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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 시민 구보씨의 하루

FTA 시민 구보씨의 하루

 

글쓴이 : 송기역
            전태일문학상 수상

 


 

정오 무렵, 잠에서 깬 구보 씨는 여전히 자신이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리번거려도 세계는 잠잠했다.


정신을 차릴 즈음 어디선가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귀를 기울이다 말고 구보 씨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TV를 켰다. 좁은 방 안에 10명의 남녀를 가두고 그들의 짝짓기 과정을 보여주는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방송사의 국내 지사에서 제작한 24시간 생방송 프로그램이었다.


구보 씨는 지난달부터 이 프로그램 애청자가 되었다. TV를 끄고 나면 보잘것없는 프로그램에 소중한 시간을 빼앗겼다는 기분이 들어 억울해하곤 했다. 지난 주엔 원고 마감을 1주일을 넘겼으면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구보 씨가 이 프로그램을 끊는다고 반드시 그의 고귀한 예술혼을 담아 원고를 쓸 것이란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보 씨가 올해 애청자가 된 프로그램의 목록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꿈꾸지만 결혼이 두려운 30대 낯선 남녀를 연결해주는 <판타스틱 체험! 7일 간의 결혼>, 말로만 듣던 타인들의 성생활과 그 속내를 엿보는 <리얼 다큐 성과 속> 등 방송 이름만 보아도 내용을 알 것 같은, 하루라도 안 보게 되면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게 되는 것들이었다. 드문 일이지만 어쩌다 깜박 잊고 안 보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리얼하고 판타스틱했으며 감동 그 자체였거나 감동을 넘어선 무엇이 있었다고 얘기해 주는, 그래서 자신을 자책하게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모자이크 처리한 화면은 더 많은 상상력을 부추겼다. 요즘 TV는 그야말로 모자이크의 시대였다. 모자이크 화면으로 훈련된 시청자들의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모자이크로 처리하게 했고 모자이크 너머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이토록 상상력이 풍부한 시대인데, 왜 평론가들이 현대인들의 상상력이 메말라간다고 개탄하고 있는지 구보 씨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국내 방송사 역시 다른 방송사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자극적인 방송을 미친 듯이 내보내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집집마다 방방마다 24시간 TV 앞에 붙어 있어 생방송의 주체가 방송국인지 시청자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 수준은 면벽 수도의 경지에 이르러 과연 성과 속이 따로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지붕을 뜯어낸다면 한결같은 풍경에 하느님도 “내가 너희를 붕어빵 기계로 찍어내지 않았노라”라고 말하며 기가 막혀 했을 것이라고 구보씨는 상상한 적이 있다. 구보 씨는 꿈과 TV가 가끔 헷갈리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꿈에선 자신이 그 프로그램 진행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 시대 인간들의 모습은 둘 중 하나였다. 미친 듯이 일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직장인의 비정규직화 법안 국회 통과를 앞두고 올 초부터 이런 현상은 극단을 치닫고 있었다. 구보 씨는 둘 사이쯤에 해당하는 소설가였다. 오늘도 법안을 지지하는 CEO들이 자신들이 먼저 비정규직이 되겠노라며 정규직 포기선언을 하는 알쏭달쏭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옥탑방 밖에선 시민 몇 사람이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아직도 골목을 내달리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자 ‘농촌의 날’ 특집 『들녘이 사라지고 있다』가 방영되고 있었다. 농업 개방 이후 농가 소득이 급격히 줄어들고 논과 밭, 작물들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심층 취재한 방송이었다. 얼마 전 <농촌시인협회>에서는 전통 농작물들이 사라져 더 이상 농촌시를 쓸 수 없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농촌시인협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저 님도 보고 뽕도 보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봐도 한참을 봐야 시가 나오는 것인데 님은커녕 기다릴 뽕나무밭도 없으니 부를 뽕짝도 없고 시도 없다.”


방송에선 국내 전역에서 산소가 줄어들고 있고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고 있다며 그 원인 중 하나로 논밭이 사라진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홍수가 5년 전에 비해 배로 늘고 있는 현상을 논이 줄어드는 것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화면은 휴양지화돼 있는 한국 농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자 광고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방송사의 계열사인 댐 건설회사의 광고가 이어졌다. 그 건설회사 사장은 모든 직장인의 비정규직화 법안 상정에 팔을 걷어붙이다 못해 발까지 걷어붙인, 머잖아 전라시위마저 예상되는 비정규직 전문경영인이었다.


