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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03
    2007/05/03(1)
    금금
  2. 2007/03/02
    눈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금금
  3. 2006/11/20
    똥빨래
    금금
  4. 2006/08/16
    시간이 다가온다(4)
    금금
  5. 2006/08/13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금금
  6. 2006/04/28
    환한 웃음을 가졌던 사람(1)
    금금

2007/05/03

주말에 아내가 광화문에 있는 공원에 갔다.

주말마다 열리는 알뜰시장에 옷가지 몇 점과 이런저런 물건을 갖고.

두 시간 정도 물건을 팔고 번 것은 삼만 얼마.

 

오늘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패물을 처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결혼 반지와 아버지가 끼셨던 반지.

언제가는 이것들도 팔아야 하겠지.

 

서신부님은 끝까지 놓지 못한 것이 책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이런저런 책을 샀는데,

이제 책도 팔아야 하겠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가진 게 많다.

 

얼마 전 꽤나 묵직한 복합기를 얻었다.

부품 하나만 교체하면 쓸 수 있는 아주 멀쩡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 부품 가격이 복합기를 새로 사는 가격하고 비슷했다.

그래서 그냥 고물상에 넘겼는데,

아저씨가 말한다. "돈은 못 드려요"

 

쓸 수 있는 물건들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생각을 한다.

 

자본주의 아래서 사람은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대충 쓰고 버리는 물건.

 

다큐멘터리를 한다는 핑계로 놀면서 사는 나는

재활용도 안되는 폐기물일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생각하는 것은 있다.

언제가 숨이 멈추면 어느 나무밑에 묻혔으면 싶다.

거름으로 쓰일 수는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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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멍하니 텔레비젼을 본다.

쉴새없이 채널을 돌린다.

우스개 소리를 하는 채널에서 멈춘다.

그리고 웃는다.

 

아버지를 찍은 테이프를 하나 보았다.

대관령.

풍력발전기가 있는 곳이 나온다.

아! 저기에도 갔었구나.

잊고 있었다.

눈물을 잊은 것처럼.

 

꿈꾸듯 지나온 시간들이다.

깨지 않는 꿈.

아버지는 그 꿈속에 있다.

나는 꿈도 잊어버렸다.

눈물을 잊은 것처럼.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걸까.

눈물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나.

이렇게 지내도 되는 것일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들숨을 끝으로 납작해진 코.

하얗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얼굴.

엉덩이에 생긴 욕창.

굳어가는 몸.

 

두 얼굴의 아버지가 있다.

사진속의 아버지와

마지막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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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빨래

병원에서 돌아오는 어느날

이천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걸음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가지러 갔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한참을 찾았지만 아버지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아버지를 불렀다.

화장실에 계셨다.

 

한참 후에 나온 아버지는 쓰게 웃으셨다.

설사가 나와 급하게 화장실로 오셨다했다.

차에 오르는 아버지를 부축하려고 보니 바지 뒷부분이 온통 누렇다.

씻고 가자고 하니 그냥 빨리 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급하게 차를 몰았지만 정선집까지는 하세월이다.

다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씻고 가시죠.

아버지는 힘없이 대답하신다. 그럼 그럴까.

 

문막휴게실에 차를 세우고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갔다.

바지를 벗겨드리고 솟옷을 벗겨드렸다.

배만 볼록하다.

솟옷을 사러갈려고 문을 열었다. 자동문이다.

늦게 닫히는 문이 야속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쳐다본다.

솟옷을 사고 다시 문을 연다.

아버지는 빨리 문을 닫으라고 화를 내신다.

장애인 화장실에서는 바지를 빨수 없어서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빌어먹을 자동문, 사람들이 쳐다본다.

 

남자화장실에 가서 아버지의 똥묻은 바지를 빤다.

졸졸거리며 나오는 물에서 한참을 비벼댄다.

젖은 바지를 입고 차에 올라탄 아버지는 창문을 모두 열라고 하신다.

잠시 후 아버지는 바지가 다 말랐다며 쓰게 웃으신다.

바지가 다 말랐다고...

 

며칠 후 엄마가 얘기한다.

아버지가 미안했다고 똥빨래를 시켜서

엄마를 통해 얘기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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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다가온다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는 걸까?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평균 9개월,

그렇지 않을 경우 3개월.

 

그동안의 치료로 쇠약해진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견뎌내실 수 있을까?

 

책을 읽어봐도 주변사람들도 항암치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의사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집에 불이 났는데 다리부러진다고 2층에서

안 뛰어내릴거냐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나서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이야기 했다.

