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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2

@ 2장 살림용 기술 @

- 해방자인가 속박자인가 -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맑스주의자들의 전통 한 가지는, 새 기술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점이다.” (55쪽)

 

 

“새로운 기술이 가정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하려면, 지금까지 가정에 도입된 기술들이 여성을 가사 노동자 처지에서 해방시키지 못했으며 여러 시간을 무보수 가사노동에 들여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지도 못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57쪽)

 

“여전히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사 일은 여성의 책임으로 여겨진다. 가정 내 노동시간에 대한 조사 또한 평균적으로 여성이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은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에 주당 60시간 정도였던 것이 1970년에는 70시간 이상이 됐다.” (57쪽)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데 기여한 요소는 몇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 교육 체계, 광고, 의약품 및 정신의학 ‘전문가’들의 조언이 어우러지면서, 여성들은 자신의 할머니들은 1년에 한번 봄철에 하던 대청소를 집안 구석구석 매주, 심지어 매일 소독까지 겸해서 하도록 설득 당했다. 또 옷은 한번 입으면 언제나 빨라고, 아이들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으면 극도의 결핍에 시달리게 된다고 설득 당했다.” (57~58쪽)

 

“가사노동이 줄지 않게 만드는 두 번째 요소는 가정생활의 개별화 현상의 직접적인 결과다. …… 음식 조리 기구를 꺼내서 조립하고 분해하고 씻고 다시 집어넣는 건, 두 명분 음식을 만들건 이십 명분을 만들건 별 차이 없이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다. 여성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하는 다른 수많은 일들도 사정이 이렇기는 마찬가지다.” (58~59쪽)

 

“세 번째 요소는 경제 전반에 기술과 과학이 적용된 결과물이다. 임금노동 영역이 자동화되고 이익과 효율을 극대화하는 한편 임금은 최소화하기 위해 합리화되면서, 보수가 없는 ‘소비 노동’(이는 배티어 와인바움(Batya Weinbaum)과 에이미 브리지스(Amy Bridges)가 이름 붙인 것이다)이 날로 소비자들에게, 다른 말로 하면 가정주부들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59쪽)

 

“무보수 노동은 곧 여성의 일로 통하는 사회에서, 이런 셀프서비스(경제학자 조너선 거슈니(Jonathan Gershuny)는 ‘셀프서비스 경제’ 경향을 주장한다)는 압도적으로 여성들에게 떠넘겨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 넓은 경제 범위에서 여성노동의 가치가 낮게 취급되는 경향을 공고히 하고, 이는 다시 가정 내에서 여성 억압을 영구화한다.” (59~60쪽)

 

“가사노동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네 번째 요소는, 여성의 보살피는 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은 가정 내에서 가족 전체, 더 구체적으로는 아이들과 나이든 이들과 몸이 불편한 식구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도록 요구된다. 임금 노동자들이 깨닫게 됐듯이,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위험을 유발한다. 지난 100여 년의 과학과 기술 발달의 결과, 이제 가정과 집 주변은 몸이 건장하고 기민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죽음의 덫과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 (60쪽)

 

 

“이 모든 것의 효과는 아주 모순된다. 한편으로, 가사 일이 쉬워지고 덜 전문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누구나 맡아서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남성들이 그전보다 더 많은 일을 나눠 맡음으로써 여성을 해방시켜 줄 잠재성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물건 판매상이 광고하는 것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남성들이 더 자신 있게 비판할 수 있게 해 준다. 한 여성이 다른 젊은 여성에게 전수해 주던 비법들은 이제 누구나 아는 대수롭지 않은 게 됐고, 그래서 비법에 대한 존중도 사라졌다. 이것은 특히 나이든 여성들에게 자신이 없어도 그만이고 다른 여성들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는 여성들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경험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일이 더 쉬어질 때 나이든 수련 노동자가 자신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자신이 없어도 그만인 처지라고 느끼는 것에 필적하는 것이다.” (62~63쪽)

 

 

“분명히 일터의 새 기술 문제에만 대응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이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인식해야 하며, 이 악영향에 저항할 길을 찾아야 한다. 지역 공동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 제시할 수 있으리라 본다.” (63쪽)

 

“아마 우리는 의사와 사회복지 담당자, 산파가 자주 더 집을 방문하라고 요구하고 슈퍼마켓에서는 배달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또 탁아소와 양로원, 장애인 시설 확충, 거리와 놀이터의 안전 확보, 집의 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도 분명 계속해야 한다.” (64쪽)

 

“또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지금 가정에서 여성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본주의를 몰아내지 않는 채 자동화 또는 유급 서비스를 통해 해결하는 사회 또는 여성이 해방을 달성하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규정해야 하며, 이 서비스들이 우리의 통제 아래서 이뤄지도록 요구해야 한다.”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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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1

# 『싸이버타리아트』(어슐러 휴즈 지음, 신기섭 옮김, 갈무리, 2004) #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자본주의 경제시스템과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것들이 가부장제와 가사노동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분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1장. 신기술과 가사노동 @

 

 

--> 이 장에서는 새로운 기술 진보가 가사노동의 사회화(상품화)를 불러오고, 남성들의 임금노동과 여성들의 무보수 가사노동의 분업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가장 값싼 새로운 일자리를 가난한 여성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가난한 여성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 새로운 기술의 진보가 서비스 업종의 노동의 규격화를 시도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규격화되지 않는 부분의 노동을 소비자에게 떠넘긴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은행의 자동 입출금 기계 앞에서 기다리면서 과거에 은행원들이 했던 입출금 일 등을 고객이 알아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사노동의 사회화에서 거의 똑같이 일어난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이 도입되어도 가사노동은 거의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상품의 규격화와 생산성 증대는 남성 노동의 일을 더욱 지루한 것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남성들로 하여금 가정을 보다 편안한 곳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 가정을 이전보다 더욱 편안하고 안락한 곳으로 만들 책임이 여성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결국 여성에 대한 이중 착취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과 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새로운 암시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말한다.

