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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는 무죄?

  • 등록일
    2010/02/01 17:44
  • 수정일
    2010/09/13 12:29


오랜 기간 동안 투수의 능력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지표는 ‘방어율(ERA)’이었다. 하지만 새이버매트리션의 등장 이후 방어율은 커다란 공격 앞에 직면하게 됐는데, 투수가 제어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투수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모순 때문이다. 야수의 수비력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비력이 뛰어난 팀의 투수는 멋진 호수비로 실점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반면, 천하무적 야구단의 임창정 투수는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는 실책’ 때문에 실점이 마구 늘어날 수도 있다. 발 빠른 주자도 방어율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은 물론 지금까지 많았으나, 고민 끝에 대안을 내놓은 이는 미국의 야구팬 보로스(Voros)였다. 판타지리그 게임을 즐겨하던 보로스는 방어율이 연예인들 스캔들 기사처럼 못 믿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힌 뒤, DIPS(Defense Independent Pitching Stats)라는 수치를 고안해냈다. DIPS는 ‘온전한 투수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삼진과 볼넷, 홈런, 몸에 맞는 공만을 변수로 계산하고, 나머지는 리그 평균을 이용해 계산한다. 야구분석 애호가들 사이에서 DIPS는 오랫동안 (그나마) 꽤 믿을만한 지표로 이해돼 왔다. 물론 DIPS도 약점이 있다. 그리고 하드볼 타임즈(The Hardball Times)의 닉 스타이너(Nick Steiner)는 1월27일자 칼럼을 통해 이 약점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사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제어 저젼스 투수. 2009년 14승10패에 방어율 2.60으로 꽤 준수한 성적을 찍어준 반면, DIPS는 3.82를 기록했다. 저젼스는 2009년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 중 방어율 대비 DIPS 비율(DIP%)이 가장 높은 선수로 남았다.

 

DIPS가 각광을 받았던 이유는 투수의 통제영역 밖에 있는 요소를 제거해 투수의 능력을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투수의 통제영역’ 수치로 삼진과 볼넷, 홈런, 몸에 맞는 공으로 꼽았다. 문제는 이 네 가지 요소에도 ‘투수의 통제영역 밖의 요소’가 엄연히 있다는 점이다. 바로 △타자 △심판 △수비 △환경(경기장 크기 및 조건, 날씨 등)이 이의 대표적인 요소들이다.

 

- 우완 투수와 우타자
- 91-93마일 구속의 직구
- -3인치에서 -7인치 사이의 횡적 움직임을 보이는 공
- 8인치에서 12인치 사이의 종적 움직임을 보이는 공
- 1스트라이크 2볼 상황
- 바로 전 상황에서 직구를 던진 경우
- 주자는 없는 상황
 

스타이너는 타자와 심판이 투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위와 같은 조건을 설정한 뒤, 그에 해당하는 투구와 결과를 모두 모았다. 2007년 이후 Pitch f/x 데이터 상 위와 똑같은 상황을 기록한 투구수는 모두 536개였다. 이 536개의 투구 하나하나를 표시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출처> The Hardball Times

 

각 코스별로 나눠보면, 해당 코스에 던져진 투구들은 모두 대동소이한 구속과 움직임을 보였으나, 결과는 (당연히도) 제각각이었다. 가운데 아래쪽 코스로 들어온 공(그림 상의 진한 파랑색)은 536개 중 34개였다. 이 34개의 공 중 3개는 볼 판정을 받았고, 5개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으며, 헛스윙은 단 하나도 없었다. 파울은 10개가 나왔고, 안타와 3루타는 없었으며, 홈런과 2루타가 각각 3개씩 나왔다. 나머지 10개의 공은 타자의 배트에 맞았으나 아웃 처리됐다. 1스트라이크 2볼 상황에서 아웃과 홈런이 기록하는 RV(Run Value, 득점가치)의 차이는 무려 1.68점에 이른다. 이처럼 각 코스별로 같은 투구가 불러온 RV 차이는 아래 표와 같다.

 

<출처> The Hardball Times

 

대부분의 코스에서 RV가 -0.1점 수준의 비슷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투구의 결과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는 점도 보인다.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의 경우(초록색 그래프)에만 대체로 투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즉 같은 상황에서, 같은 판단에 따라, 같은 코스로, 같은 구질과, 같은 구종의 공이 투구됐지만, 결과는 아웃에서 홈런까지 천차만별이었던 셈이다. 투구는 ‘온전한 투수의 영역’이었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여기에 DIPS의 약점 중 하나가 있다. 어떤 타자냐에 따라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DIPS는 반영하지 못한다. 생각보다 ‘투구 외적인 요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심판’이란 변수는 어떨까.

