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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24
    삼촌의 끝나지 않은 여행
    금금
  2. 2007/06/11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금금

삼촌의 끝나지 않은 여행

故김형률씨 2주기 추모식에서 형률씨 조카 김은영양이 삼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삼촌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서 2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2년째 힘들게 세상여행을 하고 계실 삼촌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조카들에게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쓰셨던 삼촌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 한편이 아련합니다. 힘겹고 괴로운 병마와의 싸움에서 결국 이기지 못한 삼촌은 결국 이 세상과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소식은 저에겐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식에 엄마께서는 안절부절 하셔서 덩달아 저도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니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삼촌이 보고 싶습니다. 삼촌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리에 가족들 모두는 많은 눈물을 흘렸고,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눈물도 보게 되었습니다. 삼촌의 영정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저는 눈물 한 방울을 흘렸습니다. 바람을 타고 한 폭의 민들레씨 처럼 하늘과 땅의 정중앙을 날아다니시면서 “우리 은영이가 지금 뭐 하지?” 라고 말하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내가 불었던 민들레씨속에는 삼촌과 함께한 많운 추억들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리고 기침을 하던 삼촌, 삼촌의 등을 두드려 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그 모습마저도 너무 그립습니다. 이제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는데 삼촌께 의젓한 중학생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하게 느껴집니다.

또 얼마 전에 할아버지께서도 수술을 하셨습니다. 전 삼촌처럼 아파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니 눈물이 나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작년 삼촌의 1주년 추모식 날이 생각납니다. 삼촌에 대한 저의 눈물에 모든 사람들이 삼촌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에 눈물 한 방울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반드시 삼촌과의 약속을 지켜 삼촌처럼 아파하며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된 사람이 되어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삼촌께서 하신 훌륭한 일들을 기억해 주시고 아픈 몸인데도 자기 자신을 믿으며 열심히 노력하셨던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삼촌 항상 지켜봐줘!"

 

 

평화박물관(http://www.peacemuseum.or.kr/)에서

옮겨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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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회(患友會)

대표 김형율


2001년 5월 급성폐렴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하면서 살아왔던 삶과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떠안으며 제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왜 병마의 고통속에서 내 삶이 발목 잡여야 하는가?'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의문을 품으며 제 존재에 대한 의문과 이대로 묻어두고 살아가기에는 그동안 살아왔던 삶들이 억울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불안하여 퇴원후 제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천성면역글로블린결핍증을 앓고 있는 그로인해 20여차례이상 반복적인 폐렴재발로 만성폐쇄성폐질환으로 현재 폐기능이 70%이상 상실되어 있고 나머지 30%만 가지고 호흡을 하고 있는 원폭(原爆)2세환우(患友)인 저는 '한국의 히로시마(저 이치바준꼬,역사비평사)'를 통했어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인 저에 대한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존재하게 된 그리고 평생을 병마의 고통속에서 삶이 발목 잡혀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개인의 삶은 물론 가족전체가 겪게 되는 정신적,육체적,물질적 고통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하는 현실속에서 ‘원폭후유증‘이라는 미증유의 질병으로 병마와 빈곤이 악순환되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자식된 도리, 형제된 도리, 인간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사회적인 냉대와 편견, 차별등 이․삼중의 사회적인 고통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같이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삶을 규정하게 만든 일제강점기 36년 경남합천을 역사적 사실관계로 고찰한 ‘한국의 히로시마’를 통해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해방전 합천에서 살고 계셨던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들께서 일제의 식민지수탈정책을 견뎌내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일본히로시마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必然)의 역사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제강점기 36년동안의 경남 합천은 일제의 수탈적인 식민지농업정책으로 합천의 농업형태는 모든 분야에서 왜곡되고 피폐되어 갔습니다.

합천은 전체면적의 8할이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로 농가1호당 평균경작지면적이 2,670평으로 조선 전역의 평균인 4,410평보다 휠씬 좁은 경작지면적을 가졌으며 논이 많은 한반도 남부에서 합천은 특히 논도 적은 토지분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농상의 악조건속에서 식민지지배 이전에는 그 영세성을 보충하기 위해 쌀,보리,콩,팥,잡곡,야채,특용작물 등 각종 작물을 골고루 재배하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총독부가 밀어붙인 식민지정책인 일본인의 식량확보를 위한 쌀 증산정책 즉 조선의 농업전체를 미곡단작형 농업정책과 조선을 일본의 방적․제사자본의 안정된 원료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육지목화 재배와 양장업의 강제보급정책을 실시하면서 합천농가의 농업경영상태와 농민들의 생활은 식민지지배가 가속화될수록 피폐되어 갔습니다.

