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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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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 scored as Gre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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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is mostly associated with 'envy' but it best suits the description of freshness, rebirth and renewal. You believe that sometimes it is best to start things fresh just for the energising buzz an adventure gives you. And this is what you are all about; adventure. You love exploring, testing the limits and reaching out to what is out ther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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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모르는데, 이게 정말 내 모습일지는...
맞는 것도 있고, 안 맞는 것도 있고... ^^...
믿으시거나 말거나*^^*...
제가 좋아하는 색 중의 하나가 녹색이긴 한데,
녹색보다는 노란색이나 빨간색을 더 좋아하는데...
다시 함 해볼까나^^...
근데 귀차니즘 때문에 할 수 있을까?
뱀다리 : 트랙백을 누르긴 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 글은 <작은 책 06년 11월호>에 실리 글 중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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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11 사태 이후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부시를 비롯한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테러 단체나 테러 국가는 이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이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세력들을 의미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국가는 단연 사회주의권 국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들 중에서도 좀 만만하다 싶은 제3세계 사회주의권 국가이다. 미 제국주의에게 이들 국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미 제국주의는 자본의 최대한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반면에, 이와는 정반대로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최상의 가치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3세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 중 중심이 되는 국가 중의 하나가 바로 쿠바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권 국가인 쿠바를 이끌어 낸 중심인물들은 바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회 하면 모두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 받는 사회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양의 탈을 쓴 전체주의 사회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산술적인 평균치로 모두 획일화시키며 개인들의 개성을 말살시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전체주의 독재 국가, 독재국가=테러국가쯤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위에서 말한 그런 사회가 아니다. 만일 사회주의가 이런 사회라면 맑스를 비롯한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 풀고 통곡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인간이 적대적 경쟁 속에서 ‘기계화되고 가축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의 삶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사회를 말한다. 즉 끊임없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운동 과정 속에 있는 사회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를 지향했던 사람이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현실적으로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고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며, 체와 피델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체와 피델은 그 첫 번째 노력으로 경제에서의 생산관계를 문제 삼고 이 생산관계를 바꾸려고 하였다.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느냐’ 하는 경제에서의 생산관계는 인간의 모든 삶과 그 양식인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체와 피델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모든 민중에게 민중의 필요에 따라, 즉 공공의 필요에 따라 생산물을 공급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실천했다. 이러한 생각과 실천은 모든 산업과 기업이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처럼 채산성에 그 목적을 두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이 사회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이러한 것에는 민중 자신이 자본주의형 인간으로부터 사회주의형 인간으로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이 빠져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민중 자신의 생산과정이 빠져 버리게 되면, 여전히 민중들은 자본주의의 문화, 정치 등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삶에 익숙해지게 돼서 이후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민중 자신이 사회주의의 커다란 장애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체는 “야수 같은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민중 자신의 생산과정은 동료들에게 나눔의 마음과 공동의 노력에 대한 가치를, 그리고 공동의 사회적 과업을 성취함으로써 개인으로서 민중 자신의 자기의식을, 즉 인간으로서의 자기의식(계급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도 배제되고 소외되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소통 체계, 즉 민주주의적 관계가 유기적이고도 긴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쿠바에서는 초기부터 문맹 퇴치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쿠바의 노력에 대해 프랑스 주요한 환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인 르네 뒤몽은 1965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혁명은 완전한 기쁨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것은 그토록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던 노동자 대중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들이 보여 준 문맹 퇴치 운동에 대한 집념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은 코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쿠바에서는 이러한 코뮌 형태가 협동농장과 같은 협동생산 체제, 그리고 이러한 체제에 맞는 교육 체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코뮌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코뮌을 구성할 수 있는 물적 기초가 있긴 하다. 그 물적 기초는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그 자체가 코뮌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임노동자’의 연합체이며, 조합원들 자신의 자기 생산이 현실적으로 노동조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족 형태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이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쿠바의 경우를 그대로 따라할 수도 없으며, 따라 해서도 안 된다. 이는 체와 피델, 그리고 쿠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다. 쿠바와 우리의 삶의 물적 조건은 아주 다르다. 체와 피델은 이러한 생각 위에서 쿠바만의 물적 조건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이는 체가 정통 맑스주의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혁명 2단계에 따른 첫 번째 단계인 민족부르주아지 혁명의 단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코뮌이 가족이건 국가이건 간에 개별적인 하나의 형태에 머물러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코뮌은 그 태생 상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연대의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쿠바는 자신들만의 사회주의적 코뮌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사회주의권 국가와 제3세계 국가와의 교류와 연대를 추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가 체와 피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물론 체가 쿠바의 소련 핵무기 배치의 문제에 대한 소련의 태도와 관련해서 피델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말이다).
이러한 쿠바의 끊임없는 연대의 노력이 미 제국주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바라는 국가 코뮌을 유지시키면서도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 되었다. 체는 체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제3세계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세계 연대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피델은 피델대로 자신의 생각과 정책을 묵묵히 밀고나가 최근에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와의 민중무역협정 체결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민중무역협정은 자본주의 무역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 무역 방식은 채산성, 즉 얼마만큼 최대한 자본의 이익을 낼 수 있는가에 초점이 있다면,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의 민중들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공공재를 필요한 만큼 교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쿠바는 모든 산업을 가동시킬 수 있는 연료인 천연가스와 석유가 필요하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는 의료와 교육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쿠바는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에 교육과 의료 자원인 교육자와 의사, 그리고 쿠바의 교육, 의료 시스템을 제공한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는 쿠바에 천연가스와 석유를 제공한다. 이것이 이들 세 나라가 맺은 민중무역협정의 기본 골격이다.
