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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휘수씨는 귀엽다. 인정-_-b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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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귀엽다는 말은 대체 어는 연유인고? ㅎ방학 때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내가 공부하고 싶은 게 무언지 잘모르겠다아 ㅋㅋㅋ
우선 독서소모임은 ㅎㅎ 최인훈의 "광장"으로 시작하려고 하는데;;(이해하는 사람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여름학교, 돌추셈나는 커리완독이랑 참여 하면 되겠고
글쎄 -_-더폴을 과연 나갈수 있을까 ㅎㅎ 과반 활동하고만 안 겹친다면
나갈께 ㅎㅎ 근데 거의 못 나갈듯.(우선 나가려는 노력만큼은 할려고)
그리고 나 혼자만의 공부도 해야할 것 같은데.
우선 역사, 사상에 대해서 공부해볼려고. 서양, 동양 둘다 공부하면 좋겠지만, -_- 동양사는 그냥 간단한 개관하고 중국사만 공부하고 싶고;
서양사를 중심으로 하고 싶은데 ㅎㅎ 어떤 순서로 하는게 좋을지.
알려주삼.ㅠㅠ
ㅎㅎㅎ 1968 서평은 7월 되기 이전에 줄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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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너무 가까이 있는, 너무 가까이 있어야하는 이들에게
'그들'이라는 호명이 가혹하다는 것이야.
오히려 내가 마음을 더 독하게 먹어야겠다.
넘어져도, 이젠 눈을 돌려야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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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필/고마웠다 ㅋㅋ
그나저나 김세환 안시온 저 두 명은 끝까지 깝치는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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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형 : 일단, 중국혁명은 1949년 혁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역시 혁명의 기원을 꽤 멀리까지 올라가지요.방현영 : 네 저희가 살펴본 위르겐의 논문에서도 역시
방현영 : 혁명의 기원은 사실 19세기 후반의 혁명의 전조를 나타내고
기계형 : 예컨대, 러시아 혁명의 경우 1825년 데카브리스트반란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말이지요. 중국의 경우는 어땠지요?
김세환 : 아편전쟁
기계형 : 세환씨는 년표만 보았구나!
김세환 : 죄송합니다... 그것도 안보고 대략 찍었는데...
이유나 : 태평천국운동
안시온 : 그렇게 따지면 황건적의 난까지?@_@a
윤효정 : ^^;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중국혁명은 혁명의 전조가 나타나요
서동훈 : 발표조 자료에 따르면 아편전쟁이 맞는 거 같은데
윤효정 : 그 구체적인 모습은 태평천국운동이겠지요
서동훈 : 오오 발표자님 너무 멋있는거 아니에요;;
기계형 : 이유나 맞았어요. 위르겐 오스터하멜의 논문 8페이지를 보시기를.
윤효정 : 사실 위르겐은 혁명의 진짜 시작은 청일전쟁 이후 라고 보았어요~
기계형 : 다시 말해 중국의 경우 서구열강 및 일본의 대동아지역에 대한 통일야욕이라는 외부적 충격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시온 : 맞아요. 다른 혁명이랑 다르잖아요*_*
방현영 : 네 위르겐은 사실상 혁명의 시작이 태평천군운동이후
방현영 : 급격하게 열강의 개입이 이루어지면서
방현영 :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계층이 형성된 기점을
방현영 : 혁명의 기점으로 보고있어요
방현영 : 한편, 이와는 달리 다른 학자들이
방현영 : 1800년대까지 장구한 기간을
방현영 : 중국혁명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는데
방현영 : 그럴경우 곤란하다는 비판도 하구요..
기계형 : 반외세상황 속에서 국민적 봉기로 이어졌던 점을 지적해야 하겠지요.
방현영 : 네 그래서 중국혁명에서 무엇보다도
방현영 : 반외세를 특징적으로 지적할 수 있고
방현영 : 즉 반외세의 상황에 의해서 내부적 갈등이 일치를 보이기도 했다는
방현영 : 중국혁명의 특징^^
안시온 : 근데 반외세는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지 않나요?
안시온 : (말이 이상하네;;)
안시온 : 조선이나 일본에도 반외세는 공히 해당되고...그런데 중국에선 혁명이 일어났잖아요
기계형 : 그것보다는 이런 상황 속에서 혁명세력의 일정한 진영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안시온 : 그럼 반외세의 상황에서 내부적 갈등이 일치되었다는건 무슨뜻이죠?@_@
안시온 : 반외세를 주창하는 계층이나 조직이 혁명의 주도세력이 되는건가요?