 

 

- “상품 생산의 사회화는 몇 가지 영향을 끼쳤다. 먼저 공장에서 상품을 대량 생산함으로써 생산 방법과 기술 개발의 합리화가 가능해졌고 이는 물건 값 하락을 불렀다. 그래서 집에서 직접 물건을 만드는 것이 더 이상 경제적이지 못하게 됐다.” (40쪽)

 

“두 번째로 가정에서는 창조적인 ‘생산’ 활동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창조적이지 못한 소비 활동이 대체했다. 장보기가 살림살이의 일부분이 됐고, 이와 동시에 살림살이는 임금에 의존하게 됐으며 소매업이 발전할 길이 열렸다.” (40쪽)

 

“세 번째로 (예를 들어 섬유업처럼) 여성이나 어린이를 위한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기는 했지만, 제조업 발전은 ‘남성의 일’(집 밖의 임금노동)과 ‘여성의 일’(무보수 가사노동)의 분화를 재촉했고 ‘가족임금’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냈다.” (41쪽)

 

 

- “살림살이의 사회화에서 아주 흥미 있는 측면 하나는, 논리적으로 당연히 예상되는 것과 달리 살림살이에 들이는 전체 시간이 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밖에 나가 일거리를 얻을 기회가 생기긴 했지만 집안에서 하는 무보수(가사) 노동량은 약간 늘었으면 늘었지, 별 변화가 없다. …… 가사노동은, 변변한 기술이 없는 생산라인 노동자의 단조롭고 파편적이며 스트레스 심한 일에 가까워 보인다.” (43쪽)

 

 

- “어찌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됐을까? “일거리를 덜어주는” 장치들이 왜 제 구실을 못하나?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 다른 몇 가지 요소를 점검해야 한다. …… 첫째로, 서비스 업종 노동자의 일을 규격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소비자에게 몰래 전가되는 “소비 노동”의 양을 계속 늘게 만든다. …… 소비자들이 슈퍼마켓의 상품 진열대에서 직접 물건을 담고, 채소를 직접 봉지에 넣고, 주유소에서 직접 주유하고 은행의 자동 입출금 기계 앞에 줄서고, 그래서 시간을 들이는 사람은 서비스업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인 것이다.” (43~44쪽)

 

“한쪽에서 일을 줄인다는 건 단지 그 일을 다른 쪽에 떠넘긴다는 걸 뜻한다는 지적은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44쪽)

 

“두 번째로, 서비스의 중앙 집중화는 시간, 에너지, 운송비용을 사용자에게 전가한다. …… 골목 귀퉁이의 가게가 아니라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슈퍼마켓, 의사가 집으로 왕진을 오는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 진찰실을 찾아가야 하는 것 등이 그렇다.” (44~45쪽)

 

“세 번째로 이데올로기적 압력도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가정학(domestic science) 운동, 미생물 병원설(病源說), ‘과학적 모성’ 이념의 발전이 살림살이의 기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봄철에 연례 대청소를 하며 살던 이들이, 이제 청소를 일주일에 한 번도 하지 않는 건 부도덕하다고 믿게 강요했다. 가을에 겨울철 속옷을 짓고 봄이 되어서야 풀어 빨던 이들은 매일 속옷을 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손자들을 낳고 말았다.” (45쪽)

 

“네 번째로, 임금노동이 발전하면서 나타난 결과물의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터의 ‘공적인’ 세계와 가정의 ‘사적인’ 세계가 나뉘었다는 것이다. 가정은 소외되고 짜증나며 긴장되는 노동 환경의 피난처가 되고 오락과 휴식, 정서적 지원, 성적 자극과 기쁨을 제공하는 장소가 되기를 사람들은 기대한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은 그 요구 자체가 사회화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주부에게 떠넘겨졌다.” (45쪽)

 

 

- “정서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이제는 금전적 관계의 일부가 됐음에도, 여전히 이 욕구의 충족을 돌보는 책임은 주부들 몫이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면 주부 잘못이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가사노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임금노동이 더 따분해지고 더욱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 되고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이런 욕구 또한 커진다. 그런데 임금노동이 이렇게 힘들어지는 추세는 새로운 기술 도입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46쪽)

 

 

-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가 등장하고, 이것들은 가사노동의 또 다른 부분을 사회화해 대체할 것이며 가사노동의 단순 노동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기존 서비스업과 제조 공정에 대한 투자는 노동력 착취와 중앙집중화를 더 강화할 것이며, 이는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노동력 집약적인 일들을 소비자들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임금노동이 날로 힘들고 불쾌해지면서, 여성에게 정서적 뒷받침과 평화, 행복, 기쁨을 제공하라는 요구가 훨씬 거세질 것이다. 소비 압력도 커지고, 새로운 저임금 일자리가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질 것이다.” (46쪽)

 

 

- “이런 분석을 근거로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사노동의 사회화 자체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 여성들도 억압적이고 소외를 유발하는 가사노동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소비수단과 서비스에 대한 어떤 방식이든 통제권을 요구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은 자본이 우리의 생활 영역을 점점 더 자신의 통제 번위 안으로 포섭하는 도구이다. 단지 생산 지점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지점에서 통제권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억압이 계속 강화되기만 할 것이다.” (52~53쪽)

 

“두 번째로, 우리의 조직화 방안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있다. 새로운 기술은 단지 임금노동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지역 공동체 생활의 본성을 극적으로 바꾼다. 기술은 또 여성운동 조직과 지역사회 조직이 새 기술의 가장 나쁜 영향에 대응할 필요성을 유발한다. 새 기술이 불러온 발전상 자체가 새로운 공동체 조직화 방안이 마련될 전제조건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고도로 자동화된 산업에서 새 기술의 도입이 노동자들을 원자화하고 개인을 고립시켰지만, 새 기술의 도입은 소비자와 서비스 이용자들을 대기실에 모이거나 줄서서 기다리는 식으로 무리 짓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의 운동과 조직화가 나타날 수 있다. 노동자 조직과 지역 사회 기반 조직들의 연대 행위도 가능할 것이다.” (53쪽)

 

“마지막으로, 신규 산업의 저임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무보수 가사 노동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초과 착취를 당하는 임금 노동자로서, 신기술이 끼치는 최악의 영향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모든 여성,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임금 노동자의 조건도 따라서 악화될 것이다.”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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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하여 말하지 않기]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와 관련해서는

이미 염둥님께서 자세하게 내용을 잘 소개하셔서 쓸 말이 별로 없기는 하다.

