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행동 후원행사 자원활동가를 모집 합니다.~~



안녕 하세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버마행동 한국 입니다.

버마 젊은이들의 민주의식 향상을 위한 교육과 활동 자금

후원행사를 위한 자원 활동가를 모집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버마의 민주화를 지지해주세요~


행사날짜  10월 31일 (토) 낮12시~오후10시

모집 인원      15명

분야           주방, 서빙

가능한 시간 선택      오전 11시~ 오후 6시   모집인원 (5명)

                            오후 3시~  오후 10시  모집인원 (5명)

                            오전 11시~ 오후 10시  모집인원 (5명)

장소             서울 여의도역3번 출구 유화증권 지하  BBT 호프




자원 활동에 참여하실 분은 이멜/ 전화 연락 주시면 됩니다.

연락처            소모뚜(총무)010-7155-6581(저녁7시후 연락 가능)

이메일            smthu2006@gmail.com




#자원 활동가 분들에게 자원 활동 증명서를 제공 합니다.

@버마행동한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cafe.daum.net/mmwc로 가셔서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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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1 23:13 2009/10/2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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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씨 대책위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http://cafe.daum.net/free-minu
가입하시고 주변에도
많이 알려주세요~~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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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1 11:22 2009/10/1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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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미누”의 강제송환반대]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17년 세월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2009/10/09 21:42

 

 http://blog.naver.com/yeopa/30071269183

 

[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미누”의 강제송환반대]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17년 세월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아래 글은 현재 노동대학 20기 학우인 신순영님의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졸업논문“이주노동자의 사회적 배제와 적응에 관한 생애사 연구 : 장기체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중 미누님의 생애와 관련된 글입니다.

 

 

네팔, 미누씨의 살아온 이야기와 생각들.

 

미누씨는 1972년 네팔의 버히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 주둔군 캠프 안에서 일하는 약사셨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는데, 큰 어머님이 계시고 그 쪽에 누나가 둘 그리고 어머니 아래서 형과 미누씨가 자랐다. 원래 인도인이었던 아버지가 네팔에 근무 때문에 오셨다가 어머니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함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용병으로 취업하는 네팔 사회에서 아버지는 군인은 머리 없는 사람들이나 가는 데라며 공부를 강조하셨고,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형 대신 미누씨에 대한 기대가 각별해 많은 돈을 들여 컴퓨터 학원을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으셨다. 어머니는 평소 가족들이 먹다가 남긴 밥을 다 드실 정도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분이셨는데, 큰 어머님에 대한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더사인 같은 큰 명절 때는 항상 큰 어머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게 하고 누나들을 챙기도록 아들들에게 당부를 하셨다.

 

어렸을 때는 주로 포카라에서 주로 성장했고 대학 때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가난하고 취업도 쉽지 않은 네팔에서 이주는 젊은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꿈꿀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고, 특히 유명한 관광지인 포카라에서 자란 미누씨는 어려서부터 외국인들과 부대끼는 게 낯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통과의례처럼 이주노동을 계획하면서 유럽보다는 인종 차별이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아시아를 택했고, 당시 88 서울올림픽 소식과 함께 우연히 신문에 실린 남산타워의 사진을 보고 한국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1992년 2월 22일에 도착한 한국은, 네팔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추워서 밖에서도 에어컨을 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도착하자마자 이태원의 일자리 브로커를 찾아갔고, 여관 방바닥에서 잠을 청하며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조차 낯설고 무시 당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며 한국에서의 첫 날 밤을 보냈다.

 

대부분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는 데 비해 미누씨는 특이하게 식당이 첫 직장이 되었다. 레스토랑 일자리가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그곳에서 일하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빨리 한국말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자청해 의정부의 한정식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설거지와 주방 보조일을 주로 하면서 나름대로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호의를 받으며 식당일을 배우게 되었지만, 사장이 바뀌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그만 두면서 미누씨 역시 그곳을 나왔다.

