고 느긋하다고. 이시카와는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계속 빨리빨리하는 게 아쉬웠다고 했고 준꼬씨는 오키나와에 운동하러 오지 말라고, 미군기지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지만 오키나와는 너무 아름다운 섬이니까 관광하러 자주 오라고 했다.

 에리꼬는 오키나와 친구가 공연을 보았는데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동안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 소홀했는데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사람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며,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시카와가 자랑스럽다고 뽀뽀를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뽀뽀해! 뽀뽀해!” 하며 직접 해주라고 하자 남에게 보여주는 게 너무 아까워서 싫다고 한다.

 한국인들도 돌아가며 한 마디씩했다. 아쉬운 점도 많았고 또 평가를 해야겠지만, 단순 공연만 한 것이 아니라 행진도 참가할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던 일정이었다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의 소감이었다.


===================================================================

8. 5月22日   韓國へ  한국으로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짐 정리를 한 후 9시반에 출발했다. 에리꼬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었고, 같이 공항에 가주었다.

모노레일을 타고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는데 외국여행이 처음인 진영이가 티켓을 인천에서 버리고 왔단다. 하지만 다행히 걱정한 것 만큼 큰 문제는 없었다. 수속을 마치고 출국심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데 이시카와는 계속 울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열심히 살게 라면서... 정말 고맙다. 그리고 정말 수고많았고, 고생시켜서 너무 미안해. 하지만 분명 오키나와에서의 네 생활은 더 의미있고 즐거울거야. 에리꼬 많이 사랑하면서 살어. 라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보내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 끝~~~ ---

---------------------------------------------------------------------------------------------------------------------------------------

<오키나와 신문에 나온 기사들 모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6)

 6. 5月20日  - 히가시손의 헬리콥터 기지 건절 예정지(다카에) 방문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죽과 라면?) 먼저 귀국하는 박정숙, 유영희, 정윤경, 고명원과 인사 나누고,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박미영도 남았다) 9시 반에 숙소에서 버스로 출발했다. 이번 버스는 동경 나리타 공항 반대투쟁에서 10년 이상 투쟁하다가 오키나와에 내려와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 운전하는 차였다.  나가이 씨는 아침 일찍 동경으로 출발을 하셨는데 우리는 얼굴을 보지 못했고, 나중에 오자와씨와 통화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헤노코에 우선 들러 공동대표 중 한 분으로부터 헤노꼬 투쟁의 역사와 기지관련 설명을 들었다. 헤노코 앞 바다에는 ‘듀공’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고래 종류가 사는데 멸종 위기에 처해있고, 현재 이 앞에도 50마리 정도 밖에 없다고 한다. 몇 년간의 투쟁 속에서 겪은 일들, 또 태평양 전쟁과 그 이 후의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 등, 너무나 하실 말씀이 많으신 듯했지만 시간 관계상 줄이고, 다들 긴 천에 염원을 담아 철조망에 묶고 사진촬영을 했다.

 바닷가 입구에는 현에서 걸어 놓은 경고판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쓰레기는 가져가 주십시오.”라는 문구가 써있었다. 누군가가 ‘쓰레기’라는 단어 앞에 “미군과” 라고 적어놓았다. “미군과 쓰레기는 가져가 주십시오”라고.

 더늠에서 준비한 솟대와 기념품을 드리고 시간이 없어 버스 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면서 다카에로 이동했다. 다카에는 작년 8월부터 농성을 시작했는데 헤노꼬와는 달리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북쪽 산 기슭에 있는 총 인구 140명인 작은 마을사람들이 투쟁을 하기 때문에 천막을 4군데 치고 1명씩 지키는 데 오늘은 한 곳에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 천막마다 돌아다니며 방문하고 설명을 들었고, 또 그 주변을 돌아봤다. 댐과 기지 건설을 위한 도로 입구 몇 곳을 갔는데 그 입구마다 천막을 치고 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했다. 하지만 입구를 봉쇄하거나 바리케이트를 치면 그건 불법이라 연행되기 때문에 옆에 천막을 치고 있다가 차가 나타나면 사람들을 불러 막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번에는 트럭들이 몇 대 자갈과 모레를 싣고 와서 길을 깔았는데 연락이 안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한 곳은 노인 한 분이 교대도 하지 않고 몇 달간 계속 거기서 숙식을 하고 계셨다. 그 분 말씀이 평택같은 한국의 투쟁에 비하면 미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쟁이고, 평화적인 투쟁을 하고자 한다고 하신다.

