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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과 동거 중...

벌레들과 같이 산 지 몇 달 되었다.

모기, 날파리, 나방, 집게버레, 쥐며느리, 바퀴벌레, 쌀벌레 등과 같이...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집이 지저분해서 그렇다라고...

그러나 그건 아니다.

집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한다.

(물론 곰탱이는 게으르다. 청소하는 것은 울 여친이 청소 안 한다고 구박해서 하는 거다.^^)

일주일에 한 번 가지고 될 거냐고 또한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하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딱히 없다. ㅋ~~~.

 

어쨌거나 일단 벌레가 나오면 말이 필요없다. 

잡아서 죽이고 보는 거다. 특히 바퀴벌레는 예외가 없다!

예전엔 모기약을 뿌려 보았지만 실효를 잘 못봤다.

바퀴벌레가 출현한 이후로는 바퀴벌레 약을 한 3일에 한 번씩 뿌려 준다.

그럼 모든 벌레들은 한방에 간다.

 

올 여름은 아주 죽을 맛이다.

방문을 열어 놔야 더운 열기를 빼고 해서 덜 더울 텐데 방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다.

모든 벌레들이 기어들거나 날아들기 때문이다.

특히 모기는 정말 싫다.

모기와 바퀴벌레 정말 싫다.

창문은 올 6월에 방충망을 쳐 놓아서 열어 놓지만(방충망 칠 때 아주 쌩쑈를 했다.

방충망을 쳐 본 적이 없으니, 한 1시간 넘게 걸려서 간신히 방충망을 쳤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튼튼하게 잘 버텨 주고 있다. 방충망 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창문 틀을 아주 깨끗하게 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방충망이 잘 들러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방문을 못 열어 놓으니 너무나도 덥다.

열기가 잘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방의 구조는 참 골때린다.

낮에는 그닥 덥지 않다.

그런데 해가 지고 나면 낮에 머금었던 열기를 방안으로 다 쏟아붓는다.

방세 받으려고 지은 방이라 담을 한 축으로 해서 그냥 블록으로 쌓아서 지은 집이라 그런 것 같다.

또한 주위가 높은 건물들이 많아 바람이 잘 안 분다는 것이다.

집 안보다 집 밖이 더 시원하다.

그래서 벌레들이 더 극성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생활하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게 되었다.

(요즘은 밤에 너무 더워서 잠을 못자고 집에 있는 영화 시디를 몇 번씩 번갈아

반복적으로 보고 있다.)

이걸 보고 나서는 잠시 동안 벌레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바로

바퀴벌레약을 뿌려서 저승으로 보냈다.

참, 내 마음이 요사시럽다!

어쨌거나 벌레의 생리가 무엇인지 잘 공부하면 벌레와의 관계가 좀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사실 마음이 잘 안 간다.

 

날이 좀 선선해지면 벌레와의 동거도 끝이 나려나...

벌레들아, 나 좀 봐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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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해석 불가능?)

오늘 새벽에 자면서 꿈을 꾸었더랬다.

근데 꿈이 요즘 내 삶의 상태나 의식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완전 같기도!!..음...)

시대도, 등장인물도 뒤죽박죽이고...(원래 꿈이 그런 건지...)

 

꿈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처음 꿈 상태는 아마도 6.25시절쯤 되는 것 같다.

곰탱이와 감비가 정부군에게 마구 쫓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감비의 친구 아버님 댁에 몰래(?) 들어갔다.

감비가 친구 아버님과 술잔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감비가 술 두 잔쯤 비웠을래나?...

(이때 난 술도 안 마시고 그냥 두 사람 사이에 멍청히 앉아 있었더랬다.)

갑자기 감비가 사라졌다.

난 좀 당혹스러웠다.

-말도 없이 어딜 간 걸까... 나만 남겨 두고...

쫓기는 몸인데다가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집으로 무작정 돌아가기로 했다.

 

이때 시점이 달라진다.

70년대로 말이다.

그리고 돌아가려는 집은 70년대 살던 달동네 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같이 공부하는 선후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또 시점이 달라진다.

요즘이다.

그런데 완전 왕따 취급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생각을 하다 꿈에서 깼다.

 

무슨 의미를 담은 꿈일까...?

내가 보기엔 완전 개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또 같기도!...)

