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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타협"에 관해 - 김수행의 글을 읽고 안타까와 함

한 보름 쯤 되었나.. 참세상에 실렸던 김수행의 논설에 대해 다른 인터넷 공간을 통해 쓰고 또 토론하였던 글 혹은 주제. 이곳서 블로그를 만든 연유로 퍼다 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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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꿔야 한다
양극화 해소 없이 '더불어 사는 것'은 불가능

김수행(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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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경제에 대한 최근 좌파의 기본적 입장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좋은 글. 동시에 마음 참으로 안타깝고 불편하게 만드는 글. (내 글 뒤에 복사해놈)

수출의존형 경제보다 내수에 기반한 경제가 노동자 서민들의 삶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는 것 분명하다. 내수의 발전에 기초한 경제정책은 필연적으로 노동자 서민들의 구매력을 촉진시키는 정책, 노동자 서민들의 주머니를 조금이라도 더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정책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수에 초점을 맞춘 경제정책이 노동자 서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진보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치만 이 진보성은 한계적이다.

내수가 강화되어야 수출의존형 경제가 가지는 경제의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고 경제성장의 risk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표되는 내수경제 옹호론의 논리가 여전히 성장 위주의 담론틀 내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은 사실 그리 큰 설득력을 가지진 못한다. "성장신화"가 어느 사회에서나 대체로 노동자 서민에 대한 통제/억압 기제로 사용되어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낙오되는 것이 그 대안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발전되어야 하고 생산력은 증대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산관계의 영역에 해당하는, 경제발전의 청사진을 짜는 일이나 증대된 생산력이 가져다주는 과실분배 등을 둘러싼 decision-making의 문제도 똑같이 고민되어야 한다. 그리고 김수행의 글에서 잘 드러나듯, 이에 대한 남한 진보적 좌파들의 답은 "사회적 타협의 확대"이다.

경제정책결정에서 노동자 서민들의 목소리가 정책결정과정에 반영될 아무런 공식적 통로를 가지지 못한 현 시점 남한사회에서 "사회적 타협의 확대"는 "노동자 서민의 목소리 강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사회적 타협"이란 철학에 기초한 -김수행도 모델로 삼고 있는- "유럽의 선진국"들이 오늘날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본-국가-노동 간의 "사회적 타협"이 궁극적으로는 자본과 국가가 짜고치는 고스톱 판에 노동을 끼워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결정적으로 유럽의 나라들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가능했고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가 정착되었던 것은 오로지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19세기 유럽 정치사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었던 새롭게 등장하는 민족국가들과 구체제 귀족세력들 간의 갈등,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흡수함을 통해 귀족세력들을 무력화시켰던 국가의 전략, 특히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지도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도입된 민주주의 (귀족세력에 대항한 국가-시민 동맹의 완성), 국가를 기본단위로 삼은 국제(경제)질서의 형성 (이게 얼마나 "거대한 변환(great transformation)"이었냐면, 1차대전 이후 형성된 질서가 wto가 세계경제질서를 평정하기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gatt로 이어지는 국가간 경제질서의 기본틀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00년대 초중반까지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착취의 결과 유럽제국들로 흘러들어올 수 있었던 잉여가치.. 이런 역사과정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사회적 타협"이나 "복지국가"는 존재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유럽에서의 "사회적 타협"과 유럽식 "복지국가"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과 메커니즘들이 오늘날 발견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세계경제질서는 명목상으로만 그럴 뿐, 이제 더 이상 "국가간 체제"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WTO는 국가들 뿐 아니라 대자본의 적극적 참여로 구성되며 그 자체로 행정과 사법 기능을 가진 전지구적 단위의 초국적 정부가 되어가고 있다. 반면, WTO의 기능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한줌도 안되는 목소리 센 나라와 자본가들에 의해 뽑혀지고 있다.

