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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한 이주노동자 투쟁의 구심을 만들어내자!

명실상부한 이주노동자 투쟁의 구심을 만들어내자!- 380일 동안의 명동농성투쟁단 활동을 돌아보며
노동자의힘 노동자의힘기관지 (http://pwc.or.kr/maynews/)
기사원문: http://pwc.or.kr/maynews/readview.php?table=organ&no=2175
첨부사진/동영상: cover_death.jpg
380일이다

명동 들머리에 천막을 치고 '단속추방중단 미등록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에 돌입한지 380일 만에 해단식을 한 농성투쟁단은 이제 지역으로 돌아갔다. "노동비자 쟁취하고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는 쟁취되지 못했다. 1년이 넘는 끈질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결국 지난 8월 17일 고용허가제 시행을 발표했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고강도 단속은 계속되고 있다. 지역으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은 곧 "농성투쟁에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2003년 11월 15일

11월 15일 최종점검회의 동안에도 동력이 점검되지 않았다. 얼마나 올까? 초조한 마음으로 명동 들머리에 섰다. '단속추방 박살내자'라는 구호에 맞추어 지역별로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200명을 넘었다. 세 개면 충분할 것 같았던 천막이 모자랐다. 이주노동자들의 눈빛은 빛났다. 명동성당으로 모여든 이주노동자들은 서로에게 격려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명동성당은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다. 이미 96년 11명의 네팔출신 산업연수생이 "때리지마세요"라는 요구를 걸고 쇠사슬을 몸에 감았던 곳이 명동성당이었고, 2002년 평등노조 산하 이주노동자 지부에서 '집회결사의 자유의 쟁취, 단속추방분쇄, 노동비자 쟁취'를 요구로 농성투쟁을 한 곳도 명동성당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2004년 8월 17일 시행되는 고용허가제의 사전정지작업으로 11월 15일부터 고강도의 합동단속이 예상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갈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려웠던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시작된 단속이 일회성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상은 한국 땅의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직감하게 했다. 명동성당으로 200여명, 그리고 전국 각지의 쉼터로 1,0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결집했다. 더 이상 숨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더 이상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집단으로 저항하겠다는 투쟁의 의지를 모아냈다. 1996년의 농성이 사회적 이슈화에 그쳤다면, 그리고 2002년의 농성투쟁이 소수의 선도적인 문제제기였다면, 이번에는 이주노동자 대중의 힘으로 정부를 향한 투쟁전선이 그어진 것이다.

쉽지 않았던 공동투쟁전선

02년, 03년을 경과하면서 고용허가제 도입이 가시화되자 평등노조 산하 이주노동자지부를 필두로 선도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위력적인 대정부 투쟁전선을 그어내기에는 여전히 한계적이었다. 고용허가제철폐 투쟁전선의 복원을 위해서는 11월 단속추방 국면을 통해 투쟁을 결집시켜 내야만 했다.

02년 자진신고 거부투쟁을 비롯한 고용허가제에 대한 입장 차와 이주운동의 분화과정에서 깊어진 감정의 골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을 축으로 이주지부와 외노협은 함께 공동투쟁을 모색했다. 논의의 시작부터 농성단의 명칭과 요구, 의사결정구조 및 집행체계에 대한 이견이 팽팽하게 대립됐다. 그러나 당면과제였던 '단속추방을 중단, 합법화를 쟁취'를 통해 고용허가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한다는 목표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를 가지고 공동의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목표했던 합법화의 상과 내용이 달랐음은 곧 드러나게 된다.

공동투쟁전선의 유실

그 동안의 갈등과 고용허가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결국 농성투쟁 첫날 외노협을 중심으로 한 성공회 농성단과 명동의 민주노총 농성단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낳았다.

농성장이 분리됨에 따라 공동투쟁전선 또한 유실될 위기에 처했다. 명동농성투쟁단은 공동투쟁을 유지하는 가운데, 공세적인 투쟁계획을 배치하고 다른 농성장과 쉼터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견인한다는 방향을 확인했다. 그러나 공동투쟁은 몇 번의 공동 집회와 기자회견으로 끝났다. 농성투쟁을 사회적 쟁점으로 여론화하는 작업에 있어서는 일정 성과를 낳았으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결국 출입국관리소 앞 집회, 정부종합 청사 및 노동부 항의 집회는 명동농성투쟁단만의 독자집회를 넘지 못했다. 이런 결과는 농성투쟁 초기에만 해도 이주운동의 지형상 명동농성단이 전체 이주운동에서 주도력을 확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2004년 1월 17일, 정부는 합동단속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2월 말까지 자진출국기한 연장을 발표했고, 자진출국자에 한해 산업연수생제도 또는 고용허가제로의 재입국 안을 발표한다. 명동 농성단을 제외한 다른 농성장에서는 정부의 안을 농성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지노선으로 정부의 안을 받아들였고, 끝내는 농성투쟁을 정리했다. 결국 합법화의 방안은 자진출국 후의 재입국 이상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명동 농성투쟁단의 이주노동자들은 1월 18일 총회를 통해 정부안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한국 땅에서 노동허가제로의 합법화'로 요구를 명확히 했다. 공동투쟁전선은 유실되었고 홀로 남게 되었다.

