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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으로 귀농탐방을 다녀왔다. 오랜만이라 감을 잃고 어설픈 탐방이 되었던 듯 한데,
그래도 잊지 않고자 후기를 작성해 남겨본다.
“나는 귀농한 지도 오래됐고 경우도 좀 다른데....”
슬쩍 던지는 한마디. 무슨 의미일까? 일단 외모는 4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니 좀 일찍 귀농했다 쳐서 한 10년 정도 되었나 보다. 그런데 20년째란다. 20년? 그럼 지금 몇 살이고, 도대체 몇 살에 귀농을 했다는 건지. 대충 짐작으로도 20대 초반에 귀농을 했다는 건데 무진장 일찍 하셨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질문에 답을 구할 새도 없이 가벼운 인사와 함께 몇 마디를 나누곤 찻집을 정리하는 일에 한 팔을 거들었다. 알고 보니 이 찻집은 부인이신 김도희님의 고모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또 인드라망 회원이시기도 했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차려주신 맛난 점심을 먹으며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했다. 허나 답은 그리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지역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나누시기에 내 궁금증을 먼저 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수께끼는 오래가지 않았다. 조장래님의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많은 부분이 해소되었다.
조장래님은 1991년 2월 대학을 졸업한 후 3월에 결혼하면서 의성으로 귀농했다. 졸업과 결혼, 귀농이 태풍이 몰아치듯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비밀은 80년대였다. 87년 민주항쟁을 온몸으로 겪은 그 세대는 각자의 삶을 매개로 사회의 변화를 꿈꾸었다. 그 시기에 조장래님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농촌출신이니까 농촌으로 가 살라는’ 조금은 황당해 보이는 말을 듣고 귀농을 했다. 물론 그리 단순한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단순함 속에 답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의성을 귀농지로 택한 이유는 농활을 다녔던 상주, 안동과 인접한 곳이었고, 의성이 당시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라 젊은이가 이런 곳에 들어가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장래님은 운동권 출신으로 그 연장선에서 귀농을 한 경우로 현재의 귀농 흐름과는 조금 다르다 하겠다. 그렇게 시작된 농촌생활이 벌써 20년에 들어섰다.
조장래님은 94년부터 의성군농민회 일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얘기가 농민회로 넘어가자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농민회 역사와 활동이 술술 풀려나온다. 요약해보면 90년대에는 풍년기원제나 어린이글쓰기대회 같은 대중문화사업을 많이 했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영농조합 활동으로 변모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일례로 의성군농민회는 우리영농조합법인을 만들고 농민주유소와 직판장을 개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정치위원장 역할을 맡고 있는데 지난 선거 때 군의원 후보를 냈었다. 당선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역농민들이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20년 가까이 농민회 일을 해왔고, 또 워낙 일이 많아 앞으론 줄여나가야겠다고 하는데 그리 쉽지 않아 보였다. 찾아간 날에도 저녁에 지역 농민분들과 약속이 있다며 자료를 준비하고, 바쁘게 움직이시는데 저 만큼의 애정과 열정이 있는데 일을 줄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수수께끼도 풀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조장래님의 집에 도착. 산 중턱에 품어져 있는 집은 새로 지은 듯 한눈에 보기에도 깔끔해 보였다. 염소를 키우기 위해 축사를 짓고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3년 전에 리모델링을 했다고. 처음 귀농해서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아랫마을에 방 한 칸짜리 집을 얻어 살았다고 한다.
부인이신 김도희님과도 인사를 나누고 다과를 먹으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려가 살면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왔어요. “그런데 경제적 관점이 부족해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김도희님의 말이다. 귀농이라는 말이 알려지기 한참 전인만큼 그 고충이 오죽했을까 싶은데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신혼부부였던지라 농촌경제의 어려움을 그대로 몸으로 체험했다고. 또 농사도 모르면서 처음부터 유기농으로 시작해 주변과 갈등도 많이 겪었다. 어떤 이유로 농촌생활을 시작하든 간에 초기에 겪는 어려움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이야기는 내면의 성숙에 관한 것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지난 세월 정말 미친 듯이(!) 젊음 하나로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는데 돌아보니 스스로의 내적인 성장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제는 그런 부분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단다. 젊었을 때는 에너지가 넘쳐 집단적이고 사회이슈인 문제들도 정면돌파로 풀어나갔었는데 반면, 개인의 삶은 항상 긴장되어 있고, 과장되게 비장하며 미숙하지 않았나 싶었다고. 그래서 요즘은 명상이나 수행, 혹은 가족세우기 워크숍 같은 프로그램에 적극 참석하고 관련 지역모임도 꾸려 나가고 있다.
