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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괴물2

   “국가라는 괴물”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이유로 현재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김훈태 선생님의 글을 읽고 생각해 본다. 과연 지금 국가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국가는 끊임없이 ‘전체’를 위해 ‘개인(소수)’이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전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농산물 개방, 교육 개방, 노동유연화, 한미FTA, 평택미군기지 확장 이전, 비정규직 법안, 노사관계 로드맵 등 전체를 위해서라는 일련의 모습들 속에서 희생하고 참아야 하는 것은 결국 누구인가? 남성중심 가부장 문화,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 개발 과 경쟁 중심의 경제 논리, 학벌주의 등 그러한 일련의 가치관 속에서 희생하고 참아야 하는 것은 결국 누구인가?

   혹시 국가라는 괴물이 내 안의 괴물을 먹고 자라는 것은 아닐까? 난 7년차 교육노동자이다. 보이지 않는 ‘전체’라는 허상과 그 허상을 유지하기 위한 기존 가치관들의 재생산을 위해 ‘개인과 다양성’이 희생되는 것이 당연하게 내면화되는 학교라는 공간에 충실한 내 안의 괴물들. 그 괴물들을 나의 학교 일과에 비추어 재구성해본다.


  [교무회의]

   학생부장 왈 “학생들 두발과 복장에 대해 철저히 단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명찰을 교복 왼쪽 가슴 부분에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일정한 규정에 맞추어 머리 모양이 비슷해지도록 하란다. 왜 그래야 하나? 머리 모양이 아이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명찰은 탈부착이 가능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라 패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 아이의 이름이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나 그 아이의 이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 아닐까? 두발 규정이든 명찰 패용이든 아이들을 하나의 틀거리 속에서 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통제받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내면화하는 것은 아닐까?


  [1교시]

   “반장, 수업 시작합시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차렷’과 ‘경례’...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 인사가 자꾸 귀에 거슬렸다. ‘차렷’과 ‘경례’는 군대에서 쓰는 용어가 아닌가? 군대가 아닌 학교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쓰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군대는 기본적으로 폭력과 집단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주의를 내면화시킨다.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무의식 중에 나누는 인사가 상명하복과 전체주의를 내면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섬찟했다. 내가 진심으로 고민하고 선택하기 전에 이미 군사문화와 국가주의는 ‘차렷, 경례’라는 용어 속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라는 행위 속에, 운동장 조회 때의 군사적 도열 속에서 나에게 내면화되어 있던 것이다.


  [2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잡담이 들리기 시작한다.

    “남자가 왜 그렇게 말이 많냐?”

  잉? ‘남자’가?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것은 남성중심 가부장 문화의 핵심인데...남자이고 여자이기 전에 모두 ‘인간’이 아닌가?

  여자가 여자다워야 한다는 것은 사실 남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할 줄 아는, 그래서 남성들의 가치관에 적합하고 남성들의 시각에 만족스러운 여자의 모습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여성들에게조차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지는 않은가?

  또한 남성들조차 ‘남자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왜 남자는 강해야만 하고, 힘도 좋아야 하고, 듬직해야 하고, 말이 많으면 안 되는가?

  수업 시간에 내가 했던 여러 가지 무의식적인 말 속에는 이미 그러한 성역할에 따른 성차별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3교시]

  수업 중에 한 아이가 질문을 한다.

  “선생님! 왜 저희들은 투표권이 없죠?”

  “너희들은 아직 어리고 판단력이~~”

  어쨌든 난 아이들보다 오래 살았고, 오래 산만큼 경험도 많고, 그만큼 아이들보다 객관적이고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래저래 아이들에게 많은 말(잔소리)을 하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그 고래의 주체적 의지를 배려한 것이라기보다는 ‘칭찬’을 이용해서 그 고래에게 나의 가치관과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아이들을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 보고 그들의 이야기와 판단을 존중하기보다는 아이들을 ‘부족한 그 무엇’으로만 보고, 그래서 가르쳐야만 하는 비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4교시]

  “선생님 앞에서 그 태도가 뭐야?”

  수업이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계속 자고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아이는 매우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마지 못해 일어난다.