 

규정집에 따르면, 스트라이크존은 ‘홈플레이트를 좌우 폭으로 한, 타자의 어깨와 허리띠 중간 지점에서부터 무릎 사이의 높이의 공간’을 뜻한다. 스트라이크존은 투구 상황에서 타자가 취하는 타격자세에 따라 측정토록 돼있다. 또 스트라이크존의 좌우 폭을 뜻하는 홈플레이트의 넓이는 17인치이지만, 홈플레이트의 아무 곳이나 지나쳐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실제 스트라이크존은 이보다 더 넓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규정가 이런 식이다보니 스트라이크존이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심판의 취향에 따라 때론 규정집에서 정한 스트라이크존보다 납작한 스트라이크존이 사용될 때도 있고, 길쭉한 스트라이크존이 사용될 경우도 있다. 지난 2001년에는 리그사무국의 샌디 알더슨(Sandy Alderson) 부회장이 ‘스트라이크를 규정집대로’라는 캠페인을 벌였을 정도다. THT의 존 월시(John Walsh)는 약 8만개의 투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현실에서의’ 스트라이크존을 분석한 포스트를 2007년 7월11일 등록했다.

 

<출처> The Hardball Times

 

첫 번째 도표는 우타자의 좌우 폭을 기준으로 스트라이크(빨간색)와 볼(파란색)로 판정된 투구의 숫자를 기록한 것이다. 공이 중앙에 몰릴수록 스트라이크 판정의 비율이 높아지며, 좌우로 쏠릴수록 볼로 판정된 공이 많아진다.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이며,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래 도표는 좌우 폭을 기준으로 했을 때 볼로 판정받은 비율(Fraction of balls)을 규정상의 스트라이크존(빨간선)과 현실에서의 스트라이크존(초록선)을 비교해 본 것이다. 만일 심판들의 스트라이크존 판정이 기계처럼 정확하다면, 규정상이던 현실이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순간 볼로 판정받은 비율이 ‘0’이 돼야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위 두 개의 그림은 ‘우타자’를 기준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좌타자’의 경우는 어떨까.

 

<출처> The Hardball Times

 

좌타자의 경우 스트라이크존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월시의 분석에 따르면, 좌타자가 들어섰을 경우 스트라이크존은 타자의 바깥쪽으로 더욱 쏠린다. 이는 아마도 심판의 위치에 따른 착시현상이 불러온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위아래를 폭으로 본 스트라이크존은 어떨까.

 

<출처> The Hardball Times

 

존 월시는 좌우 폭을 기준으로 스트라이크존을 측정한 방식을 그대로 위아래 기준에 적용해서 계산했고, 위 그림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흥미로운 것은, 스트라이크존의 좌우 폭이 좌타자와 우타자 모두에게 규정집보다 넓었던 반면, 상하 폭은 규정집보다 좁게 측정됐다는 점이다. 특히 좌우타자를 막론하고 낮은 공에 대한 스트라이크존이 규정보다 좁게 나타났는데, 사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심판의 시선이 스트라이크존의 상한선과는 비슷한 곳에 위치한 반면, 하한선인 타자의 무릎보다는 높기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착시현상인 것이다. 우타자의 경우 스트라이크존의 높이 상한선은 규정집과 대체로 일치한 반면 하한선은 보다 박해졌으며, 좌타자의 경우 위-아래 모두 규정집보다 좁게 나타났다. 이렇게 현실에서 드러나는 스트라이크존의 좌우-상하 폭을 규정집의 그것과 비교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출처> The Hardball Times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 결국 투수는 공이 자신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아무런 통제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투수의 통제영역 밖의 결과’를 가지고 투수의 능력을 측정한다면, 투수로선 다소 억울할 수 있다. 이는 승패와 방어율, DIPS 등과 같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투구 이후의 결과를 근거로 삼는 모든 지표에게 해당되는 반론이다. 그렇다면 ‘투수의 능력’은 도대체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 닉 스타이너는 ‘Pitch f/x 상의 자료(투구의 구종과 초속-중속-종속, 로케이션, 좌우-상하 낙차 등 구질정보를 담은 기록)야 말로 투수의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진보된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스타이너의 결론은 문제제기에 비하면 다소 초라해 보일지언정, 분명히 깊게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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