 

그래서 아주 간략하게 독후감 정도의 글로 대신할까 한다.

 

벨 훅스는 노동 계급과의 연대를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특히 흑인 인권 운동가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노동 계급과의 연대가 아주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흑인사회에 만연한 물신숭배가 이전의 흑인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으며,

이런 파괴에 의해 흑인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 마약에 물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과 비교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최고 관심사가 연봉이 많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노동 계급과 연대할 수 있으며, 또한 단순히 노동 계급과 연대한다고 해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가 거론되는 시점에서?!

 

이 두 개의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국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대안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과 직접적으로 대적하고 있는 노동 계급은 어떤 시스템으로 자신을 재생산하며,

또한 새롭게 생산하는 것인가?

이는 성별 분업화되어 있는 가부장제 시스템을 노동 계급 자기 생산의 기초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간과하고서 단순히 노동 계급과 연대한다는 것은 착취와 관련한 상당한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 계급인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착취 시스템을 해체하는 노력을 집단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집단적 노력은 착취 시스템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실질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체'인

코뮌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벨 훅스는 이런 코뮌을 이전의 흑인공동체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던 흑인 공동체,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서로의 인격을 존중했던 공동체...

과연 이러한 흑인 공동체의 상이 오늘날 가능한 상일 수 있을까?

만일 가능하다면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 세대의 노동 계급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의 노동 계급은 자본의 무한한 적대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도권 공교육과

더불어 사교육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자신의 착취 시스템을 해체하는 노동 계급 공동체 자체 내에서의 대안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각 대학을  노동 계급의 자녀들의 대안 교육의 거점으로 확보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서 대학생들을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 자치 조직의

도우미의 역할을 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또한 어렸을 때 각자 자기 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놀았던 것처럼 각 자치 조직은

자기보다 한 단계 어린 자치 조직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대학의 학생운동은 이제 새롭게 다음 노동 계급 생산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각 지역의 코뮌을 서서히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중언부언 말이 많아졌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대안과 관련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뱀다리 : 왜 책 제목을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뽑았을까?

원제목은 [Where we stand : Class matters](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 문제는 계급이다)인데 말이다.

'계급'이라는 용어가 진부하다고 여겨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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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08년 여이연여름강좌) 3-2.

4. 성별 분업 - 여성 억압의 물적 기초.

 

 

1) 성별 분업은 가부장제와 가부장적 관계의 물적 기반으로 인식.

 

① 성별 분업은 모든 사회를 특징짓는 남성과 여성 간의 불평등한 관계의 중요한 표현으로 인식. 모든 사회 속에서 성별 분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남성 지배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의 본질적 속성.

 

② “성별 분업은 한편으로는, 남성은 생산관계에 대해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연관을 갖게 되는 데 비해 여성은 반대로 생산과정에의 적극적인 참여로부터 배제되어 가정과 가내 영역으로 축출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화는 여성의 생산 자원 또는 임금에 대한 접근을 부정함으로써 여성을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만들며, 종속적 위치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에 의해 설명되는 또 하나의 현상은 노동시장에서 여성과 남성이 차별적으로 위치지워진다는 것이다. 생산적 노동력은 성에 따라 분화되어 여성은 낮은 임금과 낮은 지위의 직업에 위치하도록 제한된다. 자본주의 내에서 성별 분업은 여성들이 경제적인 생존을 위해 남편에게 의존하는 형태를 기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자본가 계급에게 고도의 착취가 가능한 노동력을 제공한다. 노동시장에서의 여성 노동은 가사종사자로서 그리고 자녀양육자로서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의 성별 분업은 가정 내에서 여성의 종속을 경제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성에 따른 노동분업은 인간 역사를 통해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성별 분업은 남성이 꼭대기에, 여성이 밑바닥에 자리하는 위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과 역사학이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성별 분리는 언제나 위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내 주장은 현재와 같은 여성의 사회적 뿌리는 성 위계적인 노동분업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남녀가 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한다면, 그리고 남녀 모두의 인간 잠재력이 완전하게 발달하려면, 양성간의 위계적 성격을 갖는 노동분업이 철폐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양성간의 분업 그 자체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론적으로 성별 분업 그 자체가 양성간의 불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성별 분업이란 여성의 노동에 낮은 지위를 부여하는 분업이다. 성별 분업은 또한 남녀의 살므이 경험을 서로 다르게 하는 성별 하위문화의 기초가 된다. 더구나 그것은 가사노동으로부터의 면제아 더 나은 취업 기회의 보장이란 면에서뿐만 아니라 시리학적 측면에서도 행사되는 남성권력의 물적 기초이다.”

 

 

2) 성별 분업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라는 표현이 우리의 일상적인 어휘와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성별 분업의 물적 기초인가?’ 성별 분업 자체는 어떻게 발생하며 어떤 방식으로 지속되는가?

 

① 성별 분업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통제에 기반.

남성들은 여성들로부터 계속적으로 가정에서의 요리, 세탁과 같은 개인적 서비스를 제공 받기 위해 연대한다. (노동력의 통제) 여성이 가정에 묶여서 새존을 위해 남성에게 의존할 것을 전제로 한다. 여성의 활동적인 노동력으로부터 재베됨으로써 확고해진다. 가족은 여성의 종속을 뒷받침해 온 중요한 사회제도이며, 가족 내에서 남성이 여성 노동력에 대해 행하는 통제는 사회적 수준에서의 성별 분업과 가부장적 관계의 재생산에 대한 배후의 추동력이다. (하트만)

 

② 재생산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생물학적 역할에 대한 통제.