항암치료를 잘 받으시면 1년이나 2년은 사실 수 있다고...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어차피 죽는 거 아니냐고...

 

어느날인가 지나가는 투로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너한테 신경질만 내는데, 너는 왜 나한테 잘하냐'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무엇일까?

 

웃음이라곤 없던 아버지가 요새는 자주 웃는다.

며칠 전 자장면이 드시고 싶다고 해서 몇 번 갔던

수타자장면 집에 모시고 갔다.

 

하루에 몇 십알씩, 3개월동안 약을 복용한 아버지는 입안이

다 헐었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것을 잘 못 드시고 입맛이 변했다.

 

자장면을 드시고 나서 아버지는 면 만들려고

고생은 하는데, 맛이 영 아니라며 티없이 웃는다.

 

아이처럼...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찡그린 모습이 대부분인데...

 

아버지의 눈물과 웃음은 얼마나 남아있는 것일까?

 

나에게 말한다.

준비를 해야한다고...

 

눈물을 흘리지 말고, 그리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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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티벳불교에서 전하는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거나 모른척 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 어떤 이유로든 죽음이란

'사실'을 접하게 된다.

 

죽음은 두렵다.

죽음은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 놓는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왜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에 무관심할까?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공포를 극복하는 것은 '마주보는 것'이라고 한다.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마주볼 수 있을까?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마주볼 수 있을까?

 

아버지가 현대의학으로부터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암 말기.

폐암으로 시작된 암이 전신으로 퍼져 치료방법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어디로?

 

두렵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부재가 두렵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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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웃음을 가졌던 사람

중학교 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은 무지 무서워서 생각을 멈췄다.

교수형을 당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꿈이란 대개 깨어나면 잊혀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 지는데, 내가 죽는 꿈은 어제 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죽음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보다.

 

고등학교 1학년 인가 2학년 인가 였을 때였다.

신문에서 대학생의 분신 관련 기사를 읽고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을 했었다.

좋은 대학을 다녔던 그 사람은 왜 스스로 죽었을까?

그때 던졌던 의문이 이후 내 삶을 지배하리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 전 아는 선배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작년 겨울 지리산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나보다 한 해 선배인 그를 처음 본 것은 88년이었다.

학교를 1년 휴학했던 그는 나와 같은 강의를 들었고,

집회장에서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다.

 

그 선배는 참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운동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고, 저녁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그 선배가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그는 항상 웃었다.

웃는 일보다는 우는 일이 많았던 그시절 그는 늘 웃으면서 말했다.

"난 일헌이만 보면 참 기분이 좋아. 힘내자! 고맙다."

 

1988년 전국의 대학가에서 전방입소 거부투쟁이 벌어졌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입소거부 투쟁를 벌였다.

학생들을 싣고 갈 버스가 학교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서 집회가 열렸다.

집회가 한창일 때 학교측은 다른 장소에 버스를 준비시키고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당시 전방입소 4박5일을 다녀오면 군복무기간 45일 단축이라는 혜택이 있었다.

하나 둘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집회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때 그 선배는 버스가 집결된 장소에 가서 몸에 신나를 붇고 분신을 감행하려 했다.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고 입소시간이 연기되면서 다행히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선배는 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전방입소를 거부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그 선배를 다시 본 것은 서울 청량리역 앞에서였다.

시계탑 밑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저 도를...."

선배였다.

반가운 마음에 약속시간을 미루고 선배와 근처 커피집으로 갔다.

많은 얘기를 했지만 기억이 희미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선배는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했다.

헤어지면서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잘 살라는 건강하라는 애기만 했던 것 같다.

마음이 아팠다. 학교 때 보다 더 마른 그의 체격 때문만은 아니였다.

평안을 얻었다는 선배의 웃음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선배의 웃음은 환했다.

그 웃음은 본 사람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환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날 선배의 웃음은 아픈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얼마 전 이사 때문에 짐정리를 했다.

켜켜이 먼지가 쌓인 예전 수첩을 둘추다 선배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봤다.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리고 예전에 미처 못했던 말을 해주고 싶었다.

 

"성일이 형! 나 형이 무지 좋았다. 몰랐지^^ 글고 제발 살 좀 쪄라, 너무 말랐잖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지만, 이럴 때는 있었으면 싶다.

나야 천국갈 마음도 없고 자격도 안되지만, 착한 사람들 고생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행복했으면 싶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그 중간쯤 어디에 면회실 같은 게 있을 게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사람을 면회올 수 있는...

그러면 형이 면회를 와서 같이 막걸리나 한사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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