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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0/29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3(5)
    곰탱이
  2. 2006/10/29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2(1)
    곰탱이
  3. 2006/10/29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1(1)
    곰탱이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3

여기에서는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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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에서보다는 『밀의 ?정치경제학의 요소들?에서의 발췌』에서 부르주아의 소외된 사회와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성의 대립이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맑스는 상품교환에서의 욕구 상호간의 도구화에 “인간적인” 생산을 강하게 대립시키고 있다 :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산한다면 좋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보자 :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을 생산할 때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중적으로 인정한다면 좋을 텐데. 내가 1) 나를 생산할 때 나의 개인성과 그 개인성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냈으면 좋을 텐데…… 2) 나의 생산물을 당신이 즐기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인간 존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줄 수 있어야 하고, 3) 당신을 위해 당신과 (인간) 유 사이의 중재자가 있어야 하고, 당신의 고유한 존재를 보충해 주는 존재로서의 당신 자신에 의해……(그 중재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4) 나의 개인적인 삶의 표현 속에서 직접적으로 당신의 삶이 표현되어야 하고, 따라서 나의 개인적인 행위 속에서 직접적으로 나의 참된 존재, 나의 인간 존재, 나의 공동체가 확립되고 현실화되었다면 좋을 텐데. (……) 나의 노동이 자유로운 삶의 표현이 되고, 따라서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된다면 좋을 텐데.”(Ⅳ.2/465f; EB 1/462f)(주53-)

 

이에 반해 현재의 상태는 다음과 같이 간주된다 :

 

“우리의 생산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어떠한 생산도 되지 못한다. 즉 어떠한 사회적 생산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산을 상호 결속시키는 것이 인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Ⅳ.4/462f; EB 1/459)

 

맑스는 여기서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인간학으로부터 인간 존재에 상응하는 사회상태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그 사회상태를 이상(Ideal)으로서 현실성에 대립시키고 있다. 맑스가 다른  곳에서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세계를 인간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는 한, 이러한 공동체가 소외의 형태로 나타난다”(Ⅳ.2/452; 40/451, Herv. von mir)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마치 소외 상태로부터 비-소외된 상태로의 이행 과정에서 인식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여기서 분명히 맑스는 공상적 사회주의 구조를 잔손질을 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걸맞는 사회적 상태와의 대결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관계를 비판한다. 참된 인간 존재에 적대적인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도덕적 비판 형태의 마지막 목적은 인간 존재의 현실화를 역사의 목적으로 제시하는 맑스 역사 개념의 목적론적인 계기를 통해 감춰진다.

그러나 이러한 “공상적인 사회비판의 형태에서 벗어나기”(Sost 1980, S.29)는 당장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형태들이 “약간 나중에 씌어진” 『수고』의 세 번째 노트에서  “지금까지의 불충분함에 대해 명백하게 수정”(Sost 1980, S.30)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것은 Sost에 의해 가정된다. 이 형태들은 다음과 같은 글을 증거로 인용한다 :

 

“사적 소유의 운동 속에서, 즉 바로 경제의 운동 속에서 모든 혁명적 운동이 자신의 경험적 토대뿐만 아니라 이론적 토대를 발견한다는 사실로부터 필연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Ⅰ.2/263; EB 1/536)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위해 필수적인 Sost의 수용에 대립해서 『밀의 ?정치경제학의 요소들?에서의 발췌』는 『수고』의 세 번째 노트 이후에 비로소 씌어졌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금까지의 불충분함에 대한 수정”이 바로 결코 단순한 신앙고백을 통해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그리고 인용된 진술이 맑스 (사상) 발전의 이러한 시점에 대해 어떤 다른 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설령 이 사실 속에서 이후의 결과들이 먼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나타난 불충분함은 오히려 소외 개념 자체에서 나타난 결과이며 따라서 오로지 새로운 개념을 통해 극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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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2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1>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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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도 맑스는, 인간의 역사성을 바로 감각의 영역에서 강조하고 인간의 5가지 감각의 형성이 “지금까지의 전체 세계사의 노동”(Ⅰ.2/270; EB 1/541f)일 수 있음을 확정할 때 포이어바흐를 넘어서게 된다.