이주노동자 대중투쟁의 가능성에 대한 확인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여, 그 동안 다른 농성장과의 공동투쟁에 집중하면서 방기해왔던 지역 이주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농성투쟁의 고립을 막기 위해서는 농성투쟁을 거점으로 하는 대중투쟁의 기획이 절박했다. 농성단은 표적단속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방문하여 '자진출국거부 선언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부의 자진출국 후 재입국안이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외면 받을 것이라는 판단이 주효했다. 이미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은 정부안의 기만적 본질을 간파하고 있었다.

명동농성 투쟁단은 정부협상안을 거부함으로써 투쟁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자신출국거부 선언을 위한 서명은 2,000명을 넘어섰고, 신문광고 모금액은 800만원에 달했다. 이제 지역에서도 명동농성단은 명실상부한 투쟁의 구심으로 서게 되었다. 집회 동력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비록 '불법'이라는 딱지에도 불구하고 대중투쟁은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정부의 말려 죽이기 작전

홀로 남겨졌던 명동 농성투쟁단이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자진출국거부투쟁으로 통해 투쟁이 확산되자, 정부는 농성투쟁단 대표 샤말 타바를 강제로 납치하면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인도네시아, 네팔,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들로만 구성된 농성단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른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다. 이미 보호소 내에서 단식투쟁을 결의하고 있는 깨비, 헉 동지를 비롯해 샤말 타바, 그리고 농성장 내의 4인으로 구성된 단식단은 연행된 이주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월 21일 '한국인과 연계하여 집회에 참가하는 불법체류자를 강력히 단속'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래도 2월 22일 100일 투쟁에 1,000여명 참가, 2월 29일 안산지역 결의대회에 500여명이 참가하는 등 집회 동력은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연행자 구출을 위한 단식투쟁이 30여일 계속되면서 지역과의 관계가 다시 이완되는 즈음 3월 2일 정부가 강력한 4차 합동단속, 특히 투쟁에 결합력이 높은 지역에 대한 표적단속을 실시하면서 지역은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고 집회동력은 줄어들었다. 30일 넘게 진행된 단식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4월 1일 농성단 대표 샤말 타바를 강제출국시킴으로써 한국 정부는 농성투쟁에 대해 타협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교착상태에 빠진 농성투쟁

정부에서는 자진출국정책이 실패했음을 스스로 시인했고, 고용허가제 시행에 대한 불안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 국면에서는 자진출국거부를 뛰어넘은 투쟁의 목표를 제시하고 대중투쟁을 기획하는 것이 필요했다. 노동허가제 쟁취를 구호로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지역에서부터 조직하는 기획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31일간의 단식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강제추방으로 귀결되는 현실을 보면서 지역에서는 투쟁에 대한 회의가 만연했다. 4차 합동단속으로 얼어붙은 지역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투쟁은 확장되지 못했다. 동력을 모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5월 30일 200일 집회투쟁 대오는 100일 투쟁에 비해 반으로 줄어들었다.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농성장에서도 월1회 전국 집회와 지역집회를 여는 것 이상의 투쟁의 기획은 나오지 않았다. 투쟁의 피로도가 쌓이고, 농성단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노동허가제 입법투쟁과 전국 투쟁위원회 건설을 목표로

5, 6월 어렵게 농성투쟁 대오를 재정비한 농성단은 농성투쟁의 전망논의에 들어갔다. 고용허가제 실시를 전후하여 대량해고 및 체불임금 등 현장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노정되었고 단속추방은 계속되면서 또 한편에서는 산업연수생과 고용허가를 받은 이주노동자 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농성투쟁의 전망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면서 명동 농성투쟁단은 향후 과제로 노동허가제 입법안 쟁취 투쟁을 진행할 것과 농성투쟁의 성과로서 전국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건설을 지향하는 전국투쟁위원회 건설을 결의했다. 이를 위해 명동성당이 집중적으로 활동해 왔던 수도권 지역에서는 지역 거점 형성을 위한 활동에 집중했다. 이때가 7월이었다.