  “교실 밖으로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

  난 왜 그랬을까? 그 아이에게 잘못했음을 지적하고 바꾸어나가는 과정에서 난 그 아이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생각하기는 한 것인가? 잘못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 아이가 책임지는 것은 다르다.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손상시키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랑의 매’는 없다. ‘매’는 본질적으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하물며 인간이 아닌 다른 그 어떤 대상에게도 말이다.

  바득바득 대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따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수행평가 성적에 불만을 가지고 항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로서 내가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하면 안 된다는 그 어떤 근거가 있는가? 오히려 교사인 내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소통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교사이기 이전에 인간인 나의 인권이 중요하듯이, 학생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아이들의 인권도 중요하다. 인권은 신분과 나이와 성별과 인종과 취향을 초월해서 평등한 것이다. 진정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과연 교권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교권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권위적이지 않은가? 교실에서의 평등. 그것은 아이들끼리만의 평등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의 평등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청소 시간]

  오늘은 학교 대청소의 날이란다.

  교무실 청소 담당 아이들이 내 책상 위의 컵을 씻겠다고 가져 간다. “고마워”라고 하며 컵을 맡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신이 사용한 컵은 자신이 씻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수업이 끝나고 나면 칠판을 닦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었다. 난 수업이 끝나면 그냥 나오고, 수업이 시작될 때 칠판이 닦여져 있지 않으면 아이들을 나무랬다. 하지만 내가 쓴 칠판은 내가 닦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는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시킨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었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아이들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일까? 아이들은 학생이고, 어리고, 어른이(교사가) 시키는 일이니까?

  학교 대청소라기에 모든 학년, 모든 학급, 모든 학생들이 청소용구를 들고 청소를 시작한다. 세제를 풀어 교실 바닥까지 박박 닦아낸다. 그래서 나도 빗자루를 들고 아이들과 함께 교실 청소를 했다. 청소도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공동 생활을 위해 각자에게 필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청소용구를 들고 쓸고 닦는 것이 청소교육일까? 더군다나 학교 지침에 따라 일제히 청소를 하는 이 모습이 말이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그저 힘든 청소일 뿐이다. 학교를 위해서 아이들이 동원되는, 옛날의 새마을 운동같은.

  청소교육이 아니라 환경교육이어야 하지 않을까? 내 주변, 내 교실, 내 학교가 보다 친인간적 환경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환경교육일 것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필요하다면 빗자루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학급단합대회]

  오늘은 토요일. 학급단합대회를 하기로 한 날이다.

  “한 명이라도 참석하지 않으면 학급단합대회가 무슨 의미가 있니?”

  조바심이 났었다. 교사가 되어 처음 하는 학급단합대회. 한 명이라도 참석하지 않으면 단합대회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이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면 단합대회는 엉성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아이들을 이렇게 저렇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고 전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들이다. 전체를 먼저 생각할 줄 알게 하는 것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음 주에 학교 체육대회를 하고 나면, 교직원 체육대회를 한단다. 이런. 하필이면 그 때 나는 약속이 있는데. 교직원 체육대회도 좋지만 내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교감선생님께 참석이 어렵다고 말씀드린다. 교감선생님 왈 “전체 교직원의 단합을 위한 것이고, 함께 잘 해보자는 것인데 참석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선생님 일은 뒤로 미루고 참석하세요” 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왜냐면 지금 내 일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 역시 아이들에게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는 않았을까?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것은 강요가 아닐까? 전체를 위한 것이든 개인을 위한 것이든 그 선택은 모두 각 개인의 몫이다. 개인의 의사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묵살되어서는 안 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그 다양성이 모였을 때 ‘전체’가 의미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학교는 어느 공간보다 진보적이어야 한다. 진보란 무엇이겠는가?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가치관과 그에 따른 통제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되고 다양한 관점이 논의되고 그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해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교실은 다양성과 평등이 존중되고 실현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전체, 나이, 성별, 장애, 피부색, 개인 가치관, 취향 등에 의해 특정 대상이 배제되고 소외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차이가 차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단 이것은 교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을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부족한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내 안의 괴물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덧붙여] 내 안의 괴물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이 오랜 시간 동안 내 내면 속에 ‘당연히 그러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내 탓이오’는 모든 책임을 나에게만 묻는 것일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내 안의 괴물과 싸우고 싶다. 동시에 국가라는 괴물, 자본이라는 괴물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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