 

포이어바흐를 넘어서는 인간 유적 존재에 대한 규정은 포이어바흐와는 아주 다른 헤겔의 평가로 이어진다. 『수고』의 세 번째 노트에서 맑스는 세 개의 긴 부분으로 헤겔의 철학과 대결하였다.(주41-) 거기서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그리고 특히 브루노 바우어를, 그의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헤겔 논리학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오로지 포이어바흐만이 헤겔 변증법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주-42) 그러나 맑스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인간 존재의 역사적 생성을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포이어바흐와는 다르게 헤겔을 인정하고 있다.(주43-)

맑스의 존재 개념이 포이어바흐와 구별되는 두 가지 계기가 있는데, 그 두 가지 계기는 역사성과 생산으로서, 인간 자신의 생산으로서 대상성, 즉 맑스가 헤겔에게서 재발견하고 있는 대상성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

 

“헤겔은 근대 국민경제학자들의 관점에 서 있다. 그는 노동을 존재로서, 즉 인간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서 파악한다.”(Ⅰ.2/292f; EB 1/574) 

 

물론 맑스는 헤겔이 역사성과 노동을 오로지 사변적인 방식으로만 파악한다는 사실을, 즉 헤겔이 알고 있는 노동이 “추상적이고 정신적인”(같은 곳)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이것은 헤겔의 소외 개념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 헤겔이 소외를 이미 대상화 속에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에, 헤겔은 현실적인 소외를 결코 해소(지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소외의 대상적 형태를 없애 버림으로써 의식 속에서만 폐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대립하여 헤겔에서 긍정적 계기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본다. 즉

 

“소외 안에서 나타난, 대상적 존재의 소외의 해소에 의한 그 존재의 전유(소유, Aneignung)에 대한 통찰,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현실적 대상화 속에서 (인간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통찰”(Ⅰ.2/301; EB 1/583).

 

맑스에게 있어서 국민경제학과 헤겔 철학은 소외 안에서의 과학들이다. 맑스는 “참된 유물론”과 “실제적 과학”을 이들과 대립시킨다. 참된 유물론과 실제적 과학을 토대를 닦은 사람은 포이어바흐라고 할 수 있다(Ⅰ.2/276; EB 1/570). 이러한 실제적 과학은 바로 이 과학이 인간 존재를 그 존재의 소외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형태로 파악한다는 사실을 통해 그 특징이 나타난다.

 

맑스가 인간 유적 존재의 대상화를 대상적 생산으로 파악하고 이 생산을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포이어바흐의 비역사적인 인간학은 이미 잠식당하고 있다.(주44-)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유적 존재의 내용을 지니고 있는(inhaltliche) 규정으로 여겨진다. 맑스의 담론 구조는 여전히 하나의 인간학적인 존재철학이다. 특히 이것은 분명히 유적 존재의 사회성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게서 이러한 사회성은 인간과 인간의 통일로서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다.(주45-)

맑스는 『수고』(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사회적 현실성을 인간 존재의 객관화로 파악한다 : 사회성은 개별적 개인들에게 내재해 있는 유적 존재를 통해 나타난다. 분명히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무엇보다도 ‘사회’를 또 다시 개인과 대립하는 추상으로서 정립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Ⅰ.2/267; EB 1/538)(주46-)

 

그러므로 여기서 맑스는 정치경제학과 똑같은 개인주의(Individualismus)로부터 출발한다. 사회는 직접적으로는 개인이라는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구성되므로 이러한 존재의 특성으로부터 파악될 수밖에 없다.(주47-) 그런데 정치경제학이 현존 사회를 인간 사회로 파악했던 반면에, 맑스는 인간 유적 존재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바탕으로 해서 현존 사회가 다만 이러한 소외의 객관화라는 사실, 즉 (현존 사회의) 인간이 참된 사회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립한다.(주48-)

이러한 참된 사회성은 공산주의를 통해서만 비로소 나타날 수 있게 된다. 공산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

 

“인간의 자기소외로서의 사적 소유의 긍정적 해소(지양)로서 공산주의, 따라서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인간 존재의 현실적 전유(소유)로서의 공산주의 ; 그러므로 완전히 지금까지의 모든 부의 발전을 의식하고 또 그 안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인간, 즉 인간적인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로서의 공산주의. 이러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연주의 = 인간주의, 완전한 인간주의 = 자연주의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순의 참된 해소이며, 현존재와 존재(또는 본질) 사이, 대상화와 자기 확증 사이, 자유와 필연성 사이, 개인과 (인간) 유 사이의 진정한 해소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자기 자신을 이러한 해결로 알고 있다.”(Ⅰ.2/263; EB 1/536)

 

