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바그다드의 비극

 

누군가 어떤 은행이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을 퍼뜨린다. 아무런 근거도 없다. 소문을 내는 자가 믿을만한 위치(=고학력, 전문직업, 일정한 부)에 있을수록 그 소문은 설득력을 가지고 퍼져간다. 은행 고객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사실여부를 따지려 한다. 그 와중에 예금을 다 인출해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 사람들이 생기니 옆에서 "헛소문일거야"라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곧 모두가 앞다투어 은행에 달려가 예금을 인출해가려 한다. 은행은 곧 현금 재고가 바닥나게 되고 망하게 된다.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어디선가 연기 냄새가 난다. 영화 와중에 수군거리는 사람들 생기기 시작하더니만 잠시후 누군가 극장에 불이 났다고, 다 죽는다고 외쳐대며 출구로 뛰어간다. 다른 사람들 영문도 모른채 그 사람 따라간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출구로 빠져나갈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있는 법.. 순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패닉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 출구로 몰린 탓에 출구마다 아수라장이 된다. 정작 불에 타죽은 사람은 없는데 사람들은 사람에 치어 죽고 밟혀 죽고 맞아 죽는다.

 

이런 사례들은 1950년대 후반 robert merton이라는 사회학자의 "자기충족적 예언 (self-fulfilling prophecy)"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들이다. 인간의 판단과 행위가 나름대로 합리적 기초 위에 서있다는 이론적 가정들에 대해 가운데 손가락 벌떡 세우는 개념이 아닐 수 없다. 하나하나 개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예컨데 은행 망하기 전에 돈 빼내야 하고 불 났으면 빨랑 도망가는 게 합리적이니까)의 집합적/사회적 결과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안목..  

 

그리고 오늘 또 그런 비극적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수만명이 넘는 이라크의 시이트 이슬람 교도들이 거리를 행진한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티그리스강을 건너는 아이마 다리에서 어느 순간 짧은 외침 하나가 튀어나온다: "자살테러다!!" 그 외침 하나에 수만이 넘는 인파의 행진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사람들은 패닉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리고는 한순간에 폭탄 자살테러 몇개가 죽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렸다.

 

하지만 "자기충족적 예언"이라는 개념으로 바그다드의 비극을 설명하는 것은 비극을 더 비극적이게 만드는 일이다. 그 이유는 이 개념이 기본적으로 역사특수적인 맥락을 초월하는 행위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려는 보편성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론/개념이든 "보편성"을 표방하는 이상 아주 구체적인 역사현실의 섬세한 "결," 즉 맥락을 어느 정도 버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보편성(universality)은 수많은 특수성(particularity)들의 발현이며 우리가 흔히 특수하다 여기는 현상들은 언제나 보편성이 작동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한다 (혹은 그렇다고 하며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경우 이런 게 다 j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오늘 바그다드에서 일어났던 참담한 결과를 접하며 오랜만에 그 j같음을 떠올려본다--어찌 천명에 달하는 보통 사람들의 죽음을 극장에서의 패닉과 비교할 수 있을까? 어찌 헛소문 하나가 사람들을 패닉상태로 몰고가 서로를 밟혀죽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찌 이라크의, 바그다드의 시민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의 맥락을 젖혀 놓고 오늘의 비극을 말할 수 있을까? 어찌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개인적 합리성이 집합적인 수준에서 보였던 비합리적 결과"로 돌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왜 죽었단 말인가? 누가 그들을 죽였단 말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