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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연대의 촉구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10 11:21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laron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내 입장을 다시 정리해본다.

 

1. 왜 laron의 글은 여성 억압적인가?

 

laron은 김윤옥을 자체 제작한 포르노에 등장시켰다. laron은 ‘포르노에는 반여성성 말고도 많은 문화사회적 맥락(http://blog.jinbo.net/picotera/?pid=425)’이 있다고 한다. 포르노의 문화사회적 맥락은 아마 포르노의 어원,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포르노가 등장하게 된 맥락을 지시하는 것 같다. laron은 자기 글이 그런 의미에서 포르노의 문화사회적 맥락에 충실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지배계급을 희화화시키는 도구로 포르노가 이용되었듯 자신도 김윤옥이라는 지배계급을 희화화하는 데 포르노적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그래서 laron은 강용석 때문에 그만 두고자 했을 것이다. 포르노의 문화사회적 맥락만 따진다면 강용석의 발언이 laron의 글보다 훨씬 포르노적이니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이 여성으로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노동자 여성은 노동자 남성의 아내로, 자본가 여성은 자본가 남성의 아내로밖에 불리지 못하고 그렇게만 보인다. laron의 눈에는 김윤옥 역시 여성으로 보이기보다 이명박의 아내로밖에 보이지 않았나 보다. 여성으로 보였더라도 그는 어떤 계급투쟁에의 이로움 때문에 김윤옥을 여성으로보다는 한 남성의 아내로 읽어내고 등장시켰다.

 

여성 억압적 포르노와 여성 억압적이지 않은 포르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포르노는 문화사회적 맥락상 여성 억압을 내포한다. 포르노가 여성 억압적이더라도 그 문화사회적 맥락과 의도를 고려해서 그 유용성을 인정하자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말하는 ‘계급혁명이 일어나면 여성도 해방될 것’이라는 오류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문화사회적 맥락에 충실할수록 포르노는 오히려 더 여성 억압적일 수 있다. 여성 해방에 저해가 되더라도 포르노의 유용성을 받아들이자는 뜻밖에는 더 되지 않는다.

 

2. 왜 laron이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이 비윤리적인가?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이 논쟁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여성이 이 논쟁에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이 전략적 오류라면, 남성이 그러는 것은 비윤리다. 윤리라는 것은 자기가 고립된 개인이 아니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타자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하고 그로부터 어떤 행동양식을 만들어 낼 때, 그 행동양식을 윤리라고 부른다.

 

남성이 여성 억압적 글쓰기에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은 젠더적 지형과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한국을 살아가는 몇몇 남성들(과 조선일보의 박은주)은 OECD에서 2006년에 발표한 GID 지수(http://www.oecd.org/dataoecd/57/20/36240233.pdf, 아랍권 국가들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허무맹랑한 지수다. 이것은 ‘제도’가 얼마나 평등한가를 보는 지수로서, 여성이 현실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에서 대한민국의 성평등이 세계 4위니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중 하나라고 외치고 다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남성은 오히려 성평등에 대한 일종의 피로감을 호소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 여성이 여성으로서 말할 수 없고, 동등한 임금을 받지도 않으며 가족 내에서 가부장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제도가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내가 딛고 있는 현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성 억압적 현실에서 남성이라는 젠더는 억압하는 총체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남성이 가질 수 있는 윤리는 자신이 억압하는 총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laron이 자기 글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글을 썼다는 현실적 인식을 회피하는 것으로서 윤리적 기반이 부재해 있다.

 

3. 왜 표현의 자유의 문제로 보면 안 되는가?

 

먼저 본격적인 질문과 아주 무관하지 않은 작은 문제제기부터 하겠다. 많은 블로거들이 laron의 성찰과 반성을 요구한다. 진보넷도 답변에서 성찰과 사과를 주문했다. 물론 laron의 성찰과 반성은 중요하고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성찰과 반성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계급문제를 논할 때 부르주아지의 성찰과 반성이 부가적인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핵심이 되지는 않는다(오히려 부르주아지의 자선이 일종의 성찰로 읽혀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 해방 운동에서도 남성의 성찰과 반성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아니다.

 

이 논쟁에서 과연 여성 억압적 표현도 표현의 자유가 될 수 있는지가 화두가 된 듯 하다. 의도했든 안 했든 laron을 비판하는 여성들도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laron의 글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본다면 다시 자유주의 프레임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자유주의 프레임은 문제의 해결을 자유의 내면적(계몽적) 내지 외재적(강제적) 제한으로 풀어나가게 된다. 만약 laron이 끝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데도 표현의 자유를 중점으로 논의가 흘러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진보넷에서 여성 억압적 글쓰기가 허용되어야 하는가, 어느 정도의 제한이 가해져야 하는가의 테제들이 등장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그 제한에 관련한 논쟁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자유주의, 그것도 자유주의 법학과 연관을 맺게 된다. 우리는 자유주의 법학이 중성으로 가장한 남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 법학의 중성성은 논의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며 심지어는 그 운동성까지 갉아먹는 해를 끼친다.