여기에서 맑스의 존재개념과 소외개념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계기들이 모여 있음을 보게 된다. 현실성은 관념적인 인간 존재와 대조되는데, 여기서는 현존재와 존재(또는 본질)의 불일치, 모순, 현실적 존재의 소외가 확정된다. 이러한 모순은 공산주의에서 해소된다.(주49-)

맑스가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존재로 “복귀”(주50-)하는 것으로서의 공산주의에 관해 말할 때, 인간이 여전히 자신의 인간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어떤 근원적인 상태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함축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근원적인 통일의 분리, 상실, 심지어 자신의 고유하고 참된 본질(또는 존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분리, 상실에 다름 아닌 소외의 개념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주51-) 상실로서 하나의 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그러나 항상 이미 이런 상실 앞에 있는 다른 하나의 상태를 가정하게 된다. 물론 맑스는 소외되지 않는 국면으로서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비추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물론 이러한 역사적 국면은 이런 근원적인 상태의 지위(상)에 관한 문제를 낳는다.(주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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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1

여기에서는 <가치에 관한 과학> 중 2부 <맑스의 과학 혁명> 3장 <비판으로서 인간학:청년 맑스의 이론적 개념> 5절의 <인간존재, 기원과 유토피아>를 번역하였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2,3>으로 계속해서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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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맑스의 과학적 혁명 #

 

@ 제3장. 비판으로서의 인간학 : 청년 맑스의 이론적 개념 @

 

** 5절. 인간 존재, 기원과 유토피아 **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전개되었던 맑스의 인간 존재 개념은 1844년 국민경제학 비판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존재 개념이 『요강』과 『자본』에서 나타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구성되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맑스 이론 발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맑스가 유적 존재의 대상성을 대상적 생산으로 파악하는 한에서, 맑스의 인간 유적 존재 개념이 포이어바흐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간략하게 대략적으로 제시되었다. 이에 반해서 포이어바흐에게는 이성, 의지, 정서가 가장 중요한 인간 존재 개념 규정이다(Feuerbach 1841, 39쪽). 따라서 포이어바흐는 종교에서 비밀스러운 인간 존재가 명백히 드러나는 인간 소외의 결정적 형태를 보았다.(주37-) 이에 반해서 맑스의 세 번째 공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사람들은 산업의 역사와 산업에 의해 생성된 대상적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감각적으로 현존하는 인간 심리학인, 즉 지금까지 인간 존재의 연관성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항상 외적인 유용성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파악되었던 심리학인 인간 존재 능력이 펼쳐진 책을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운동하는 소외 속에서- 오로지 인간의 보편적 현존재, 즉 종교, 또는 추상적-보편적 인간 존재의 역사를 인간 존재 능력의 실현과 인간의 유적 행위로서의 정치학, 예술, 문학 등으로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산업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인간의 대상화 능력을 감각적이고 낯설며 유용한 대상의 형태로, 즉 소외의 형태로 가지고 있다.”(Ⅰ.2/271; EB 1/542f)

 

또한 산업이 “인간과 자연 따라서 인간과 자연과학 사이의 현실적인 역사적 관계”(Ⅰ.2/272; EB 1/543, Herv. von mir)인 한에서, 역사성은 인간 유적 존재의 이러한 대상성 속에 포함된다. 따라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이른바 전체 세계사는 인간의 노동에 의한 인간의 생산, 인간을 위한 자연의 생성에 다름 아니다.”(Ⅰ.2/274; EB 1/546)

 

맑스는 여기서 노동이 『정신 현상학』의 주인과 노예의 장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하는 헤겔의 노동개념의 본질적인 계기를 받아들인다. 거기서 헤겔은 주인을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는 노예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바로 자신의 본성의 우월함과 사유 능력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따라서 노동 생산물에 대한 직관 속에서, 즉 자신의 창조물 속에서 노예는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주38-) 맑스에게서 인간 유적 존재의 현실화는 자신의 창작물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생산력의 전개와 역사성으로서의 대상성이 포이어바흐의 존재 규정들을 넘어서고 있지만, 인간 존재의 감성(Sinnlichkeit)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맑스는 사적 소유의 긍정적인 해소가 인간 삶의 감각적 전유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

 

“사적 소유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소유할 때, 그 대상은 비로소 우리의 대상이 된다는 정도로 우리를 어리석고 일면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감각을 대신해서 이러한 감각의 단순한 소외, 즉 소유라는 감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 따라서 사적 소유의 해소는 모든 인간의 감각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이다.”(Ⅰ.2/268f; EB 1/540)(주-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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