이처럼 국가간 질서를 대체하고 있는 초국적 정치경제 단위들로 인해 개별 국가는 과거와 같은 자율성을 가지질 못하고 있다. 최고 정책결정자가 아무리 아래로부터의 민심에 기초한 경제정책을 수립하려 해도 WTO나 IMF같은 초국적 권력단위에서 안된다 하면 쩔쩔 맬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타협"의 아우라를 제공했던 민주주의는 점차 실종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뽑지도 않은 누군가가 결정한 정책을 강요당해야 하며 설사 그것을 반대한다 해도 반대의견을 제기할 공식통로조차 없는 것이다.

100년만에 새롭게 나타난 또하나의 "거대한 변환"을 우린 목도하고 있는데, 남한 좌파들의 시야는 아직도 100년전의 변환에 가 꽂히고 있는 것이다. 지금 "사회적 타협"을 바라보며 그걸 뒷받침하기 위한 "내수 중심의 경제"를 주장하는 그 정신은 참으로 훌륭하지만, 그 판단근거/분석력의 미숙함과 사고에서의 몰역사성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내수성장은 참 중요하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판치고 국가간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의 대외적 자율성(=설사 그것이 초국적 권력단위의 정책기조와 충돌한다 할지라도 자국 시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정책화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가 내수경제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타협"을 바라보면서 주장하는 내수경제로의 방향전환은 문제의 핵심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사회적 타협"을 가능케 해 줄 역사적 조건들이 고갈된 상황에서, 그리고 이미 오래전 "사회적 타협"을 해냈던 나라들에서조차 그 의미가 무색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수출의존형 경제에서 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내수의존형 경제에서의 trickle-down effect일 뿐이다. 언제부터 좌파의 목표가 더 큰 떡고물이 되어버린 것인지..

문제는 경제와 관련된 정책결정과 수행과정에 대한 통제를 누가 하느냐이다. 일국 단위의 자율적 결정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조건에서 설사 "사회적 타협"이 있다손 쳐도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사회적 타협"은, 올바른 방향타를 가지지 못한 "사회적 타협"에의 기대는 오늘날 좌파에게 필요한 정치적 정책적 목표를 더 흐릿하게만 만들 뿐이다.

그렇다고 내수경제나 사회적 타협의 주장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지는 현실적 힘 분명 있다. 타협이 피할 수 없는 것임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타협이 목표여서는 원하는 타협의 내용에 근접도 못한다. 타협은 싸울만큰 싸운 후에 주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회적 타협"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비타협적인 투쟁을 이야기하고 조직해야할 때이다. 그러다 보면 자본이 먼저 정부가 먼저 타협하자 할 것이다. 그때 타협하면 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더 우리가 원하는 방향에서의 타협 내용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타협이란..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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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꿔야 한다
양극화 해소 없이 '더불어 사는 것'은 불가능

김수행(논설위원)


