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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의 보편성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5/18 11:19
  • 수정일
    2015/05/06 18:4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글[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을 쓰시고 또 한 편의 글[문제의 글에 덧붙임]을 쓰셨습니다. 두 번째 글 덕분에 하나의 쟁점이 명확해졌다고 보는데, 그것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라는 쟁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쟁점이기에 슈리님이 성매매를 소재로 삼은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슈리님이 성매매 여성과의 연대를 거부한 것이 아니며, 그녀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린 것도 아닌데 독자들이 단순한 오해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애매한 글쓰기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슈리님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전적으로 변명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서술 등을 하실 때 특히 그렇습니다. 일단 이것이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의 판단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별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두 경우 모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어떠한 행동을 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하다면,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이지 그것을 인용부호로 처리한 다음 ‘전적으로 변명할 수는 없다’는 또다시 애매한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그 말 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하다면 도대체 왜 그 바로 위에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을 하시는 건지요?


내지는,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즉 그 자체는 가능하더라도 근본적인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 ‘어쩔 수 없음’ 만으로는 그것에 대한 전적인 변명이 될 수 없다고 하고자 했다면, 이 문장에 내재된 모순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던가요? 슈리님은 “X라는 행위를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를 하나의 예시로 들어주시는데, ‘어쩔 수 없음’은 바로 ‘죽을 수조차 없음’을 포괄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왜 그리도 쉽게 간과하시는 것인지요?


이미 슈리님의 글이 내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있으면서 왜 특수성이야말로 거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시는지요? 만약 슈리님의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면,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밑그림은 이미 아포리아에 다다른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저 표현 역시 슈리님의 불찰로 인한 불명료함일 뿐이라면, “양해”는 그만 구하시고, 명료한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거듭된 수정을 거치심이 어떠한지요? 슈리님에게는,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이 글을 제출했어야 했더라도, 여전히 근본적인 자유가 있으니 말입니다.

 


1. 성노동의 문제


슈리님은 결코 성매매 여성들과의 연대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매매를 ‘보편적인’ 문제로 보려는 여성주의와는 필시 거리를 두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수한 요구들이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된 경우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주의도 그런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을 수 있지만, 그것은 가변적이므로 “그 자체로 판단할 사안”이 아닌 것, 즉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되어있는지의 여부를 검토하는 것으로 치환되어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여성주의는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슈리님은 왜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님을 굳이 증명해내셔야 할까요? 그러니까, 성매매가 임노동이라서 이것이 보편적인 해방과 관련이 된다고 하더라도, 사실 슈리님의 글의 논리구조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임노동이 아니라는 쪽의 증명이 필요할까요? 선의로 해석한다면 슈리님은 성매매가 임노동일 가능성과, 임노동이 아닐 가능성 모두를 고려한 뒤에, 면밀한 논증 결과 그것이 임노동이 아니라고 판명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선언’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사고를 전환하자면, 오늘날 좌파 진영에서 누가 ‘다른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여성주의자들보다 그 누가 더 투철하게 좌파 진영에서 ‘다른 보편성’의 사고를 요청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보편적인 해방’을 수호하기 위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해야 하는 좌파 내의 진영은 여성주의자들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리고 그 여성주의자들을 반박하는 것에 대해, 성매매가 결코 보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진리의 장소’일 수 없다는 충격적인 스캔들을 폭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슈리님의 글은 좌파인 독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성매매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서술하는, 내지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성매매가 설령 여성의 문제더라도,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 증명된다면 슈리님의 논증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매매는 당연히 여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매매는 여성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특수한 문제일 뿐 보편적 해방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큰 일관성이 있지 않은가요?

 


2. 성과 도덕의 문제


더욱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첫 번째 글의 <2. 성과 도덕>이 슈리님의 논증에 있어서 도대체 왜 필요한가 입니다. 슈리님은 단지 성매매가 노동자 계급의 문제가 아닌 특수한 문제인 것만을 지적하시면 되는데 왜 굳이 그것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증명’하셔서 그토록 글의 맥락을 흐리는 것입니까? 그것도 제대로 된 증명을 하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된 증명인지의 문제에 대해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칸트주의적 답변이 이론적으로, 맥락적으로 맞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성을 파는 쪽 역시, 자기의 자유로운 인격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하기 때문에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위와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은 올바”르다(?). 순서가 바뀐 것 같은데, “위와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은 올바”르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하기 때문에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겠지요.


왜 성매매는 부도덕한 것인가요? 참고로 슈리님은 칸트주의적 답변을 기각하고 나신 후 두 번째 글에서 칸트의 철학적 혁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고 합니다. 어쩌자는 것인지요?