여성이 출산자로서 갖는 기능에 대한 교묘한 통제가 여성 억압의 원인이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성별 분업의 전형. ‘어머니’라는 사회적 역할은 남편에 대해 여성이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 및 사회적으로 확산된 이데올로기와 국가에 의해 재생산된다.(질라 아이젠슈타인)

 

③ 남녀의 성별화라는 심리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과정의 결과.

가족 및 보다 넓은 사회의 성 역할의 생산과 강화의 동학을 강조한다. 여성의 억압을 존속시키는 중요한 동인은 사회적으로 남성적, 여성적인 인성 유형을 주조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낸시 초도로우)

 

 

5. 여성주의 정치경제학-여성노동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위하여

- 여성 노동에 대한 재개념화

- 여성 노동권

- 지구적 차원에서의 분석

- 이주의 여성화와 관련된 논의

- 섹슈얼리티/젠더와 여성 노동

 

 

-->(소결론)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에서 여성 노동의 의미가 무엇이고, 여성 노동이 차별 받게 되는 근본적인 생리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자본의 생산구조와 가부장제 구조의 관계를 파헤쳐야 한다고 본다. 즉, 결국 자본은 어떻게 각기 서로 다른 자본주의 생산구조와 가부장제를 결합시키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의 생성과 관련된 두 구조가 서로가 서로에게 귀결되지 않지만, 출발점이 되는 질적으로 서로 다른 구조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환원되지는 않지만, 서로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알튀세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층결정론’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중층 결정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 심급이 경제에 있다’는 모호한 말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리보위츠의 ‘자본의 총체성’ 개념이다. 총체로서의 자본은 자본의 생산구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생산구조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이다. 자본의 생산구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필요하다. 그 전제는 바로 ‘노동자의 생산구조’이다. 자본의 생산구조는 ‘무한한 적대적 경쟁 관계’를 기초로 한다. 반면에 노동자의 생산구조는 ‘단결과 협력, 연대 관계’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단결과 협력, 연대’의 관계가 ‘성별 분업화’와 관련하여, ‘남성’들만의 ‘단결과 협력, 연대’라는 여성주의의 주장은 타당하다. 노동자의 생산은 그 노동자를 생산할 수 있는 누군가의 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 누군가는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체로 ‘여성’이라고 인식돼 있다. 그러므로 ‘남성’의 단결과 협력, 연대의 관계는 ‘여성’의 노동을 전제로 한다. 이 ‘여성’의 노동이 없으면 ‘남성’의 단결과 협력, 연대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은 자신에 의해 생산된 ‘남성’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남성’ 노동자의 임금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물론 여성 노동이 자본으로부터 직접 임금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임금의 기준, 즉 그 가치의 기준은 항상 남성 노동자의 임금에 준해서이다). 그런데 이 남성 노동자의 임금은 그 남성 노동자가 간신히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노동력의 비용을 자본은 계산하지 않는다. 남성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노동 과정에서 들어가는 노동력의 비용은 무상이며, 스스로 알아서 충당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남성 노동자는 다음날 자본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충분히 소비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본의 걸림돌이 된다.

 

남성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생산관계가 필요하게 된다. 이 생산관계는 자본-노동 생산관계의 전제이며 토대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노동 생산관계가 드러나면 날수록 은폐되며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것이 기존 맑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지적하는 여성주의의 주장은 온당한 것이다.

 

이 생산관계는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부르주아적인 결혼, 가족 제도로 나타나는데, 자본-노동의 관계와 같은 착취, 억압의 남녀 관계로 나타난다. 이런 착취의 관계가 아니면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력 재생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가부장제는 총체로서의 자본의 한 축 또는 한 과정인 노동력 재생산, 즉 노동자의 자기 생산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시스템 또는 구조이다. 가부장제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직접적인 착취 시스템 또는 구조는 서로에게 환원·귀결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출발점 또는 전제가 된다. 노동해방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의 착취 시스템인 가부장제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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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08년 여이연여름강좌) 3-1.

★ 작은 틀 ★

 

 

1. 문제 제기 - 계속되는 질문들.

 

 

1) 성의 측면에서 좀더 평등했던 분업이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

2) 위계적인 분업이 어떻게 하여 현재의 임금노동에까지 확대되었는가?

 

 

- 가사노동에 대한 분석과 여성 임금노동에 대한 분석이 분리.

70년대 초 중반, 가사노동이나 가부장제의 개념에 대한 분석 등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새로운 논의들이 등장하고, 여성의 역사에 대한 페미니즘적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의 여성 임금노동자의 위치에 대한 분석에 포함되는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 여성의 공적인 노동력으로의 진입이 해방은커녕 여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이중의 임무.

대규모 산업이 여성을 가정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내몰고, 가족의 생계 책임자로 만들면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가정에서의 남성 지배의 최후의 보루는 모두 무너져 버렸다(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여성해방의 최우선의 전제조건은 전 여성이 공공산업으로 재투입되는 것이다.”

 

 

- 여성노동에 대한 연구는 여성이 담당하는 노동의 성격에 의해서도 밝혀질 수 있지만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조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와 그 속에서 관철되고 있는 성별 분업의 논리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뜻.

 

 

2.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이론 검토 및 비판.

 

 

--> (강사 선생님 말씀) 여기에서 주요 이슈는 여성에 대한 차별, 불평등이 “왜” 저임금․불안정․비정규직 노동으로 현상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한 논의는 크게 2가지가 있다.

 

 

1) 인적 자본론

--> (강사 선생님 말씀)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여성은 일 시킬 만하면 일을 그만 둔다>이다. 이 예는 위의 “왜”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기존 사회학 이론의 답변(자본 이데올로기) 이다. 이 논의는 이 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이중노동 시장론으로 이어진다.