노무현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공동체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지적하면서, "더불어 사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함께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날카로운 현실 파악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전환시키고 실현할 때 우리 사회는 지금과 같은 '증오와 분노'를 해소하게 될 것이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다국적자본이 세계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세계화시대에도 정부 또는 공권력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는 사실을 정책담당자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주 일어나는 세계적인 금융공황을 보라. 1983년에 일어난 후진국의 외채위기, 1987년 10월의 세계적인 주식시장 공황, 1980년대 말 미국 저축대부조합의 대규모 파산, 1997년의 아시아 전역의 외환금융공황, 1998년 미국 헤지펀드 롱텀 캐피털 매니저먼트의 파산 위기, 2002년의 아르헨티나 금융공황 등등에서 각국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시장에 맡겨 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각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금융기관이나 기업을 살리기 위해 누가 자금을 제공했는가? 금융시장도 아니고 자본시장도 아닌 정부가 국민의 혈세인 공적 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노사대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노사 모두가 큰 손해를 보고 경제가 큰 혼란에 빠질 때 누가 이 노사대립을 해소할 수 있을까? 정부 뿐이다. 따라서 '공동체적 통합'에 필요한 현실적인 정책을 '힘이 없기 때문에' 추진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정부는 빨리 물러나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은 노대통령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양극화의 해소가 기업가들과 노동자들 모두에게, 그리고 부자와 서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인식'을 어떻게 심어 줄 것인가?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지금과 같이 수출에만 목을 매달고 있다가는 우리 경제가 계속 침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며 빈곤층을 내팽개치고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목을 비튼다. 이리하여 서민의 소비규모는 격감하고 내수산업은 도산하며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를 겪고 있다. 이렇게 되니까 수출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생기고,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함으로써 국내수요기반을 더욱 축소시키고 서민들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수출 증대와 서민 불행의 악순환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과 우리의 최대 수출시장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2004년에 수출액을 국내총생산액으로 나눈 수출의존도는 37%이고, 수출액과 수입액을 더한 무역액을 국내총생산으로 나눈 무역의존도는 70%이었는데, 이 숫자는 내수기반이 붕괴되면서 2002년부터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미국과 일본의 무역의존도가 20% 정도인 것에 비하면 우리 경제의 무역의존도는 매우 높은 편이고, 따라서 우리 경제는 세계경제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수출시장이 중국과 미국에 너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 대한 수출 비중이 점점 증대하고 미국에 대한 비중이 점점 감소하다가 2004년에는 중국과 미국에 대한 수출이 각각 총수출액의 20%와 17%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시장의 장래가 중국 국내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의 가능성과 미국 정부의 중국에 대한 견제정책에 따라 안정적이지 않으며, 미국 시장에 대한 수출은 항상 미국 정부의 '보복'조치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경제가 수출에 목을 매달다가는 눈 깜작할 사이에 대규모의 과잉생산과 과잉설비에 부닥치고 1997년과 같은 공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수출 증대와 서민 불행의 악순환을 끊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는 내수기반을 확충해야 한다. 정부는 국산품에 소득의 대부분을 지출하는 서민들의 소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경제정책(양극화를 해소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건강한 일꾼일 뿐 아니라 건전한 소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며,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임금과 인격 면에서 엄청난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을 폐지해야 할 것이고, 고용효과가 대기업보다 훨씬 큰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해야 할 것이며, 빈곤층에 대해서도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조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내수기반의 확충 위에서 비로소 건실한 과학기술이 발달할 수 있으며 수출의 증대와 국민생활의 향상이 더불어 이루어 질 것이다.

이리하여 양극화의 해소 → 내수기반의 확충 → 경제의 안정적 성장 → 증오와 분노의 해소 → 사회적 타협의 확대로 나아갈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유럽의 선진국들이 걸어온 길이다. 친미주의자들이 칭송하는 미국 사회는 복지수준에서나 범죄수준에서 유럽의 선진국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5년06월12일 11:47:4

참세상에서 펌: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3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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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블로그는 사려깊고 똑똑한 이들의 왕래가 잦은 사랑방 같은 곳인데, 내 글을 읽고 막막하다거나 답답하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평소 막막/답답을 조장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 글에 담긴 문제의식은 그와는 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정세에 관해 나는 갈수록 낙관적이 되어가고 있다.

5년전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이유들은 훨씬 많아졌음을 나는 발견한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혼돈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혼돈이라는 게 "기존 질서" 시스템의 불안정을 말하는 것인 한, 혼돈의 증대는 곧 기존 질서로부터 큰 수혜를 받지 못한 이들에겐 기회의 증대를 말하는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 블로그에 길게 덧글을 썼다. **는 대안과 구호가 없는 것으로 인한 막막함으로, 그리고 결국 "사회적 타협주의"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물었고.. 많은 이들이 비슷한 답답/막막감을 가지는 것 같았다. 나는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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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기한 "대안"과 "구호"의 문제에 대해:

뚜렷한 "대안"에 대한 그림이 없으면 무언가 불충분한 것 같은 느낌 저도 있습니다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게 무슨 강박관념 같은 것일 가능성 크다는 생각. 왜냐면.. 대안이나 계획이 있다손 쳐도 그대로 가는 경우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가 훌륭한 대안처럼 보는 것들이 아주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 improvise된 결과라는 것을, 훌륭한 듯 보였던 대안이 전혀 안훌륭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을 봅니다 (프랑스혁명이나 꼼뮨이 가장 전형적인 improvisation의 결과일 것이며 명백한 대안을 가지고 성공했던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는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지난 겨울인가 여기에도 올려져있었던 howard zinn의 글에서 배워야 할 것 아직도 많은 것 같습니다). 활동가들의 마음을 편안케해주는 효과야 있을 수 있지만, 대안이 있고 없고에 따라 현실투쟁이 영향받는 부분은 극히 미미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91년 5월 권력대안을 둘러싼 논쟁이 떠오르는군요.. --;)