 풍물공연을 할까 준비도 하고 생각도 했으나 지금은 천연기념물인 새들의 번식기라 미군기지 건설도 중단되어 있을 정도니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아 공연은 생략하였다.

 산 입구에 쓰여진 푯말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다카에 바다는 우라소에 해변공원 바다와는 아주 다른 색을 띠고 있었고 산호 띠에 의해 파도가 잦아드는 선도 아름답고, 바다도 좀 더 깊은 듯 청록색을 띠고 있었다.

 다카에 지역의 산은 정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군이 정글게릴라 훈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이 지역에 사는 천연기념물인 뜸북이가 있는데 오키나와에는 포유류가 없어 천적이 없기 때문에 그 새가 날지 못하고 걸어다닌다고 한다.

 역시 더늠이 준비한 솟대와 기념품을 드리고 다시 출발했다. 오는 길에 바닷가라도 들를까 했으나 오자와씨, 메구미씨, 히나타 씨의 비행기 시간이 늦을 수 있어 그냥 바로 공항으로 갔고, 나하공항에서 일본분들과 인사를 하고 사진도 찍고 헤어졌다.

 버스로 다시 숙소로 돌아와 버스 청소를 돕고 난 후 개인당 500엔씩 받아 알아서 각자 저녁 해결했다. 이시카와는 전날 에리꼬가 화가 났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찬영이가 솟대를 만들어 집으로 찾아가 같이 라면을 먹는 등 애를 써서 화를 풀고는 다시 숙소로 왔다. 공연장 옆의 공원으로 가서 캔맥주를 마시다가 모기가 많아 숙소로 다시 돌아와 한 잔을 더 했는데 에리꼬에게 한국에서 가지고 온 반찬들을 주었다. 참 좋아했다. 이시카와는 에리꼬를 보내고 나서 역시 숙소에서 잤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5)

5. 5月19日  평화콘서트 : 한국과 오키나와를 잇는 예술인의 밤 (사쿠라자카 극장)

 

  - 아침부터 공연 준비 / 공연은 18시 개장  /19시 공연 시작해서 21시 30분까지

  - 사전행사 : 인천노동문화제 영상 상영(5분), 평택 대추리 다큐상영 (40분)

  - 공연순서 : トヌム 더늠 (19:00~19:25) / まよなかしんや 마요나카 싱야 (19:25~19:35) / 金城繁 긴조시게르 (19:35~19:50) / しゃかり  샤카리 (19:50~20:30) / コッタジ 꽃다지 (20:30~21:10) / アンコール 앵콜 (21:10~)


 늦은 아침을 먹고 11시반에 꽃다지와 스텝을 맡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이동했다. 올라가는 길 옆 쪽으로 공원이 하나 있었다.

희망의 언덕 공원. 버려진 고양이들이 정말 많았는데 고양이들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았고, 먹을 것을 달라는 듯 주변을 맴돌았다. 그 공원 앞에 있는 우리가 공연할 극장 이름도 사쿠라 자카 극장(벚꽃언덕?)이었다.

꽃다지가 리허설 하는 동안 진영이와 나, 정혁씨, 창곤형, 그리고 이시카와가 산책을 나갔다.

늦게 온 진영이에게 주변 관광을 시켜주자는 취지였다. 시장통을 누비고 재래시장에도 갔었다. 국제거리 뒤쪽의 시장은 정말 크고 여러 블록으로 되어 있다.

한참을 걸어다니다가 다시 극장으로 가서 리허설이 끝난 꽃다지 식구들, 에리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더늠은 2시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

3시 반부터 샤카리와 긴조시게르, 마요나카 상이 공연 리허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우리는 밥을 먹고 다시 진영과 주변을 돌아다녔다.