 

사는 게 완전히 같기도(!)인 모양이다, 내가...흐흐...

왜 글구 사냐!!! 이 곰탱아!!!

 

기운이 없어서 그러나...

곰국을 먹어야 하나... (아니,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려 하다니...(퍽퍽퍽!!!))

투쟁 중인 여러 동지들께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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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아, 돌아오다^^...

이러저러하게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를 방치해 두었다..ㅠ...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구나.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를 깨끗이 해야겠구나.

 

여기를 찾아 주신 다른 블로거 분들께

너무 미안하다는 말씀 전한다.

 

이제 차분히 공부도 좀 하고,

방학 중 생활비도 좀 벌고...

 

<천지인>의 <청계천 8가>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오늘은 이 노래를 좀 배워야겠다.

 

 청계천 8가(김성민 작사,작곡)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틈없는 인파로 가득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워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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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만이 넘었다^^...

ㅋㅋ...

드뎌 방문자 수가 만이 넘었다^^...

난 언제나 만을 넘어보나 했는데...ㅋ...

드뎌 넘었다.

음 그럼 자축하러 가야겠다^^...

배고파서 저녁 먹으러^^...

ㅋㅋ...

 

뱀다리> 울 엄니가 이걸 보셨으면...

- 에구~~~ 이 싱거운 녀석아...끌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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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찜한 자유(?)...

내일이면 우리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에서 독립한다.

이번 주에 방을 알아보고 그제 계약을 했다.

그리고 독립하겠다고 우리 어머님께 말씀 드린 것은 오늘 아침에서였다.

그런데 어머님의 반응이 의외로 담담하시더라.

내 예상대로라면 <왜 편한 집을 놔두고 나가서 사서 고생하려 하느냐!>,

<월세면 그 월세가 얼마나 아까운지 아느냐!>, <남의 집살이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너처럼 게으른 녀석이 집 나가면 몸이나 망치지 않겠느냐!> 등등 시시콜콜하게

뭐라 말씀하셨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냐, 좀 있다 나가면 돈 마련해서 전세라도 마련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이 말씀이 전부였다.

그러시곤 돌아누우셔서 짐짓 잠을 청하시는 듯하시는 거다.

많이 서운하셨던 것 가타는 생각이 들더라.

평생 도움 안 되는 남편, 자식 새끼 뼈빠지게 뒷바라지했더니

그렇게 지 갈길 가겠다고 하니...

이젠 혼자구나라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닌지...

학교 오면서 마음이 참 아프고 안 좋았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께서 내가 태어날 때쯤 나셨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고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우리 어머니 나이(68세)쯤 되신 어떤 어머니라도 마찬가지일 게다.)  

우리 어머니 젊으셨을 때(처녀였을 때) 인근 동네에서 소문난 글쟁이였단다.

동네 여인들의 제문은 어머니께서 도맡아 쓰셨다고 한다.

그 제문이 하도 구구절절하여 그 제문을 읽으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처녀 때 쓰신 제문 우리 큰 외숙모님께서 아직도 가지고 계시면서 울적할 때 커내서 읽어보신단다.

하긴 얼마 전에 핸폰 문자 보내는 법 가르쳐 주었더랬다.

그 이후에 가끔씩 문자를 보내시는데, 그 내용이 참 내 마음을 울렸더랬다.

 

<아들아오늘은어찌지냈느냐밤이깊어지니니가보고싶구나일찍왔으면좋겠구나엄마가>

 

뭐 이런 내용들이었다(물론 철자법도 틀린 글이긴 했지만 말이다).

언젠가 어머니께 살아오신 내용을 글로 쓰실 생각이 없으시냐고 여쭤 봤더니

그냥 웃으시기만 하더라.

 

<이 나이 들어서 글은 무신...>

 

참 쓸쓸한 웃음이었더랬다.

그때 공책, 펜 사 드리고 글을 쓰도록 하셨으면 살아오시면서 쌓인 한이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많이 들기도 한다.

오늘 드어가서 다시 권유해 보아야겠다.

(만일 글을 쓰시면 어머님께 동의를 구해서 블로그에 올려볼까나^^...)

 

 이렇게 우리 어머니가 보인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집을 나오려 하니 참 착잡하다.

이제 조금씩 서로 간에 물길이 트려고 할 때...

