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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의 역사흐름(1)

 

<별첨1> 르완다공화국(Republic Rwanda)의 역사의 흐름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내륙소국으로 우간다, 탄자니야, 부룬디, 자이르 등의 국경지역으로 면적 2만6338km*.인구 773만(1997). 수도 키갈리로 대부분이 구릉과 호수로 이루어진 해발고도 2000이상의 산맥지형으로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리운다. 

 

-원주민은 피그미계 트와족이며 현재 약 9.000명이 수렵, 채집생활을 하고 있다.

-1000년경부터 반투계 농경민 후투족(인구의 90%)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부른디지역에 살고있었음. 약 600년전 호전적인 유목민 투치족(인구의 9%)이 북쪽으로부터 침입하여 후투족은 대항하지 못하고 지배자로 인정하여 음와미왕을 받드는 왕국을 형성하였다.

 

-1897년 독일의 지배가 시작되고 독일령이 되었다. 1923년 1차대전이후 국제연맹위임통치령, 1946년 2차대전후 국제연합신탁통치령으로 UN에 의해 벨기에 간접통치령 정책속에 투치족의 전통적 왕국은 계속되며 권세와 교육을 독점하였다.

 

-1957년 후투족의 전제종결과 식민지제 타파를 선언하였다. 1959 르완다왕의 죽음으로 정치적불안이 시작 후투족반군과 투치족간 15만명의 사상자를낸 내전후 1960년 선거로 후투족G. 카이반다가 정권 장악하고 초대대통령으로 1961년 벨기에의 신탁통치를 벗어나 독립하여 1962년 7월 1일 르완다공화국이 세워졌다.

 

-1963-64년 투치족게릴라사건으로 수천명희생. 70년대 부룬디와의 긴장으로 반투치 감정이되살아나고 정치정세가 불안하였으며

 

-1973년 투치족의 아비야리나마가 쿠테타를 일으켜 국가개발혁명당을 결성하고 78년 단일정당으로 일당독제를 편성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여 지방주의와 부족대립을 해소하고 국가통일과 국제연대의 정책을 펼쳤으나 종족분쟁은 계속되었다.  

 

-1994년 내전에 휩쓸려 대혼란과 살상으로 95년 현재 UN군의 감시하에 있다. 

- 미국이지원하는 투치 군부정권이 독재를 하며 사회를 안정시키려하지만

산악지역을 중심으로한 반군들의 저항이 2001까지 계속되었으며 나라의 국기를 바꾸며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고 있다.



<별첨2> 경제상황과 문화


-국민 90%이상이 농업이며 콩, 고구마, 감자, 바나나, 옥수수, 땅콩이 자급농작물이나 인구밀도가 높고 주기적인 흉작으로 자급자족이 어렵다.

-수출 주상품 커피와 차가 총수출액의 54%를 차지하며 광산물 주석, 텅스텐 등이 수출되고, 천연가스도 분출한다.

- 수력발전소가 있으며 경공업은 키갈리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비누, 도료, 방충제, 고무신,맥주 등을 생산하고 목축이 번성하지만, 르완다의 국민총생산은 약 19억 만달러, 국민1인당소득은 230달러로 아프리카중에도 최극빈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 소수 투치 목축민의 중앙집권적 조직왕국과 약40개의 지방조직으로 농산물과 수세를 관리하는 추장제도로 후치족과의 계층관계의 오랜 전통문화가 신성시되었다.

-소를 둘러싼 봉건적 주종관계가 종족갈등의 원인이되고 생명력을 둘러싼 복잡한 종교관념은 전통종교로 연구되고있으며 바구니, 돗자리, 우유병, 목제용기, 의식용 도끼 등의 기하학적 세공품과 현악기 반주의 전통음악의 독특한 소리등 전통문화가 발달 하였다. 

-국민의 50%가 카토릭이며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교육도 잘 보급되고 110만이상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92년 국립대학이 개설되어 3,454명이 다니고 있다. 언어는 킨야르완다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가, 영어가 공용어이다.

- 1991년 주산업인 차가 UR협상이후 값의 폭락하였고 1992년 IMF경제위기의 수렁에 빠졌으며 전쟁의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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