 

- 노동시장은 동질적, 완전 경쟁적이며 개별 근로자의 직업적 지위나 임금 수준은 학력, 직업훈련, 업무경험, 기술습득 등 인적 자본에의 투자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인적 자본에 투자함으로 노동생산성이 질적으로 떨어지며, 이러한 차이가 결과적으로 임금이나 직업적 지위 면에서 성 차별을 가져오게 된다.

 

 

- 여성들이 가족 내의 지위 때문에 남성보다 인적 자본을 덜 가진다는 입장. 인적 자본론자들은 노동시장의 결과가 합리적 선택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비판) 직업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가족 내의 여성 지위의 결과로서 설명하며, 이는 가족 구성원이나 전체 사회 모두에 기능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파슨스의 기능주의와 동일한 논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개인의 노동 전략이라기보다는 가구의 노동 전략이라는 관념을 인적 자본론과 파슨스 이론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성과 노동에 관한 많은 사회학적 분석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특히 인적 자본론은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그들의 가치에 맞게 임금을 주는 완벽한 노동시장의 가정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돈을 많이 받는 직업’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직업이고, 이는 실제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강한 권력을 가진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이 고도로 숙련된 것으로 불리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

남성과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불평등하게 구조화시키는 제도화된 권력관계를 간과한 것이 인적 자본론, 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회학 이론들이 실패한 핵심적인 이유이다.

 

 

2) 이중노동 시장론

--> (강사 선생님 말씀) 이 이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동시장이 왜 이중적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이다.

 

- 노동시장이 완전 경쟁적이고 동질적이기보다 질적으로 구분되는 여러 부분들로 분절되어 있으며 분절된 부분들은 각기 다른 직종으로 이루어져 다른 원리 및 고용관행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 1차 노동시장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좋은 근로조건, 다양한 승진 기회,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며, 2차 노동시장은 여자, 연소노동자, 도시빈민 층으로 구성되며 저임금, 열악한 근로조건, 승진 기회의 부족, 고용 불안정성 등이 그 특징이다.

 

 

3. 노동 과정과 산업예비군 이론

 

 

1) 노동 과정-매뉴팩처로부터 근대산업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분석

 

 

- 근대산업으로의 이행 과정

① 기계의 도입

② 근대산업에 있어 숙련노동을 미숙련노동으로, 남성을 여성으로, 성인노동을 소년노동으로 대체하려는 경향.

③ 여성과 어린이의 고용. 남성 노동자들의 기계발전에 대한 저항을 무화.

④ 공장 밖 생산. 여성과 어린이가 고용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내공업.

⑤ 여성과 어린이의 고용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

 

 

- 자본이 여성을 고용함으로써 갖게 되는 이익.

① 근대 산업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고용함으로써 재생산 비용이 인구의 모든 구성원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에 노동력 가치가 낮아지는 경향. 노동자의 재생산 비용이 줄어들면서 잉여가치가 증가.

② 여성 고용으로 상품의 수요가 증대하며 순환 과정이 빨라진다.

③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남성 노동자의 저항을 무너뜨린다는 점.

 

 

- 여성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① 여성의 낮은 훈련 비용. 노동력 재생산 비용도 낮다.

② 여성은 재생산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져 여성의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 이것이 여성은 가족의 부차적 수입원이고 남편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 비용에 책임이 있다는 가정 때문에 여성 임금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진다는 것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라고 설명. 남편과 아버지가 없는 경우에도 여성의 위치는 가부장적 구조에서의 가족 개념으로 규정.

 

 

2) 산업예비군 이론

 

(각주-산업예비군의 정의 1) 유동적 산업예비군의 노동자들은 때로는 근대산업의 중심부에 유인되어 들어가고 때로는 밀려 나간다. 이것은 대부분의 근대산업이 숙련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남성을 여성으로 그리고 성인을 아동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2) 잠재적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적 농업 방식의 침투에 의해 농토에서 추방된 농업인구 가운데 존재한다. 3) 정체적 산업예비군은 가내공업 등에 비정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로 구성되는데, 그 성원은 근대산업과 농업의 임시 고용인으로부터 충원된다(베로니카 비치, “여성과 생산”, 『제3세계 여성노동』, 여성평우회 편, 창작과 비평사, 1985)).

 

- 맑스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때에 노동자로 하여금 임금과 고용조건에 대해 협상할 능력을 차단하는데 산업예비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 “가장 마지막으로 고용되고 가장 먼저 해고되는” 노동자군.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있고 임금이 상승될 위험이 있을 때 임금노동에 충원될 수 있고, 그런 다음 이 수요가 감소하고 실업이 증가하는 불황의 상태에서 잉여노동자가 된다(기혼여성).

 

 

비판) 남자보다 먼저 여자가 일자리를 잃는 과정을 결정짓는 것이 자본이라고 생각한다면, 남자보다 낮은 임금으로 고용될 수 있는 여성을 먼저 그만두게 하는 것이 고용주의 이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경험적인 증거들이 이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성별 직업분리를 설명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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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3.

