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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폭2세환우의 삶과 목소리

* 2007년 8월 5일 히로시마 도서관에서 열린 '국제연대집회'에서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장의 연설 전문입니다. 

 

 

한국원폭2세환우의 삶과 목소리



                                                    정숙희(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 이런 행사에 초대해주신 모든 단체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당시에 히로시마에서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 세분께서 피해를 입으셨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와 고모 한분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후 할아버지 시신은 찾아 화장해서 근처 절에 갖다놨다고 하는데, 고모의 시신은 찾지도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겨우 살아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합천 고향으로 나왔지만 먹고 살 게 없어서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살아계시는 동안에 피폭후유증으로 숨이 차고 기침을 자주 하셨고 하루도 약 없이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건너가 검진한 결과 폐에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1990년 일본에서 돌아오시고 3일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4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했고, 합천으로 돌아오신 뒤에 폐암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습니다.  항암치료와 가족 모두 힘을 모아 민간요법 등으로 치료를 해서 차도가 좀 있었지만, 좀더 건강을 되찾기 위해 일본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일본 측 병원에서 어떤 치료방법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2주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일본측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산 공항에 읍급차를 대기하고 있으라’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오실 때 아버지의 모습은 중환자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해서 두 다리로 걸어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아버지도 1999년 일본에 건너가 검사받은 뒤에 돌아와서 식물인간이 되어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버지가 일본 병원의 실험대상에 불과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피폭자 건강수첩도 가져갔는데 일본쪽은 아버지 죽음에 해명 한마디 없었습니다. 아버지 생전에는 일본에서 수당도 없었고 병원비만 겨우 지원이 되었는데, 일본에 다녀온 뒤에 돌아가셨으니 결국 일본은 아버지를 두 번 죽인 것입니다.


저는 1966년에 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 잘 엎어졌고, 중학교때부터 빈혈이 심해서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날씨로 따지면 화창한 날씨가 없고 맨날 구름 낀 날이지요. 다리가 아파 두드리면서 자다가 2000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진단결과로 연골이 재생되지 않는 병이라고 하였고, 병명은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양쪽 다리에 인공뼈를 넣는 수술을 받아 인공관절로 지탱을 하고 있으나 남의 피를 많이 넣고 약을 계속 많이 먹어서인지 살이 쪘습니다. 수술비로 빚을 많이 지고 수술 뒤에도 6개월 이상 걷지 못해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목욕도 혼자 못해서 우즐증도 걸려 3번 죽으려고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원폭으로 뼈가 약한 것이라 생각 못하다가 딸도 내 어릴 때 증상과 비슷하고 남동생도 정신지체장애인 다운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어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언제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할지 모르는 상태이며 요즘은 더 어지럽고 구토증세가 있어 병원에 의뢰하여 진찰을 받은 결과 피가 일반인에 비해 3분의 2정도 밖에 없다고 합니다.

몸속에 피가 출혈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2세 환우 분들을 찾아보니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픈 분들도 많고, 병원에 가도 병명조차도 없는 분도 계시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병원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몸이 아프니 일을 할 수 없고 생계가 어려우니 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정말 모두들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전 회장이었던 김형률씨가 계속 전화를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부산에서 대구로 저를 만나러 왔을 때도 저는 원폭피해자 2세임을 부정하고 만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제가 다른 2세들에게 전화하면서 형률씨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전 김형률 회장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05년 7월부터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고통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또 하루를 살아도 차별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원폭피해자로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며 살아왔기에 한국정부와 일본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2,3,4세 앞으로 몇 세대가 될지 모르나 이 고통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치료와 생계를 보장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특별법이 꼭 통과되고 2세 등 후세에게도 차별없는 피해보상을 해주어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는 우리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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