방현영 : 저희 발표문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이걸 채팅으로 설명하려니 좀 힘이 듭니다 ㅜㅠ
김준호 : 반외세의 상황에서 내부적 갈등이 일치되었다는 것은
김준호 : 제1차 국공합작이나
김세환 : '반외세 통일전선'라는 측면 아닐까요...
김준호 : 중일전쟁시기의 제2차 국공합작
김준호 : 네
김준호 : 통일전선전략의 측면에서
김준호 : 국민당과 공산당은
김준호 : 합작 전선을 구성하게 됩니다.
김준호 : 그런 측면에서 반외세 반제국주의적
안시온 : 그래서 묻는건데요...어떻게 보면...반외세로 내부갈등이 일치되면...혁명세력이나 정신이 희석되지 않을까요?
김준호 : 제1차 국공합작시기에도
김준호 : 그러한
김준호 : 이유로 인해서 갈등이있었어요
김준호 : 중국공산당의
김준호 : 천두슈는
김준호 : 계급적 기반이 다른 두 정당의 연합은 계급조직을 혼돈시키고
김준호 : 독립정책을 제한한다는 입장이었구요
김준호 : 리자다오는
기계형 : 우선, 5.4운동을 거치면서 반제반봉건운동의 한계가 노정되고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의 이념으로 등장한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김준호 : 암튼 리자다오는 민족이 중심적 이슈가되는 프롤레타리아화된 국가로서의 중국인의 연대를 중시하는 입장이었어요
서동훈 : 방금 하신 말씀은 외세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인한 공산당 내 갈등이 있었단 말인가요?
기계형 : 일제가 워낙 강하고, 중일전쟁 시작과 함께 일시적 국공합작이 가능했음다.
김준호 : 외세에 대한 태도의 차이라기보단
김준호 : 국공합작시기에
서동훈 : 전술의 차이?
김준호 : 민족부르주아지의
김준호 : 정당인 국민당과
김준호 : 중국공산당의연합은
김준호 : 계급적 기반이 다른만큼
김준호 : 계급조직을 혼돈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어요
김준호 : 여기에
서동훈 : 그건 통일전선에 관한 문제지 아까 얘기되던 반외세에 관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요;
서동훈 : (계속 말씀하시길)
김준호 : ;;
김준호 :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당시의 정세에서
김준호 : 일본은 중국의 북부지방을 장악하였고
김준호 : 점차 그 세력기반을 넓혀가고 있었어요
김준호 : 두 정당은
김준호 : 이 상황에서
김준호 : 국가통일의 과제를 우선적으로 내세워 연합전선을 펼치게 되었어요
기계형 : 중국공산당이 언제 어떻게 새로운 혁명전략을 갖게 되었는지 말해보아요.
김준호 : 그 과정에서 중국공산당내에서 계급적 기반이 다른 두 정당간의
김준호 : ;;;
김준호 :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될 조짐이 보인것은
서동훈 : 코민테른 2차 대회 이후인가요;
김준호 : 1927년
김준호 : 초였구요
안시온 : 그렇다면 반외세는...중국공산당혁명에서 기연한건가요...아니면 오히려 지연시킨건가요...
김준호 : (흑흑흑)
김준호 : 어찌하라는건지;;;
서동훈 : (아 국공합작 이후의 새로운 혁명전략 말씀하시는 거였나)
방현영 : (뭘 정확히 물으시는건지;; )
김준호 : 암튼
김준호 : 제1차국공합작은
서동훈 : (보통은 선생님의 질문에 먼저 대답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함)
김준호 : 1927년초에
김준호 : 상하이에서 일어난 사태로 인해서 가장 파격적인 모순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정민용 : 다들 조용히 하시고 일단 다 듣고 질문하시죠
김준호 :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도아래에 있는 상하이 총노동조합은 총파업에 돌입하는 동시에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김준호 : 하지만 장제스가 상하이에 들어와 비밀리에 노동조합을 탄압할 군대를 조직했구요
김준호 : 1927년 4월12일에 노동조합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총노동조합을 노동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김준호 : 이후 장제스는 난징에 자신의 정부를 세웠구요
김준호 : (너무 기네요;; 간단히 말할게요 나중에 질문을 ...;;)
김준호 : 이러한 사황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였고
김준호 : 중국공산당은 세력의 열세로 인해서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방현영 : 네 지금 준호가 설명한 부분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 결렬되고 내전이 발생하게 된 계기..
