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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 2007

 

<천원돌파 그렌라간>

 

감독: 이마이시 히로유키

각본: 나카시마 카즈키

제작: GAINAX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정의하는 단 한 단어, 그것은 바로 '열혈'!!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오타쿠 문화의 풍조가 절망감, 패배감, 개인적 갈등 등에 초점이 맞춰질 때 가장 먼저 그것을 포착해 그 흐름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가이낙스가, 이제는 낡았다고 여겨지는 인간 의지와 말도 안 되는 극복을 그리는 작품을 2007년에 내놓은 것이다.

 

배경은 모든 인간이 지하에 갇혀 사는 어떤 시점의 미래의 지구. 지하 마을에 살면서 항상 지상을 꿈꾸던 청년 카미나와,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기도 장점도 없이 항상 주눅들어 있던 고아 소년 시몬이 우연한 발견을 계기로 로봇을 타고 지상으로 나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불가능하다, 위험하다, 그런 것 있을 리 없다,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등 모든 부정적인 장애물들을 뛰어넘고 의지와 패기만으로 전 우주를 해방시키는 스케일 큰 이야기다.

 

 

▲ 이들이 바로 주인공

 

 

이른바 '열혈 로봇물'의 특징: 첫째, 강한 의지로 어떤 것이든 돌파한다. 여기에 합리적인 이유는 사실 필요 없다. 둘째, 로봇이 과학적 근거와는 전혀 상관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또 강하다. 물론 적들도 마찬가지. 이런 측면에서 <그렌라간>은 열혈물의 교과서다. <그렌라간>에서 의지의 힘은 '나선력'이라는 설정으로 표현되는데, DNA 나선구조를 가진 생명체라면 의지와 패기를 통해 누구나 방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라는 설정이다. 이 설정은 그렌라간의 유일한 무기인 드릴의 나선운동과 연결되면서 재미있는 일치를 구성한다. 또한 그렌라간은 닥치고 세다. 주인공이 악쓰면서 드릴을 갖다 대면 안 뚫리는 것이 없을 정도고, 최종 합체 형태에 가서는 은하를(;;) 손으로(;;) 집어 던지는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처음부터 크고 강한 다른 열혈 로봇물과 달리, 그렌라간은 로봇에게 '성장'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처음 주인공이 발견한 로봇은 기껏해야 성인 남성의 키를 살짝 넘는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며, 짧은 팔다리에 얼굴만 커다래서 웃기기까지 하다. 그러나 합체를 거듭함에 따라 결국 이제까지 어떤 로봇물도 보여주지 못한 우주급(!!) 스케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로봇의 성장은 주인공 소년 시몬의 정신적 성장과도 연계되어 있다.

 

 ◀ 이랬던 녀석이

 

▲ 이렇게 변합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내적으로 <그렌라간>의 또다른 특징이 있다면, 만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데포르메' 기법을 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렌라간>의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열혈물답게 굉장히 과장되어 있으며, 그 동세(動勢)는 인체비례를 무시하기까지 하며 강렬한 원근법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캐릭터들의 신체는 표현의 편의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얼굴 표정도 안면부 함몰을 의심케 할 정도로 자유자재로 변화한다. 이러한 연출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극적 현실에 대한 시청자의 감정 이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 때 어디까지 대상을 뭉개어(;;) 극대화된 감성적 효과를 노릴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 훌륭한 예라 하겠다.

 

내러티브에 있어서 <그렌라간>을 보는 사람을 가장 거슬리게 할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마초이즘일 것이다. 사실 '드릴'이라는 무기 자체부터가 일단 좀 그렇다. 약간만 알고 보면 누가 뭐래도 남근의 상징 아닌가. 게다가 클 수록 좋다니(;;) 이런 원초적인 마초이즘도 몇 없을 것이다. 또한 열혈물의 특성상 여성 캐릭터들은 거의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으며, 남성적 공격성에 대한 예찬은 어떤 페미니스트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할 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카미카제 정신의 미화라던가, 정치인에 대한 냉소적 시각이라던가 하는 부분에 대한 비판은 여러 측면에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렌라간>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변호하자면, 열혈물이 내세우는 인간 의지와 불가능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윤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대중 문화의 특성상 그 주 소비층인 젊은 남성들을 의식하여 그것이 남성적 형태로 표출되고는 있지만, 일본이라거나 남성이라거나 하는 외형을 걷어내고 보면 마초이즘이나 카미카제 정신과 유사하지만 궤가 다른, 인간의 원초적인 열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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