“농촌에서 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사람사이 관계의 복잡성이나 그로 인한 상처, 경제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농촌에서도 그대로 겪는다. 오히려 더 냉정할 때도 있다. 그래서 마음의 풍요를 갖는 것이 먼저라고. 조장래님이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은 내적 성장과 마음의 풍요를 갖게 해주는 선배, 선각자들의 지혜를 잘 이어받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왔으니 이제는 자신을 돌아볼 때인가 보다.
이야기는 어느새 가족이야기로 넘어갔다. 1녀 1남의 자녀가 있는데 큰 딸은 현재 풀무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아들인 현우는 작은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여행학교를 다니고 있다. 특히 큰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였는데, 아주 예쁘다며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린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때마침 주말이라 집에 온다는 큰 딸의 연락을 받고는 좋아하는 표정이 어찌나 정겹든지. 요즘 유행하는 ‘딸바보’ 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었다. 역시 가족이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다. 조장래님도 귀농하고픈 이들에게 부부가 함께 귀농할 것을 첫째 조언으로 꼽았으니까.
여기서 잠깐! 조장래님이 전하는 귀농 조언^^ ① 부부, 가족과 함께 귀농하라. ② 멘토를 찾아라! 기대고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힘이 된다는 거. ③ 이장과 같은 지역 일을 해라! 마을 일을 해 보아야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④ 2~3가족이 함께 귀농한다면 금상청화. 많이들 아는 얘기겠지만 그만큼 중요하기에 반복학습 차원에서.
이야기는 그쯤하고 사과 열매를 솎아내기 위해 밭으로 향했다. 사과가 주 작목인 만큼 규모가 상당했는데 올 해 수확할 밭이 7,500평 정도에 2년 정도 된 밭이 2,200평, 약 만 평 정도의 사과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외에도 옥수수와 윤작하는 양파 밭이 2천평 더 있다.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데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 터라고 한 뒤라 그 많은 농사를 어찌 지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앞으로 농사는 계속 줄여나갈 계획이라고.
사과는 보통 꽃눈 하나에 대여섯 송이의 꽃이 피는데 이 꽃들이 각각 열매를 맺으면 포도알 만한 사과열매가 5~6개 오글오글 달린다. 그 가운데 굵고 볕을 잘 보는 위치에 달린 열매만 놔두고 작은 열매들은 따 버리는데 그래야 큼직하고 달콤한 사과를 생산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며 조장래님 부부와 함께 열매 솎는 작업을 했다. 실제로 옹기종기 달려있는 아직 어린 사과열매를 보니 얼마나 앙증맞던지. 어린열매를 솎아내는 게 내심 미안하기도 했지만 맛난 사과를 먹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열매 중 제일 실해보이는 놈을 찾아내는 것은 초보자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가며 어느 것을 솎아낼까 고민하다보니 두 분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역시 별 도움은 안 되겠구나 싶어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다.
어설픈 작업을 끝내고 밭에 시원하게 물을 뿌려주는 것으로 오늘의 작업은 끝. 저녁준비를 위해 먼저 집으로 올라간 김도희님이 차려주신 저녁으로 잠깐의 노동으로 급 고파진 배를 채웠다. 땀 흘려 일하고 맛난 저녁을 먹는 것,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찾은 나태주의 시처럼 그렇게 행복한 저녁식사 시간을 보내고 귀농탐방을 마쳤다.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고 이제는 스스로의 내적 성장에 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조장래․김도희님 부부. 지금까지 보내온 20년 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즐겁게 또 가족을 사랑하며 살아가시는 모습이 변함없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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