또한 합천농민들의 생활을 악화시킨 또다른 원인으로 매년 합천에 발생했던 자연재해와

식민지농업정책과의 관계을 들수 있을 것입니다.

합천군 총면적의 약18%를 점하는 농경지는 초계분지 및 황강 유역이 평지부와 산간의 계곡부에 산재해 있고, 그 대부분은 천수답(관계설비가 없고, 오직 빗물에 의해 벼농사를 짓는 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강바닥이 얕은 황강유역의 전답은 장마나 태풍의 계절이 되면 홍수피해를 입기 쉽고 그 반대로 산간부에서는 가뭄의 피해가 컸습니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합천농민들은 예전부터 다양한 작물을 경작하는 것으로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왔습니다.

그렇지만(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와같은 합천의 농업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쌀증산정책인 쌀의 단작화를 강요하였으며 재해시 쌀이나 보리의 대용식으로 농민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왔던 조나 메밀, 콩이 심어졌던 밭에 면화나 뽕나무를 심게 하였습니다. 쌀이나 면화나 뽕나무만 심은 전답은 자연재해에 대한 저항력을 잃게 하며 약간의 홍수나 가뭄에도 합천농민들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큰 홍수나 가뭄이 휩쓸고 가게 되면 이농의 쓰라림을 겪지 않을 수 없었으며 더구나 자연재해로 황폐해진 전답이나 도로나 가옥의 복구작업은 모두 농민들이 자력으로 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재해에 의한 이농자가 늘어나면 복구작업은 진척되지 않아 농촌의 피폐는 더욱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생존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로 향하는 합천농민이주자가 해마다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합천군의 농촌피폐가 극도로 심화되면서 많은 합천농민들이 이농의 괴로움을 겪었으며 당시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의한 도항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도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합천농민들중에는 보릿고개를 넘을 수 없게 되어 ‘유리걸식하는 무리’, ‘이촌재민’이 속출하여 전체 합천군 인구의 7할이상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상태에 놓여 있게되며 1930년, 1932년, 1935년, 1940년은 일본히로시마로 건너간 도일자 수가 급증한 해로서 합천에 큰 홍수나 극심한 가뭄이 있었던 다음해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향산천을 떠나 일본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합천군쪽에서 사람들을 히로시마로 ‘밀어내는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이후 일본의 참략전쟁 확대에 발맞추어 군사도시로서의 도시확장공사가 대대적으로 착수되어 군수공장이나 군사시설도 많이 만들어지고, 조선으로부터 값싼 노동력이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즉 1930년대에는 히로시마쪽에서도 합천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수탈정책과 극심한 자연재해로 인해 생활기반을 잃은 많은 합천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도일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침략전쟁의 결과로 원자폭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70여만명의 인명이 살상되는 처참한 인명피해를 낳으며 일본제국주의의 항복과 함께 일제36년의 억압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일으킨 잔혹한 침략전쟁의 희생자들이며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해방후 세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원폭(原爆)2세환우(患友)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원폭(原爆)2세환우(患友)라는, 그로인해 겪고 있는 원폭후유증으로 예전의 건강한 몸을 되찾을 수 없는, 점점 여위어가는 모습과 상황속에는 20세기 일본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식민지수탈정책이라는 광기(狂氣)의 역사가 지금 이시간까지도 연장되었어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경남 합천은 앞으로 다시 쓰여지고 다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3대 삼보사찰이 있는 해인사가 있는 곳보다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태어난 곳보다는 일제36년의 기나긴 식민지수탈정책으로 생존의 몸부림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처참하게 원자폭탄에 피폭당하여 평생을 ‘원폭후유증’이라는 미증유의 병마속에 빈곤과 사회적인 소외의 악순환을 겪으며 지난 59년동안 일본정부,미국정부,한국정부로부터 아무런 법적인 보호없이 인간답게 살아갈수 없는, 인권이 유린된 역사로서 재인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평생을 병마의 고통속에서 사회적인 냉대와 편견을 받고 있는 전국의 2,300여명의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만행이 지금 이 시간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필연(必然)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면 보다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 스스로 자발적인 동참속에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문제의식들을 한일시민사회와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간다면 보다 근본적인 해결점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시작은 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쟁은 국제연합(UN)의 반대와 세계 시민사회의 거센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이라크침략전쟁을 일방적으로 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1년 걸프전에서 사용한 반인륜적인 무기인 열화우라늄탄을 이번 이라크침략전쟁때도 다시 사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미 1991년 걸프전에서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걸프증후군(Gulf War Syndrome)으로 무고한 이라크민간인과 군인뿐만 아니라 다국적군으로 참전한 미군과 영국군등에서도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방사능오염으로 심각한 방사능후유증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 열화우라늄탄을 아무런 죄의식없이 다시 사용한 것은 미국정부가 지난 59년동안 ‘방사능과 유전‘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을 외면한체 철저히 은폐와 왜곡으로 핵헤게모니에 의한 핵개발 정책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원폭과 유전‘ 문제는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난 59년동안 미국정부와 일본정부, 한국정부는 ‘원폭과 유전‘ 문제를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의 문제로 강요하여 왔습니다. 더 나아가 각 정부가 원폭과 유전 문제를 올바르게 진상규명하지 않고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면서 사회적인 인식도 아울러 원폭과 유전 문제를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의 문제로만 인식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전국의 2,300여명의 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은 지금도 자기가 겪고 있는 병으로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보다 더한 고통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병마로 인한 경제적인 빈곤과 사회적인 냉대속에서 병마를 이겨내는 것도 힘겨운 데, 국가권력은 그동안 원폭과 유전 문제를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의 문제로만 인식하도록 규정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또다른 인권침해이며 인권유린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원폭과 유전‘ 문제는 한개인 또는 한 가족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진상규명을 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난 59년동안 미국정부,일본정부,한국정부는 이에 대한 올바른 진상규명없이 은폐와 왜곡속에서 ’원폭과 유전’ 문제를 금기시까지 하여 왔습니다. 그 연장선 위에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방사능 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세계는 미국이라는 일방적인 폭력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을 유린당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반전의 목소리는 전쟁을 막아내지 못하고 폭력에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라크 땅에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하여 방사능오염을 초래했습니다.