마찬가지로 어떤 뚜렷한 "대안"을 "구호"에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도 상당히 지식인적 마인드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정치적 투쟁이 사회구조상의 대립과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라 본다면, 자생적으로 터져나오는 구호들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구호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 터져나오는 구호들.. 다양한 삶의 영역들에서 터져나오는 생존권 보장의 구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르짖는 구호, 그리고 삶의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개방 반대의 구호들 외에 어떤 구호가 더 필요한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이라면 혹은 이미 혁명적 정세가 형성된 조건이라면 응당 어떤 대안적 구호가 필요하겠습니다만 과연 그것이 지금 필요한가 혹은 그러한 정세인가에 대해선 또다른 논쟁이 필요할 것입니다).

답답/막막에 대해:

이건 제 의도와 전혀 무관합니다. 김수행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실적 "대안"에 대한 고민(e.g., 사회적 타협론)이 되려 현실투쟁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것 같은 우려는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의 현실이 그닥 우울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한의 테두리를 넘어 전지구적 차원의 그림을 그려보면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제 글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지금 상황은 백여년전 성립되었던 국가간 시스템에서 벗어나 초국적 정치경제 단위들을 중심에 놓는 시스템으로의 거대한 변환이 일어나는 시점입니다. 근데 백여년전의 "거대한 변환"이 국민국가 단위에서 형성된 아래로부터의 지지/동의에 기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오늘날 "거대한 변환"의 움직임은 아래로부터의 지지/동의를 이끌어내는 절차와 과정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전지구적 저항은 이미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 이것이 이삽십여 년전 유로콤의 고민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99년 시애틀에서 시작하여 퀘벡 밀라노 캔쿤 등등을 거쳐 서구 사회운동 중심의 global justice movement는 올7월 스코트랜드에서의 G8 회담을 깽판놓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알헨티나,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등 남미 국가들과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의 반신자유주의 전선은 점차 강고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에콰도르에서의 좌파정권 창출과 함께 남미에서 반신자유주의 블럭의 형성은 이제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네덜랜드 국민투표 결과 또한 새로운 거대한 변환이 가져다 줄 위험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보통 인민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남한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전지구적으로도 아주 모범적인 투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 판단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투쟁의 불꽃을 계속 살려내고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책결정자들로 하여금 바깥에서의 압박과 내부로부터의 압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내수 중심 경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압박은 이런 면에서 유효합니다. 내수가 활성화되어야 외부의 압박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자율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질서에서 주류 신자유주의에 저어하는 국가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내는 것이야 말로 지금 남한에 가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압박을 약화시키는 길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남한의 사회운동은 새로운 "거대한 변환"에 맞선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투쟁과 보다 더 연대를 돈톡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국의 차원을 넘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혼돈을 계속 부채질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WTO IMF G8 EU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 바람에 입각해 진행되고 있는 모든 움직임들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은 인터내셔널리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사회적 타협주의"에 대해:

혁명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야 ** 말대로 "사회적 타협"은 불가피합니다. 타협은 모든 갈등이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협은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것과 사회적 타협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투쟁의 결과로서의 "사회적 타협"을 바라봐야지 그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것이 "타협주의"일 것입니다)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개진한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라는 게 그닥 투명해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불안정한 전환기, 위기상황은 불투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투명한 혼란의 상황에서의 improvisation을 통해 인류는, 인민은 끝없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저는 현재의 상황이 전혀 어둡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되려 갈수록 희망의 근거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타협"을 구호로 삼으려는 시도들이 안타까왔던 것입니다. 그게 오히려 투쟁의 불꽃을 잠재울까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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