 

우리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한 건 전적으로 내 여친 때문이다.

내 여친께 참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한다.

여친이 맛있는 거 사 줄 때 꼬옥 어머니가 생각나고,

그래서 안 먹고 어머님 갖다 드리곤 했는데...

이젠 가져다 드리기 쉽지 않게 됐다.

이젠 집에 별로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집을 나오는 거니까...

 

하여간 한켠 마음이 먹먹하고 아프고 답답하다.

 

오늘 집에 들어갈 때 우리 어머니 좋아하시는 초밥 사 가지고 들어가야겠다.

 

자꾸 눈물 나려 한다.

 

살면서 울 엄니께 많이도 참 못되게 굴었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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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4.

 

물론 이미 추상 노동의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서술에서 특정한 모순적인 것의 양립(추상노동과 구체노동-옮긴이)이 발견된다.(주2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자본』 제1판에서 맑스는 여전히 가능한 한 추상노동을 단순하고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노동과 동일시한다.(주26-)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상품은 교환가치로서 “가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단순하고 동일한 형태를 지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온다.(Ⅱ.2/109; 13/17) 게다가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기 위해서, 서로 상이한 노동들 그 자체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형태를 띠는 단순한 노동, 요컨대 질적으로 동일하며 오로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환원은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추상은 사회적인 생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추상이다.(……) 보편적 인간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은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행할 수 있는 평균노동 속에 존재하며 인간 근육, 신경, 두뇌 등의 특정한 생산적 지출이다.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적응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단순한 노동이다…… 이 단순한 노동은 사람들이 모든 통계를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한 한 모든 노동을 형성한다.”(Ⅱ.2/110; 13/18)


맑스는 여기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추상들을 서로 동일시한다 : 한편으로는 항상 좀더 기계화된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추상으로서 노동력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추상, 특수한 성질을 지닌 노동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대체, 따라서 특정한 한 종류의 노동지출과 다른 한편으로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 노동”, 즉 특정한 종류의 노동지출이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노동.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결코 추상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실체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본』 제1판에서도,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도 동시에 단순한 평균노동으로 측정된다(Ⅱ.5/19f). “추상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가치형태의 고찰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Ⅱ.5/31). 그러고 나서 우선 제2판에서 단순노동과 추상노동이 엄밀하게 구분되었고 처음부터 가치실체로서의 추상 노동으로 시작하였다.(주27-) 물론 두 개의 첫 소절에서 추상 노동을 규정하는 데에 “자연주의적인” 것을 많이 연상하게 한다. 생산적 활동의 특정한 성격이 추상되고 난 후에 그 추상 안에 오로지 생산적 활동이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지출”(Ⅱ.5/24; 23/58)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미 나타난 후에, 맑스는 (제1판과 대비되어 새롭게 파악된)두 번째 소절의 끝에서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며, 또한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또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속성 안에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Ⅱ.6/79; 23/61)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치 “추상 노동”이 노동의 자연적 속성에 해당하고, 노동의 가장 보편적인 생리학적 규정들, 즉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품 생산에서만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규정들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의 추상성이 결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속성이라는 사실, 즉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질적인) 상이함에 대한 추상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자본』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 안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주29-) 

이러한 것은 나에게 물론 하나의 정식화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맑스는 자신의 담론을 고전 정치경제학에 반대하여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으로 자신의 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서 맑스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주30-) 여기에서 우선 고전 정치경제학이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를 구별했지만 상품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추상 노동의 생리학적 파악은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 없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수행되지 못한 구별이 보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파악된 구별을 통하여서는 노동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비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주31-) 추상 노동이 사실상 노동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규정으로 파악될 때에 비로소 고전 정치경제학을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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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3.