 

@ 3강. 여성의 임금노동 @


** 여성의 임금노동과 관련하여 주되게 제기되는 논쟁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와의 관계 설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상황은 이러하다. 여남 노동자 사이의 임금 차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여남 차별은 도대체 어떤 관계 구조에 기인하는가? 자본주의 관계 구조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가부장제에 근거하는가? 그런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둘 중에 자본주의가 우선적이며 주도적인가, 아니면 가부장제가 우선적이며 주도적인가? 아니면 제3의 관계 방식이 있는 것인가? 어떤 물음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따라 해결책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기존 정통 맑스주의는 이 물음들 중에서 자본주의가 주도적이며 우선적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여성의 임금노동에서의 성별 분업(수직적 분업과 수평적 분업) 체계에 따른 임금 차별, 나아가서 모든 착면에서의 여남 차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가부장제를 단순히 자본주의로부터 발생한 부차적 국지적 측면, 즉 자본주의를 보완하기 위한 단순한 사회 제도쯤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가부장제도 철폐된다는 논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이 맑스주의는 자기 자신 안에 성별 분업에 따른 성 차별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안고 가게 될 수밖에 없다는 모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유물론적 페미니즘이 기존 정통 맑스주의의 한계를 간파하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 틀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틀은 기존 정통 맑스주의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그 정반대의 입장이란 가부장제를 주도적이며 우선적인 것으로 보고, 자본주의를 부차적이고 국지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인데, 유물론적 페미니즘의 입장은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정반대의 입장은 가부장제를 자본주의와 질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데, 그 독립성에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이라면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초역사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이 돼 버린다는 사실이 숨어 있게 된다. 그러면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가부장제는 인간 이전부터 본래 그렇게 있어 온 초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유물론적 페미니즘은 기존 정통 맑스주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 같다.

유물론적 페미니즘은 맑스의 『자본』이 여성의 억압과 착취, 차별이라는 현실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고 보고, 이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가부장제를 끌어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부장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인데, 유물론적 페미니즘은 여기서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가부장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단순한 부산물로 보는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초역사적인 시스템으로 보는 입장도 아니라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여성의 임금노동에 관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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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틀 ★


1. 여성 노동 현실.

- 1970년대 초․중반 이후 여성의 가사노동과 여성의 임금노동에 관한 연구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연구의 관심이 가사노동으로부터 임금노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 여성 노동 현실은 성별 분업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별 분업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① 수직적 분리, ② 수평적 분리.

- ① 수직적 분리 형태는 피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는데, 고위 관리직으로 올라갈수록 여성 할당 비율이 적다.

- ② 수평적 분리 형태는 성별 직군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성 직군에는 수위, 경비, 의사 등이 있고, 여성 직군에는 청소, 간호사, 선생님 등이 있다.


2. 수직적 분리가 왜 문제인가?

- 지금까지 ‘왜’와 관련해서는 언급하고 있는 바가 없다고 한다.

- 문제 해결과 관련해서만 언급해 왔는데, 그 해결책으로 할당제를 들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할당제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또한 언급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


3. 수평적 분리가 왜 문제인가?

-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왜 문제’인가에 대해서 지금까지 거의 이론화되어 있지 못하다고 한다.

- 특히 성별 직군제가 왜 문제인가 하는 물음은 좀더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고 풀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남녀 차이에 따른 평등일 수도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성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전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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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2-4,5

 

4.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

▶(나의 생각) 여기에서 <외부>라고 하는 말은 ‘가사노동=사적인 노동 영역’이라는 범주 외부를 가리키고 있는데, <사회적>이라는 의미와 동일하게 쓰이는 것 같다.

▶(나의 생각) 여기서 주요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생산양식의 의미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단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인 개념이며, 한 역사적 시대의 지배적인 생산 체제 전체를 생산양식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 시대에 하나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있을 뿐이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생산양식 외의 다른 어떤 생산양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한 역사적 시대에 지배적인 생산양식인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에 다른 어떤 생산양식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식의 뉘앙스를 지닌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물론 다른 생산양식이 나타날 가능성을 지닌 싹을 지배적 생산양식이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생산양식이 양립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봉건제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생산양식인데, 그 속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싹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봉건제 생산양식이라고 하지, 봉건제 생산양식+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자본주의 생산양식 체제가 2가지의 질적으로 서로 다른 운동 과정, 즉 자본의 자기 생산 운동 과정과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운동 과정으로 이루어져서 이런 혼동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 두 과정은 서로 각기 다른 운동 과정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결코 그 운동 과정을 자신의 운동 과정의 결과로 삼지 않는다. 즉 애초에 자본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자신의 운동 과정의 최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고(목적으로 삼게 되면 자본은 더 이상 자본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해체된다), 노동자는 자본의 최대 이익 생산을 위하여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는 이렇게 2개의 이질적인 운동 과정의 통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 2개의 운동 과정 중에서 <가사노동>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운동 과정은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과정’이다. 가사노동이 없이는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불가능하다.   


① 존 해리슨, “가사노동의 정치경제학(1973)”

- 사회주의 경제학회에서 발표. 사회주의 경제학회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 분석의 잠재적인 교차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보다는 마르크스 분석에 보다 주요한 관심이 있었다.

- 가사노동을 “경제 사회체계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지배적 양식에 의해 창조되거나 혹은 선택된 종속양식”.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양식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생산양식을 구성한다고 주장.

▶(나의 생각) 가사노동과 관련하여 이 2개의 설명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전자의 설명에서 가사노동이 지배적 양식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의해 창조된 ‘종속적 양식’이라고 한 것이라고 해 놓고서는 후자의 설명에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생산양식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종속양식=명확히 구별되는 생산양식>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산양식의 맹아 형태를 띠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존 해리슨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② 폴 스미스.

- 가사노동 논쟁과 생산적,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관련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생산양식의 개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엄격성이 부족하다는 것.

▶(나의 생각)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내 생각엔 생산양식의 개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엄격성이 부족한 것은 포 스미스 자신이 아닐까 한다.

- 필요노동과 생산 노동의 혼동.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존재 조건을 확립해 주는 활동들은 비록 그것들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하여 기능을 갖는다 할지라도 외적인 것.

-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위한 외부적 필요성으로 개인화된 가사노동”

- 가사노동 논쟁에서 생산/비생산 논쟁 모두 가사노동이 사적인 노동으로 된 것, 즉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배제된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오류는 두 입장 모두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 이 배제된 부분을 포함시키고자 한다는 것.

- 가사노동을 소외시킨 것은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것.