츠보야에 한 번 가보자고 해서 물어 물어 찾아갔다. 츠보야는 도자기 거리로 대부분 상점에 공방이 같이 있어 만드는 과정을 볼 수도 있고, 돈을 조금 내면 직접 제작 체험도 가능한 곳이다.

가서 보니 우리가 매일 다니던 시장길 평화의 통로로 나가면 바로 츠보야 였다. 그걸 모르고 우리는 반대편 길로 빙돌아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다. 지난 번에 왔을 때도 가본 곳이라 오래된 가마와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 굽는 공방도 들어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했다.

그리곤 맥주 몇 개 사서 공원에서 쉬자고 하여 다시 극장 앞으로 왔다. 이미 사람들은 매대를 펼치고 있었고, 그 동안 만났던 오키나와 분들이 몇 분 와 계셨다.

 밖에서 매대를 펼치고 오자와 상과 진영, 광배, 창곤형이 판매를 담당했고, 에리꼬도 계단 중간에서 팜플렛을 나누어 줬다. 진행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 준비가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덕분에 아무도 공연 사진은 찍지 않았다 ㅠㅠ)

 도시락을 먹고 평택 다큐멘터리 ‘들사람들’이 먼저 시작을 해서 극장에 들어갔다. 40분 정도의 다큐였는데 일본어 자막을 준비못해서 사람들이 잘 이해를 했는지 의문이다. 이어서 인천 노동문화제 동영상 5분짜리가 상영되고 7시 정각에 더늠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걱정을 많이 했으나 다행히 거의 객석이 가득 찼다.

 더늠은 입구에서부터 들어오는 소리로 치기 시작해서 객석 중간을 돌아 무대에 입장했다. 선봉형이 하얀 민복을 입고 나와 넘어가세를 2절까지 불렀다. 시간이 늘어지면 안된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한 절을 뺐다고 한다. 그 다음엔 마요나카 싱야 씨의 공연. 마요나카 싱야 씨는 삼신을 연주하는 김상(金さん)과 같이 나와 노래를 두곡 불렀는데, 노래들이 중간에 에드립도 많고 말씀도 많으셔서 15분가량 늘어졌다. 두 번째 곡에서는 더늠이 나와 함께 연주를 했다. 마요나카 씨가 긴조시게르씨를 소개했다. 긴조 시게르 씨는 오른 팔을 교통사고로 잃고 손 대신 쇠꼬챙이를 달아 삼신을 연주했는데, 연세가 75세가 되는 분으로 연주 실력이 아주 뛰어나고 노래도 오래 부르셨다고 한다. 하지만 눈도 어둡고, 숨도 가쁜 듯했다. 헤노꼬에서 만난 미찌루상이 타이고 연주를 같이 했는데 표정이 너무 예뻤다. 두 번째 곡에선가 객석을 향해 노래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물은 듯했다. 누군가 안다고 하자 올라오라 하고, 젊은 여성이 신발을 벗고 무대에 올라왔다. 아마도 그 노래는 듀엣곡인듯 여성은 자신이 불러야 할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후 곡들도 객석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좀 전 여성의 일행인 듯) 오키나와 전통 춤을 추었고, 객석 중간 중간에서도 일어서지는 않았으나 팔을 올려 춤을 같이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음순서로 샤카리 공연을 위해 무대를 정리하는 데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는데 아주 정확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아는 듯 아무도 불평은 없었다. 샤카리는 전문 활동을 하는 대중가수인데 관객들과 소통하려는 느낌이 많았고, 오키나와 전통 민요도 부르고 전통민요와 대중음악을 접목한 노래들을 불렀다. 우리가 일본 가요라고 느낄 만할 그런 노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꽃다지 공연을 위해서도 역시 무대 셋팅을 바꾸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람들이 많이 나가는 듯해서 샤카리를 보기 위해 온 그런 팬들이 아닐까 싶었으나 거의 모두 다시 들어왔다. 약 15분 정도의 셋팅시간이 흐른 후 꽃다지가 공연을 시작했다. 정서적으로도 약간 다르기 때문에 느낌이 있었겠지만 자막을 쏴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용을 더 잘 느끼는 듯했다.