 

추상 노동


맑스는 상품교환 분석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으로 나아간다:


“비로소 상품 교환 속에서 노동생산물은 그 생산물의 감각적이고 다양한 사용대상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동등한 가치대상성을 가지게 된다. (……) 이러한 순간에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은 사실상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적 노동은 한편으로 특정한 유용 노동으로서 특정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총노동의 지절로서, 즉 사회적인 노동 분업의 자연적인 시스템의 지절로서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특수하고 유용한 사적 노동이 각각의 다른 유용한 방식의 사적 노동과 교환될 수 있고 따라서 그 노동들이 동등해지는 한에서, 사적 노동은 바로 그 사적 노동의 생산자의 다양한 욕구만을 충족시킨다.” (Ⅱ.6/104; 23/87, Herv. v. mir)


노동이 분업화된 모든 사회에서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개인의 노동은 동시에 사회적 총노동의 부분이며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서 이러한 사회적 성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개별적인 사적 노동이 다른 사적 노동과 동등한 것이 될 수 있을 때에만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사적 노동은 서로가 동등하게 상품 생산에 대해 더 넓어진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따라서 상품생산에 대해서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사실이 통용된다;


“서로 독립적인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인간 노동이라는 동등성 속에 있으며 또한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Ⅱ.6/105; 23/88, Herv. v. mir)


맑스가 첫 번째 인용문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gleiche Geltung)이 무엇으로 실현되는가에 관한 문제가 나타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이 사적 노동을 인간 노동으로 동등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좀더 확대된 물음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이러한 동등성이 모든 사적 노동을 서로 동등하게 하면서도 독립적으로 만들지만 그 사적 노동들에 귀속해 있는 하나의 속성에 기인하는가 또는 사적 노동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 문제인가? 가치 분석과 상품의 물신적 특성에 관한 절의 문맥 속에서 맑스는 명백하게 두 가지 가능한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 교환에서 사적 노동들의 동등성은 결코 개별적인 사적 노동들에 곧바로 귀속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다른 사적 노동들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다. 또한 자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특수한 사회적 동등성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사람들은 추상적 노동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날카롭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전체 하늘 아래서의 모든(toto coelo) 서로 다른 노동의 동등성은 그 노동들의 현실적인 비동등성(Ungleichheit)을 추상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노동들이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서, 추상적 인간 노동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Ⅱ.6/104; 23/87f)


이런 한에서 추상적인 노동은 교환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현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규정이 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보충판……(Ergänzungen……)에서 맑스는 자신이 방금 인용한 글을 다음에 나오는(Ⅱ.7/55와 비교해 보면, 역시 프랑스 번역판에도 포함되어 있는) 글을 부가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교환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


“서로 다른 구체적인 사적 노동을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물로 환원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노동의 생산물들을 동등하게 만드는 교환을 통해서만 완수된다.” (Ⅱ.6/41)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추상”이 교환 행위자들을 통해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하다 :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행할 뿐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지적인 추상과정이 문제가 아니다; 추상은 오히려 교환 행위자들의 교환행위를 통해서 수행된다.(주24-)         

맑스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교역의 관점(그리고 추상의 공정)에 기초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서도 답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적 장과 결별하게 된다. 따라서 맑스는 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한에서, 고전경제학 어디에서도 만들지 못한 노동 내에서의 차이가 “정치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Ⅱ.5/22; 23/56)이라는 사실을 정당하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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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

2000년이 되면서부터 1학기 초가 되면 몸이 항상 안 좋다.

오늘 아침에 담이 걸렸다.

왜 1학기 초가 되면 이리도 몸이 안 좋은지...

보약이라도 먹을까봐...

근데 보약 먹는다고 몸이 좋아질까...

보약 먹을 돈도 없다^^...흐...

조용조용 잘 넘겨 보자.

다른 수가 없다^^...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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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와 가타리) 1.

아래의 내용은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에 대한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부족하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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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1장 1절-4절 #


1. 기계(machine, 제작, 생산) 

- 유기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 변증법적 통일의 반대 개념이다.

- 비유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불어로는 ça이고, 독일어로는 Es로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들은 프로이트 개념인 id를 가리킨다.

- 기계는 언제나 분리되고 새로이 구성될 수 있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요소들의 기계적(비유기적) 구성체이다.

-이런 면에서 기계는 고대 원자론에서 원자들(더 나아가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to apeiron(뭐라 규정할 수 없는 것들, 무한정자))의 구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또한 이 기계는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이기도 하다.


2. 욕망

- 이러한 기계를 생산하고, 연결되고 연접되는 기계들의 기계를 생산하게 하는 힘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 여기서 생산은 근대의 의식적 주체로서의 Ich(나)가 아니라 욕망이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에게서 욕망은 결핍, 결여, 필요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욕망은 들뢰즈에게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chaos(카오스) 내에서의 흐름일 따름이다.