그러나 동력이 계속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허가제 입법을 위한 투쟁동력은 조직되지 못했다. 입법안 제출자체가 어려운 조건에서 투쟁력마저 뒷받침되지 않아 노동허가제 입법투쟁은 추진력이 붙지 않았다. 농성단 내부에서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심리만 만연했다. 그러나 투쟁동력이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오히려 민주노총은 외노협의 고용허가제 수정안 제출을 막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에서 외노협과 이주인권연대를 입법안 관련 논의의 자리로 끌어내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2년 노동허가제 관련 입법안을 만들고 이미 노동허가제로 정리되었던 민주노총의 입장은 일보 후퇴해서 좌충우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좌충우돌은 또 다시 농성장의 혼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380일이 남긴 과제들

380일간의 투쟁은 '단속추방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쟁취' 투쟁을 고용허가제 철폐 노동허가제 쟁취 투쟁전선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이미 1월 18일 농성단 총회에서 정부의 협상안을 거부함으로써 마련된 투쟁의 교두보이며, 향후 확장되어야 할 전선이다. 이를 통해 이주노동자 대중들 사이에서 농성투쟁단은 실질적인 투쟁의 구심으로 설 수 있었고 인정받게 되었다. 이주지원단체 운동이 중심이었던 과거는 전변되었고 이주노동자 주체들이 이주노동자 운동의 주체로 선 것이다.

이제 이주노동자 투쟁에서의 당면과제는 고용허가제 개정이 아니라 노동허가제 쟁취임을 명확히 하고 2월 '고용허가제 철폐 노동허가제 입법'을 향후의 목표로 하는데 이견을 제기할 단위는 없다.

그러나 380일의 농성투쟁을 통해 '명실상부한' 대중적 전국적 이주노동자 운동의 구심이 세워졌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민주노총이 380일간 손놓지 않고 함께 해 왔고, 이주노동자 운동을 포괄하기 위한 의미 있는 첫 걸음을 뗐다. 그러나 노동허가제 입법국면에서 보였던 좌충우돌은 투쟁하는 이주노동자들을 향후 이주노동자 운동의 주체로서 명동성당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이주노동자 운동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민주노총은 과거의 관계가 현재의 투쟁을 지배하고 있는 이 지독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있어서 단호한 자기입장의 결정이 필요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 이주노동자 운동의 주체들이 결집하고 운동의 주체로서 스스로 책임 있게 결의하고 나서야 하는 것은 전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농성투쟁의 성과로 결의되었던 '전국이주노동자투쟁단 건설'뿐만 아니라 그 현실적 경로로서 '수도권이주노동자노동조합' 또한 힘있게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네팔 투쟁단의 경우 일부는 평등노조 이주지부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또 일부는 네팔 투쟁단에 남아있어 내부적인 단일한 전망의 공유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평등노조 이주지부 또한 농성투쟁에 결합한 동지들을 중심으로 내린 판단이어서 총회결정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이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농성투쟁과정에서 결집된 지역별 이주노동자 모임도 농성 해소를 기점으로 이완될 조짐들이 보이고 있다. 2월 노동허가제 입법투쟁을 위해서는 시급히 수도권 지역에서부터 재정비 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9월 노동허가제 입법투쟁에서 보이듯이 대중투쟁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해야 할 것이다.

장기적인 과제와 맞물려서는 현재 네팔과 방글라데시 출신의 활동가들에 머물러 있는 국가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더 넓게 각 국의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허가제 철폐 노동허가제 쟁취' 투쟁전전으로 결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내부에서 국가의 장벽뿐만 아니라, 연수생과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단결도 아직은 요원한 과제이다. 이번 농성투쟁에 결합한 주요 이주노동자 대오들은 '합법화'를 요구로 했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들이었고, 등록, 미등록을 넘어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미등록과 등록의 문제는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연수업체를 이탈하는 순간 벌어지는 이주노동자 현실의 양면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착취에 맞선 현장의 투쟁을 통해서 '고용허가제 철폐 노동허가제 쟁취 투쟁'으로 나가야 한다.

농성투쟁을 통해 민주노총 지역본부와의 연계가 강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지역 이주노동자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농성투쟁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성과이다.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는 한국 땅 노동자의 현실을 투쟁으로 극복하기 위한 연대의 단초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주체의 강력한 결의를 통해 명실상부한 이주노동자 대중투쟁의 구심으로서 전국적인 이주노동자 투쟁단 건설, 나아가 전국적인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 지역을 넘어 출신국가를 넘어, 등록과 미등록의 구분을 넘어 끊임없이 한국운동의 보편성과 이주노동자 운동의 특수성을 감안한 이주노동자 운동의 전형, 대중투쟁의 전형 그리고 노동조합 운동의 전형이 만들어 져야 한다.

다시 한 번 이주노동자 대중투쟁의 불길이 타오를 그 날을 향해 투쟁!

변정필 | 노동자의 힘 회원 200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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