기계형 : 장개석의 국민당은 마르크스주의와 상관이 없는 부르주아민족주의정당이었음을 지적해야할듯.
김준호 : 네;;
김준호 : 발표문에는 장제스가 민족부르주아지의 대표자로 자임하면서 난징에 정부를 수립했다고 적었어요
김준호 : 중국공산당은 1927년 이후 혁명전략의 변화를 추진해야 했습니다.
김준호 : 당시 도시를 기반으로 한
김준호 :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운동은 국민당의 탄압을 받고 있었고, 많은 도시를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김준호 : 이 상황에서 도시를 기반으로 혁명전략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농촌으로 깊이 들어가
김준호 : 농민들에게 혁명적 변혁의 대안적 전망을 제시하면서 조직을 재정비합니다.
방현영 : 즉, 결론적으로 국민당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은
방현영 : 기존의 도시기층을 중심으로 추진하려던 노선을 수정하고
방현영 : 내전패배 이후 농촌에 정착하면서
방현영 : 농민들과의 결합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방현영 :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농민의 역할이
방현영 : '주체적'이었는지의 여부를 두고
방현영 : 관점이 다소 엇갈리기 때문이죠
방현영 : 농민출신이기도 했던 마오쩌둥은
방현영 : 공산당의 강화된 토지개혁을 추진,
방현영 : 소작제 폐지와 마을 내 토지, 재산 평등화를 추구하는 개혁안을
방현영 : 선전했는데 농민들의 지지를 폭발적으로 받았어요
기계형 : 맞아요
방현영 : 이는 물론 만주에 거해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방현영 : (만주가 산악지형이었다고도 하더라구요)
방현영 : 이렇게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방현영 : 재산관계, 정치권력을 급격하게 변화시켰고
방현영 : 위르겐은, 이 과정에서 '계급자체가 섬멸'했다고도 표현했구요
방현영 : 중국공산당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방현영 : 이에 대해 위르겐은, 농민이 '보병으로서 동원되었다'
방현영 : 라고 하여 그 주체적인 역할에 의문을 갖긴 하지만
방현영 : 그럼에도, 농민들의 기본적인 폭발력, 즉 지주층에 대한 불만이
방현영 : 함께 작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라는 전제도 분명히 하구요.
방현영 : 이후 국민당은 내전 초기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방현영 : 국민당 조직 맻 군대 내부의 비민주화(위르겐에 따르면)
방현영 : 그리고 이후, 토지혁명 등을 통한 농민들의 광적 분위기로 인해
방현영 : 패배를 하게 됩니다
방현영 : 여기까지가 내전 이후 중국공산당의 혁명전략수정, 승리 의 이야기입니다
방현영 : 또 어떤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
기계형 : 발표조 윤효정은 마오쩌뚱의 대장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히기를!
윤효정 : 우선 중국공산당은 1927년의 패배이후 장시소비에트를 결성하여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윤효정 : 하지만 1934년에 국민당의 장시 소비에트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면서
윤효정 : 중국 공산당은 잠시 탈출을 해야했습니다
윤효정 : 장시;
윤효정 : 그리고 1936년
윤효정 : 10월 16일 중국공산당은 장시를 탈출하여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윤효정 : 이 대장정에서 군대가 중간에 휴식을 취할때 마다 당 지도부는 대 규모 집회를 열고 토지개혁에 대해 토론하고
윤효정 : 압수된 물건을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하는 등 선전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윤효정 : 대장정이 완수된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 각지에 공산주의 이념을 흩뿌리는 파종기의 역할을 하였다는 측면에서 대장정을 승리라 평가하였어요^^
김세환 : 넓은 중국대륙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다녔다...
방현영 : (네 비록.. 군대 8만명이 8천명으로 손실을 입긴 했지만..)
윤효정 :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손실을 얻어지만 말이요
기계형 : 공산당 지도부는 쫓겨가면서도 철저히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고 하지요. 훔치지 말라. 농민에게 피해주지 말라. 똥싸면 덮어라...