가사노동을 여성억압을 구체적 역사 속에서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열쇠로 파악된다. 즉 가사란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특수한 종속을 규정하는 중심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할 거리)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가사노동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논의가 여성의 지위/억압/불평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5. 여성주의 정치경제학과 가사노동

- “보이지 않는 가슴”

- “싸이버타리아트”

--> 강사 선생님께서 위 주제와 관련해서 보아야 할 책 목록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가슴”이 영화라고 말씀하셨는지, 책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딴 짓을 하고 있었나 보다.^^ 


(참고문헌) 

- 아네트 쿤, 앤 마리 울프, 『여성과 생산양식』, 강선미 역, 도서출판 겨레, 1986.

- 조세핀 도너번, 『페미니즘 이론』, 김익두, 이월영 역, 문예, 1993.

- 레오뽈디나 포트 뚜나띠, 『재생산의 비밀』, 윤수종 역, 박종철출판사, 1997.

- 로즈마리 통, 『페미니즘 사상』, 이소영 역, 한신문화사, 1995.

- 어휼러 휴즈, 『싸이버타리아트』, 신기섭, 갈무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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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2-3

 

3. 소외된 노동/소외되지 않는 노동

▶(나의 생각) 앞에서 말했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노동/소외되지 않는 노동은 상품화된 노동/상품화되지 않는 노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1) 소외되지 않는 노동(상품화되지 않는 노동) 


① 리스 보겔(Lises Vogel, “지상가족 The Earthly Family”(1973))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지 않는다고 주장. “그것은 일차적으로 유용한 노동이기 때문에 모은 노동이 일차적으로 유용한 것이 되는 미래사회를 제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정주부는 “소외되지 않는 생산 활동의 삶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다.”


②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노예사회에서의 흑인 여성의 역할에 관한 성찰 Reflection on the black Women`s Role in the Community of Slaves”, 1973)

흑인 여성의 비판적 의식과 노예 저항운동의 중심으로 만든 것은 흑인 여성의 이중적 인식이었으며, 그 이중적 인식은 소외된 생산노동의 공적인 세계와 상대적으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개인적 세계 양쪽에 다 관여한다는 사실.

▶(나의 생각) ①의 리스 보겔 견해보다는 ②의 안젤라 데이비스의 견해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가사노동은 단순히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소비될 (남성)사용가치인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이라는 사용가치는 전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③ 엘리 자렛츠키(Eli Zaretsky, “자본주의, 가족과 개인의 삶 Capitalism, the Family and Personal life”, 1976)

소외되지 않은 개인적 영역과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논의. “어떤 개인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거친 세계”로부터의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피난처”가 되고, “가족 내에 있는 여성에게 노동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합되었다.”

▶(나의 생각) 이 의견은 여성의 성분업적인 역할을 신성하고 위대한 것으로 미화시켜 여성을 끊임없이 가사노동에 얽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고 볼 수 있다.


2) 소외된 노동

질라 아이젠스타인은 어떤 특정한 집단에 미리 할당되는 임무들은 그것들이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므로 소외되고 있다고 주장. “사회 안에서의 노동의 성적인 분할은 특히 여성에게는 비창조적이고 고립적인 일을 떠맡게 된다.” 

▶(나의 생각) 위에서 ‘소외되지 않는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은 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고 노동생산물의 사용가치만을 생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외’는 ‘상품화’, 즉 ‘상품 가치의 생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외’는 ‘자신의 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1)과 2)에서 쓰이는 소외의 의미는 스펙트럼이 다르다(물론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둘셋 정도의 매개를 거쳐야 한다). 동일한 소외의 의미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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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08여름강좌] 2-2

 

2. 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나의 생각) 제목과 관련해서, 위의 제목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밑에 나올 내용들과 또한 위에서의 큰 틀과 연관해서 볼 때, <비생산적 노동/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으로 고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강사 선생님께서 급하게 강의안 만드시느라 살짝 빼먹으신 것 같다^^. 

* 가사노동을 보는 두 가지 시각

- 그 자체가 소비되는 일련의 서비스(비물질 생산)와 즉각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보는 것(비생산적 노동).

-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 노동력이라는 명백한 생산물을 만드는 활동으로 보는 것(생산적 노동).

▶(나의 생각) 이 두 시각이 내가 볼 때에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고, 자본주의 구조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임금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양손에 자본주의라는 칼과 가부장제라는 칼을 들고 있는 페미니즘이 어떤 칼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나오지 않나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사 선생님께서 요즘은 가부장제도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임옥희 선생 같은 분은 가부장제 대신에 ‘가부장 시스템(구조)’으로 쓰자고 하셨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못 들었는지, 아니 이해를 잘 못 했던 것 같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와 가부장제도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역사적인 시간에 제약을 받는 역사적 산물이다. 가부장제도 역시도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라는 것은 시대적인 지배 권력 형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사적인 자본주의와 역사적인 가부장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이 문제는 페미니즘 내에서 사실상 철학에서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인 물질-정신과의 문제만큼이나 근본적인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가부장 제도라고 하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상위 개념이고,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제도로서 이 권력 체제보다 하위의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증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은 인간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나타나는 초역사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도’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라는 개념은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 구조 틀로서 이해되는데, 이는 바티유와 알튀세의 구조주의로부터 차용한 개념이지 않을까 싶다.)  

1) 가사노동의 사회화 -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

* 벤스톤(Margaret Benston, "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Liberation", Monthly Review 21, no.4(September, 1969)

- ① 여성은 본래 생산자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 “가정과 가족과 관련된 그런 행위들 속에서 단순한 사용가치품의 생산을 책임 맡고 있는” 하나의 계급을 구성.

- ② 가사의 사회화. 그것이 반드시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일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


- ③ 가사노동 임금화 반대. 다른 일을 할 기회 박탈, 상품화 경향에 일조, 노동의 성적 분업의 유지.  