 

실제로 여성 억압적 표현, 다시 말해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을 제한하기로 합의를 봤다고(‘반성’했다고) 가정하자. ‘김윤옥 포르노’류는 제한될 것이다.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가 섹스를 하는 상상을 한다’류는 제한될 것이다.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랑 섹스를 하고 싶다’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잘 모르겠으면 조금 더 심화시켜보자.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랑 섹스, 그것도 쓰리썸을 하고 싶다. 김ㅁㅁ도 그러길 바라면 좋겠다.’ 확실한 대상화이며 ‘나는 김ㅁㅁ랑 섹스를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다르지 않으므로 이 역시 제한될 것이다.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랑 식사를 하고 싶다’류는 어떤가? 언뜻 보면 여성 대상화가 아닌 것 같지만 그 맥락을 살펴보면 여성 대상화가 맞다(특히 김ㅁㅁ가 여성이라는 가정 하에서는). 남성이 여성과 데이트를 할 때, 그 최종 목표가 성관계인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맞는 명제다. 그렇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여성 대상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그 ‘이상’을 바란다는 것, 맥락적으로는 여성에 대한 대상화라는 점을 시사한다.

 

자유주의의 능력이라고는 불분명한 논리로 저 단계에서 어디까지가 부적절하고 제한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즉 모든 단계를 다 제한해서 거의 모든 소통을 금지시키든가, 특히 눈에 띄는 여성 대상화만 제거하여 나머지 대상화들은 남겨두는 오류를 범한다. 또, 남성들은 보다 사적이고 보다 은밀한 공간에서 계속해서 여성 억압을 지속할 것이며, 여성은 다시 껍데기 평등에 안주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진보넷이라는 공간을 여성 억압적 표현이 없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해방되는 것이다.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 나는 그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있지 않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중성을 가장한 남성의 글쓰기,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글쓰기를 할 때 어떤 결론이 도출될 지는 알 것 같다.

 

여성으로서의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진보넷에서 여성 억압적 표현을 몰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나는 진보넷이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가능한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런데 진보넷의 현실에서 남근주의가 발견된다. 단지 다른 커뮤니티에 비해 많이 숨겨졌을 뿐 결코 부재하지 않는다. 진보넷을 남근주의가 없는 공간으로 간주하는 것이 여성 해방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진보넷의 기능은 그런 남근주의적 발언에 대해 여성연대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이 여성 억압인 것은 맞다. 그런데 왜 그것이 여성 억압인가? 여성이 동등한 위치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여성이 대상화되지 말아야 하는가?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여성도 남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사회가 성평등 사회인가? 그 사회는 성평등 사회가 아니라 무성생식에 가까운 사회일 것이다. 여성이 동등하지 않은 이유는 여성이 남성을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할 때는 대상화뿐만 아니라 상품화도 병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주의와 결합된 가부장제의 특성도 고려해야 할 문제다(상품화를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면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상품화는 대상화의 변주에 지나지 않으므로 별도로 고려할 필요는 없다). 가부장제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로 봐야 한다.

 

뤼스 이리가레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비슷한 문제에 대해 같은 방향으로,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 2의 성(le deuxième sexe)인 여성이 가부장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했다면 이리가레는 여성은 없다고 봤다. 우리가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남성이 아닌 무언가, 성조차 아닌 성(ce sexe qui n’en est pas un), 주변부에 있는 그것(이다).

 

나는 두 페미니스트의 입장이 상호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의 연대를 이뤘을 때 대단한 동력으로 작동한다고 보지만 지금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이리가레의 문제의식에 서고자 한다.

 

(윗 단락이 내가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독해될 가능성이 있고, 또 실제로 그런 독해가 생겨서 덧붙인다. 이 글의 제목에서 말하는 '여성연대'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뤼스 이리가레의 연대가 아니다. 나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뤼스 이리가레의 이론이 마치 반대된다는 듯이 쓴 글을 예전에 본 적이 있고, 그것을 경계하고자 두 페미니스트의 연대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사실 이미 시몬 드 보부아르가 사망한 마당에 두 페미니스트의 실재적인 연대를 바라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여성 억압에 맞서서 현재 필요한 것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복원이며, 그 작업을 위해 젠더로서의 여성은 모두 포함된 여성연대를 주문한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남성에 의해 잉여나 찌꺼기 형태로만 남아있는 이 성에 여성이라는 섹슈얼리티를 입히는 작업이다.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 남성이 오독하고 오역한 찌꺼기의, 상품의 섹슈얼리티를 다시 독해해낼 때 여성은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다.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얻어냈듯이 여성도 남성의 대상화 전략을 은유함으로써 남성의 전략을 흔들고 축소시켜 남성의 여성이나, 남성이 되고자 하는 여성이 아닌, 여성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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