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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에 미래는 없나

새내기,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시절, 난 오만하게도 학생운동을 비웃고 있었다. 변혁운동 부문에서 학생운동은 이미 쇠퇴하는 부문이고,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는 관념적 급진성만으로 발악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오만한 착각이었기에, 내 생각은 금세 깨어져 나갔다.

 

2학년, 집행부원과 학회 일을 하면서, 난 학생운동이 희망차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고 강력하게 진행된 민중진군 26년의 관악 교육투쟁 속에서, 나는 주체들의 의지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이 관악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지금은 3학년, 한 반의 학생회장이다.

 

그리고 나는 절망의 암흑 속에서 앞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학생운동 몰락의 최대 난점은, 지금까지 학생운동의 급진성과 건강함을 유지해오던 주체 형성 시스템의 침몰이다. 선배에게서 후배에게로, 여러가지 급진적인 시각들과 지식들이 전수되던 전체 시스템이 붕괴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선배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의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쉽사리 얘기해 줄 수 없고, 후배들도 그러한 것들을 쉽사리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끼리는 "7차 교육과정의 폐해"라고 하면서 낄낄거리지만(6차 마지막 세대인 04들끼리는 말이다 -_-;;), 점점 학생들은 아는 것은 없고 고민은 가벼워지면서 지적 허영심만 늘어가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절대진리인양 굴던 것은 이제 운동권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의한 학생들의 경쟁과열로 인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내가 볼 땐 말도 안되는 소리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어려움들을 안지 않고 운동하던 시절이 대체 언제 있었단 말인가. 결국 왜 지금의 세대만이 이렇게 자신을 그러한 불안감에 종속시키고 투항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또 누구는 이제 학생운동이 상대하는 적이 뚜렷하지 않고 다종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엔 이것도 헛소리다. 80년대의 전두환 파시즘 정권이 '뚜렷하고 명백한' 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도 결과주의적인 역사관이다. 급진적인 몸짓들은 언제나 반감을 사게 마련이고, 당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적대전선이란 언제나 불명확한 것이다.

 

내가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대학의 계급적 기반 자체가 이미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생들의 계급적 구성이 프티 부르주아지 이상으로 이동해가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대학이라는 공간이 사회 내에서 위치하는 위상 자체가 계급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 80년대 학생운동의 계급적 기반은 민중주의에 있었으며, 이는 다수의 대학생들이 그 계급적 기반을 넓은 의미에서의 민중 부문에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의 위상 자체가 조국과 민족(한국적 민족 담론은 대학 내에서 쉽사리 민중 담론으로 치환되었다)에 봉사하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구로서 위치지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기반이 학생운동의 대중적 흐름을 계급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장애물이 되었지만, 일정 정도 학생운동 주체들의 급진성을 제고하는 데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은 조국과 민족에 봉사하는 엘리트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프티 부르주아지를 양산하는 기관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학생운동 일각에서는 여전히 '예비 노동자' 담론을 사용하지만, 실제로 대학을 나와서 '노동자'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시작은 노동자일지라도 대학생들은 언제나 중상층 부르주아지, 즉 기업에서는 관리자급 이상이나 공무원 등으로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주어지고(물론 그 이상의 엘리트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박탈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이전과 같은 책임의식이나 높은 수준은 요구받지도 않거니와 스스로 요구할 이유도 없다.

 

이러한 흐름들은 결국 학생운동을 이끌어 온 최대의 동력인 급진성을 그 기반으로부터 제거해 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의 화두는 급진적인 담론일 수 없으며, 오히려 문제는 누가 프티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혹은 누가 프티 부르주아지를 넘어 국가 엘리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러한 대중적 기반의 박탈은 길게 보면 결국 급진적 주체 양성의 기회마저 박탈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체 풀(pool) 자체가 사멸되어 가는 것이다. 또한 가뭄에 콩 나듯 주체화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대학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그 주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을 하기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러한 문제는 나아가서 전체 민중운동/변혁운동 부문에 있어 급진적 담론과 이론의 제자리걸음을 부추기는 효과를 낳는다. 서구의 급진적 담론은 수입만 될 뿐, 그것을 한국 현실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이상의 담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주체들은 서서히 사멸해 간다. 제거된 급진성 속에서 계급적 시각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현재 학생사회의 현실이다. 레닌 대신 알튀세르가, 알튀세르 대신 발리바르가, 발리바르 대신 들뢰즈/가타리, 혹은 네그리가 더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학생사회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리라. 그것은 이전처럼 급진적인 계급적 실천 자체가 봉쇄된 상황에서 학생운동 주체들이 이론적 정당화와 활로를 찾고자 하는 발악에 다름없다. 대중들이 계급적 관점을 잃어버림과 함께 대학의 담론 역시도 '계급 없는 투쟁'과 '수평적 중층결정', 그리고 '다중'을 향해 폭주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고자 하는 주체들의 발악은 더 눈물겹다. '계급 없는 투쟁'에 대한 주체들의 안티테제는 당연히 '계급투쟁'이 되지만, 그러한 담론 역시 맑스와 레닌 이후로 아무런 발전이 없다. 대학 내에서의 계급적 실천이 봉쇄되자 이들은 학교 밖으로 나아가고, 계급적 실천을 교란하는 모든 이론과 소통을 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 일신의 계급적 실천마저도 간수할 수 없게 된다는, 무의식적인 절박함의 표현이라는 인상은 과연 나만의 것인가. 결국 대중적 기반에 뿌리를 내린 힘 있고 여유 있는 실천이 없기에, 계급적 담론 역시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있는 주체형성이 봉쇄되어 간다.

 

결국 대학에서 가능한 정도의 급진성이란 '인권의 정치', '시민성의 정치' 정도이다. 담론에 있어 계급의 사상은 더 이상 계급적 실천과 계급투쟁이 불가능한 현실의 단면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러한 레토릭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급진성조차 제거될 것이 명백하다. 그 레토릭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자들이 뭐라건 간에, 현실에서의 계급적 위상에 따라 정치적 구호들은 변질되고, 따라서 인권과 시민성 역시 프티 부르주아적 인권과 시민성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한 새내기의 비웃음을 사기까지 했던 '관념적 급진성'마저 제거된 학생운동은, 이제 새내기의 비웃음을 살 만큼의 자격조차 상실한다.

 

적어도 내가 볼 때, 제목으로 달린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이다.

 

나도 뭔가 변혁운동에 일조를 하고 싶다면,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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