방현영 : 위르겐에 따르면,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이 농민과
방현영 : 손을 잡게 된 과정이라 볼 수 있는데
기계형 : 역시 해방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요?
방현영 : 약탈을 일삼는 지주에 맞서서 빈곤한 중산층, 농민계층을 동원하기로 결정한 것이구요..
방현영 : 중국공산당에게 농민이 가치있었던 이유는
방현영 : 도시 바깥에서 당이 얻을 수 있던 '유일한 인민대중' 이었다는 것..
방현영 : 그러면서도 적당히 무관심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무분별하게
방현영 : '열성적'이지 않게
방현영 : 신중하게 선동해야 할 집단으로 다뤘습니다..
방현영 : 어쨌든 이 과정에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준호 : 선생님 해방구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몰라서 그러는데요
김준호 : 혹시 중국 북부 지방과 만주를 기점으로한 중국공산당의 영역을 말하는 것인가요?
기계형 : 공산당의 영향아래 있는 지구, 이른바 해방구는 전쟁기간중에 강화되었지요. 일본군의 진격은 파죽지세였고, 화북에서 화중지역이 모두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을때 농촌은 점령하지 못했고, 일본군이 들어올 때 부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농민들은 그대로 남습니다.
방현영 : 네... 1940~1941년즘
방현영 : 일본군 진격에 의해 섬멸위기에 닥쳤을때
방현영 : 일본에 끝까지 맞서는 자세로
방현영 : 사실상, '정당한' 행정조직을 구체화한 세력으로
방현영 : 신뢰를 획득하게 되는것 같아요..
방현영 : 중국공산당이 농민과 손잡는 과정이 이렇게 이야기가 되고
방현영 : 그 이후, 아까 계속 언급했던 토지혁명과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까지 이어지구요^^
기계형 : 이때 민중의 자치조직 해방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공산당은 바로 해방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농민을 지도하는 유기적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방현영 : 선생님, 그럼 이정도에서 위르겐의 관점에 대한 논의로 진행시켜도 될까요?
방현영 : 아무래도 공산당과 농민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더 가능할 것 같은데..
기계형 : 넷
서동훈 : (음 해방구를 소비에트와 비슷한 걸로 생각해도 될까요? 단답형 질문이니 지금 대답을^^;)
기계형 : 그보다 더 기능이 많았어요.
방현영 : 사실 위르겐은, 해방구에 대한 그닥 자세한 서술을 하고 있지 않아서요..
기계형 : 해방구에서는 농업혁명, 토지혁명이 일어났고, 산속의 해방구라도 은행이 조직되어 있었지요.
김준호 : 토지혁명시기에 지주층과 국민당 세력이 반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김준호 : 해방구를 기점으로 해서 중국공산당은 토지혁명을 지속할 수 있었어요
김준호 : 만주는 자원이 풍부하고 게릴라전을 하기에도 유리했다고 합니다
기계형 : 전쟁기간 중에 통용된 화폐는 일본점령당국의 화폐. 국민정부의 화폐, 중국공산당의 인민권 3가지가 있었거든요. 그중에 공산화폐가 제일 끝내주는 화폐였지요.
김세환 : 끝내주는????
기계형 : 화폐신용도가 말이예요.
방현영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것 같아서.. ^^ 일단 논란이 될만한 부분은 위르겐이 농민계층의 역할을 다소 '미약하게' 보고 있다는 점인데요
김세환 : 당시 공산당이 화폐를 발행하는 사실은 새로 알게됐습니다...
방현영 : 물론, '농민문제'가 중국이 당면한 중요한 문제였다
방현영 : 농민층에 폭발력이 잠재되어 있었다 라고 하면서도
방현영 : 1차적 농민혁명운동인 태평천국운동이나 의화단 운동 모두
방현영 : 농민층의 참담한 패배로 끝나
기계형 : 수업시간에 좀더 자세히 말하지요.
방현영 : 사실 오늘, 중국 혁명 초기 부분 관련해서 좀 논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데요.
방현영 : 저희에게도 수업시간에 조금 시간을 주십사 하는 ㅜㅠ
기계형 : 그래요. 발표조가 논점을 잘 제시했어요. 수업전에 10분정도 최종논의를 추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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