이러한 민중무역협정이 세 나라의 민중들의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바꾸는 기초이며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인간과 삶의 양식, 나아가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의 현실적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방문하여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사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코뮌을 구성하기 위한 틀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어떠한 생산물(우리 자신을 포함해서)도 제공하지 못하고 또한 그들로부터 어떤 생산물도 받을 수 없다. 설령 생산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삶의 양식과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우리 자신에게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야수 같은 자본주의 세상을 원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원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오늘 포스팅한 것을 보니 추석이라 괜찮은 영화를 보거나 해서
뜻 있게 보낸 것 같다.
그런데 사실상 난 잠자느라 볼일 다 봤다.
그렇지만서도 잠만 내처 잤다는 건 아니다.
(이거 앞 문장 하고 상당히 모순적인 관계에 있는 것 같구만^^...)
작년 추석 때부터인가보다.
명절 때만 되면 좀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니라 며느리와 딸 사이에서
누구의 역성을 들어야 하는가이다.
좀 얘기를 해 보자면 이렇다.
명절 때만 되면 명절 치르는 노동은 현실적으로 거의 모두 여성의 몫이다.
그런데 이 여성의 노동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며느리의 노동이다.
결혼을 하신 여성 분들은 시댁에서 명절 노동만 생각하면
온 몸이 아프다는 말씀을 거의 대개가 하신다.
명절 노동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자아는
이중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며느리와 딸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결혼하신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며느리와 딸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딸로서의 사회적 지위는 며느리라는 사회적 지위와 고까운 관계에 있다.
딸은 며느리가 하는 모든 가사노동을 시원찮게 여길 때가 많이 있는 것 같다.
며느리는 시부모를 공양해야 하고 남편을 잘 내조하고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는 일종의 지독한 편견이다)이 있는데,
딸들이 이 통념에 잘 길들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딸과 며느리 사이의 다툼은 항상
이 통념의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 딸들이 며느리라는 사회적 지위에 서게 되면,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된다.
며느리는 이제 딸들이 참으로 고깝다.
오죽했으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서로 며느리라는 똑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며느리 대 며느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며느리 대 딸로 만나는 것이다.
자, 이러한 상황에서 도대체 누구의 역성을 들어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여성 자아의 분열은 자본주의 가부장 사회의 모순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며느리나 딸 둘 다에게 이런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얘기를 못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나의 무능 탓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내 탓이오> 하고 자빠지는 것은 98% 부족한 일이다.
며느리의 역성을 들 것인가, 딸의 역성을 들을 것인가.
며느리의 역성을 든다면, 며느리는 딸과 시어머니의 갈굼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며느리의 삶은 더욱 고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딸의 역성을 든다면, 이는 가부장제의 화신(마초)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이런 것은 현실적으로 고부간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 갈등을 현실적으로 당장에 면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박쥐처럼 며느리에게 붙었다가, 딸(시어머니)에게 붙었다 해야 한다.
물론 이게 오래가지 못할 뿐더러 결국에 가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딜레마이다.
그렇다고 명절을 아주 없애자고 할 수도 없고,
또 명절을 없앤다고 해서 여성의 가사노동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좀 나누어 주시오!!!
뱀다리.
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잘 모르지만,
결혼을 한다면 당장에 큰일이란 생각에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린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사람이 만나서 서로 몸을 기대어 불꽃을 사른 다음,
더 이상 사를 것이 없을 때 한줌의 재로 남아서 바람에 따라
각자 제 갈 길을 가면 된다.
각자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미련을 남기는 것은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대체로 미련을 남기고서 자신의 갈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서로에게 너무 의존하여 서로에게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의존과 집착은 지배욕을 낳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존이 너무 크게 되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노동과 수고에 기대는 삶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삶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노동과 수고를 지배하려고 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노예의 굴종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삶은 어떠했는가를 깊이 반성해 본다.
답은 뻔할 뻔자이다.
누군가에게 지독하게 의존적인 삶이었다는 사실...
흐흐흐...
그래서 내 것만을 강조하고 강요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이가 들면서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리라.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일 테고,
자유롭지 않은 나는 그만큼 더 외로워지고...
악무한적인 악순환이다!!!
이제 의존을, 집착을, 미련을 버리는 연습을 충실히 해야 할 때이다,
4학년인 이 시점에서...흐흐흐...
더 이상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자유로워지기 위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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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은 잘 날아온 것 같은데요. ^^;제가 잠깐 뵌 적 있는 그 분 맞죠? 녹색, 어울리는 것 같아요. testing the limits and reaching out to what is out there. ..논문주제도 그런 것 같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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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 과찬이십니다^^. 그 사람, 네 맞아요^^. 잘 지내시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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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몇 번 여기 온 적 있는데 그 사람일 꺼라고 미처 생각 못했었네요. 이런. ㅋㅋ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