방사능후유증을 호소하는 어린 시선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반인륜적인 무기를 사용하여

또다시 인권(人權)을 유린한 미국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아울러 전세계 핵과 방사능피해자들과 함께 세계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일방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반인권적인 열화우라늄탄과 같은 핵무기 사용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자신 스스로의 인권(人權)과 평화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의 인권(人權)과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금기와 성역'의 벽을 허물고

반드시 반인륜적인 인권유린을 자행한 미국에 대해 법적인 책임과 배상등 더 이상의 열화우라늄탄과 같은 핵무기 사용을 금지 및 폐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인권(人權)의 시대입니다.

인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보할 수 없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이며 인류보편적인 삶의 가치입니다. 한국원폭피해자와 한국2세환우들은 지난 59년동안 원폭후유증에 시달리며 보편적인 삶을 박탈당한체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인권의 당위성.....


일본정부는 일본원폭피해자들에게 1957년 '원자폭탄 피폭자 의료등에 관한 법률(의료법)'과 1968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조치법(특별조치법)' 그리고 1994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피폭자원호법)'을 제정하여 자국원폭피해자 35만여명에게 1957년 의료법이 제정된 이래 1998년까지 누계예산 약 25조원(2조5,000억엔)을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1998년 한 해 피폭자 예산만 해도 약 1조6천억원(1,600억엔)을 썼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는 1991년,1993년도에 각각 17억 엔과 23억엔등 모두 40억엔(당시 환율 286억원) 기금을 받았을뿐입니다. 이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속에서 원폭에 피폭당하였지만 지난 59년동안 일본정부로부터 "인권유린"에 가까운 차별정책으로 인간된 삶을 누리지 못한체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정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전국에 원폭후유증을 전문으로 치료할 수 있는 원폭전문병원을 세우는 등 ‘원폭치료전문시스템’을 58년동안 구축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폭자건강수첩’을 소지하고 있는(일본내 거주하는 재일한국인원폭피해자나 도일할 수 있는 한국원폭피해자 포함) 일본원폭피해자들은 일본 전국의 병원 어디에서나 고가의 검사장비인 MRI, CT등을 통한 각종 검사와 암치료, 수술, 입원등을 무료로 받을 수 있으며, 원폭후유증에 의한 질병에 따른 각종 수당을 수령받는 등 일본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피폭자원호정책은 일본원폭피해자 스스로 원폭후유증을 극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정책적이고 법적인 뒷받침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폭원호시스템을 받으며 일반인들처럼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나갈수 있도록 각종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일본원폭피해자들은 '의료법'과 특별조치법' 그리고 '피폭자원호법'으로 의료원호와 생활원호를 받아 건강․치료․생활상태가 나아진 것에 비하여, 한국원폭피해자들은 원폭후유증이라는 미증유의 질병을 앓고 있지만 한국 어디에서도 원폭후유증을 전문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시스템 부재속에서 열악한 건강상태는 정상적인 생계활동을 가로막아 가족 전체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병고와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며 육체적․정신적․경제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또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은 고스란히 ‘원폭2세환우’들에게도 미쳐 그들의 건강권과 생존권 더 나아가 생명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199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한국원폭피해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원폭피해자1세대 19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원폭후유증’을 호소하는 원폭2세환우들이 전국에 