 

동료를 따라 다시 취직한 곳은 의정부의 나이트클럽이었는데, 그곳에서도 금세 사람들과 친해지고 사장의 신뢰를 얻었고, 한국말도 많이 늘어 잘 할 수 있게 됐다. 또 한국 노래를 배워 부르곤 하면서 의정부에서는 한국 노래 잘 부르는 네팔 이주노동자로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노래를 하고 싶은 욕심과 주말마다 친구들을 만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처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군포의 밸브 만드는 공장이었다. 쇠로 된 밸브를 코팅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광물질이나 유해물질을 다루는 일이었고 그 일은 이주노동자들에게만 할당되었는데 당시에는 별로 힘들지 않아 좋아했지만, 나중에야 그게 꽤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 공장은 얼마 있어 당진으로 이사를 가고, 그 다음에는 구로공단 독산동의 봉제공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구로공단의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봉제공장 일을 배우다가 동대문 봉제공장에서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아예 옷을 직접 만들고 돈도 더 벌고 싶은 욕심에 동대문쪽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동대문에서 일을 하면서는 처음에는 월급쟁이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보조로 그리고 나중에는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고, 한국인 동료와 일대일로 장 당 얼마씩 가격을 계산해서 나눠 갖는 식으로 5년가량 일하면서 봉제쪽 일은 미싱과 시다를 다 할 줄 알게 되었다.

 

스스로가 말하는 미누씨는 한 번 마음을 먹고 일을 시작하면 무섭도록 집중하는 성격이어서, 일을 배우는 시기에는 완전히 손에 익을 정도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엄청 노력을 했다. 일을 하나 맡게 되면 똑같은 작업복을 일주일 내내 입고 모자랑 마스크 쓰고서 사람들이 기계냐고 할 정도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고 작고 좁은 공장에 날리는 먼지 때문에 눈썹까지 다 하얗게 될 정도로 하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일하던 중에 외환위기가 왔고 미누씨가 일하던 공장도 어려워져서 가족처럼 일하던 공장을 먼저 그만두고 나왔다. 당시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온통 회사가 부도나고 사람들이 자살하고 노숙인이 되고 그런 이야기들을 전하기에 바빴고, 한국 사람들이 다들 고통을 겪고 있는데 자신이 출근하고 일하는 게 어쩐지 눈치 보이고 미안하고 죄책감도 느껴져서 사장이 말리는 데도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2000년부터는 직접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공평하게 일하고 나누면서 일했고, 직접 경영을 하면서부터는 노동자로 일할 때 미처 몰랐던 어려움도 알게 되었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한편 이따금 이주노동자 단체들에서 하는 행사가 있을 때 초대 받아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마침 팀으로 공연하던 네팔 친구들이 외환위기 때문에 돌아가고 혼자 남은 친구가 있어 그때부터 함께 노래하게 됐다. 이후에 한 상담소에서 명절 때 텔레비전에서 하는 외국인 노래자랑에 출전해보겠냐고 권유해서 신청하고 나갔다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미등록 상태여서 조금 걱정을 했는데 방송국에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상을 받게 되어 쑥스러웠다.

 

처음에는 그렇게 노래하는 일 외에 다른 활동이나 단체와의 연계가 전혀 없었는데, 조금씩 알려지게 되고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면서 다양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당시에는 운동을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이 전혀 없었지만,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면서 미누씨는 언젠가부터 우리를 이웃으로 여겨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이 시작되었을 때, 미누씨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불법체류자를 신고하라는 안내방송 같은 것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전에도 이따금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았었지만, 그 방송을 들은 이후로 미누씨는 스스로 농성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성공회성당 농성에 합류하여 농성단의 일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도 낯설기만 했고 이주노동자라는 말도 강제추방이라는 말도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어려운 한국의 투쟁가 대신 부를 쉬운 노래가 필요해 구호를 모아 노래를 만들다가 밴드(Stop Crack Down, 스탑크랙다운)까지 결성하게 되었다.