 10시가 다되어 공연이 끝나고 무대 및 밖에서 음반 파는 일도 정리를 한 후 뒷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아주 큰 술집이었는데 엄청난 안주들이 등장했다. 초밥과 오리고기, 소고기, 생선찜, 오키나와의 전통음식인 고야 복음 등. 샤카리 팀도 모두 참석했고, 헤노꼬에서 온 미찌루와 미온상, 마요나카 상, 야기상, 이시우 일행, 첫날 사회복지센터 뒷풀이 때 보았던 센터 사무국장님과 소설가 등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공연이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몇몇 분은 전날의 연설이 감동적이었고, 나의 일본어 발음이 매우 좋았다고도 했다. ㅋㅋㅋ

 야기상은 수상을 보좌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계속 음식을 챙겨주셨고, 술집의 서빙보는 사람으로 오해한 한국사람들이 그를 마구 불러 음식을 시켰다. 그러나 전혀 불평없이 너무나 친절하게 다 챙겨주셨다. 더늠은 옷을 갈아입으니 아무도 공연단으로 알아보지 못하여 소외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곧 곳곳에 끼어서 같이 어울렸다.

 이시카와의 병원 직원들이 20명 정도 공연을 봤고 뒷풀이에 같이 온 4명이 인사를 하며 공연이 너무 좋았고, 또 이시카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에 다시 공연을 온다면 자신들이 스텝을 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이시카와의 가장 큰 소득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대표선수(?)를 불러 인사를 시켰다. 동경을 대표해서 야기상이, 한국인을 대표해서 이은진이, 오키나와를 대표해서 토미야마상이, 그리고 이시카와가 나왔고, 메구미 상이 통역, 샤카리 그룹의 리더가 오키나와 말로 통역하겠다고 같이 나왔는데 “니헤 뒤베~~” 이런 식의 도통 뭔말인지 모르겠는 말을 반복했다. 아마도 ‘감사합니다’라는 오키나와 말인듯 했고, 사람들은 재밌어 했다. 동경에서는 1700명이 이 행사를 위해 오키나와에 왔다고 했다. 

 정리한 후 숙소로 이동했는데 이 시우 일행과는 여기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거리에서 퍼커션 잼을 한 팀도 있고, 따로 술집을 찾아간 사람들도 있고, 준꼬상의 차를 타고 야경을 보러 간 사람들도 있고, 숙소에서 한 잔 한 사람들도 있고 다들 어디선가 알아서들 즐겼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 (4)

 4.  5月18日(平和行進3日目) 평화행진 3일째

     현민대회

 10시 출발하여 기노완시의 해변공원에 도착했다. 해변공원 야외 공연장 입구에 짐을 내려 놓고 오자와상, 요오꼬상, 박정숙 일행은 후발대를 마중하러 나하공항으로 떠났다.

시간이 많이 남아 이시카와가 바닷가에 가서 맥주나 먹자고 했다. 미영이는 피곤하다며 짐을 지키겠다고 했다.

나머지는 나가이 상, 메구미 상과 함께 바로 옆 해변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며 쉬었다. 바다색이 정말 예뻤다. 해변에는 천막을 쳐놓고 나무의자와 테이블이 쭉 있었다.

그 중 한 칸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이런 자리에 예약이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나 써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예약한 사람이 있다면 비켜줘야 한다고... 옆에서는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여기는 신청하면 바비큐 장비를 빌려준다고 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었는데, 너무 힘드니까...

 바닷가 산책을 하는 사람, 사진도 찍고, 인터뷰를 하기도 하면서 자유로운 시간 가졌다.

 12시에 도시락을 먹고, 1시반부터 행사 진행 준비를 했다. 그 때 후발대가 도착 (민정연, 정윤경, 고명원, 박진영)했다. 서울에서 보는 것 보다 더 반가웠다.

 매대를 펼치고 인천노동문화제 티셔츠와 뺏지, 인천CD를 판매하면서 오키나와 투쟁에 연대와 지지를 보냈다. 티셔츠에 요오꼬 상이 오키나와 신기지건설 반대. 라고 써주었다.