2,300여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6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출판된 ‘핵의 아이들’에 나오는 21명의 원폭2세환우들과 그 가족들의 삶속에 투영된 모습은 원폭에 의한 원폭후유증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물론이요, 생계의 어려움과 치료받을 기회로부터의 배제된체 기본적인 건강권과 생명권마저 위협당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에 피폭당한 한국인들은 전체 피폭자 70만여명중 10%에 해당하는 7만여명으로 그중 생존자는 4만여명만이 생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한국인 원폭피해자 중 약2만3,000여명은 한국으로, 약2,000여명은 북한으로 피폭당한 몸을 이끌고 돌아갔고 나머지는 일본에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한국원폭피해자들은 일제강점하 36년동안 일제의 수탈적인 식민지농업정책과 강제징집, 강제연행(일본제국주의의 국가적인 납치)등으로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로 생존을 위해 도일하거나 끌려가게 되며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침략전쟁의 결과로 원자폭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70여만명의 인명이 살상되는 처참한 인명피해를 낳으며 일본제국주의의 항복과 함께 일제36년의 억압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기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이고 수탈적인 식민지 만행과 침략전쟁에 의해 강제연행, 납치되거나 징집, 경제적 수탈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에 피폭당한 수많은 한국인원폭(原爆)피해자들은 원폭후유증이라는 전쟁의 상흔(傷痕)을 평생동안 안고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전국에 2,300여명의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도 전쟁의 상흔(傷痕)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같은 현실속에는 지난 59년동안 일본정부와 일본사회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저질러졌던 불법적이고 수탈적인 식민지 만행과 침략전쟁과 같은 “가해의 역사“를 철저히 은폐하면서 일본인원폭(原爆)피해자들을 앞세워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의 피폭을 받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 피해국이라는 “피해자 의식”만 강요하며 지난 59년동안 허구적인 일본의 평화주의를 확대 재생산하여 지금 이시간까지도 지속되고 있기때문입니다.(허구적인 평화주의 확대재생산-보다 구체적이고........)



아울러 작년6월 일본의회에서 통과된 유사법제 3개법안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일본정부와 일본사회가 보수우경화되어 갈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이에 한국원폭(原爆)2세환우회(患友會)는 전쟁의 상흔을 치유함과 동시에 인류보편적이고 올바른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정부와 일본사회의 허구적인 평화주의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대안마련과 함께 올바른 역사성과 사회성을 바탕으로 진정한 평화를 한국시민사회구성원과 일본시민사회구성원들과 함께 공동연대하여 다음 세대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물려주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최근 북한의 핵개발 발표로 한반도에 다시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원폭(原爆)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구체적인 삶들을 담보해내는, 핵무기 피해의 상흔(傷痕)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한국원폭(原爆)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살아있는 증언과 삶을 통해 무서운 핵무기의 실상을 한국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야 하고 널리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되는, 인권(人權)을 중시하는 진정한 평화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한국원폭(原爆)피해자와 한국원폭(原爆)2세환우(患友)들의 처절한 삶의 모습을 통했어 전쟁의 기억들을 복원하고 체계화하여 다시는 한반도에 핵위협이 상존하지 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인권(人權)을 위한 평화, 인권(人權)에 의한 평화가 한반도와 전 세계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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