 

85일 간의 농성이 끝나고 다시 일터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고 외부인 취급하면서 섞이기 싫어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답답하기도 했고, 농성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상황들도 알게 되면서 사회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시 분위기 상 언제 공장으로 단속반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었고, 그 즈음부터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후 서울 용산의 <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에서 몇 개월 간 일을 했고 그러면서 단체들의 어려움과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 같은 걸을 알게 되면서 새롭게 공부가 됐다. 물론 단체는 돈이 없지만 진심을 담아 활동하는 게 좋았고 또 그렇게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와 이주노동계의 흐름 같은 것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단체에서 몇 개월 간 활동하던 중에,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방송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거기에 합류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MWTV(이주노동자의방송) 일과 농성장에서 결성한 밴드 활동 등을 병행하며, 온전히 이주노동자 활동가로서 사회운동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개인 생활이 거의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 고향과 집에 대한 그리움이나 혼자라는 외로움을 묻어버리고 오히려 덤덤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가족들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지는 대신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훨씬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살면서 이따금 연애를 하기도 하고 오래 만났던 애인도 있었지만, 주로 혼자서 생활하고 바쁜 활동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던 미누씨는 이제 가족의 느낌이라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에 네팔로 돌아간다면,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가족이라면 주로 어떤 말들을 하고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 이따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게다가 몇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럼에도 네팔로 갈 수 없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면 그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가족이란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별로 안 좋아지고 외로움과 슬픔이 먼저 밀려오고, 고아가 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이제는 가족이란 것이 미누씨 스스로에게 새로운 개념, 새로운 분야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초에 네팔에서 한국으로 올 때 미누씨의 계획은 딱 3년만 돈을 벌고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나버렸다. 하지만 사실 애초의 그 계획은, 이주노동의 삶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했던 상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많은 것들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생활하면서 들어가는 비용 같은 것 역시 전혀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이 돈을 벌기만 하고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한국사람 못지않게 소비할 수밖에 없다.

 

미누씨의 형은 영국 용병으로 미누씨보다 먼저 홍콩으로 떠났었다. 어렸을 때는 많은 네팔 사람들이 영국 용병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고, 특히 돈을 벌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사실이 비극적으로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정적으로 영국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정부의 여러 가지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형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생각할 때 오히려 그런 형의 선택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누씨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비록 아직 한국은 자신을 받아주지 않지만, 사회운동을 시작하고 만나는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력하는 일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문화라는 구호가 범람하는 지금도 그 다문화라는 것에 이주노동자가 포함되는지 의문스럽고, 백만 이주민 시대라고 말할 때 설마 이주노동자도 이주민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건지 의문스럽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이제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준비 역시 한국 사회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미누씨 자신처럼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책임감으로 활동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물론 만족스러운 활동에 비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빈 부분이 많지만, 그런 빈자리 역시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활동을 통해 채워나가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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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9 22:21 2009/10/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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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가 잡혀갔데...

내 오래된 친구이자

동지이자 친형이기도 하는

미누형이 잡혀갔다고 하네..

 

미누가 잡혀갔데...

표적 단속이라네..

도대체 미누가 한국에 어떻게 살았기에?

어떤짓을 하기에?

그들이 미누를

그리 미워할 수 있는건가?

 

지난 99년도

한 무대에서 우리 만났네...

노래 참 잘 부르는 친구

인상이 참 좋은 친구

잘 웃고 얘기 잘 하는 친구

이제 10년 째 함께

우린 같은 길을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깝게 걸어왔는데...

 

미누가 노래 부를때

이주민들 춤을 추네

한국인들도 춤을 추네

이주민들과 한국인들

서로 손을 잡았네

서로 사이에 벽이 없어지네

 

미누가 촬영을 할 때

이주민들의 아품

이주민들의 기대

이주민들의 삶

이주민들의 희망

미누의 카매라 속에 담겨져 있네

미누의 눈물 속에 담겨져 있네

 

한 때 미누가 내게 이렇게 말 했었지

어느날 내가 이땅을 떠나려고 생각을 한적있어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비꾸,다라카, 안드레이 등

강제추방 공포에 자살한 이주민들이

나타났고 나를 부탁하는 눈빛으로

보고있어... 울고있어...

그래서 나는 내몸 내생각

모두를 이들을 위해 받춰야해

살아야해..책임맡아해..

내스스로가 책임 있다고 생각을 하면

책임 있는 일이 된다고 하네..

