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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3-부처

월정사에 갔다.

흐린 날씨에 조금씩 흩뿌리는 빗발이 참 맘에 들었다. 날씨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내 마음이 부질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그 맛이 다르니까 흔쾌히 그 때 그 때의 기분에 충실히 젖어 본다.

 

일단 대웅전을 찾았다. 그다지 크다고 생각들 지 않는 대웅전.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대웅전보다 더 크다 싶은 불상이 실내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불상은 온 몸에 금(진짜 금인가?)칠을 잔뜩 두르고 어마어마한 덩치에 살짝 웃는 모습으로 정좌를 하고 있다.

 

그 불상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무언가 때문에 못마땅하다.

 

무엇때문에 웃고 있을까?

자신의 깨달음에 스스로 만족해서? 자신의 이야기가 '말씀'으로 많은 민초의 숭배를 받고 있어서? 지금 돌아가는 요꼬라지의 세상이 흡족해서?

그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맘이 뾰로통해진다....

 

왜 저 높은 곳에 '모셔져' 있는 게지?

웬만한 사람 키만한 높이의 단상에 '올려져' 있는 불상. 그 높이는 다소 다르지만 모든 절의 부처상은 항상 단상에 '올려져' 있다. 누가 올려 놓았을까? 고대의 불교에서는 불상조차 없었다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의 질곡을 깨트릴 수 없었기에, 절대적 존재의 힘에나마 의존하고 싶었던 민중의 바람이었을까? 우리 문화 속에서 호랑이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하나는 우스꽝스러운 해학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형태로. 왜냐면 호랑이는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였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 속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해학을 통해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숭배를 통해 호랑이를 달래고 호랑이의 절대적 힘으로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님, 절대적 힘의 절대적 숭배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해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당시 지배계급들의 욕망이었을까?

현실의 질곡을 깨트리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굳건히 하려는 계급적 욕망. 적과의 동침. 난 올려진 불상은 오히려 민중의 아픔을 상징하는 것이려니....생각한다. 불상을 내려놓자..

 

왜 불상은 저리 큰 게야?

큰 절일수록 불상이 크다. 작은 절일수록 불상이 작다. '돈'의 문제인가? '과시'의 문제인가? '권력'의 문제인가? 이미 종교도 권력화, 제도화되어 가고 있는 마당이다. 어느 노래엔가 '꿈을 먹고 사는 젊은이여'라는 가사가 있던데....이건 완전히 '민중의 꿈을 먹고 배부르는 욕망덩어리여'이다...모든 조형물은 상징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어쩌구저쩌구, 아시아에서 제일 큰 어쩌구저쩌구...는 필요없다. 자연을 닮은, 인간을 닮은, 억압받는 자의 삶을 닮은 '실제'의 상징이 중요하다.

 

난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표정'의 불상이 사람들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더이상 종교가 아닌가?

 

대웅전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데, 여기저기에 풍뎅이며 메뚜기며 '밟혀서' 생을 마감한 존재들이 수두록하다...단지 신발 밑에 잘못 기어들어간, 혹은 위치 선정을 잘못한 그네들의 책임만을 아닐 것이다...불상을 찾아 온 욕구는 어차피 소유적인, 이기적인 개인의 욕망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발로 밟는 자는 발 밑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비에 촉촉히 젖은 나뭇잎과 풀들이 그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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