여하튼 계속하겠습니다. 성매매가 부도덕한 것은 일단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애매함을 좀 더 밀고 나가” 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근친상간의 금기를 제시하시면서 이 근거 없음이 “인간 사회의 토대이며 실체”라고 하십니다. 근친상간이 금기라는 데는 별 이의가 없습니다. 과연 성매매가 금기인가요? 그러니까 A라는 사람이 근친상간을 했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A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할 것입니다. 반면 A가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사실 여기서 고려할 것은, A가 성을 구매한 남성이냐, 성을 판매한 여성이냐에 따라서 그 사회적 판단이 달라진다는 지점이겠지만, 이것이 칸트주의적으로 어떻게 해명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츄리님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그것은 금기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근친상간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은데도 금기이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금기와 법적 금지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는 없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근거 없이 성매매를 부도덕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요? 혹은 슈리님의 지나친 말장난 때문에 오해가 생겼다고 치고, 칸트주의적 답변이 옳고, 그것으로부터 성매매의 부도덕함을 추론할 수 있다고 해봅시다. 칸트주의적 답변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우리는 부도덕한 행동을 한 사람을 계속 하나의 인격체로서, 하나의 목적으로서 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다 지도록 해야 합니다. 칸트는 부도덕한 자에게 그 책임을 다하게 하기 위해 동해보복의 제재를 주장했으니, 우리는 “자기의 자유로운 인격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한 것에 대한 동해보복을 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성매매 여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에, 그녀가 그냥 다시 성매매를 하면 결국 동해보복이 가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관은 성매매에 대해 유효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슈리님은 칸트의 철학적 혁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여기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든지, 성매매가 금기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인류학적 연구를 행함이 어떠한지요? 왜냐하면 근친상간이 금기라면, 그것과 성매매 사이에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즉 완전히 새로운 연구가 필요합니다.

 


3. 여성주의의 문제


슈리님의 두 글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주장은, 노동자 계급의 관점만이 유일한 보편성을 무조건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여성주의자로서,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자로서 이것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제 의무입니다.


물론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슈리님이 왜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된 경우만이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는지 성실하게 논증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왜 노동자 계급의 문제만이 “진리의 자리”를 독점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증 말입니다. 그러니까 슈리님은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논증은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공백’이 있는 한, 슈리님에 대한 반박은 개연적으로 자의적인 추측을 수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개연성을 용납하실 수 없다면, 부디 성실한 논증을 선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저는 자의적인 추측의 개연성이라는 위험을 떠안고 글을 계속 전개할 테니, 이 자의적일 수 있는 해석이 너무 불쾌하실 것 같다면, 이 글에 대한 독서를 중단해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안전한 반박을 위해서, 슈리님이 어째서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되었을 때만이 보편성이 획득되는지에 대한 논증을 추측하기보다는, 그것만 가지고는 보편성이 온전히 달성될 수 없음에 대해 간단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저는 박가분 씨의 <페미니즘의 변용과 성차의 진리>를 적극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더 분명해진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고전적 철학과 정치적 담론이 견지했던 반여성주의적 제스처를 결코 긍정할 수 없다. 우리에게 유용한 참조가 되었던 라캉 역시 예외가 아니다. (중략) 그런데 버틀러가 라캉의 반-여성주의를 논박하면서도 그녀 역시 "여성적 주체"의 고유한 도덕적 가능성에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본연의 주체성을 다양한 수행적 제스처 안에서 상상적으로 해소함으로써 상징적 억압의 여성적 판본을 제출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급진적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본연의 해방 정치의 모든 차원이 폐색에 이른 지금 남성주체와 여성주체가 "마주할 수 있는" 본연의 보편적인 기획을 사고해야 한다."


보편적인 기획 안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관점의 반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주체와 여성주체가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도래(=노동자 계급의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의 달성?)가 이를 보장할까요? 분명 “공명”하지만 이것은 여성주체와 남성주체가 마주할 수 있는, 자본주의보다 나은 조건에 불과합니다. 이 여성과 남성 주체의 “연정어린 조우(amorous encounter)”의 과정 안에서 산출 될 수 있는 진리-사건의 신화적 원형은 “만남”(=사랑)인데 사랑은 분명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이것에 대해 “이 양자의 차이를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우리가 적이라는 물음에 완전히 직면하게 되는 데 견주어 사랑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보편적인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 달성해야 할 여성주체와 남성주체의 마주할 수 있음은 그 공명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있으며 이 여성주체와 남성주체의 마주침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젠더의 문제로서, 바로 여기에 보편적 기획을 완수하기 위한 여성주의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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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길 출판사 2010 조재룡 옮김, 72p.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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