 

미누가 원하는 것은

이주민들의 인간다운 삶

안전한 노동환경

희망찬 한국생활

평등한 대우

그래서

미누는 노래를 부른다

영상을 만든다

 

미누가 보고싶은 것은

단일 민족을

다문화 시대로

단일 민족을

넓은 세상으로

단일 민족을

세계화 시대로

 

하지만

이제 한국은

이주민들의 희망을 만드는

한국인들의 행복을 만드는

다문화 시대를 이끌은

아름다운 한국을 보고싶은

미누가 필요 없다네

이것이 바로

미누라는 사람이

필요없다는것 뿐만 아니라

이주민들의 희망

한국인들의 넒은 세상

아름다운 한국을 꿈꾸는 마음

모두 모두

필요 없다는 의미 하네

 

미누에게

비자가 없어서 쫓아내는게 아니라

한국한테

미래를 볼줄 아는 생각이 없는것이다..

 

미누가 한국에 있어서

한국한테 좋은 일만 가득찬데

비자라는 도장 하나가

뭐가 중요하다고

 

대한민국

아직 멀었다...

육체적 발전이 앞서가도

정신적 발전이 후퇴하고 있네

 

걱정이다

이제

이땅에

희망이란게 있을까?

인권이란게 보일까?

 

대답해라 ...자신이 있다면...

 

(2009년 10월 8일에

집앞에서 표적단속된

한국생활17년

차별없는 한국

탄압이 없는 한국

제2의 고향 한국을

떠난 미누형 에게)

동생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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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9 00:41 2009/10/09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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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뚜 이주노동자방송 대표 인터뷰

 

-이주노동자 방송이라….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인데요. 최근 어려움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눈과 귀와 입이 되려는 방송이에요. 도움이 되는 정보나 교육을 제공하고 한국사회에 우리의 생각과 권리를 발언하고 소통하기 위한 거죠. 한국어 포함해서 11개 국어로 방송도 하고 온라인으로 뉴스레터도 보내고. 상근자 4명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월급으로 일하고 있어요. 저 참 나쁜 대표죠(웃음).
‘퍼블릭 엑세스(필자 주 :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주장하는 운동)’ 방송국인 시민방송(RTV)을 통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 동안 정부에서 나오던 지원금이 이번 정부 들어 끊겼습니다. 운 좋게도 ‘아름다운 재단’에서 1년 지원금을 받아 운영 중이죠. 이 스튜디오를 쓰게 해 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도 학생, 학부모들이 지원해주고 있구요. 저도 제 돈 쓰면서 대표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어요. 후원이 많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미얀마에서는 제 성격을 제대로 펼치기가 힘들었어요. 전 자유롭게 말하고 활동하고 싶고, 제 희망을 자유롭게 추구하면서 노력하고 싶은데 나라가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돈이 있어도 자유롭게 사업할 수 없고, 국민을 감시하고 엄청난 세금을 거두는 정부는 부패했죠. 미얀마에도 한국처럼 아들이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문화가 있어요. 제가 여동생 둘이 있는 장남이거든요. 큰 아들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여동생들 공부시키고 싶은 작은 욕심도 이루기가 힘들었어요.
그 때 찾은 유일한 방법이 외국에 나가 일하는 거였죠. 그래서 대학 1학년이었던 95년,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한국 사신지 벌써 14년째시군요. 지나가면서 보면 한국 사람인 줄 알겠어요. 한국말도 정말 유창하신데요?

 

처음 취직한 공장에 저 혼자 외국인이었는데, 정말 답답하더라구요. 일하는 것도,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무슨 의사소통이 돼야 말이죠. 사람들이 저기서 뭐 좀 가져오라고 하면 그걸 못 알아들어서, 아예 그분이 가리킨 곳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갖다 드리곤 했어요. 우리 엄마가 말하라고 입도 만들어주고 들으라고 귀도 만들어줬는데,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한심했죠. 그래서 일만 끝나면 집에 틀어박혀 중고생 교과서 보면서 닥치는 대로 읽고 썼어요. 신문의 영어회화 코너는 한국말과 영어가 동시에 나오니 도움이 많이 됐어요. 벽에 붙여놓고 무조건 외웠어요. 한국에 친구도 없고 갈 데도 없으니 5시간이고 6시간이고 공부만 했죠 뭐. 그렇게 한 6개월 지나니 좀 살겠던데요(웃음). 

