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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표의 망상을 걷어치워라

지방선거가 가까워 오면서 슬슬 여기저기서 투표철에 맞는 계절상품들이 몰려오고 있다. 보수 정치권의 보여주기식 정쟁의 대표격이라 할 무료급식, 사법개혁 논란은 물론, 진보 진영에도 계절풍은 피해가지 않는다. 항상 이맘때쯤 되면 진보 진영을 휘감는 계절상품, 그게 바로 '계급투표' 논의이다.

 

간단히 말해 소위 '계급투표'란, 각 사회 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에게 투표하는 정치적 선택을 지칭한다. 물론 역사상 완전한 계급투표가 이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 조직된 노동자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하여 정권을 구성하는 것이 정석으로 되어 있는 유럽 정치 지형을 보고 배운 진보 정치세력들은 이 계급투표가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는가가 한 사회의 계급의식의 척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각계각층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표에 대한 논의는, 사실 무용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 한국 좌파가 계급투표에 대한 희한한 망상을 걷어치우지 않는 이상 사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계급투표에 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유형은 항상 동일하다. 원래대로라면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여 자본가들과 맞서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과연 어떤 다른 요소가 작용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며, 이 교란 요인을 제거할 방법은 무엇일까? 즉 이미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론적 명제와 그에 모순되는 현실 사이의 괴리 사이에, 해명되지 않은 중간 매개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규명, 극복함으로써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다.

 

당연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계급투표 논의의 전제가 되는 명제, 즉 '원래대로라면 노동자 계급은... 투표하여야 한다'는 부분이다. 과연 이 명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옳은가?

 

혹자는 이러한 의문을 계급성의 사상 시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가 여기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 자체다. 과연 계급이란, 노동자 계급이란 무엇인가? 즉자적/대자적이니, 헤게모니니 하는 골치아픈 말장난은 집어치우고, 간단하게 요점을 조명해 보자. 계급이란 하나의 경제적 범주인가? 아니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구성되는 주체적 범주인가? 만약 계급이 부르주아 통계학자들의 차트 안에 존재하는 행렬의 하나가 아니라면, '원래 이러저러하게 투표해야 하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허깨비란 말인가?

 

요약하자면, 계급투표에 관한 모든 논의는 노동자 계급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세련된 논의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국 사회에 즉자적 노동계급은 존재하지만 대자적 노동계급은 미약하다고 얘기할 것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말을 꼬아놓은 유희에 불과하다. 왜냐면 여기서 논자가 말하는 즉자적 노동계급은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 범주를 의미하며, 대자적 노동계급이란 주체적 범주를 의미하는데, 이 논자는 동적인 주체적 범주가 정적인 경제적 범주에 일치해 가는 것을 정상 상태로의 이행이라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결국 정적 범주의 선험적 상정의 오류와 크게 궤를 달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급투표가 아니라, '어떻게 계급이 투표를 하게 할 것인가'이다. 이미 존재하는 자연적 개별자들의 집합을 관념적인 상태로 다가가게 만드는 방법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개별자들의 산개된 현상태를 새로운 집합적 주체로 양질전환시킬 방법을 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계급투표의 창출 이전에 일단 계급의 창출이 우선된다는 뜻이다.

 

결국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물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는 교란요인을 제거하는 것이나, 자연적 개별자들을 계급이라는 집합적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나 결국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게 묻는 사람들은 여전히 핵심을 빗겨나가고 있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전환이라는 화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정치의 기반에 대한 전제에 있다. 즉자적 계급을 대자적 계급으로 전환하고 계급의식을 함양하여 이들을 계급투표가 가능한 정치적 집단으로 만든다는 모델은, 애석하게도 여전히 미조직 대중을 하나의 집단으로 상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즉 비정치적 집단을 정치적 집단으로 전환하는 것이 대중정치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적인 대중정치의 기반은 관념적인 경제적 범주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개별자들을 어떻게 최초로 집단화시킬 것이느냐에 걸쳐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계급투표에 대한 논의는 금세 노동자 정치세력화니, 이데올로기 투쟁이니 하는 공론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는 결국 개량주의/조합주의로의 길과 관념적 시민운동의 길로 나뉜 갈림길에 좌파 운동을 몰아세우는 것이다. 이 구도 속에서 정치는 투표행위 혹은 투표행위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인식행위에만 국한되며, 모든 논자들은 과거 리용 면직공들의 투쟁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평했던 브루노 바우어의 오류에 속박된다.

 

말이 길어졌는데, 간단하게 하나의 질문으로 줄여 보겠다. "지금 한국 좌파 운동이 지방선거에 신경 쓰고 있을 때인가?"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계급의 구성보다 계급투표가 선행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소위 계급투표라는 것은 계급의 구성이 계급의 승리로 이어지지 못하고 패배했을 때 피눈물을 삼키며 선택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동시에 점차 그 안으로 매몰되어 가는 함정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계급투표'라는 망령을 좌파의 잔칫상에서 걷어치워라. 지방선거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라면, 선거 과정에서 드러나는 보수 세력의 진짜 의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력을 거리에서 공장에서 고발하라. 대중에게 표를 구걸하는 것은 이제 그만 두어라. 만약 우리가 정말로 유효하게 계급을 천천히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면, 우리가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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