- 그러므로 들뢰즈는 프랑스 68혁명을 맑스의 거시적 혁명인 정치경제적 혁명(결여를 메꾸는 반결여의 혁명)과는 다른 혁명으로 본다. 이 68혁명은 결여-반결여를 넘어서는 혁명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곧 <기관 없는 신체들>이다.

- <기관 없는 신체들>은 루소의 자연인(원초적 자연인)처럼 어떠한 것도 매개되지 않은 직접태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욕망으로부터 이러한 기계, 신체 없는 기관은 어떻게 생산되는 것인가?

- 이 문제와 관련해서 들뢰즈는 이 생산 과정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은 우연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 그렇지만 이러한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들뢰즈의 욕망 체계는 신화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3. 이전의 정신분석학의 긍정과 한계

- 긍정 : 무의식의 측면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한계 : 이 무의식의 측면을 개인적, 성적인 측면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무의식의 개인적, 성적인 측면을 사회 전체 측면으로 확대시켰다.

- 들뢰즈는 이전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자 치료의 목적을 사회의 통합으로 보았는데, 이는 제국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사회의 통합은 결국 정신병자를 건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들뢰즈의 관계 방식

- 들뢰즈의 관계 방식은 <종합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의 방식은 변증법적 관계 방식과 다른 비유기적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 연결적(접속적) 종합 --> 이접적 종합 --> 연접적 종합

- 연결적(접속적) 종합은 und(또, ~그리고)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방식은 최초로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를 들뢰즈는 <생산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리비도이다.

- 이접적 종합은 entweder ~ or(~이거나 ~이거나)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종합은 욕망이라는 흐름의 매끄러운 표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등록, 기입되는 종합이다. 등록, 기입은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등록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누멘(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연접적 종합은 so~ daß~(그래서 ~이다)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인데, 이 종합에서 비로소 주체(그래서 나는 ~이다)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는 이접적 종합에서 파여진 홈을 메꾸면서 이루어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일시적, 분열적, 유목적 주체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주체의 생산을 <소비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볼룸타스(자발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이 주체는 소비의 선택을 통해서 주체로서의 자기를 인식(의식)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주체는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주체이다.

- 그런데 이러한 종합 형식의 순서는 『자본』에서의 가치형태의 전개 순서와 매우 유사하다. 연결적 종합은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와 닮아 있으며, 이접적 종합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닮아 있고, 연접적 종합은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와 닮아 있다.

- 여기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처음의 단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관계 방식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사용가치)에 따라 흘러간다. 바로 이러한 것에 또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맑스에게서는 사회주의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용가치 자체에는 어떤 관계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상품소유자로서의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 위에서 말한 이접적 종합과 연접적 종합의 내용을 보게 되면 그 관계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전략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 그 자체는 모순이 없는 매끄러운 자본의 표면을 원한다. 그런데 자본의 모순에 따라 자본의 저항 주체가 자본의 운동 과정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는 자본에 의해 호명되고 또 다시 자본에 의해 자본 속으로 포획, 포섭된다. 자본은 소비를 통한 자본의 물신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홈을 메운다. 이는 또한 그람시의 <동의>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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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블로그에 글을 쓴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게으름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과 삶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자기 검열...

 

지금 생각해 보면 두려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산 것 같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억척스럽게 그리워하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일종의 편집증을 보인 것 같고...

그래서 꽃다운 청춘(?)에 연애를 못해 본 것도 같고^^...

 

갑자기 두려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계기였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난다.

그저 내 삶이 그냥 그저 그렇게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일까?

어쩜 이런 생각하게 된 것도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쨌든.

 

두려움은 내 실존의 왜소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왜소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결국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것이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스트레스와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고...

 

두려움은 삶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삶에 생채기를 내고 생채기에 또 생채기를 내면서 결국 자신을 증오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 벽을 쌓게 되고 자기 앞 마당에 봄이 오지 않게 하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도록 한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두려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맞짱을 떠야 하는 방법밖엔 없다.

두려움을 강철 같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자기 자신을 가감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이젠 두려움을 없애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 가자고 다짐해 본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바로 실천활동(Praxis)이 아닐지...

또한 자기변혁으로서의 혁명이 아닐지...

 

곰탱이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올해의 삶의 목표^^....

두려움! 다이다이로 맞짱 한번 떠 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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