 

-그동안 언론에도 많이 나오셨더군요. 이주노동자 방송도 그렇고, 인권운동에 밴드활동까지 주제도 다양하게. 

 

한국엔 많은 이주민 공동체가 있어요. 미얀마 공동체, 네팔 공동체 등등. 이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 돕고 교류하고, 국경일을 함께 기념하기도 해요.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한국 사는 이주민들의 생활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저도 그렇고, 이주민들은 모두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한국에 온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그들이 일하던 공장에서 도망 나오고, ‘미등록 노동자’, ‘불법 체류자’가 돼 강제 추방되고, 심지어는 자살하기도 해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산업연수생 제도, 고용허가제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만든 것인지 고민하고 고민했어요. 한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채워야 했고, 우리는 그걸 제공하는 대신 정당한 월급을 받고 기술을 배우고, 결국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겐 아무런 힘도 권리도 없었어요.

꿈이 있으면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죠. 친구들과 모여 앉아서, ‘우리가 일만 할 때가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다치기 전에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8년 동안 일했던 공장을 그만두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활동에 참가하게 됐죠. 방송도, 밴드도 목적은 하나예요.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 얘길 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일 뿐이에요. 

 

-산업연수생제도, 고용허가제는 무엇이 문제던가요?
 
사실 투자금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저와 같은 단순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제도가 없어요. 유일한 제도가 산업연수생제도였죠. 당시 연수생으로 들어오려면 브로커를 통해야 했어요. 브로커에게 수수료, 비자비용, 비행기 값까지 지불해요. 그걸 충당하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까지 잡혀요. 그만큼 한국에 희망을 걸고 온다는 거죠. 연수제도는 3년으로 운영되는데, 그 기간 동안엔 ‘연수생’이기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없어요.

기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월급은 적고, 제 때 못 받아도 말도 제대로 못하죠. 거의 봉사활동 수준이죠. 어떤 연구결과를 보니 우리 같은 사람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11시간이래요. 한국 직원들과 차이가 나죠. 그러다 연수기간이 끝나면 싼 값에 노동력을 쓰는 이점이 없어지니 회사에서 연수생을 정식으로 채용하는 일은 드물어요. 나름대로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한국까지 왔는데, 돈은 돈대로 못 벌고 기술도 못 배운 상황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그렇게 버티다보니 ‘불법 체류자’가 되고, 그런 상황에서 일하다 보니 ‘미등록 노동자’가 되고 하는 거죠.  

 

-그런 폐단을 없애려고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건데요.

 

네. 브로커를 통해 들어오는 시스템을 없애고 정부 간의 합의를 통해 인력을 주고받게 됐죠. 한국 경제가 점점 발전하면서 연수제도만 가지고는 노동력이 부족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고용허가제는 고용주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줬어요. 고용주가 정부에게 어떤 인력이 몇 명 필요하다고 먼저 신청하고,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 맘에 드는 사람들을 필요만큼 골라서 데리고 가요.

그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아요. 천식이 있는 노동자가 먼지 날리는 가구공장으로 가게 되더라도 방법이 없는 거죠. 일단 고용주에게 선택되면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기술을 꿈꾼 그들에게 고용허가제는 선택권을 허락하지 않죠. 3년의 기간 동안,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데 고용주가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으면 두 달 이내에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해요. 못 구하면 나의 노동력이 한국에선 쓸모없단 의미니, 집으로 돌아가야 하죠.

지금까지 한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를 외치며 서로 사랑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좋아했어요. 뿌리깊은 단일민족주의에서 나온 문화죠. 하지만 그런 민족주의도 ‘인권’이란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주민들은 무엇을 위한 수단도 아니고, 불쌍한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도와가며 함께 사는 사람들일 뿐이죠. 단 한명이라도 그의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일은 이제 한국에선 없어야 해요. 한국은 이미 민주화, 선진화 된 나라잖아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본인도 ‘미등록 노동자’의 신분이신데 이런 활동을 하는 게 위험하진 않으신가요? 