곧이어 갯벌과 바다의 생명들이 시위하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눈깔 하나가 없는 광어가 붉은 띠를 매고 나와 오폐수 추방과 생존권 쟁취를 주장하고 있었다. 광어 주변으로 꼬리가 사라진 고래, 지느러미를 잃어버린 우럭, 알이 썩은 엄마 연어, 다리가 토막난 문어 들이 절박하고 참담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모여 있었다. 


구보 씨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만지다 안도했다. 한껏 슬픔에 가득차버린 구보 씨는 생각난 듯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았다. 입금 명세에는 약간의 인세와 방송국에서 보낸 <리얼 다큐 성과 속> 모니터링비가 적혀 있었다.


언젠가부터 구보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정기적으로 혹시나 하고 인터넷 복권을 구매하고 혹시나 하고 자신의 오롯한 영혼을 대변할 소설을 쓰고 내일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으로 혹시나 하고 잠이 들었다. 잠속에서도 혹시나 좋은 꿈을 꾸지 않을까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야 혹시나는 시대의 유행어가 된지 오래였다. 비정규직 직장인들은 혹시나 하고 정규직이 되길 바라며 일하고 있었고 빈민들은 혹시나 하고 야근과 철야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면 비슷한 헤어스타일, 비슷한 표정, 다를 게 없는 옷차림으로 학교라는 감옥으로 등교해 똑같은 급식을 먹었다. 이들은 수인번호를 확인해야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가끔 불순한 의도를 가진 학생들의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방송을 타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의 세상은 역시나 기업주들에게, 부자들에게, 학원 경영자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있었다. 구보 씨가 볼 때 세상은 ‘혹시나’와 ‘역시나’로 또렷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메일을 확인하자 ‘혹시나’를 버리고 테러리스트가 된 시인 친구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시인 친구는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닌 시대 정신의 독립운동가임을 자처했다. 그 뜻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구보 씨는 테러리스트의 어감이 주는 강렬함에 매료돼 주소록에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적어 두었다. 그는 원래 『돈과 똥』이라는 한 권의 시집을 낸 전도유망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 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달리 지금은 정신의 식민지 시대이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고 지배당하는 것은 똥이다. 돈과 똥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선, 냄새가 비슷하다. 돈은 곧 욕망이고 똥은 욕망의 배설물이다. 똥이 없으면 돈도 없다. 돈이 없으면 똥도 자주 못 눈다. 똥줄 빠지게 일하는데 똥 쌀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똥을 제때 싸지 못하니 스트레스는 쌓이고 스트레스 때문에 똥줄이 막혀 변비 걸린 사람들 천지다.”


시인은 역시나의 존재들과 싸우기 위해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최근에도 비정규직 해고로 파업을 불러일으킨 모기업 회장실에 폭탄을 투척했다. 시인은 회장실에 시 한 편을 남긴 후 유유히 사라졌다.


구보 씨는 얼마 전 야심작이라고 생각한 한 편의 소설을 들고 <맥도날드 페이퍼> 출판사를 찾아갔다. 이 출판사는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맥도날드처럼 영양가 있는 도서를 출간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곳이다. 그 출판사에서 펴내는 잡지의 편집위원은 구보 씨를 ‘리얼리즘의 새로운 장을 연 작가’로 평가한 명망 있는 평론가이자 그 출판사의 실세였다. 편집위원은 구보 씨를 만나자마자 얼마 전 미국 주식시장의 불안정한 여파로 자신의 주식이 곤두박질친 이해 불가능한 얘기를 1시간 가까이 떠들어댔다. 편집위원은 ‘혹시나’와 ‘역시나’의 혼합형 인간이었다.