▶(나의 생각) ① - ㉠ 여기서 벤스톤은 생산과 소비를 처음부터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데에 한계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본이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켜 놓고 (자본의) 생산을 주도적인 것으로 보고, 소비를 하찮은 것으로 보는 자본의 시각이 ‘여성은 본래 생산적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이라는 말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산을 여전히 자본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으로서의 노동자 생산을 늘 (생산의 영역과 동떨어진) 소비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것으로 볼 위험성이 크게 된다. 생산을 이제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소비와 생산의 분리를 전제로 삼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의 생산은 곧 사용가치의 소비를, 즉 현실적인 욕구 충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가사노동을 ‘단순한’ 사용가치의 생산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도대체 ‘단순한’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만일 ‘단순한’을 그야말로 말 그대로 ‘단순한’, 즉 예를 들어 시장에 가서 비누 등과 같은 상품들(사용가치)을 구매해서 그 사용가치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집에서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비누를 만들고 그 비누의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자본처럼 가사노동을 정말로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사용가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잘 드러나고 있지 못하다. 다른 한편, 복잡한 사용가치란 누가 어떻게 생산하는 것인지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단순’과 ‘복잡’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도 설명되었더라면 좋겠다.

㉢ ‘하나의 계급’을 구성한다고 했는데, 이 계급은 자본과 적대적으로 대립해 있는 노동자 계급과는 별개의 노동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제3계급처럼 보인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자본-노동의 두 계급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또 하나의 계급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 있는 이 ‘하나의 계급’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계급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모호하다.

②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의 ‘사회화’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하나의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따라서 그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일 터인데, 이러한 과정의 구체적인 물질적 관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의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자’라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③ 다른 한편으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화를 사람들이 상품화, 자본화와 등치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적 영역’에 있는 가사노동을 사회화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사회화를 ‘공적 영역’인 ‘상품화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관념적인 수준에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가사노동 임금화

* 달라코스타/제임스(Mariarosa Dalla Costa, Selma James,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Community”, Falling Wall Press, 1972)

- ①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붕괴”(1972) : 가사노동도 노동력 상품의 교환가치에 관여하고 따라서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가사노동이 생산적임을 주장.

- ② “the double day” -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

- ③ 개별적인 남성들이 아니라 정부와 고용주가 가정주부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을 제안.

- ④ 자본주의는 남성들과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창조하려면 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그러한 반란은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닌다.

- ⑤ 가사노동이 ‘간접적’으로 생산적이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하여, 여성이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둘러싸고 보편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주장.

- ⑥ 여성이 의식화된 상태에서는 그들의 종속 원인이 물적 기반을 소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 전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에 대한 비판

-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주장을 약화.

- 여성들이 맑스주의적 ‘계급’을 구성한다는 주장의 오류.

- 자본이 여성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간과.

▶(나의 생각) ① 여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여성의 가사노동을 임노동으로 편입시킬 때,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하고 맑혀 낼 수 있지만, 동일한 임노동이라는 차원에서 보게 될 때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착취 부분은 은폐될 위험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생산적’ 측면을 ‘자본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 즉 반자본주의적이면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②, ③, ⑥ “the double day”는 여성이 밖에서 하는 임금노동과 임금노동으로 편입되지 못한 가사노동의 이중적 노동의 담당자라는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아래에서 여성이 자신의 물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남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이러한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을 단일한 임금노동으로 환원함으로써 임금이라는 (남성) 노동자 계급과 동일한 물적 토대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④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애매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남성과 어린이들의 노동력 창조’라는 것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을 위한’ 노동력 창조의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환원시켜 볼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맑스주의에서 생산력-생산관계 사이의 관계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을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인간’에서 찾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여성이 ‘혁명적 잠재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⑤ 위의 ‘가사노동의 사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하나의 계급’이란 자본-노동계급 이외의 제3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여성이 자본-노동의 관계와는 다른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임노동자로서 여성이 제3의 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 생각한다. 먼저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남성)노동자계급의 임노동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은 어쨌거나 지금의 이 상태를 유지하려 할 것이며 언제나 노동자계급을 분리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두 번째로 임노동자의 계급이 둘로 분리된다는 것은 어쨌거나 자본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로 분리된 이 두 계급은 자본의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무한 경쟁을 하게 되는 위험성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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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08여름강좌]2-1

 

★ 작은 틀 ★


1. 가사노동의 성격과 위상

-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 내에서 가사노동에 관한 논쟁은 주로 노동력 상품 생산에 있어서의 가사노동의 역할, 즉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에 기여하는가 하는 물음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인가 아니면 비생산적 노동인가?

- 가사노동은 소외된 노동인가 아니면 소외되지 않은 노동인가?

▶(나의 생각) 가사노동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에만 주목해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임노동의 측면, 즉 자본에게 노동력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면서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으로 완결되는 자본의 운동 시스템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노동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노동자의 노동을 임노동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게 된다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노동 = 임금노동>이라고 놓고 보면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 = 임금>이라는 도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는 맑스가 ‘노동’과 ‘노동력’을 그토록 구분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노동은 모순적인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가 바로 위에서 말한 임금노동의 측면, 즉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운명적 측면, 둘째, 자신의 노동력을 판 대가로 얻게 되는 임금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생산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주도적인 것은 둘째 측면이다. 이 둘째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맑스가 주목한 것도 이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 측면을 미처 다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다루었다면 3권 <계급투쟁> 장에서 다루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장의 내용을 심화시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이클 리보위츠의 『자본론을 넘어서』(백의)를 참조하면 좋겠다).

바로 이 둘째 측면 때문에 정치경제학적으로 <착취>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자본은 항상 생물학적으로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주지만, 창조력과 상상력을 훨씬 풍부하게 갖춘 인간으로서 ‘공장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며, 또한 그렇게 강제한다. 이것이 바로 <착취>이다(맑스는 이것을 두고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말했다).

가사노동에 대한 논쟁도 단순하게 노동력이라는 상품 재생산의 측면에만 주목하게 되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은 임금으로 환원되고,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 =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가사노동 =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도식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사노동에 대한 착취, 나아가서 여성노동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논쟁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의 둘째 측면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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