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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6

르완다, 프랑스와 맞장뜨다! /아프리카 학살에 개입한 혐의로 프랑스 정치인들을 기소 입력: 08-08-22 16:59 르완다 정부가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학살에 직접 개입한 혐의로 프랑스 정치인들을 기소했다. 르완다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르완다 위원회는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과 30여명의 원로 정치인들이 학살에 개입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르완다 정부는 이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들을 기소했다. 그 동안 프랑스 정부가 르완다 학살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많이 제기되었으나 르완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처음이다. 르완다 학살 (Julius Guzy의 작품) 르완다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1994년에 벌어진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갈등으로 투치 인 80만 명과 온건파 후투 인 수만 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투치와 후투는 유목민이었던 투치가 15세기에 나일강 유역에서 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현재의 르완다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같은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1916년부터 1962년까지 약 40년 동안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 지배하는 동안 투치와 후투에 대한 분리정책을 실시하면서 그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벨기에는 투치 사람의 외모가 후투 사람의 외모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퍼뜨리기도 하였고, 이 둘을 구별하는 신분증을 발급했다. 또 투치 인들에게만 정치, 경제, 교육에 특혜를 주어 이들이 후투 인들을 지배하게 하였다. 르완다가 벨기에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투치 인들이 지배층의 다수를 차지하고 후투 인들이 소수를 차지하는 구조는 계속되었다. 1963년 12월에 이러한 사회 구조에 반감을 가진 후투 인들이 2만명의 투치 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0년 뒤인 1973년에는 후투 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프랑스는 1975년부터 1994년 대학살 이후 정권이 바뀌기 전까지 후투 정권에 경제와 군사 원조를 하면서 후투 정권을 지원해왔다. 1994년에 투치에 대한 후투의 대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90년에 우간다에 거주하던 투치 망명자들이 군대를 조직해 르완다를 공격하면서 고조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후투의 강경파 정치인들은 투치가 반군을 지원하고 정권을 빼앗으려 한다며 후투 인들에게 반투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후투 정권을 지원했던 프랑스 정부는 투치 반군을 막기 위해 무기와 군대 등 군사지원을 퍼부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1990년부터 1993년 12월까지 르완다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켰다. 그러던 중 당시의 대통령 주베날 하비아리마나가 비행기 폭파로 살해된 후 투치엔 대한 후투 민병대 인터함웨군의 대량학살이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인터함웨는 민병대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정부군의 지원 하에 조직되었고 정부군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그리고 투치 반군이 정권을 잡고 학살이 중단되기 전까지 100일 동안 80만 명이 살해되는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게 된다. 르완다 학살 사건을 사실감있게 그린 영화 [호텔 르완다] 그 동안 르완다 정부와 프랑스 정부는 르완다 학살의 책임을 두고 마찰을 빚어왔다. 르완다 정부는 학살 당시에 평화유지군으로 르완다에 군대를 파병했던 프랑스가 직, 간접 적으로 학살에 개입했다고 주장해왔다. 당시 르완다 정부군이 인터함웨 민병대를 지원하는 과정에 프랑스 정부가 개입했고,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학살이 더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 정부는 르완다 정부의 주장을 완강히 부인하다가 올해 초에 당시 외교적인 실수가 있었다고만 입장을 밝혔다. 오히려 프랑스의 한 저명한 판사가 르완다의 현 대통령인 폴 카가메가 199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의 살해를 지시했고 그 때문에 학살이 시작되었다는 혐의로 폴 카가메 대통령과 그의 측근 9명을 기소했었다. 카가메 대통령은 한 국가의 지도자라는 직책 때문에 기소되지 않았지만 다른 9명에게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전 대통령이 살해되기 이 전에 이미 투치에 대한 대량학살이 계획되고 있었다는 것이 기정화된 사실이었기 때문에 설령 카가메 대통령이 주베날 하비아리마나를 살해했다고 하더라도 카가메 대통령에게 학살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큰 논란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 재판관이 제시했던 증거가 후투 극단주의자들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스 정부가 르완다 대학살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조사하기 위한 르완다 위원회는 2006년 10월에 활동을 시작하여 거의 2년 만에 르완다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르완다 위원회는 프랑스의 전직 대통령과 총리, 외무장관 등이 후투 극단주의자들을 무장시켰고 프랑스 정부가 후투를 지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학살 이전부터 당시까지 후투 정권에 정치, 군사, 외교적 지원과 물자지원을 했다. 위원회는 후투 정권이 남기고 간 공문서를 그 증거로 제시했는데, 공문서에는 프랑스 정부가 후투 정권에 대규모로 무기를 지원했고 학살을 저지른 인터함웨 민병대의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증거가 남아있다. 또한 보고서는 프랑스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르완다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투치 인에게 반인륜범죄를 저질렀으며 학살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유엔 난민촌을 이용하여 도망갈 수 있도록 했다는 혐의도 두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군은 투치 반군에 대항하는 작전에 포병대를 투입시키고 무장 헬리콥터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 군인들이 직접 투치 인과 투치 인을 숨겨준 후투 인을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투치 생존자들을 강간하는 일도 수 차례 발생했다. 르완다 위원회는 이러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프랑스 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후투 인과 언론인들의 증언을 수집했고, 그 중에는 프랑스 장교들과 같이 인터함웨 병사들을 훈련시켰던 후투 군 지휘관도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르완다 법무부는 르완다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기소된 프랑스 정치인과 군 지도자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게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당국에 요구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외교부는 자신들이 보고서를 다 읽기 전까지 답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뻔뻔하고 거만한 프랑스의 정치인들을 르완다의 법정에 세우기는 쉽지 않겠지만, 르완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전쟁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공개한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많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그리고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이후에 식민유산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정리되지 못한 식민유산은 그 형태를 바꾸어 그림자 같은 망령처럼 민중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르완다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의지가 같은 처지의 동료 국가들에게도 울림이 되길 기대해본다. 분류: 아프리카 입력: 경계를넘어 / 08-08-22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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