 

하하. 왜 아니겠어요. 한 미얀마 친구가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기자회견에 초청된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한국말을 못해 제가 통역해주기로 했죠. 그런데 출입국관리소에서 전화가 왔어요. 한국은 외국인의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대요. 그래서 제가 그걸 통역해주면 출입국법 위반으로 추방하겠다더군요. 그런데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 직원께서 정치라는 걸 잘 이해 못하셨던 것 같아요. 우리가 매일 먹고 자고 일하는 모든 활동이 정치 아닌가요? 그런 사소한 활동도 제대로 안되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건데….

 

-다 그만두고 미얀마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을 것 같아요.

문제가 있을 때 도망가면 참 간단하죠. 그런데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순 없어요.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계속 노력하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어요. 가고 있으면 언젠간 목적지에 닿는 것처럼. 처음 한국 왔을 땐 ‘3년만 있다 가야지’ 했어요. 그런데 일이 좋고 사람들이 좋아 있다 보니 3년은 훌쩍 지났고, ‘2002년 월드컵만 보고 가야지’ 했는데 아직도 못 갔어요. 한국은 제게 또 하나의 고향이에요. 지금 제가 하는 활동도 한국이 싫고 한국 사람이 미워서 하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비판이나 항의를 하는 게 아니라, 정든 내 고향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현하는 거예요.

나 혼자 잘 살긴 쉽지만, 많은 사람이 다 같이 잘 살게 되는 건 어려워요. 그래도 많은 사람이 잘 살면, 그 안에 나도 포함되니 좋은 거죠. 그게 제 희망이에요.

 

-최근 한국사회도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정 등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죠. 정부 차원에서도 많은 정책이 나오고, 국회에도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생기구요. 상황이 많이 나아지고 있는 건가요?

 

우리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거죠.  이주노동자 친구들이 겪은 일들, 바라는 점들을 기자회견, 세미나, 시민단체들을 통해 글로, 인터뷰로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지금에서나마 그걸 들어주려고 한다는 게 저희에겐 반가운 일입니다. 지금 다문화 사회를 위한 정책이 나오곤 있지만, 그 대상은 노동자와 국제결혼가정 뿐이에요. 지금 한국에 있는 이주민들이 백만 명 정도 되는데, 정책의 혜택을 받는 건 15만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 나머지 90만 이주민에 대한 배려도 필요해요. 한국 경제에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가정을 배려하는 건 사실 민족주의 성격이 더 강한 거라고 봐요.

하지만 정책의 근본은 정말 그들을 한국 사람들과 동등하게 사랑하고 존중하는 한국 정부의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정책들은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지금은 무슨 일을 하세요?

 

소화기에 압력을 표시하는 계기판을 만드는 일을 해요.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하면서 만난 선배님의 동생이 운영하시는 회산데, 5년 째 일하고 있어요. 외국인 노동자는 저 혼자죠.

 

-요즘 경제가 많이 어려운데, 영향은 안 받으세요?

 

얼마 전 한국인 직원 3명이 정리해고 됐어요. 그런데 전 제일 마지막까지 남을 자신 있어요(웃음). 사장님이 “너만 있으면 내가 회사를 비워도 마음이 편하다” 하시거든요.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차별하지 않는 사장님도 훌륭하시지만, 내 자리를 안정적으로 보장받고 싶으면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배우고 정말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려 스스로 노력하는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계획은요?

 

우선 이주노동자방송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게 큰일입니다. 전문 인력도 부족한 상황이라, 좀 더 나은 방송을 만들려고 미디어 관련 공부를 하고 있어요. 방송장비 다루는 법도 배우고 있구요.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입국하자마자 산업안전교육을 하루 받게 되는데, 한국어도 서툰 사람들이 하루 배운 것 가지고는 절대 안전하게 일 못해요. 다쳐도 보상받을 권리가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입니다.

매년 열고 있는 이주노동자 영화제도 준비 중이예요. 밴드 공연도 해야 하고. 힘들지만 열심히 하면 언젠간 잘 되겠지 하는 희망과 기대를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글 서지영 나라경제 기자
사진 전민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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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9 14:51 2009/09/1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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