덕분에 출간에 관한 얘기는 한참 후에, 그것도 잠시 논의됐다. 그는 최근 저자 사후 100년까지로 연장된 저작권료가 부담스러워 좋은 책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며 출간을 고사했다. 편집위원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리얼’하고 ‘판타스틱’한 소설을 써보는 것을 제안했다. 구보 씨는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설득이 어렵자 편집위원은 역사소설을 써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맥도날드 페이퍼>는 얼마 전 『여성 소설가들을 위한 시대별 해어화 인물사전』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린 적이 있는 곳이다. 벌써 몇 십 년째 출판계의 대세는 역사소설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한 역사소설 유행은 고려와 통일신라, 발해, 삼국시대를 거쳐, 요즘은 고조선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이 대유행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과거에서 배우자는 구호는 시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지경이었다. 구보 씨는 그러한 역사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소설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작가들끼리 모인 어떤 술자리에서 구보 씨는 ‘현재’를 말하지 않고 ‘과거’로 숨어버린 작가들의 숨바꼭질을 성토하다 한동안 친구들이 없어 술래처럼 외롭게 지낸 적도 있었다.


구토를 느낀 구보 씨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당신은 ‘역시나’군요.”라고 외치고 나와버렸다.


그 일을 생각하자 구보 씨는 산책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별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구보 씨는 별을 볼 때마다 자신의 고귀한 영혼을 되찾은 느낌이 들곤 했다. 하지만 서울 하늘도 ‘역시나’였다. 배기가스가 심해진 서울 하늘에 별들은 드문드문 박혀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는 별들은 지루하고 졸리운 표정이어서 잠들었는지 말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역시나의 하늘은 스모그로 희뿌연했다. 구보 씨는 저 하늘이, 눈물이 눈동자에 가득찼지만 아직 흘러나오지 않은, 흘리기 전의 희뿌연한 눈망울 같다고 마음으로 썼다.


그때 별안간 핸드폰 벨이 울렸다.


구보 씨가 지난 2년을 고스란히 바쳐 완성한 원고를 연재하고 있는 잡지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잡지사 편집자는 얼마 전 보내주신 선생님의 소중한 옥고를 반려할뿐더러 더 이상 연재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유인즉슨, 직장인의 승진을 위한 피도 눈물도 없는 암투를 사실성 있게 그린 그의 장편 『인간 김만세』는, 방금 통과된 모든 직장인의 비정규직화 법안으로 인해 일절 사실성 없는 원고가 되었으므로 연재 종결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패잔병처럼 돌아온 구보 씨는 미국 택배회사에서 부리고 간 우편물을 발견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편물을 열었다. 그곳에 아내라도, 아니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용물은 <리얼 다큐 성과 속> 제작진이 이달의 가장 우수한 모니터 요원에 당선된 것을 축하하는 메시지와 함께 보낸 미국산 소고기였다. 얼마 전 골목길에서 보던 미친 소처럼 날뛰던 광우병 환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간 광우병 환자는 방향감 상실 증상을 보이고 정신착란, 시력장애, 중풍과 치매의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구보 씨는 세상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미친 소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미친 소들이 뛰어다니는데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너무도 잠잠했다. 언제부턴가 선박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미친 소들은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상륙해 들어왔다. 미친 소들은 한반도 전역을 날뛰며 미친 인간들을 만들어냈다. 구보 씨는 아메리카 들소 떼의 역사가 떠올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메리카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들소를 수렵하며 살아 왔다. 그러나 백인들과 함께 총이 들어오고 거대한 들소 떼는 서서히 말살되어 갔다. 수천 년을 들소와 함께 생존해 온 인디언들은 격렬한 저항을 하지만 운디드니 대학살 이후 들소 떼와 함께 역사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들소들이 죽어가자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처럼, 소가 미쳐가자 인간도 미쳐가고 있었다.


구보 씨는 갑자기 탈춤을 추는 사람처럼 팔을 꺾고, 다리를 높이 추켜올렸다. 그러다 고개를 한 바퀴 두 바퀴 돌리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절지동물의 움직임 같았다. 춤을 추는 것인지 백정의 몸짓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이었다. 구보 씨의 입술에선 누런 타액이 흘러나오고 완전히 풀린 눈동자는 너무 멍해 아무 곳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곧이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괴수 영화에 나오는 이무기가 내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미친 소의 소리 같기도 하고 인디언의 휘파람 소리 같기도 했다. 이 모든 소리들이 섞여 그의 옥탑방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구보 씨는 자신이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계는 잠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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