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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한다는 건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혼 후, 아들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모 대학 가정상담센터에서 무료로 부자가정, 모자가정의 미취학 아동에 대해 심리검사를 해 준다고 해서 아들과 같이 갔었다.

심리검사 결과, 아들은 분리공포심에 따른 정서불안정과 자기 욕구 표현을 억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아이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상담자는 나보고 아이의 감정을 먼저 공감하고 인정해주라고 주문했다.

 

난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려고 노력했고, 인정해주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상담자의 주문을 받고, 곰곰히 생각해봤다....내가 그동안 어떻게 해 왔는지...

 

난 공감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내 이야기를 아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감정 표현에 대해 '왜 그러니?"라고 먼저 그 감정의 원인을 듣고, 있는 그대로 그 감정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네가 짜증이 났구나. 그런데 어쩌구저쩌구"하면서 아들에게 이렇게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들은 자신의 감정이 공감받았다기보다는 "아빠가 결국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내 감정을 인정하는 것처럼 했구나"...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요구가 내세워지면 그건 공감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는 상대가 원할 때 하면 되는 것이다.

감정과 감정 표현에 대해, 왜 그런지를 먼저 듣지 않고, 왜 그런지를 듣고 나서는 그냥 그 감정만 공감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채, 그 다음에 무조건 나의 판단에 따른 나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은 공감의 방해일 뿐이다.

그 다음에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거나, 감정 표현이 글자 그대로 감정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난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이야기를 나의 판단 기준으로 해석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짐으로서 내 영역이 침범당하거나 무시당했다는 것을 방어하고 있다. 즉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 혹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로서 나의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말고는 나의 요구가 아니라 상대방의 판단이자 선택인 것이다.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은,

공감을 위해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에 매우 서툴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공감한다면서도 진지하고 진솔하게 그 얘기를 듣는다기 보다는 매우 형식적으로 혹은 그 다음에 나의 말을 준비하기 위해 공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상담자가 나에게 분노와 자기중심성이 무척 강하다고 한다....이것이 바로 나의 문제이다...

 

아들과의 공감을 위한 내 노력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나의 대화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나의 이런 모습 때문일 것이다.

 

진지하게 고민한다....그럼 어떡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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