 선봉형과 광배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판매하면서 호객행위 했다. 선봉형은 어설픈 일본어지만 아주 열심이었다. “티셔츠를 뜨겁게 살고 있습니다” (티셔츠를 싸게 팔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잘못 함) 뺏지를 빤쓰라고 하는 등 아주 갖가지 말 장난으로 주위사람들을 뒤집어지게 했다. 우리만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나보다. 우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들이 많았다. 

 오후 3시부터 사전행사가 진행되었다.

오키나와 음악팀이 한 팀 나와서 공연한 후 더늠의 풍물공연 10분하고 꽃다지가 노래 2곡(반격과 사람꽃)을 불렀다.

 사전공연이다 보니 행진대오가 계속해서 입장을 하고 있었고, 대오가 들어올 때 노래 중간인데도 안내 멘트를 했다.  객석은 반 정도 차있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4시가 되어서 집회는 시작했다.

 영택이와 내가 대회 공식 참가자(게스트)로 되어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역을 맡은 준꼬 씨와 단상에 올라가 미리 앉아 있었다. 참, 한국에서도 드문 이런 일이 오키나와에서 있다니. 한국에서 누가 문화단체들을 이런 귀빈 대접을 한단 말인가...

 연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연설자 당 5분간 발언을 하기로 되어 있는지 행진 둘째날 사회를 본 야기상이 젤 앞 중앙에 앉아 ‘1분’, ‘종료’ 등의 팻말을 들어올리고 있었고, 별로 늘어지지 않고 진행되는 편이었다. 

  동경에서 온 노조 위원장, 실행위원들, 국회의원, 무슨 단체 대표자들이 연설을 했다.

 그런데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특이하게도 무대위에서는 행사와 약간 무관하게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는 두 학생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예전 현민대회 흑백 사진을 A3 사이즈로 뽑아 들고 단상 옆이나 뒤에 서고 한 사람이 계속 사진 촬영을 했다. 객석에도 가서 사진을 찍고. 이들은 고교생 사진 창작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팀인데 기술자로 인정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팀이고, 뭔가 창작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사진기자는 한 명도 무대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면서도 이들의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또 매우 특이했다.

 나과 영택의 연설은 약 5분정도 였다. 준꼬상이 통역을 해주었는데 인사말과 소감, 지지 발언, 광주에 대한 이야기, 돌아가서 열심히 투쟁하겠다는 다짐, 감사의 인사, 그리고 구호로 마무리했다. 외국의 공식 연설은 우리가 유일했고 TV에도 나왔다고 한다.

 비는 흩뿌리듯 계속 내렸다. 태풍때문인데 바람도 많이 불어 좀 추웠다. 마지막 아필(선언문) 낭독 시 오키나와 음악팀이 다시 나왔고, 청년 대표가 앞부분은 생략하고 뒷부분 한 문단만 읽는 센스를 보였다. 집회를 정리하면서 음악팀이 같이 연주를 하고 인터내셔날가를 합창했다.

 단상에서 내려오니 이미 매대를 다 정리해 놓았고, 야마시로 상과 인사를 나누고 남은 티셔츠등을 행사 자원봉사자들에게 기증했다.

 서둘러 버스로 다시 이동했고, 사람들이 더 왔기 때문에 오자와씨와 몇 명이 택시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버스로 숙소 도착했다. 오면서 이시카와가 저녁 식사 할 수 있는 식당을 예약했고, 에리꼬도 오기로 했다고 한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어 주점에 들어가 자리잡았다. 모두 28명정도 되었다. 1인당 3천엔(3만원 정도)에 술은 무한 리필, 음식은 코스로 나오고 모자란 것은 더 시키면 계속 준다는 약간 뷔페같은 곳이라고 진짜 좋아했으나 요리의 속도가 너무 늦어 거의 깡술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특히 더늠이 몰려앉은 테이블은 요리가 나오자마자 30초도 안되어 바닥을 보였고, 모두 배가 고파 화를 냈다. 어쨌든 10시 경에 식당을 나와 숙소에 돌아와서는 2차 할 사람들은 라면 끓여 먹고 술마시고 하면서 또 하루를 마감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